제18장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자
엄청난 수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히매인 왕국의 군대가 지금 귀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용맹한 모습으로 수도로 들어오는 군대를 보고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 우리가 승리했다!”
“히매인 왕국! 만세!”
“만세!”
“만세!”
앞쪽에는 바치스 공작과 라핀 후작을 선두로 해서 그 뒤로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 그리고 라이안이 함께했다. 누가 보아도 전쟁의 영웅은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뒤로 오고 있는 간테츠 백작과 나머지 귀족들은 어째서 라이안이 2열을 지키며 먼저 가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어찌한단 말인가. 그것이 영웅에 대한 예라고 하며 바치스 공작이 명을 내렸거늘…….
본래 바치스 공작은 라이안을 맨 앞 열에 새우고 싶었으나 앞 열은 지위가 가장 많은 사람의 몫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히매인 왕국의 영웅인 라이안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히매인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는 문제도 함께했다.
말이 지나가는 성도 위쪽에서는 수많은 꽃잎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로 떨어져 내렸다. 위에서 라이안의 얼굴을 본 여성들이 소리를 질렀고 좀 더 가까이서 라이안을 보고자 하던 여성이 그곳에서 떨어질 뻔하기도 했다.
“어쩜 저토록 잘생겼지?”
“저 나이에 벌써 마스터에 올랐다지 아마?”
“어머 정말? 역시 대단해…….”
“아! 진정 나의 왕자님이구나…….”
그 옆에 있던 한 여성이 황홀감에 젖어 있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미친년!”
하지만 이미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헤매고 있는 그녀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꺄악! 기사님! 여기 좀 봐주세요!”
“아… 기사님이 날 봤어…….”
“미친년아! 기사님이 눈이 삐었냐? 널 보게!”
“컥!”
봐달라고 해서 시선 한 번 옮겼다가 순식간에 눈 삔 놈이 되어버린 라이안이 그 소리에 휘청거리며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런 라이안을 옆에서 팔튼이 잡아주며 말했다.
“어, 어! 조심하게 이 친구야. 하하, 라이안 자네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군.”
“하…하하… 뭐 늘 있는 일이지. 에휴.”
와이파른 백작도 그런 라이안을 바라보며 웃었다.
“오늘 있을 연회에서는 라이안이 참으로 바쁘게 생겼구나. 허허허.”
“연회요?”
라이안이 중세시대의 연회를 상상하며 물었다. 서로 춤 신청을 하며 파티를 하는 그러한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당연하지 않느냐? 이런 대 승리를 했는데 연회가 빠질 리가 없지. 아마도 7일 밤낮으로 연회가 진행되리라 생각되는구나.”
“헉! 7일 밤낮!”
라이안은 애초에 파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아니 이전에 있던 지구에서조차 사람들이 많은 곳은 항상 꺼려했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접어야 했던 기억들이 수도 없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하하, 아버님께서 농을 하신 것이라네. 설마 정말로 밤낮으로 파티를 하겠는가? 그런데 라이안은 파티가 마음에 안 드나 보지?”
“어? 아, 난 원래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해서…….”
고급스러운 곳보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을 즐기던 라이안이었다. 고교시절 친구들과 함께 강당 뒤에서 소주와 삼겹살을 사서 땅을 파고 연탄에 구워먹는 맛이란… 천상의 구름 위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라이안이 옛 상념에 젖으며 뒤를 돌아보자 기사들과 함께 웃으며 걸어오는 헤인드 일행이 보였다.
“아버님, 그럼 나머지 기사들과 병사들은 이 승리의 기쁨을 어떻게 나누는지요?”
“그들은 그들의 숙소와 연무장에 술과 음식이 지급될 것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라이안이 어떤 마음으로 물어온 지 알 만하여 그리 말하는 와이파른 백작이었다.
와이파른 백작은 라이안이 병사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물었다 생각하였으나 라이안의 생각은 달랐다.
‘시끄러운 여자들에 둘러싸일 바에 차라리 저들과 같이 고기에 술 한잔하는 것이 더 즐겁겠지? 큭큭.’
어차피 헤인드 일행도 병사들과 승리의 기쁨을 나눌 것이었다. 아직 여자에 관심이 없는 라이안은 여자보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지금의 친구들은 비록 자신과 조금 다르지만 진정 자신을 걱정하고 위함을 알고 있기에 가족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라이안은 다시 뒤로 고개를 돌려 헤인드 일행이 웃고 떠들며 걸어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다른 세상이나 진정 저들과 행복한 삶을 같이 하고 싶구나. 후훗.’
그러한 상념을 하고 있을 때 그 사이로 간테츠 백작의 찡그린 무서운 얼굴이 헤인드 일행의 모습을 가렸다.
살며시 미소를 띠우고 있던 라이안의 얼굴에서 웃다가 찡그린 썩은 미소가 번졌고 그것을 바라본 간테츠 백작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다.
“무슨 용건이냐!”
“아니오, 됐소이다.”
좋다가 기분이 팍 상한 라이안이었다.
“아… 왜 갑자기 토하고 싶지?”
“이잇!”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간테츠 백작을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말렸다.
“고정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상대할 자가 못됩니다.”
“지금 저놈의 표정을 보았소? 저것은 명백히 나를 비웃는 것이었소!”
하지만 여전히 귀족들이 참으라며 간테츠 백작을 말렸다.
라이안의 옆에서 그것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팔튼이 붉어진 얼굴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라이안의 썩은 미소가 너무도 웃겼기 때문이다.
“푸웁! 크그극!”
라이안이 그런 팔튼을 보며 의아해 했다.
“왜 그래, 어?”
그러면서 와이파른 백작을 바라본 라이안이 이상함을 느꼈다.
“아버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안 좋으세요.”
“커걱! 아, 아니다. 크흡!”
와이파른 백작은 라이안이 팔튼의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라이안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라이안이 뒤를 돌아보았고 그 시선이 헤인드 일행에게 가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를 간테츠 백작이 가리자 라이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만 것이었다.
웃으면서 찡그리는 썩은 미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을 참기란 너무도 힘들었다. 그래서 라이안의 얼굴을 보지 않고자 서둘러 고개를 돌렸으나 그 얼굴이 상상이 되니 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라이안의 물음에 결국 체하듯 말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으니…….
웃음을 참느라 숨도 쉬기 힘든 와이파른 백작이었다.
라이안은 영문도 모른 채 뒷머리를 긁었고 라이안과 같은 열에 서 있던 그들은 붉어진 얼굴로 웃음을 참느라 곤혹을 치렀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와이파른 백작이 모든 식솔들에게 한 말이 있었다.
“체면 차리다가 죽을 뻔했다. 그대들도 체면에 목숨 거는 일이 없길 바란다.”
그리고 항상 기분이 우울할 때면 그 때의 라이안이 지었던 표정을 상상하였고 그때마다 배를 잡고 웃었었으니, 라이안의 지었던 썩은 미소가 우울증 치료에 좋음을 아는 사람은 팔튼과 와이파른 백작뿐이었을 것이다.
* * *
국왕과 신하들인 귀족들이 모두 모인 어전.
그곳은 각각 높은 신분일수록 왕과 대화하기 쉽게 자리배치가 되어 있었다.
국왕인 크호른 왕이 기쁜 얼굴로 가운데 앉아 있었고 그 양쪽으로 왕비와 공주가 있었다. 아래로는 몇몇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전쟁에서 승리하고 들어오는 귀족들의 자리이리라.
어전에 들어서던 라이안은 루시 공주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것은 그때의…….’
삐이이이이!
귓속을 울리는 이상한 신호음과도 같은 소리에 더욱 이상함을 느끼는 라이안이었다.
그것은 라이안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루시 공주 또한 라이안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또 저 사람을 만나니 이런 느낌이 드는구나. 그리고 이 소린…….’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은 서로가 끌어당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팔튼과 같이 들어오는 라이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뭐, 뭐야. 어색하게 왜 나만 쳐다보는 거야?’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하고 눈알만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라이안이었다.
가장 앞에 있던 바치스 공작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 바치스 드 스피린이 국왕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그에 따라 그 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작과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역시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라이안이었다.
팔튼이 서둘러 라이안의 팔을 잡아 아래로 끌어내리려 했으나 라이안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그런 라이안을 보며 수군거렸다.
“저, 저런 건방진…….”
“어찌 저리 무례할 수가…….”
“저런 처 죽일!”
“국왕전하께 예를 올리지 않다니!”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은 라이안의 행동에 곤혹스러웠다.
자신들과 같이 예를 올리라고 팔튼이 손으로 라이안을 잡아 무릎을 꿇게 하려고 했지만 라이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살펴보니 힘을 주고 버텨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닌가.
팔튼은 라이안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쪽에 있던 간테츠 백작은 그런 라이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 너의 그 시건방짐이 너의 목을 칠 것이다. 큭큭큭!’
크호른 왕은 그런 라이안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호른 왕은 혼자 서 있는 라이안이 그토록 말로만 듣던 그 스피어마스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네가 전쟁의 승리를 이끌었다는 스피어마스터인가?”
“그렇습니다.”
그때 바치스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호른 왕에게 한 번 고개를 숙이더니 한쪽으로 물러나 라이안에게 말했다.
“자네가 예의를 몰라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말끝에 전하라는 호칭을 붙이게나.”
바치스 공작도 처음에는 간테츠 백작으로부터 라이안이 왕족이 아닌 왕족을 사칭하는 평민일 것이라는 말을 들었었다.
전쟁터에서 라이안이 스스로 자신이 왕족이라고 하기는 했으나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정말로 평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 앞섰다. 왕성까지 오면서 간테츠 백작과 그 외의 귀족들이 라이안의 험담을 입에 올리기 힘들 만큼 늘여놓았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은 그런 바치스 공작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케로틴 성에서 말한 적이 있었지요. 제가 왕족이었다는 말을요.”
“으음?”
크호른 왕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바치스 공작은 표정이 굳어졌고 목소리 또한 거칠어졌다.
“아무리 자네가 왕족이었다고는 하나 지금 앞에 계신 분은 한 나라의 국왕이시네! 그리고 왕족이었다는 자가 어찌 이리도 무례하단 말인가!”
하지만 그때 주위를 압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의란!”
라이안의 부드러웠던 기세가 강렬하게 바뀌자 바치스 공작과 크호른 왕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런! 나조차 뒤로 물러서게 만들다니…….’
바치스 공작은 굳어진 얼굴로 라이안을 주시했고 라이안의 주위에는 약간의 바람이 움직이더니 또다시 고요해졌다.
“예의란, 그 어떤 곳에서는 다를 수도 있는 것이며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때 간테츠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라이안에게 손가락질 했다.
“네가 왕족이라면, 네 나라가 어디이기에 대륙의 기본적인 예의도 모른단 말이냐?”
간테츠 백작은 라이안이 귀족도 아닌 왕족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평민 따위가 자신의 실력만 믿고 사기를 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것은 나도 궁금하군. 그래, 자네의 국가가 도대체 어디이기에 자네 같은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것인가?”
크호른 왕도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라이안은 겉으로 보기에도 20대를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그토록 어린 나이에 마스터급에 오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궁금한 크호른 왕이었다.
크호른 왕 자신도 그토록 많이 보유하고 싶은 인력이 바로 마스터급이 아니었던가.
라이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크호른 왕의 물음에 답했다.
“전 다른 차원에서 왔습니다. 행성의 파괴로 인해 급히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우연히 들어서게 된 블랙홀로 인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미 한 번 지구에 갔었다는 말은 빼고 말한 라이안이었다.
“차, 차원이동!”
본래 바치스 공작의 옆에 있던 라핀 후작이 놀라며 일어났다.
“마, 말도 안 된다! 차원이동은 마법의 끝이라 말할 수 있는 신의 영역이거늘!”
진정 차원이동은 신의 영역이 확실했다.
그토록 수많은 마도사들이 가장 궁극으로 생각했던 문제가 바로 차원이동이 아니었던가.
또한 그토록 위대한 마도사들이 그 차원이동을 시도하다 차원의 틈에 있는 함정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어져 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단지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차원이동에 성공해서 사라졌다는 말들만 들려올 뿐이었다.
간테츠 백작은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고 확신하며 소리쳤다.
“하! 역시 거짓이었구나! 차원이동? 이제 그딴 것까지 지어내다니. 그래, 어디까지 지어내나 더 들어보자꾸나.”
하지만 라이안은 단지 크호른 왕만을 바라보며 말할 뿐이었다.
“믿으나 믿지 않으나 상관없다 생각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단 말입니까.”
크호른 왕은 라이안의 말을 들으며 라이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만 떳떳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단 말인가? 그리고 이 자의 눈은 거짓을 말하는 이의 눈이 아니구나.’
어렸을 때부터 정치싸움에 이골이 난 크호른 왕이었다.
나이를 먹은 크호른 왕은 그 사람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해져 있었다.
크호른 왕 역시도 차원이동이라는 것에 어의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우선 그의 진실된 눈을 보고는 믿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느니라. 행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거라.”
“행성이란 이 대륙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에는 이러한 대륙과도 같은 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하늘을 보았을 때 수많은 별들이 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이 바로 이러한 수많은 대륙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흠…….”
크호른 왕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수많은 망상가들에 의해 그러한 발상이 제기되어져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행성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대륙 자체가 소멸되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겠군.”
“맞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땅도 사라졌으며 자네의 국민들 또한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으로 왕족이라는 것도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아닌가?”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앞서 믿으나 믿지 않으나 상관없는 것이라 말한 것이었습니다.”
라이안의 마지막 말을 들은 크호른 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군. 그래…….”
그리고 곧 웃음을 멈추며 고개를 끄덕였고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두 들어라! 짐은 내 앞에 있는 자를 왕족으로 인정할 것이며 그리 대우할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 또한 왕족에 대한 예를 다하여라.”
왕명이었다.
“아, 알겠사옵니다. 국왕전하.”
“알겠사옵니다. 국왕전하.”
모든 귀족들이 어정쩡한 모습으로 왕명을 받았다.
논의를 했다면 분명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불가능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크호른 왕이 선수를 쳐버린 것이다. 그리해야 라이안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크호른 왕은 애초에 라이안을 자신의 사람으로 끌어들이고자 생각하고 있었다.
크호른 왕은 다시 왕좌로 돌아가 앉았고 근엄하게 말했다.
“모두 일어나시오. 그럼 지금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그에 대한 합당한 상을 내리겠소. 호명하는 귀족은 앞으로 나서시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귀족들은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봤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귀족들은 갑자기 입이 마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보다 낮은 귀족이 어느 한순간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는 일인지라 그동안 실수한 것이 없는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자들 또한 있었다.
그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때 크호른 왕의 음성이 들려왔다.
“먼저 힘든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전쟁의 최전방을 맡았던 와이파른 백작은 앞으로 나서시오.”
크호른 왕의 말에 와이파른 백작이 몇 걸음 앞으로 나와 부복했다.
“신 와이파른 콘 포르베가 국왕전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크호른 왕은 왕좌 옆에 있던 검을 들고 와이파른 백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검을 뽑았고 그것을 와이파른 백작의 어깨로 올렸다.
“그대는 히매인 왕국의 검이 되겠는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히매인 왕국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대는 국왕인 나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
“국왕전하께 충성을 다할 것이며 아울러 국민을 보살피는 기사도를 펼치겠나이다.”
“히매인 왕국의 충성스러운 검인 그대에게 후작의 위를 내리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러한 장면을 보고는 라핀 후작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이제는 내가 저자를 쉽게 볼 수 없게 되어버렸구나. 제길!’
와이파른 백작의 양쪽 어깨에 검을 댄 크호른 왕이 팔튼을 바라보며 말했다.
“새롭게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 팔튼은 앞으로 나서라.”
국왕의 말에 와이파른 백작이 살며시 일어나 옆으로 섰으며 팔튼이 앞으로 나와 그 자리에 부복했다.
“신 팔튼 콘 포르베가 국왕전하의 명을 받드옵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벌써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서다니 정말 대단하도다. 그대는 모든 기사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히매인 왕국의 최연소 마스터일 것이다.”
크호른 왕은 그러한 말을 하며 잠시 라이안을 바라보았다. 사실 라이안이 더욱 어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팔튼에게도 와이파른 백작과 같은 절차가 행해졌다.
“그대는 히매인 왕국의 검이 되겠는가?”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히매인 왕국의 검이 되겠습니다.”
“그대는 국왕인 나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것인가?”
“국왕전하께 충성을 다할 것이며 아울러 국민을 보살피는 기사도를 펼치겠나이다.”
“진정 위대한 검을 완성한 그대에게 후작의 위를 내리노라.”
귀족들은 그 말을 듣고선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후작의 작위란 그리 쉽게 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작부터는 자잘한 하극상조차도 즉시 처분이 가능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귀족들이 반발하려는 그 순간 크호른 왕의 음성이 이어졌다.
“후작의 위는 애초에 작위가 없는 그대에게 과한 위치가 될 것이나 이번 전쟁에서처럼 제국에 맞서서도 물러섬이 없는 검이 되리라 하는 생각에서 주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작위에 맞는 품성과 위엄을 갖추어 작위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귀족이 되길 바란다.”
이러한 말을 이어서 하는 왕에게 따질 수 있는 귀족은 없었다. 왕이 스스로 ‘후작 위는 애초에 작위가 없는 그대에게 과한 위치가 될 것이나’ 라는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유로 반대의 입장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제길, 당했구나.’
‘이런, 이러다 왕당파의 힘이 너무 커지겠구나. 설마 스피어마스터라는 자까지 높은 작위를 주지는 않겠지?’
라핀 후작과 데브릭 공작은 전쟁에 대한 승리로 작위를 내리는 것에 대해 반문할 명분이 전혀 없었다.
사실 히매인 왕국은 원래 지금 이시기쯤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길거리에 있는 거지에게 물어보아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최소의 피해로, 아니 전쟁에서 몇 천의 피해란 피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몇 십만을 상대해 막았다는 것은 분명 대륙의 역사에 쓰일 만한 일이다.
그에 따라 왕의 기쁨과 국민들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그들에게는 왕의 자리 빼고 다 주어도 아깝다 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큰 공을 세운 라이안은 앞으로 나서라.”
크호른 왕의 말에 라이안은 잠시 생각했다.
‘내가 작위 같은 것을 받아봤자 무슨 소용이지? 흠… 뭐 평민보다는 편할 수도 있겠지만 그로 인해 이곳에 묶이는 것 또한 귀찮은데…….’
하지만 한쪽으로 물러난 팔튼의 표정으로 보아 자신이 작위를 받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기뻐하는 것 같았다.
라이안은 우선 작위를 받은 다음 그것을 단지 명예직으로만 칭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다. 그리고 곧 크호른 왕의 앞에 가서 섰다.
하지만 그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라이안은 살면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라이안은 크호른 왕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대신했다.
크호른 왕 또한 역시라는 생각을 했다.
‘역시 쉽게 굽히는 자는 아니로구나. 하지만 이 자를 진정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동안의 치욕을 갚을 수 있으리라. 귀족파들의 대한, 그리고 에드코르 제국에 대한…….’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무례하다!”
“국왕전하께서 아무리 왕족으로 대우한다고는 하나 어찌 건방지게 고개만 숙인단 말이오!”
“어서 무릎을 꿇으시오!”
반발은 오히려 귀족파의 귀족들보다 왕당파의 귀족들이 더욱 심했다. 그들은 진정한 왕의 신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끄러움도 크호른 왕이 손을 올리는 것으로 인해 사그라졌다.
“히매인 왕국의 23대 왕인 크호른 폰 세쿠론은 그대 대륙 최초의 스피어마스터에게 공작의 위를 내리노라. 작위를 받을 것인가?”
“국왕전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맞사옵니다. 아직 그자의 내력을 모르지 않사옵니까?”
“혹 타 제국의 첩자이면 어찌한단 말이옵니까?”
“그자가 말하는 것 또한 너무도 황당한 것투성이옵니다.”
“분명 누군가의 농간이 섞여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국왕전하!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국왕전하! 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들에게는 분명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스피어마스터이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오러를 보임으로써 마스터급임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 보도 못한 그러한 자를 상전으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자신들이 히매인 왕국의 지켜온 세월이 얼마란 말인가!
너무 많은 귀족들이 들고 일어나자 크호른 왕 또한 난처함을 느꼈다.
한편 히매인 왕국의 왕성 하늘에서 모습을 감춘 채 떠 있는 챠둠은 라이안이 당하는 수모에 화가나 분노를 터뜨렸다.
“이것들이 감히 주인님에게!”
“저런 발칙한 것들을 보았나! 자신들의 나라를 구한 영웅을 저리 대하다니. 왕의 자리를 내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라? 첩자?!”
챠둠의 홀로그램 옆에 있던 타미르안도 라이안이 당하고 있는 굴욕에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인정한 존재가 아닌가. 이는 곧 자신이 굴욕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내 이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기이이이잉!
챠둠의 음성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챠둠의 음성과 동시에 무엇인가가 돌아가는 기계음들이 들려왔다.
그러한 상황에 타미르안은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 챠둠에게 물었다.
“이보게, 챠둠. 자네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가?”
“무엇을 하긴, 지금 저곳을 날려버리려고 에너지를 모으고 있지. 조금 후면 이곳은 먼지만 남는 곳이 될 거야. 후후후.”
“이보게, 저곳에는 자네 주인과 그의 지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광선포를 쏘기 직전 그들만 이곳으로 워프 시킬 것이니까.”
“도대체 얼마나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인가?”
“이 나라 전체!”
“헉! 그것은 너무 강한 거 아닌가?”
타미르안도 왕국 하나 정도가 멸망하는 것은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멸망이 아니라 송두리째 사라진다는 것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보통 드래곤의 브레스가 쓸고 지나간 자리도 며칠 동안은 먼지로 뒤덮인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한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았다.
그러나 한 왕국 자체가 사라질 정도의 파괴력이라면 근처에 사는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그 피해가 갈 것이다.
게다가 이 일은 중간계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타미르안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은 중간계의 조율자이기 때문이었다.
“챠둠, 멈추게!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내가 가서 저들을 혼낼 터이니 자네는 조금 진정하고 있게나. 알았지? 절대 그것을 쏘아서는 안 되네! 텔레포트!”
타미르안이 급히 텔레포트를 시전하며 사라져갔고 그러한 모습을 보며 챠둠이 웃었다.
“역시 단순한 드래곤이라니까. 후후후”
그랬다. 챠둠은 타미르안을 이용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쇼를 했던 것이었다. 그런 큰일을 행할 때는 라이안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은 한 챠둠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타미르안을 이용하고자 생각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타미르안이 먼저 나서게 된 것이다.
귀족들의 반발에 어전이 시끄러워지고 있는 상황에 갑자기 한쪽에서 밝은 빛이 번쩍였고 금발의 한 사내가 나타났다.
물론 그 사내는 타미르안이었다.
“이, 이럴 수가! 이곳에는 텔레포트 방해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거늘!”
궁정 마법사인 라핀 후작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텔레포트 방해 마법진이 생성되어 있는 곳에 텔레포트를 사용할 경우 공간의 틈에 끼어 공간의 미아가 되기 때문이다.
“흥! 그깟 하찮은 인간이 만든 방해 마법진 쯤이야.”
그러한 모습을 보고는 바치스 공작이 서둘러 크호른 왕의 앞을 가렸고 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국왕전하를 보호하라!”
바치스 공작의 명에 왕궁 수호기사단들이 갑자기 나타난 타미르안과 크호른 왕 사이를 막으려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을 멈추는 한 음성이 있었으니 바로 크호른 왕이었다.
“멈춰라!”
“아니, 국왕전하! 위험하옵니다.”
“모두 물러서거라! 눈앞에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이리 큰 과오를 저지르느냐!”
크호른 왕의 이러한 태도는 타미르안이 갑자기 나타나자마자 했던 말 때문이었다.
타미르안은 버릇없는 이들에게 모두 오줌을 질질 쌀 정도의 피어를 날려주고 시작하려 했지만 크호른 왕의 행동에 조금 미루기로 했다.
“호오? 내가 누군지 알다니. 운이 좋은 왕이로구나.”
크호른 왕은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가 부복하며 말했다.
“히매인 왕국의 국왕인 크호른이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헉!”
“헉! 위…위대한 존재! 드래곤!”
“컥! 드, 드래곤!”
“드, 드래곤이 어째서!”
주위에 있던 귀족들의 말에 타미르안의 피어가 왕을 뺀 모든 사람들에게 쏟아졌다.
“크억!”
“허걱!”
철퍼덕!
쿵!
쿠궁!
귀족들과 기사들은 피어의 압력에 못 이기며 모두 쓰러졌다.
그것을 느낀 라이안은 눈으로 보기 힘든 속도로 쓰러지려고 하는 왕비와 루시 공주에게 다가갔고 자신의 내기를 풀어 그녀들을 보호했다.
타미르안이 이상함을 느끼며 라이안을 쳐다보자 라이안은 타미르안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고 곧 타미르안의 피어가 걷혔다.
“괜찮아요?”
루시 공주는 숨 막힐 듯한 공포가 밀려오다가 갑자기 사라짐을 느꼈고, 눈을 떴을 때 그곳에는 라이안이 있었다.
“아, 네…….”
루시 공주는 그제야 라이안이 자신을 보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쓰러졌기 때문에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크호른 왕은 조심스럽게 타미르안에게 말했다.
“위대한 존재께서 어찌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셨나이까?”
“난 위대한 골드드래곤의 수장 타미르안 율리아나 파블라온이다.”
‘컥! 광룡 타미르안!’
‘꼼짝없이 죽었구나!’
모두가 그렇게 자세를 낮추고 엎드려 있을 때 라이안만이 그곳에 돌아와 서 있었다. 물론 그것을 눈치 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몇몇 고개를 든 귀족들은 라이안이 국왕의 앞에서 호기를 부렸듯 드래곤의 앞에서도 호기를 부린다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 저렇게 행동하다가 목숨을 잃을 것이라 예상했다.
라이안은 주위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타미르안이 광룡? 미친 드래곤이라는 말인가? 큭큭큭.’
속으로 생각하던 라이안은 너무 웃겨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라이안의 웃음소리에 그곳에 있던 모든 귀족들과 기사들이 라이안을 쳐다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런 미친!’
‘저자가 돌았구나!’
‘저자로 인해 히매인이 오늘로 망하는구나, 망해!’
라이안은 크호른 왕을 호위하고자 나섰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의 사이사이를 밟으며 타미르안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터벅터벅.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라이안의 발걸음이 타이탄의 발걸음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만큼 그곳의 고요함은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크호른 왕의 바로 뒤까지 걸어온 라이안이 크호른 왕의 한쪽 팔을 두 손으로 잡으며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일어나시지요. 왕의 체통을 생각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보게, 하지만! 이분은 위대한 존재이시네. 제발 이러지 말게나.”
크호른 왕은 미칠 노릇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드래곤이 라이안의 목숨만을 취해 가길 원하는 마음도 있었다.
‘도대체 이 자가 어찌하려고!’
크호른 왕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라이안의 손길을 뿌리치고는 또다시 부복하며 타미르안에게 말했다.
“위대한 골드드래곤의 수장이시어. 부디 이 자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에휴.”
라이안은 한숨을 쉬며 타미르안의 앞으로 걸어갔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주 깽판을 쳐도 제대로 치는군. 왜 왔어? 타미르안.”
귀족들은 절망감을 느꼈다.
‘끝이로구나.’
‘아… 이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하지만 곧 들려오는 타미르안의 음성에 어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네가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온 것이 아닌가? 저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감히 내가 인정한 자네에게 이리 홀대하는 것을 어찌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못들은 것이 아닌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이, 이게 무슨?’
“서, 설마?”
그들은 설마 드래곤과 라이안이 원래 아는 사이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항상 설마가 사람 잡는 법!
“휴… 타미르안, 인간을 벌레라 칭한다면 나 역시 벌레라고 하는 것과 같은 거야. 다신 내 앞에서 그런 말을 안 썼으면 좋겠어.”
라이안의 불편한 표정에 타미르안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헛기침을 했다.
“어흠, 알겠네. 주의하겠네.”
이러한 상황에 모든 귀족들은 피어에 짓눌려 엎드린 상황에서도 고개만 든 채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한들 어느 누가 드래곤에게 주의를 준단 말인가! 그리고 드래곤은 그 주의를 받아들이다니… 어찌 이런 일이…….’
황당해 하는 귀족들과는 달리 라이안과 타미르안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도 뭐 내가 걱정되어서 왔다고 하니 고마워, 타미르안.”
타르미안은 걱정 돼서 왔는데 핀잔을 받으니 조금 무안했지만 감사의 인사를 받자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허허허, 당연한 것을 뭐.”
“근데, 챠둠 이 녀석은 가만히 있고 왜 네가 온 거야?”
“그것이… 그 친구가 이곳을 쓸어버린다고 말하기에 내가 수습하고자 대신 온 것이라네.”
타미르안의 말을 들은 라이안은 손을 이마에 가져가며 또다시 웃었다.
“하하하하하! 역시 챠둠의 잔머리는 못 당한다니까. 하하하!”
“으음?”
“타미르안, 앞으로 좀 더 챠둠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는걸? 큭큭큭.”
“무엇을 말인가?”
영문을 모르는 타미르안은 라이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타미르안과 라이안이 정답게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본 크호른 왕과 귀족들은 어이가 없었다.
‘이럴 수가! 드래곤이 인정한 존재란 말인가!’
‘드래곤이 인정한 존재라면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자가 아닌가!’
‘드, 드래곤 나이츠…….’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드래곤 나이츠는 약 1만 년 전에 단 한 번 있었다는 전설의 존재다.
중간계가 마왕의 마수로부터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드래곤 나이츠가 드래곤과 함께 나타나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가 안단 말인가. 그 1만 년 전의 드래곤 나이츠 또한 드래곤이었다는 것을!
라이안은 지금의 상황이 너무 어색해 슬그머니 턱짓을 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들 계속 이렇게 놔둘 거야?”
“흠… 생각중이라네. 사실 오자마자 몇 놈 죽이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타미르안의 말에 귀족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만하고 다들 일어나게 해줘.”
“알겠네, 모두 뭐하는 것이냐! 들었으면 바로바로 일어나지 않고!”
타미르안이 고함을 지르자 귀족들은 언제 엎드려 있었냐는 듯 엄청난 속도로 일어났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크호른 왕 또한 눈치를 보고 있다가 라이안이 일으켜 세워줌으로서 일어났다.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타미르안과 전 친구입니다.”
“허… 그, 그럴 수가…….”
그런 크호른 왕에게 다가온 타미르안은 그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오늘 내가 너희 나라 전체의 목숨을 구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보다도 더 강한 존재를 수하로 둔 라이안은 너희가 그렇게 함부로 대할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 그 존재가 노하여 이 나라를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을… 말리고 내가 대신 온 것을 신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소동은 순식간에 왕성 전체에 퍼져나갔다.
몇몇 귀족들과 기사들이 왕성에서 일어난 일들을 밖으로 유출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함구를 명했으나 항상 입이 간지러운 사람이 있는 법이었으니 그러한 소문은 서서히 왕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 * *
국왕이 일을 보는 국왕의 집무실.
그곳에는 히매인 왕국의 국왕인 크호른 왕과 타미르안, 그리고 라이안이 함께 있었다.
“위대하신 분과 라이안 님이 친분이 있으신지 정말 몰랐습니다.”
크호른 왕은 지금의 상황을 무척이나 어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이안은 뒤에 들어가는 ‘님’이라는 말에 당황스러워했다.
“아닙니다. 님이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냥 편하게…….”
타미르안이 라이안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럼! 당연하지. 위대한 골드드래곤의 수장인 나의 친우에게 님이라고 붙이는 것조차 부족하지 않은가 싶은 것을… 어흠.”
“이봐, 타미르안…….”
라이안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타미르안을 바라보자 타미르안은 오히려 크호른 왕에게 되물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가?”
갑자기 물어오는 타미르안의 말에 크호른 왕은 당황하며 급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당연하고 말구요.”
“거 보게나. 국왕도 그렇다고 하지 않은가.”
라이안은 무대포로 나오는 타미르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타미르안은 이미 챠둠과 관련된 사람들은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 따위가 자신이 인정한 존재에게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하니 그것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계속 한숨만 쉬고 있는 라이안의 머릿속에 타미르안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라이안, 대륙에서 활동하려면 한 나라의 비호정도는 받아야 수월할 것이라네. 자네가 무엇을 하던 어떤 일에 개입을 하던 그것은 자네에게 이익이 되었으면 되었지 불이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자네에게는 인간 친구들이 있지 않은가? 그 친구들은 자네와는 다르게 세속에 묶인 사람들이라네. 국왕이 자네를 어려워해야만 그들에게 함부로 못할 것이며 자네에게 잘 보여야 하니 그들 또한 자연스럽게 왕의 비호를 받게 되는 것이지. 어떤 쪽으로 바라보든 좋은 것이 아닌가…….]
타미르안의 말을 들은 라이안은 그제야 여러 가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팔튼은 이 나라의 귀족이었지… 그럼 이로 인해 그에게 이득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지도… 다다익선이라…….’
무엇이든 좋은 것이 많으면 더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인 한국에서 자란 라이안은 나이가 많은 크호른 왕에게 타미르안과 같이 반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전하, 그럼 이렇게 하시지요. 서로 편한 존칭을 쓰는 것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전하께서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이 편하시면 그렇게 부르셔도 좋습니다. 대신 전 지금과 같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크호른 왕은 타미르안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타미르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헉! 아닙니다. 저에게 존대를 하시다니요?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전혀 개의치 마십시오.”
“그것은 제가 안 될 말입니다. 제가 살던 곳은 자신보다 연대가 높을 경우 항상 존대를 붙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오래 사신 분들은 그만큼 연륜이라는 것이 있으니 어린 사람들이 배울 점이 많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살던 그곳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없던 세상이지요. 그곳에도 오래전에는 그러한 귀족과도 같은 풍습이 있기는 했으나 사라져 버렸답니다. 그러니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지요?”
그러면서 무서운 표정의 타미르안의 얼굴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그래야 크호른 왕이 동요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라이안 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어흠, 요즘 반짝거리는 것이 부족한 참인데…”
“응? 무슨 말이야?”
라이안은 다짜고짜 말하는 타미르안의 말에 궁금함을 표시했고 크호른 왕은 마른 침을 삼켰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어째 그냥 지나간다 했더니…….’
“위대하신 분이시어. 섭섭하시지 않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호오? 제법 눈치가 빠른 왕이로군. 후후후”
라이안은 그들의 대화에서 점점 더 궁금증이 일었다.
“아, 무슨 말이냐니까? 타미르안.”
“요즘 내 창고가 너무 빈 것 같아서 허전했는데 국왕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하는군.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허허허!”
순간 라이안은 타미르안의 말에 어이가 없어졌다.
‘그 작은 동산과도 같은 금은보화들이 허전하다고?’
그러한 생각을 하던 중 무슨 말인지 깨달은 라이안이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그럼 지금 너 국왕전하께 삥 뜯는 거야?”
“삥? 무엇을 뜯는단 말인가?”
“너 지금 국왕전하께 돈 달라고 한 거 아냐?”
“어흠, 누가 누구한테 무엇을 달라고 했다고 그러는가? 국왕이 나에게 선물을 준다고 하지 않은가?”
타미르안은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는 듯 라이안과 살짝 돌아앉아서는 창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쭈? 이 녀석이?’
“이봐, 타미르안. 이 나라는 지금에서야 전쟁을 끝낸 상황이야. 내가 알기로는 군자금만 해도 나라의 예산 중 70%를 먹는다고 들었었는데 이럴 때 갈취까지 하고나면 나라가 쓰러지기 직전에 놓이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그거야 뭐… 국왕이 적당히 알아서 여유가 있는 만큼만 선물을 주지 않겠는가?”
“흠… 여유라…….”
크호른 왕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의 상황에서 타미르안에게 보화를 바치고 나면 어지러워진 나라를 수습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라이안이 잘만 이야기 하면 보화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한 생각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던 것이다.
“전하,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래요?”
“무슨 부탁이신지요?”
“나라의 재정문제를 모두 와이파른 후작님과 팔튼 후작에게 넘겨주세요.”
“아니, 왜 그런 부탁을…….”
“어려운 시국에 자금까지 부족하다면 재정문제를 담당하는 그들이 무척이나 힘들어지겠지요?”
라이안의 말에 크호른 왕이 긍정의 말을 했다.
“없는 돈을 아껴서 쓰려면 당연히 힘든 문제이겠지요.”
“그러한 친구의 어려움을 제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흠… 그런데 난 돈이 없고. 어떡하지? 아! 챠둠에게 달라고 하면 되겠구나? 챠둠이 돈이 없다고 하면 타미르안에게 빌려서라도 돈을 달라고 하면 되겠지. 뭐.”
타미르안 또한 알고 있었다. 라이안이 챠둠에게 하는 명령은 절대적이라는 것을…….
“헉!”
타미르안은 순간 자신의 드래곤하트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챠둠이 돈을 빌려달라는데 안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이, 이럴 수가! 결국 내 창고만 비는 것이 아닌가!’
타미르안은 왠지 크호른 왕에게 선물을 받았다가는 더 큰 보물이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어흠, 이보게 국왕. 선물을 안 주어도 되네. 내 그 마음만 잘 받겠네. 왠지 이곳이 상당히 더운 것 같군. 난 이만 가보겠네, 라이안. 텔레포트!”
그렇게 타미르안은 도망쳐버렸다.
다시 챠둠의 전함으로 텔레포트한 타미르안은 그곳에서 안심하며 큰 숨을 내뱉었다.
사라진 타미르안을 보며 라이안과 크호른 왕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다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허허허허허!”
한참을 그렇게 웃던 두 사람은 겨우 웃음을 멈추었고 크호른 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라이안 님 덕분에 재정문제가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약한 사람이 삥 뜯기는데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요.”
그 와중에도 크호른 왕은 계속해서 처음 들어보는 삥이라는 말이 거슬렸다.
“저기… 라이안 님, 그런데 그 삥이라는 말은 무엇인지요?”
“아, 삥이요? 큭큭큭, 그것은 제가 있던 곳에서 쓰던 말이지요. 그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는 저도 자세히 모르지만 뜻은 갈취와도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라이안 님은 참 재밌는 말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뭘요.”
“우선 피곤하실 것 같은데 이만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미리 일러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곳에서 쉬시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이안의 말에 살며시 미소를 머금은 크호른 왕이 집무실 한쪽에 있는 줄을 잡아당겼다.
딸랑딸랑.
그 줄은 집무실의 문밖과 연결이 되었는지 곧 나이가 조금 든 시비 하나가 들어섰다.
“찾으셨는지요. 국왕전하.”
“라이안 님을 내가 말한 곳으로 모셔다 드리고 시비를 붙여 극진히 대하여라.”
“알겠습니다.”
중년의 시비는 라이안을 보며 고개를 숙였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라이안은 크호른 왕을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라이안이 시비를 따라 나간 후, 크호른 왕은 창 쪽으로 걸어가 하늘을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팔튼 후작이라… 공작도 아깝지 않군.”
이러한 크호른 왕의 말로 보아 팔튼이 승급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라이안은 중년의 시비를 한참이나 따라가서야 자신이 지낼 방 앞에 멈출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중년의 시비는 문을 열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시지요.”
“아,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존대를 하시면 아니 되십니다. 말을 낮추어 주십시오. 혹 위에서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경을 칠지도 모릅니다.”
중년의 시비는 라이안의 존대에 난감함을 나타냈다.
국왕조차 ‘님’이라는 말을 붙이며 존대하는 존재가 자신에게 존대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
역시나 아직은 귀족문화에 치우친 이곳 세상이 무척이나 낯선 라이안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의 시비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선 라이안은 두 명의 어린 시비를 볼 수 있었다. 두 명의 시비는 라이안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앞으로 저희가 모실 것이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드는 그녀들의 얼굴은 이미 짙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이렇게 잘생겼을 줄이야…….’
‘아, 반할 것만 같아…….’
그런 그녀들의 마음도 모르는 라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응, 나도 잘 부탁해. 헤헤.”
“아…….”
“아…….”
그녀들은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작은 신음성을 내며 라이안을 바라보았다. 라이안의 미소에 지금 죽어도 좋을 듯한 황홀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 너희들 어디 아파? 얼굴도 빨갛고 감기라도 걸린 것 같은데?”
이러한 마음을 모르는 라이안은 곧 그녀들의 상태를 보려고 손목을 잡고 맥을 관찰했다. 하지만 손목을 잡힌 그녀들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다.
“이, 이런! 맥이 너무 빠르잖아. 아니,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토록 아픈 아이들에게 일을 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라이안은 쓰러진 그녀들을 안고서 서둘러 침상에 눕혔고 천을 찾았다.
그는 곧 한쪽에 걸려 있는 천을 향해 허공섭물을 시전하였고 그것은 순식간에 라이안에게 날아왔다. 라이안은 서둘러 물의 하급 정령인 운디네를 불러 천을 적신 다음 그녀들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단 몇 초 만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오히려 내가 이 아이들을 모셔야 하잖아?”
다시 그녀들의 맥을 잡은 라이안은 맥이 안정을 되찾았음을 확인하고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잠깐 이상한 일은 겪은 라이안은 방 안에 있기가 따분해서 산책이나 하려고 밖으로 나왔다. 갓 전쟁을 끝낸 상황이라서 그런지 왕성 안은 상당히 어수선했다.
“다들 무척 바쁜가 보구나. 그나저나 헤인드나 나머지 애들은 어디에 있지?”
라이안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병사들의 숙소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려고 급히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헉! 아, 안녕하십니까! 라이안 님!”
“아, 네. 안녕이야 하죠.”
라이안을 알아본 그 남자는 극히 라이안을 어려워했다.
라이안도 그것을 느꼈기에 갑자기 무엇인가를 물어보기도 어색했다.
그는 현재 남작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바체라로, 특별한 물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일을 맞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상당히 큰 예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에 히매인 왕국만의 특출난 상품을 고가에 넘겨 큰 이득을 보아야만 했다. 그래서 그 또한 상당히 바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새로운 수출품목을 찾아 그것을 보고하러 가던 중 라이안을 만난 것이었다.
왕성 안에서 라이안의 얼굴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고위 귀족들밖에 없었다. 어전회의는 본래 고위 귀족들만 참가하는 것이어서 백작까지만 참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의 귀족들은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위 귀족들에게 임무를 하달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현재 한국의 급수가 조금 높은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바체라 남작은 라이안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우연히 귀족회의가 끝날 때 그곳을 지나게 되었고 고위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통해 라이안이 얼마나 대단한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이 하던 말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 바로 드래곤 나이츠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바체라 남작은 라이안과 함께 그 옆에 있는 금발의 준수한 남자도 볼 수 있었다.
‘이럴 수가! 그럼 저 사람이 드래곤이란 말인가!’
드래곤이라면 그 어떤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쉽게 대할 수가 없는 존재였느니 바체라 남작의 놀라움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드래곤 나이츠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앞을 막고 있었으니 등에서 식은땀이 흐흐는 바체라 남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말이라도 잘못 한다면 큰일이거늘…….’
그의 조마조마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자 오히려 라이안 자신이 찜찜했다.
“아, 아니에요. 바쁘신 것 같은데 그냥 일 보시지요.”
바체라 남작은 어둠속에서 하나의 빛줄기를 잡은 듯 표정이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바체리 남작은 갑자기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뛰어갔다.
“뭐야? 저 사람…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거지? 내가 저 사람한테 감사할 일이라도 했나? 아휴, 갑자기 저 사람이 어려워 하니까 나도 물을 걸 묻지 못했네.”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병사들의 숙소를 물어보려고 하던 라이안은 그것을 그만 두었다. 더 빠른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챠둠, 들리냐?”
챠둠에게 그들을 찾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챠둠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모여 있는 숙소를 찾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네, 들립니다.”
“그러냐? 하하! 챠둠, 지금 헤인드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줘.”
“지금 바로 약도를 반지로 송신하겠습니다. 약 3초 후면 이곳의 지도를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지도에서 붉은 점으로 표시된 곳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응, 고마워.”
라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반지의 파란색 부분을 눌렀고 반지에서 곧 하나의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위에서 왕성을 바라보는 듯한 지도였다.
라이안은 곧 그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뭐야? 완전 성 끝에 있잖아?”
“이곳 성에 침입자가 생겼을 경우 가장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곳에 있는 듯합니다.”
“그래?”
자세히 전체 지도를 바라보던 라이안은 역시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지도대로 가면 너무 꼬불꼬불하잖아. 이거 담이라도 넘어서 가야겠다. 귀찮아…….”
홀로그램을 지운 라이안은 자신이 가야 할 곳과 직진 방향을 정한 후 곳곳에 있는 담을 하나하나 넘어갔다.
“이제야 좀 시원하군.”
얼굴로 스쳐가는 바람이 너무도 상쾌했다.
몇 개의 담을 넘어 가던 라이안은 중간에 자신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을 보았다. 한 여성이 두 명의 시비를 거느리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이곳의 공주라고 했던가? 왜 저 사람만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거지?”
정원을 산책 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루시 공주였다.
라이안이 그런 느낌에 의문을 가지며 루시 공주를 바라보고 있을 때, 루시 공주 또한 같은 느낌을 받으며 그 느낌이 이끄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곧이어 루시 공주도 멀리서 보이는 사람의 형태를 볼 수 있었다.
보통 성벽 위에 사람이 서 있다면 그것에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루시 공주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느낌… 역시 그 사람인가? 항상 볼 때마다 드는 이 느낌… 이상해… 내가 왜 이러지?’
라이안은 순간 루시 공주와 자신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 같이 느꼈다.
“이 거리라면 저쪽에서 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텐데… 내 얼굴이 보이나?”
라이안은 왠지 모를 이 이상한 느낌의 의문을 풀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헤인드들을 만나는 것을 잠시 미루고 루시 공주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의 날아가는 수준으로 순식간에 새가 날아오는 듯한 속도로 루시 공주에게 다가온 라이안이었다.
루시 공주의 시비들이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 놀라 서둘러 루시 공주의 앞을 막았다.
“누구냐! 이분은 이 왕국의 공주이시다. 썩 물러가거라!”
두 시비들은 어디서 빼어들었는지 어느새 단검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라이안은 그런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름다운 여성들이 너무 위험한 걸 들고 계시군요.”
그제야 라이안의 얼굴을 확인한 두 시비들은 갑자기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누, 누구지? 이렇게 잘생긴 사람이 이 성안에 있었단 말인가…….’
‘왜 이러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
그녀들은 자신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들이 옅게 홍조 띤 얼굴로 라이안을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들의 뒤에서 루시 공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아는 사람이야. 너희들은 먼저 들어가렴.”
하지만 왠지 그녀들은 무반응이었다.
‘으음? 얘들이 오늘 왜 이러지?’
이상함을 느낀 루시 공주는 살며시 그녀들의 얼굴을 확인했고 곧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갑자기 일어나는 분노…….
루시 공주는 눈을 꼭 감고 팔을 부르르 떨며 굳은 음성으로 말했다.
“야! 정신 차려!”
큰 소리에 이제야 정신을 차린 두 시비는 놀라며 루시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 네! 부르셨나요, 공주님?”
“왜 그러시죠?”
그녀들은 홍조 띤 얼굴로 루시 공주가 소리를 친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기는! 너희들 얼굴이나 보고 왜 그러는지 물어봐! 치… 이것들이 잘생긴 얼굴에 혹해가지고 날 호위하는 것까지 잊다니… 흥!”
루시 공주는 삐친 듯 새침하게 콧소리를 내었고 그제야 이 상황을 느낀 그녀들은 무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
“공주니~임.”
그녀들은 무안함을 느끼며 토라진 루시 공주를 달랬다.
“됐어, 내가 다신 너희들하고 산책 나오나 봐라. 치!”
“공주님, 잘못했어요.”
“그래요. 공주님, 용서해주세요…….”
라이안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시비들을 보고는 자신의 시비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 그런 것이었군. 크…….’
왠지 쓴웃음이 지어지는 라이안이었다.
루시 공주는 손을 휘저으며 시비들에게 말했다.
“그건 우선 됐고. 이 사람하고 이야기 할 것이 있으니 자리 좀 비켜줘.”
“어? 아시는 분이셨어요?”
“어떻게 아신 분이에요?”
하지만 루시 공주의 표정은 볼을 힘껏 부풀린 채 날카롭기만 할뿐이었다.
“아, 알았어요. 갈게요.”
“공주님 치사해요. 혼자만 저런 분을 만나시고. 히잉.”
사라져가는 두 시비의 말에 루시 공주가 쫓아갈 듯 소리쳤다.
“너희들 정말!”
하지만 곧 더 빠른 발걸음으로 급히 사라진 그녀들이었다.
라이안은 자신의 앞에서 씩씩거리는 공주를 바라보며 참 신기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시비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루시 공주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다.
살며시 미소 짓고 있던 라이안을 루시 공주가 몸을 돌려 바라보았다.
“물어볼 게 있었어요.”
“물어볼 게 있습니다.”
“아?”
“어?”
“푸훗!”
“하하하.”
라이안 역시 루시 공주가 자신을 바라보자 자신의 의문을 묻고자 했고 루시 공주도 항상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고자 동시에 말했던 것이었다.
서로의 같은 반응에 서로 웃음을 터뜨리던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라이안은 먼저 물어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을 살며시 앞으로 내밀었다.
“그럼 제가 먼저. 이전부터… 아마도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로부터 습격을 받았을 때부터겠죠? 아무튼 그때부터 이상하게 당신을 보면 귓속에서 풀잎으로 만든 피리 소리 같은 게 들려요.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나요?”
순진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루시 공주가 왠지 이뻐 보이는 라이안이었다.
“공주님이 절 좋아해서 그런가보죠?”
“네?”
라이안의 장난스런 대답에 루시 공주는 잠시 어이가 없어졌다.
“그거 지금 장난친 거죠?”
“네, 맞아요.”
“윽!”
자신은 심각하게 물었는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고 하니 왠지 몸에 힘이 풀리는 루시 공주였다.
보통이라면 이러한 상황에 화가 날 법도 했으나 이상하게 그런 라이안과 이야기 하고 있는 이 상황은 그녀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루시 공주님?”
“네.”
“저 역시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돼서 지나가던 중 여기에 오게 된 것이랍니다. 저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군요.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공주님과 눈빛이 부딪힌 듯했고 곧 루시 공주님과 같은 풀잎 부는 소리를 들었지요. 처음에는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후에 공주님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나 아까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같은 느낌과 같은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당신도 그랬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공주님을 보러 온 것이지요.”
“그럼 당신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거군요.”
“네. 저도 그것을 알 수가 없네요.”
“으음…….”
입술에 손을 대고 생각하고 있는 루시 공주를 바라본 라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으응? 뭐지?’
라이안은 순간 자신의 생각에 놀랐다. 그 순간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살면서 처음 느낀 감정에 라이안은 복잡해지는 머리를 다잡기 위해 혈기공을 운기했다.
천천히 생각을 하던 루시 공주는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상쾌함을 느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곧 느낄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이 눈앞에 있는 라이안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는 것을…….
“지금 이 바람, 당신이 한 것인가요?”
“느꼈어요?”
“네… 마치 산에 있는 듯 상쾌한 바람이었어요.”
루시 공주의 말에 라이안이 미소 지었다.
“산속은 맑은 정기가 모이기 마련이지요. 그만큼 순수한 마나가 모이는 것이기도 하고요. 공주님은 제가 흡입하는 마나를 느끼신 듯합니다.”
라이안과 루시 공주는 거리낌 없는 대화를 계속 주고받았다. 처음 하는 대화였으나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지내온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
한참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루시 공주가 하늘을 보며 당황해 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전 이제 돌아가서 연회준비를 해야겠어요.”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바로 오늘 저녁부터 며칠 동안 연회가 열린다고 했었지요?”
“예, 그리고 이 연회는 어쩌면 라이안 님을 위한 연회가 아닌가 싶어요.”
“에이, 그럴 리가요. 승리에 대한 기쁨을 다 같이 나누자는 것이겠지요.”
“그 승리를 라이안 님이 가져다주셨잖아요.”
라이안은 루시 공주의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림을 알았다. 그리고 온몸에 흐르는 전율…….
몸 곳곳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왜 이러지? 몸이 이상하잖아?’
라이안이 자신의 반응에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때 루시 공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연회에 참가하려면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라이안 님도 연회에 참가하시려면 서두르셔야죠.”
“아, 네. 그래야죠.”
그렇게 등을 돌려 걸어가는 루시 공주는 바라보던 라이안은 뭔가 갑자기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와 더 같이 있고 싶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으나 라이안도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이 루시 공주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걸어가는 루시 공주의 뒷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본 라이안은 곧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시 공주는 먼저 그곳을 떠나며 발걸음이 무거워진다고 느꼈다. 왠지 라이안과 같이 있다면 며칠을 그렇게 서서 이야기해도 다리가 아프지 않을 것만 같았다.
곧 한쪽 귀퉁이를 지나려던 루시 공주는 마지막으로 라이안을 보기 위해 고개를 살며시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루시 공주의 시선에 라이안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이 허전함은 뭐지? 설마… 오늘 처음 이야기한 것일 뿐인데…….’
루시 공주는 순간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성의 경우 연회에 참가하기 전에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 * *
병사들의 숙소는 그리 깨끗하지 못했다. 청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하는 병사들로서는 청소가 사치스럽게 느껴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 전쟁에 대한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 이야깃거리는 모두 라이안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이미 병사들에게는 술과 음식들이 지급되었는지 여기저기서 통돼지가 구워지고 있었으며 한쪽 구석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쌓여 있었다.
음식들은 조금 지저분하게 커다란 통 안에 잔뜩 들어가 있었으나 병사들은 개의치 않고 그것을 듬뿍 담아갔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역시나 헤인드들이 있는 곳이었다. 노크리 성의 병사들은 헤인드들이 라이안과 친구임을 알고 있었고 이러한 이야기들이 다른 병사들에게도 퍼져나간 결과였다.
“아니, 어떻게 그런 분과 친구가 되었는가?”
“그러게 말이야? 처음 어떻게 만났는가?”
병사들의 물음에 헤인드가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키야! 술맛 좋다! 그것을 말하면 모두 놀랄 것이라네. 하하하, 글쎄 산속에서 오우거를 만났는데 말이야…….”
헤인드는 기분이 좋은 듯 자신들과 라이안이 처음 만났던 상황을 줄기차게 늘어놓았다.
“하하하, 그런데 그 친구가 팔튼의 검을 돼지 굽는 꼬챙이로 사용했단 말이지! 하하하.”
없는 곳에서는 국왕의 욕도 한다 하지 않는가?
병사들 역시 팔튼에게 후작이라는 호칭을 안 쓰는 것을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는지 웃으며 헤인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하하, 기사가 검을 잃어버렸었으니 그거 참 볼만 했겠군.”
“하하하.”
“허허허.”
그때 연회준비를 위해 옷을 갈아입던 팔튼은 이상한 느낌과 함께 재채기를 했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이거 늦겠군. 어서 준비해야지.”
라이안은 은자술을 펼치며 병사들이 있는 곳을 살폈다. 그냥 병사들 주위로 걸어 다녀도 되었으나 그러면 시끄러워질 것 같기도 했고 헤인드들 앞에 짠하고 나타나 놀라게 해주려는 심산도 있었다.
라이안은 곧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헤인드들을 찾을 수 있었다.
“저기 있군.”
라이안은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에나와 라드이라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법사와 신관은 다른 곳에 있나보군.”
곧 병사들 뒤쪽으로 다가간 라이안은 모여 있는 병사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 라이안의 귓속으로 들려오는 소리…….
“라이안 그 친구가 어찌나 눈치 없고 멍청한지 말이야. 어떨 때는 대단하지만 어떨 때는 꼭 멍청한 오크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수도 없이 많았지 뭔가. 하하하.”
정적.
고요했다. 꼭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헤인드의 말에 같이 웃어주던 병사들도 굳은 표정으로 헤인드의 뒤쪽만 바라볼 뿐이었다.
헤인드도 곧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의 병사들이 자신의 뒤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인드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옆에 있던 디로안을 보았다. 그러나 디로안 역시 자신의 뒤를 바라보며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보게 디로안, 제발 라이안이 내 등 뒤에 있다고만 하지 말아주게나…….”
하지만 디로안은 헤인드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헤인드… 부디 죽지는 말게나. 난 먼저 일어서야 겠네.”
“이보게 디로안!”
헤인드는 일어서려는 디로안은 옷을 강하게 잡았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하지만 디로안은 곧 헤인드가 잡고 있던 부분의 옷을 자신이 직접 찢으며 일어났다.
찌지직!
“부디 좋은 세상으로 가게나…….”
“디, 디로안!”
그러고는 곧 일어나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디로안이었다. 병사들 역시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남아있는 것은 단 두 사람.
“혹시… 다 들었는가?”
헤인드가 눈알만 굴리며 물었고 대답은 한참 뒤에 들려왔다.
“내가 오크는 얼마나 멍청한지 잘 알고 있지.”
헤인드는 지금 들려오는 소리가 사신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살려주게…….”
“안 돼.”
“부탁이네…….”
“늦었어.”
촤라라라락!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끌려가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비명이 병사들의 숙소에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살려줘!”
퍼버버벅!
퍽! 퍽!
“끄아아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병사들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몇 병사들은 디로안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설마… 죽이는 것은 아닌가?”
“그러게 말이네. 저거 말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디로안의 말은 냉정했다.
“난 죽기 싫다네. 쯧쯧쯧… 불쌍한 헤인드… 내 언젠가 저놈의 입이 큰일을 낼 줄 알았지.”
한참동안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병사들은 곧 홀로 남아 개거품을 물고 있는 헤인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헤인드를 디로안이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숙소로 옮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