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돈의 라이안-17화 (16/57)

제17장 라이안의 무적병기

하이븐 후작의 명령에 따라 마나의 보충이 끝난 파이어 기사들이 타이탄을 이끌고 케로틴 성으로 진격했다.

쿵쿵쿵쿵.

쿵쿵쿵쿵.

“이번에야말로 본때를 보여주자!”

“와! 공격!”

“와!”

타이탄으로 공격해오는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에게로 수십여 발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슈슈슈슝.

슈슈슈슝.

버버벙!

퍼버버벙!

케로틴 성의 성벽 위에서는 라핀 후작의 명으로 마법사단의 마법이 난사되고 있었다.

“공격하라! 쉬지 말고 공격하라!”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은 강력한 공격마법에 맞을 때마다 휘청거렸다. 하지만 움직임만 조금 둔해질 뿐 별다른 피해는 없어 보였다.

“얼음계열 마법을 시전하여 적들의 움직임을 둔화시켜라!”

라핀 후작의 명에 마법사들이 급히 얼음계열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라이브림!”

“프리즈 애로우!”

“프리즈 브리드!”

“아이스 애로우!”

제각기 다른 얼음계열의 마법이 타이탄에 작렬했고, 그 때문에 순간순간 타이탄의 움직임이 멈추기도 했다. 이를 확인한 라핀 후작이 타이탄들에게 음성증폭 마법을 시전하여 명을 전달했다.

“자국의 타이탄들은 둔화되어 있는 적들의 타이탄을 공격하라!”

“공격!”

“와!”

“이야!”

쿵쿵쿵쿵.

쿵쿵쿵쿵.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들이 잠시 움직임이 둔화되어 있는 타이탄들을 덮쳐갔다.

파캉!

파캉!

몇 몇 움직일 수 있는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이 히매인 왕국 타이탄의 공격을 막았으나, 한 기의 타이탄이 움직이지 못하는 타이탄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쿠웅!

“크악!”

주루룩.

커다란 소리가 들려오며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 중 한 기의 가슴에 검이 꽂혔고, 이를 본 하이븐 후작의 푸른색 타이탄이 검을 꽂은 타이탄의 허리를 갈랐다.

쿠앙!

“크악!”

콰당탕!

엄청난 크기의 검이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을 순식간에 반 토막 냈고, 잘린 타이탄의 상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라핀 후작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서둘러 마법사들을 독려했다.

“무엇하느냐! 어서 다시 적들의 타이탄에 얼음계열 마법을 시전하라!”

슈슈슈슝.

슈슈슈슝.

텅! 텅! 텅!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은 그러한 마법사단의 도움으로 둔해진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과 겨우 교전을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을 한 기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도 한 기의 손실을 입었다.

결과적으로는 양쪽 모두 한 기씩의 손해지만 따지자면 오히려 히매인 왕국의 손실이 더 컸다. 움직임이 느렸지만 그래도 그 수가 많은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에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은 겨우 겨우 버티는 것이 다였다.

라핀 후작이 바라보는 마법사들의 상황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이미 모든 마나를 손실하고 쓰러지기 시작하는 마법사들도 보였으니 너무도 답답했다.

“이…이런!”

라핀 후작이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은 마법으로 둔해진 몸이 다 녹았는지 서서히 원래의 움직임을 회복해 나갔다. 그리고 그로 인해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들은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그것을 보고 있던 라이안이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와이파른 백작을 보며 말했다.

“저라도 같이 나서서 싸워야겠습니다.”

“괜찮겠느냐?”

라이안은 걱정스럽게 물어보는 와이파른 백작의 물음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보탬은 되겠지요. 타앗!”

라이안이 그렇게 대답하는 동사에 돌을 던지며 앞으로 쏘아져나갔다.

턱! 턱! 턱! 턱!

쉬이이이익!

그렇게 초상비를 펼치며 날아가듯 발사되어 가는 라이안을 보는 히매인 왕국의 병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스피어마스터다!”

“와! 스피어마스터가 나간다!”

“와!”

촤아아아악!

너무 빠른 속도로 쇄도한 바람에 라이안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앞으로 미끄러졌지만 그것도 잠시, 곧 멈출 수 있었다.

“시작해볼까? 강식장갑!”

처러러럭!

촤락촤락!

순간적으로 라이안의 몸이 검은 빛을 띠는 강식장갑으로 변했고, 그렇게 몸을 보호한 라이안은 창을 쥐고 타이탄들의 전투에 끼어들었다.

마침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 중 한 기가 하이븐 후작이 움직이는 타이탄에 두 동강 나려는 순간, 라이안이 그 사이로 들어가며 창을 휘둘렀다.

파캉!

“스피어마스터!”

겨우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이 빗겨 맞으며 위기를 모면했고 라이안은 다시 한 쪽으로 착지할 수 있었다. 히매인 왕국에서는 그러한 장면을 목격하며 경악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대단해! 타이탄의 검을 쳐내다니!”

“역시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어!”

“10만을 쓸어버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스피어마스터 만세!”

“와! 스피어마스터 만세!”

라이안은 땅에 착지 하자마자 챠둠이 말했던 강식장갑의 레밸을 5단계의 최고치로 맞추었다. 그러자 강식장갑의 팔이 부풀더니 더욱 단단해지는 듯 빳빳해져갔다.

“후훗! 힘이 넘치는군.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싸울 때 이것을 사용하는 건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들이 또 공격받자 라이안이 중간 중간 끼어들며 에드코르 제국 타이탄의 공격을 막았다.

운룡대구식으로 공중에서 교묘하게 타이탄의 검을 피해가는 라이안의 모습을 보는 케로틴 성의 모든 사람들은 그런 라이안에게 타이탄의 검이 떨어질 때마다 움찔거리며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하이븐 후작은 라이안이 나온 이후로 계속 밀리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여 파이어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3기의 타이탄은 적군의 타이탄을 막고 나머지는 스피어마스터를 상대한다!”

“알겠습니다!”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과 가장 가까이 있던 타이탄들이 남아서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을 공격했고, 나머지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을 포함한 모든 타이탄들이 일제히 라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이것들이 왜 이래!”

쾅!

쾅!

“이크!”

여기저기서 떨어지는 타이탄의 검을 힘겹게 피하는 라이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라이안은 다시금 공중에 떠올라 하이븐 후작의 검을 밟고 튕기듯 날아올라 다른 타이탄을 공격해 나갔다.

“하앗! 청룡일섬!”

쉬이익!

파앙!

라이안이 타이탄과 타이탄 사이로 들어가서 강탄을 쏘아 보내자 한 타이탄이 그것에 저항할 틈도 없이 맞아 쓰러졌고, 다른 타이탄들 역시 너무 근접한 거리에 있어 라이안에게 칼을 휘두르지 못하고 공간을 벌렸다.

그것을 본 하이븐 후작이 재빨리 명령했다.

“뭉쳐 있지 말고 스피어마스터를 둘러라!”

“넵!”

“넵!”

하이븐 후작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이 라이안을 둘러쌌다.

그에 위기를 느낀 라이안이 급히 한 타이탄의 다리 사이로 빠져 나가려고 하는데, 순간 그 옆에 있는 타이탄이 휘두른 칼에 그만 탈출로가 막혀버렸다.

“어딜 도망가느냐!”

콰광!

“으윽!”

라이안이 서둘러 뒤로 빠지자 라이안을 둘러싼 타이탄들의 연공이 이어졌다.

그렇게 마냥 피하기에 바쁜 라이안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케로틴 성의 뒤쪽으로 히매인 왕국의 깃발을 든 3만 정도의 군사들이 케로틴 성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전장을 바라보는 라핀 후작에게 한 병사가 오더니 하나의 소식을 전했다.

“라핀 후작각하! 바치스 공작각하께서 군대를 이끌고 오셨습니다!”

“뭣이! 그게 정말이냐?!”

“어서 가보셔야 할 듯합니다. 지금 성안으로 들어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어서 안내하여라.”

서둘러 병사의 뒤를 따라가려고 하는 라핀 후작에 귀에 들려오는 니직한 음성이 있었다.

“그럴 필요 없네. 이미 올라왔으니.”

어느새 성벽 위로 바치스 공작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라핀 후작이 바치스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라핀 후작.”

“바치스 공작각하께서 어찌하여 이곳까지 오셨는지요?”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전투에 참여하려고 왔다네.”

바치스 공작이 그렇게 말하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좋지 않군. 저기 타이탄들이 둘러싼 인물이 스피어마스터인가?”

“그렇습니다.”

“대단하군. 7기의 타이탄을 상대로 혼자서 싸우고 있다니. 허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저자에게 타이탄을 지급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저자가 저곳에 있다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타이탄이라니요?”

라핀 후작이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바치스 공작에게 물었다.

“이번에 우리 히매인 왕국에 성능이 아주 좋은 타이탄이 2기나 발굴 되었다네. 한 대는 국왕전하께서 내게 주셨고 나머지 한 대는 스피어마스터에게 주어 에드코르 제국을 물리치라는 명을 받았다네.”

라핀 후작은 바치스 공작의 말에 새삼스레 타이탄이 욕심났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기사에게 준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힘이기 때문이다.

라핀 후작과 바치스 공작이 이러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와이파른 백작과 팔튼이 바치스를 보고는 인사를 하러 왔고 이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와이파른 백작이 바치스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장자 팔튼이 바치스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호오, 와이파른 백작 오랜만이오. 그리고 팔튼 경도 오랜만이군.”

그렇게 바치스 공작이 반갑게 그들의 인사를 받을 때 와이파른 백작이 바치스 공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바치스 공작각하, 지금 현재 싸우고 있는 자들이 위험합니다. 부디 서둘러 저들을 구해 주십시오.”

“나도 지금 그러려고 하던 참이오. 상황을 보니 타이탄이 아니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것 같소. 하지만 나머지 한 기의 타이탄에 탑승할 적절한 기사를 찾지 못하겠구려.”

“제가 나가겠습니다.”

팔튼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리고 곧 와이파른 백작이 부연설명을 했다.

“이번에 이 녀석이 마스터급에 올랐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라핀 후작의 표정이 그 순간 팍 일그러졌다.

“오오, 그것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바치스 공작이 팔튼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고 팔튼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나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과연 히매인 왕국의 천재검사로다.”

“과찬이십니다.”

“좋다! 팔튼 경은 지금 당장 나를 따라 타이탄과 계약을 하고 전투에 참여하라!”

“감사합니다!”

그 즈음에도 라이안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공격을 피하기 바빴다. 그리고 간신히 빈틈을 찾아 어느 한 타이탄의 무릎을 밟고 공중으로 뛰어올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위기를 벗어나려던 라이안에게 다시 하이븐 후작이 몰고 있는 타이탄의 검이 작렬했고, 그 검은 라이안의 등을 후려쳤다.

퍼걱!

“크윽!”

막대기로 친 공처럼 라이안은 사정없이 케로틴 성의 벽으로 날아갔고, 그곳이 움푹 파일 정도로 라이안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 강식장갑의 방어력에 의해서 상처는 입지 않고 내장이 흔들리는 충격만 받았다.

“크억! 제길!”

그리고 그때 성벽에 부딪치며 떨어지는 라이안에게 또 하나의 타이탄이 뛰어가 검을 휘둘렀고, 라이안은 급한 마음에 그것을 창으로 막으려고 했다.

그 순간 검은 색의 물체가 라이안의 모습을 가렸다.

파캉!

“헉! 타이탄!”

검은색의 쌍둥이 타이탄 중 한 기가 급히 라이안을 보호했고 그곳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온 이상 라이안은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다!”

“파…팔튼?”

“자네, 괜찮은가!”

“응, 이거 큰 도움을 받았군.”

팔튼이 탄 타이탄이 적군 타이탄의 검을 밀치며 공격했다. 그리고 이내 바치스 공작이 탄 타이탄이 뒤로 물러나는 타이탄의 가슴을 뚫어버렸다.

하이븐 후작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의 타이탄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것들을 부수어라!”

“넵!”

쿵쿵쿵쿵.

파캉!

파캉!

검은색의 쌍둥이 타이탄은 멋지게 호흡을 맞추어 싸워갔다. 하지만 역시나 6대 2의 싸움을 유리하게 이끌고 나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쿵! 쿵!

그때 옆쪽에서 싸우던 히매인 왕국의 타이탄 2기가 3기의 적군 타이탄에 의해 쓰러져 버렸다.

그나마 한 기는 양패구상! 서로가 같이 찌른 상태로 동시에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를 끝낸 2기의 적군 타이탄이 다시 검은색의 타이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시 불리한 상황이 초래되었다!

라핀 후작은 초초한 표정으로 마법사단을 독촉했다.

“아직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들은 얼음계열 마법을 시전하여 아군의 타이탄을 도와라!”

“크윽!”

마법사들이 라핀 후작의 명령에 힘겹게 일어나며 주문을 외웠다.

“프리즈 애로우!”

“프리즈 브리드!”

“아이스 애로우!”

퍼버버벙!

바치스 공작은 그러한 마법공격의 도움으로 느려진 한 기의 타이탄의 가슴에 검을 찔러놓고 뒤로 빠르게 빠져나왔다.

“이런 개자식들!”

“죽어라!”

이를 악문 하이븐 후작과 파이어 기사들은 악을 쓰며 그들을 공격해 나갔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다! 이얏!”

파캉! 파캉!

카가가강!

팔튼이 타고 있던 타이탄의 가슴에 아슬아슬하게 타이탄의 검이 스쳐지나갔다.

“조심하게! 팔튼경!”

“크윽! 알겠습니다!”

이미 마법사단들 중 멀쩡히 서있는 자들도 없었으니 더 이상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케로틴 성에 있는 히매인 왕국의 병사들이 손에 땀을 쥐고 있을 때였다.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한동안 몸을 가누지 못하던 라이안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타이탄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나도 저런 거 하나 있었으면… 으응?”

순간 라이안은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떠올렸다. 바로 챠둠이 한 말이었다.

‘지금 타미르안이 만든 타이탄과 제가 만든 로봇하고 누구의 작품이 더 강한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노크리 성에 있을 때 라이안이 챠둠을 불러 건설 장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때 챠둠이 말한 것이었다.

라이안이 착용한 강식장갑이 해체되었고 라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는 곧바로 반지를 들어 챠둠에게 말했다.

“챠둠.”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에는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보였지?”

“그렇습니다. 조심하여 주십시오.”

“크흐흐, 그렇지… 조심해야지…….”

“주인님?”

“챠둠…….”

“네? 왜… 그러시는…지요?”

“내놔!”

“무… 무엇을 말인가요?”

“크흐흐, 너 지난번에 타미르안이 만든 타이탄과 맞붙일 로봇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그거 내놔.”

“주인님, 그것은!”

“어허? 그럼 내가 이렇게 힘들여 가면서 피터지게 싸우리? 저 자식들 봐! 저 자식들은 치사하게 타이탄 같은 거 타면서 싸우잖아! 그러니까 나도 하나 있어야겠어. 주인이 죽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그거 내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정말 헌신을 다하여 만든… 헉!”

라이안이 자신의 목에 창의 날을 가져다대며 챠둠을 협박했다.

“이래도?”

“크윽! 알겠습니다. 드리겠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큭큭.”

잠시 끊긴 챠둠의 음성이 떨리며 들려왔다.

“주인님, 워프로 드릴까요. 아님 그냥 떨어뜨려 줄까요?”

“아무래도 무대효과 같은 게 있어야 더 멋있겠지?”

“컥! 이런 세계에 무슨 무대효과를…….”

“잔말 말고 얼른 떨어뜨려!”

라이안이 타이탄들이 싸우는 곳에서 잠시 벗어났고 발이 미끄러지면서 멈추어 섰고, 챠둠에게 말했다.

“여기로 떨어뜨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은색의 엄청난 크기의 돔(dome)이 떨어졌다!

피유유융!

꽈과과광!

돔이 떨어지자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쳤고 수많이 먼지가 피어올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가렸다.

“쿨럭! 쿨럭!”

“크윽! 뭐…뭐야!”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윽! 먼지 때문에 안 보여! 쿨럭!”

슈아아악!

휘이이익!

싸우던 타이탄들조차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로 떨어져 검을 휘두르며 먼지를 걷어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먼지가 가라앉자 다른 사람들도 땅에 조금 파묻힌 돔을 볼 수 있었다.

“저…저것이 뭐지?!”

“엄청난 크기다!”

케로틴 성 전체가 시끌시끌했다.

하이븐 후작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돔을 보고는 어이없어 했다.

“어디서 저런 엄청난 물건이!”

하늘을 쳐다보았으나 맑고 푸른 하늘과 구름만이 보였다.

“신이 무엇인가 떨어뜨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곧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돔의 중앙이 갈라지며 양쪽으로 갈라졌고 그 안에 하얗게 번쩍이는 하나의 물체가 서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쿠궁!

쿠궁!

제 역할을 다한 돔은 양 갈래로 갈라지며 땅으로 쓰러졌고 라이안의 앞에는 하얀색의 로봇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라이안은 그것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챠둠이구나! 그토록 애니메이션만 보더니. 하하하!”

그것은 바로 이전 시대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로봇이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는 미래의 우주병기로 표현되었던 우주로봇이 그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최고다. 챠둠! 그래, 이것의 이름은 뭐지?”

“게인입니다.”

“게인! 이름도 좋군. 하하하!”

하이븐 후작은 이 어이없는 상황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어찌 저자와 만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케로틴 성에서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인을 보았고 그 놀라움에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저…저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시…신!”

“그래! 신이시다!”

“시…신이 강림했다!”

“신께서 히매인 왕국을 보살피러 친히 강림하셨다!”

“와!”

“와!”

그들의 눈에는 게인이, 신으로 착각할 만큼 대단해 보였다.

한편 신이라는 소리에 로봇을 쳐다보며 흐뭇해하던 라이안이 잠시 휘청거렸다.

“으윽, 이게 신처럼 보이나……?”

그렇게 움찔하며 휘청거리는 라이안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고는 수군거렸다.

“스피어마스터가 왜 저기 있지?”

“그러게 말이야?”

케로틴 성의 병사들은 어느새 갑자기 나타난 신(?) 앞에 라이안이 서 있자 의문을 가졌다.

하이븐 후작도 갑자기 나타난 타이탄 급의 물체를 보다가 그 앞에 있는 라이안을 확인하였다. 그런 하이븐 후작의 가슴속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라이안은 단번에 게인의 허리 쪽으로 뛰어올랐다.

“여기가 조종실이군.”

라이안은 게인의 허리에 나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면서 사라졌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 기묘한 장면에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헉! 스피어마스터가 신 안으로 들어갔다!”

“저…저거 혹시 타이탄 아니야?”

“타이탄?”

“스피어마스터의 타이탄!”

“그렇구나! 신이 아니라 허공에서 소환된 타이탄이로구나!”

“와! 스피어마스터의 타이탄이다!”

“와! 에드코르 놈들의 쓸어버려라!”

“스피어마스터 만세!”

“와!”

“와!”

하이븐 후작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왜 타이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반 타이탄은 지상에 아공간이 생성되지만 저 타이탄은 공중에서 아공간이 생성되어 떨어지는 것이군.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이해가 가는군. 어쨌든 위험해 보이는 물건이다. 조심해야겠어.’

하이븐 후작도 로봇이 상당한 높이에서 아공간이 생겨 떨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모두 저 타이탄을 견제하라!”

“넵!”

“넵!”

팔튼도 라이안이 게인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저렇게 대단한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다니! 내가 라이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대단해! 라이안! 자네는 정말 대단해!’

한편 성벽에서 전투를 바라보고 있던 와이파른 백작은 갑자기 나타난 게인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은 지난번 땅을 파는 물체들과 비슷한 형태인 듯한데… 헌데 어디서 계속 저런 물건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역시나 예리한 그였다. 포크레인의 이음새와 게인의 팔과 다리 관절을 잇는 사이사이가 모습은 다르지만 무척 흡사하다고 느끼는 와이파른 백작이었다.

* * *

로봇 안으로 들어온 라이안은 복잡해 보이는 조종간을 바라보며 챠둠에게 물었다.

“야, 챠둠!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 거야? 그걸 가르쳐줘야 할 거 아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5초 후 그곳으로 지식주입기를 워프로 전송해드리겠습니다. 전에 쓰던 지식주입기에 사용설명에 대한 지식을 집어넣었습니다.”

챠둠의 말이 끝나자마자 번뜩이는 빛과 함께 모자와 비슷하게 생긴 지식주입기가 나타났다.

“좋아, 그럼 한번 써볼까?”

라이안이 그렇게 챠둠과 대화를 하고 있는 사이 하이븐 후작이 넋이 나간 타이탄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3기의 타이탄은 앞에 있는 검은 타이탄을 맡아라! 나머지는 나와 같이 저 이상하게 생긴 타이탄을 파괴한다! 공격!”

“공격!”

“스피어마스터를 죽이자!”

나머지 타이탄들이 라이안이 탄 게인을 치려고 하는 것을 본 팔튼이 그것을 막으러 움직였으나 남아 있던 3대의 타이탄에게 앞이 막혀 버렸다.

“어딜 가느냐!”

파캉!

“크윽! 비켜라!”

팔튼이 서둘러 검으로 막고는 다시 검을 휘둘렀으나 팔튼을 공격했던 타이탄은 뒤로 빠지고 그 옆에 있던 타이탄이 공격해왔다.

“죽어라!”

“이잇!”

파캉!

파캉!

그리고 이어지는 검은색의 쌍둥이 타이탄과 3기의 파이어 기사단의 타이탄은 혼전을 계속했다.

그 즈음, 라이안은 지식주입기를 쓰려고 하는 순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쾅!

“크윽! 뭐…뭐야!”

라이안이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인해 놀라고 있을 때 챠둠의 음성이 들려왔다.

“밖에서 타이탄들이 공격하고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이…이런!”

급히 지식주입기를 쓰고 있던 라이안은 갑자기 몸이 옆으로 기운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 번의 충격을 몸으로 느꼈다. 게인이 하이븐 후작이 휘두른 검에 맞아 쓰러져버린 것이다.

쿠구궁!

게인의 옆구리 부분이 하이븐 후작이 모는 타이탄의 검에 맞아 약간의 파임이 생겼다. 그리고 라이안이 쓴 지식주입기의 숫자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편 케로틴 성의 병사들은 왜 라이안이 탄 게인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공격을 당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어떻게 된 거지?”

“왜 공격을 당하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거야?”

“이런, 제길! 저러다 당하겠어!”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싸워!”

“스피어마스터 힘내라!”

하지만 계속해서 게인을 검으로 내려치고 있는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게인은 그렇게 여기저기 상처를 입고 있었다. 계속해서 저런 공격을 당한다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챠둠은 그대로는 망가질 것만 같은 게인 때문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크윽! 자동으로 움직일 수도 없고… 내 저것들을…….”

자동으로 움직일 수도 있었으나 분명 그리한다면 라이안에게 혼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생각에 끙끙대는 챠둠이었다.

그러는 사이 라이안이 쓰고 있던 지식주입기의 숫자가 100이라는 숫자를 가리켰고, 순간 라이안이 눈을 빛내며 지식주입기를 벗어 뒤로 던져버렸다.

“으윽! 뒤졌어!”

“한 번 싸워보자! 게인!”

라이안이 앞에 있는 붉은 버튼을 강하게 누르자 미약한 진동음을 내며 여기저기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가동되기 시작한 게인이었다.

라이안은 지식주입기를 통해 얻은 지식으로 빠른 손놀림을 이용하여 게인을 가동시켰다.

처음에는 보조 움직임을 위한 동체 현 상태의 점검 표시가 나왔으며 곧 게인의 정면 스크린이 나왔다. 이어서 양옆을 볼 수 있는 스크린이 나왔으며 메인 화면이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오는 메인 화면이 있었으니…….

[general ok (일반사항 완료)]

[autonomic ok (자동화 완료)]

[inspection ok (정밀검사 완료)]

[nerve system ok (신경계 연결 완료)]

라이안은 그 화면을 비로소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렇구나, 게인이라는 이름은 이 메인 작동방식의 철자를 따서 지었군. 재밌는데?”

그때 다급한 챠둠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방어 장갑에 에너지를 공급하십시오. 자칫 부서질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어, 그렇게 보채지 말라고! 이제 다 죽었어!”

라이안은 게인의 전체 에너지 공급을 위해 손잡이를 있는 힘껏 끝까지 밀었고 곧 진동과 함께 게인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gain go!]

부우우웅!

그 소리에 신이 나서 게인을 부실 듯 검으로 내려치고 있던 타이탄들은 게인의 몸체 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해 동요하기 시작했다.

“새…색이 변하다니!”

“서둘러 파괴하라! 뭔가 조짐이 이상하다!”

불안감이 더욱 커진 하이븐 후작이 파이어 기사들을 독려했고 그들은 마저 게인을 파괴하기 위해 검을 내려쳤다.

그러나…….

캉!

카강!

카강!

“헉!”

“이럴 수가!”

“오히려 검을 튕겨 내다니!”

갑자기 견고해진 게인을 보며 놀라고 있을 때 게인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누운 상태로 한쪽에 있던 타이탄을 발로 차버렸다.

쾅!

“크윽!”

콰당!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하이븐 후작이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하는 게인을 목 부분을 내려쳤다.

“이잇! 부서져라!”

파캉!

“헉!”

어느새 게인이 허리에 있던 단검을 꺼내어 하이븐 후작의 검을 막았고 그 검을 빗겨내며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아니, 그것은 일어나기보다 등 뒤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더니 게인의 상체를 띄웠다. 이제부터가 가동된 게인과 타이탄의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부슈우우우.

게인이 일어나자마자 한 기의 타이탄이 수직으로 검을 내려쳐왔다. 그러나 게인은 타이탄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빨리 단검으로 검을 흘려보내며 뒤돌려차기로 공격해 온 타이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쾅!

“크억!”

하이븐 후작이 게인의 놀라운 기동성을 보고는 서둘러 명을 내렸다.

“모두 동시에 공격해라! 빠져나가게 두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이얍!”

“죽어라!”

모두가 게인을 둘러싸고 동시에 공격해 오는 순간, 라이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지식주입기로 인해 게인의 모든 사용지식을 이전받은 라이안이었으니 이제는 게인을 자신의 몸처럼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무서울 게 없어진 것이다.

“너희는 달리는 게 전부지만!”

하이븐 후작과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이 게인을 공격할 찰나! 갑자기 게인이 뒤로 엄청난 점프를 뛰어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억!”

“헉! 이럴 수가!”

“타…타이탄이 날다니!”

“말도 안 돼!”

게인의 몸 곳곳에는 게인이 날아오를 때 몸체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기능이 설치되어 있었으니 그것을 이들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난 나는 것도 가능하지. 후후후.”

라이안은 끝없는 만족감에 한쪽 입 끝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케로틴 성의 모든 병사들과 귀족들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에 눈을 비비며 다시 확인하기 바빴다.

간테츠 백작은 옆에 있던 피에른 남작의 어깨에 한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이보게, 피에른 남작.”

“…네?”

그 역시 너무도 놀란 나머지 대답이 늦어지는 피에른 남작이었다.

“지금 내가 본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저…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날았습니다. 타이탄이 날아올랐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찌 저 무거운 것이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인가…….”

하이븐 후작은 멍하니 있는 타이탄들을 독려했다.

“멍하니 있지 마라! 적은 기껏해야 단검 하나가 전부다! 공격하라!”

“이잇! 빠르기는 하다만! 네가 죽는 것은 변함없다!”

“죽어라! 스피어마스터!”

“이야아!”

그렇게 다시 공격해오는 타이탄들을 보며 나머지 입 끝을 올리며 활짝 웃음 짓는 라이안이었다.

게인은 그대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단검을 공격해오는 타이탄에게 던져 버렸다.

슈아아아악!

터엉!

“크악!”

게인이 던진 단검이 한 타이탄의 가슴에 박혀들었고, 그 때문에 타이탄에 탄 기사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게인의 단검으로 인해 몸이 반으로 절단되어버린 것이다.

하이븐 후작이 이빨을 꽉 깨물러 소리쳤다.

“제길! 이제 적은 무기가 없다! 죽여라!”

“와!”

“와! 죽어라!”

“멍청한 놈! 죽어라! 오늘에서야 너를 죽이는구나!”

“형제들의 원수!”

라이안이 탄 게인은 그 순간 엄청난 빠르기로 타이탄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보는 에드코르 제국의 타이탄들은 라이안을 멍청하다 말하며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점점 가속도가 붙은 게인은 타이탄들을 지나쳤고 지나치며 몇 개의 붉은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만이 게인에게 미처 검을 휘두르지 못하고 발이 미끄러지며 멈추었다.

촤아아아아악!

그런데 지나친 그와 달리 3기의 타이탄들은 그 자리에 죽은 듯 멈추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타이탄들을 보며 하이븐 후작이 소리쳤다.

“어서 피하지 않고……!”

게인이 곧 뒤를 돈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멈추어 있는 그들이 게인에게 등을 내준 것처럼 보였으니 그 얼마나 위태로워 보였겠는가.

그러나 하이븐 후작은 소리치던 것을 멈추며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그그그그.

터덩! 터덩!

터덩! 터덩!

멈추어 있던 타이탄들의 몸이 정확히 세 갈래로 갈라지면서 쓰러져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이븐 후작과 그곳의 반대편에 있는 히매인 왕국의 병사들은 게인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타…타이탄에… 오…오러블레이드라니…….”

“말도 안 돼. 저럴 수가…….”

“어디서 저런 것이…….”

이젠 그 어떤 곳에서도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이미 옆에서 한참 전투중인 타이탄들도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검은색의 쌍둥이 타이탄이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를 했기 때문이다.

라이안은 무사한 2기의 검은색 타이탄을 보고는 다시 혼자 남은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을 보았다.

그러자 라이안의 목소리가 큰 소리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모하다. 살려서 돌려보내줄 터이니 돌아가라.”

하지만 라이안의 말에 아무런 의사표시도 안하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하이븐 후작은 그 순간 자신의 타이탄 안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자신은 혼자 남았고 적들은 3기의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으니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아니지… 한순간에 3기의 타이탄을 베어버린 저 흰색 타이탄조차 이길 방도가 없으니…….’

그때 라핀 후작이 라이안의 말을 듣고는 증폭마법을 사용하며 소리쳤다.

“저자를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 어서 처리해라!”

하지만 라핀 후작의 말에 움직이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바치스 공작도 라핀 후작의 말에 고민했다.

‘라핀 후작의 말에 일리는 있다. 저자를 이대로 보낸다면 나중에 또 다른 위험으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의 주도권은 저 하얀 타이탄이 가지고 있다. 스피어마스터… 과연 저자를 그냥 보낼 것이란 말인가?’

바치스 공작은 현재 자신이 타고 있는 검은색의 타이탄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일반 타이탄에 비해 그 성능이 무척이나 우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는 게인의 움직임은 일반 타이탄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래서 약간의 욕심이 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수준이 아니었으니 비교자체가 안 되었다.

바치스 공작이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라핀 후작은 또 다시 큰 소리로 라이안에게 명령했다.

“무엇하느냐! 당장 끝내지 않고! 어서 저자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아야 한다!”

포로라는 소리에 하이븐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포로로 잡힐 수는 없지…….’

그 순간 게인의 동체가 케로틴 성 쪽을 돌아보았고, 곧 라이안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 재수 없게 생긴 노인네! 조용히 해라. 시끄럽다!”

“뭐…뭣이! 네가 미쳤구나!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내 이 일이 끝이 나거든 너를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권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귀족이 바로 라핀 후작이었다. 후작 위에 있는 자신에게 그런 건방진 말을 한다는 생각을 하자 그것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안은 곧 웃으며 말했다.

“군법? 후훗, 웃기는군. 난 군사도 너의 밑에 있는 사람도 아니다! 지금 내가 너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는가?”

라이안은 게인을 움직여 라핀 후작에게 붉은 빛이 흐르는 검을 들이 밀었다.

“잇!”

라핀 후작은 커다란 오러와 같은 빛이 자신을 향하자 말을 잇지 못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내 친구들이 이곳 히매인 왕국에 없었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서 싸울 이유는 없다! 건방지게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나 또한 한 나라의 왕족이었다! 어디 너 따위가 귀족이랍시고 나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것인가!”

라이안의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놀라기 바빴다.

“헉!”

“스피어마스터가 왕족이라니!”

“어느 나라의 왕족이란 말인가!”

“정말 왕족이란 말인가!”

“어디서 저런 자를 키웠단 말인가!”

라이안의 말을 들은 그의 친구들 역시도 그 말을 듣고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심지어 팔튼조차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라이안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애초에 라이안의 친아버지인 르시엘은 갈리스 행성의 최고 과학자의 신분이면서 왕족 중 하나였다. 정치적인 힘이 원로원들에게 넘어가 왕족은 단지 존재하기만 하고 군림하지 못하는 형태로 변했지만.

그렇다 해도 라이안의 아버지가 왕족의 하나였으니 당연 라이안도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기억들과 지식은 챠둠이 지구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 라이안에게 주입해준 것이었다. 자신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라이안의 말을 들은 라핀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와…왕족이었다니… 혹 내가 실수한 것은 아닌가? 제길! 어느 나라의 왕족이란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국제적인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

라핀 후작이 고개를 숙이고 수많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게인의 동체가 다시 하이븐 후작의 타이탄으로 방향을 바꿨다.

“나는 너를 잡을 생각이 없다! 그만 돌아가라!”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는 않는 법이었다.

하이븐 후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수많은 군사들을 잃은 이상 제국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황제폐하께서 내 목숨을 취할 것이다. 그런 마당에 어딜 간단 말인가? 난 마지막까지 싸우겠다. 제국의 기사로서 죽을 수 있게 해다오!”

하이븐 후작은 자신이 이대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가족들까지 해를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라이안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많은 군사를 잃었다한들 대륙의 마스터급을 쉽게 죽일 리는 없을 텐데…….’

오리닌 황제의 성정을 모르고 있는 라이안이었으니 그러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마친 라이안이 곧 다시 하이븐 후작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초야에 몸을 묻듯 혼자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좋은 것이 아닌가! 어찌 자신의 목숨을 그리 허망하게 버리려고 하는 것인가!”

“후후후, 진정 너라는 인간은 알 수가 없구나. 혹 지금까지의 모든 함정들은 네가 만든 것인가?”

에드코르 제국의 패배의 원인이었던 함정들이 마지막으로 궁금했던 하이븐 후작이었다.

“그렇다. 모두 나의 생각이었다.”

“역시… 그랬었군.”

하이븐 후작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타이탄의 고개를 위로 올려 하늘을 보았다.

‘맑구나, 너무도 맑아… 내가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내 가족들 역시 변을 당하리라.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다면 가족들은 살 수 있을 터…….’

하이분 후작은 두 갈래길 앞에서 어찌할지 고민했다. 죽고자 생각을 하니 갑자기 생의 한 줄기 밧줄을 잡고자 하는 마음도 들었다.

‘새로운 인생이라…….’

라이안은 하이븐 후작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끝까지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곧 하이븐 후작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 들어주겠는가?”

“좋다! 무엇인가?”

“저들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를 따라와 주겠는가?”

하이븐 후작의 말을 들은 팔튼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안 돼! 라이안! 함정일 수도 있어!”

케로틴 성의 병사들 또한 라이안이 어떠한 판단을 내릴지 그 궁금함에 침을 한 모금씩 넘겼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듣는 것조차도 말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따라와 달라고 해서 따라가겠는가. 하지만 역시 라이안은 다른 생각을 했다.

“좋다, 자리를 옮기자. 앞장서라.”

“라이안, 왜 위험한 판단을 하는 것인가!”

팔튼이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소리쳤고 게인이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마, 팔튼. 한 기의 타이탄이라면 이것을 타지 않은 맨몸으로도 이길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하이븐 후작은 뒤돌아 걸어가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라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6기의 타이탄으로도 잡지 못했으니… 저자의 말이 허언은 아니지. 후후.’

쿵쿵쿵쿵.

쿵쿵쿵쿵.

그렇게 하이븐 후작이 탄 타이탄이 먼 숲으로 걸음을 옮겼고, 라이안의 게인이 그 뒤를 따랐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들의 신형이 케로틴 성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숲으로 사라져갔다.

바치스 공작은 모든 일이 끝났다 생각하며 검은색의 타이탄을 이끌고 케로틴 성 안으로 들어갔다. 팔튼 또한 그렇게 성 안으로 들어가는 바치스 공작을 따라갔다.

라이안이 사라진 숲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저 녀석은 어찌 사람을 이렇게 걱정만 시킨단 말인가.’

바치스 공작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라핀 후작이 허둥대며 뛰어왔다.

“공작각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그렇소, 모든 일을 스피어마스터가 처리했으니 내가 다칠 일이 무엇이 있겠소?”

약간 허탈한 표정을 짓는 바치스 공작이었다.

* * *

하이븐 후작은 걸어가던 것을 멈추고 타이탄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타이탄을 만지며 말했다.

“돌아가라.”

하이븐 후작의 말과 동시에 타이탄 뒤에서 하나의 공간이 생겨났고 곧바로 타이탄을 집어삼켰다. 그러한 모습을 본 라이안 역시 게인에서 내려 하이븐 후작의 앞으로 다가갔다.

둘은 그렇게 한참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어리군. 자네는… 정말 신기해. 어찌 그 나이에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지가…….”

“후후, 그건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왜냐면 내 실제 나이는 당신의 2배는 되거든?”

라이안의 말에 순간 눈썹이 꿈틀거리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그리고는 곧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군. 그럼 그렇지. 겉으로만 어린 모습이란 말인가? 후후후. 그것도 대단하군, 대단해. 도대체 어떤 곳에서 자네와 같은 인물을 키웠단 말인가?”

그 말에 볼우물이 패일 정도로 라이안이 환히 웃었다.

“어떤 곳이 아니라 어떤 분들이시지. 나에게는 정말 대단한 두 분의 할아버지가 있거든.”

“아! 그렇군. 큭큭큭, 그들에게도 정말 큰 피해를 겪었었지. 아마도 그들이 계속 우리를 공격하고자 했다면 그들에게 전멸을 당했을지도…….”

라이안이 무슨 말인가 싶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모르고 있나보군. 우리가 타이탄과 함께 노크리 성을 공격하기 이틀 전 두 명의 그랜드마스터급의 노인들이 우리를 공격했지. 우리가 자네를 죽인 것으로 알고 있더군. 아마도 우리가 히매인 왕국에 잠입해서 자네와 싸웠을 때의 소식만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군.”

그제야 라이안은 자신이 함정을 파던 중 느꼈던 익숙한 기운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그랬군. 하긴…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지하까지 오는 진동이 엄청났으니.”

그러한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챠둠은 지상 위에서 뜨끔했다.

‘이런! 잠시 피해 있어야겠군.’

챠둠의 속사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자네와 정식으로 검을 겨루고 싶은데… 어떤가? 이 제안에 동의하는가?”

하이븐 후작은 역시 진정 검사였다. 강한 자와의 결투는 언제나 검사의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라이안은 웃으며 등 뒤의 창을 앞으로 옮겼다. 긍정의 의미였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공격할 준비를 한 채 두 사람은 약간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이븐 후작은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한 치의 틈도 없다. 대단하구나. 역시 그랜드마스터란 말인가?’

라이안 역시도 눈앞의 하이븐 후작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진정 대륙의 효웅이로구나. 진정 검사다.’

하이븐 후작은 이대로 있다가는 자신의 심력만 소비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기려고 싸우는 결투가 아니다. 그렇다면!’

“챠앗!”

생각과 동시에 기합성을 내며 라이안에게 덤벼드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창!

차장!

하이븐 후작의 허리를 가르는 검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막아버리는 라이안이었다. 곧바로 몸을 휘돌며 올려쳤으나 이미 그곳에는 라이안의 잔상만이 남았다.

‘크윽! 엄청난 빠르기다. 나의 검보다 저자의 몸이 더 빠르다니!’

하이븐 후작의 검로는 라이안에게 너무도 선명히 보였다.

‘투박하고 단순하나 검 하나하나에 담긴 힘은 정말 대단하다.’

하이븐 후작은 가끔씩 부딪쳐오는 충격조차 마치 구름을 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것이 그랜드마스터란 말인가? 전혀 움직임을 잡을 수가 없구나. 제길!’

하이븐 후작은 곧 결심하고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가 소리치며 공격했다.

“소드 브레이커!”

라이안은 그 기술이 이전에 에드먼드 후작에게 당했던 기술임을 기억했다.

“청룡일섬!”

꽈광!

투둑툭!

촤아아악!

하이븐 후작의 신형이 뒤로 빠르게 날아가며 바닥에 몇 번 굴렀고 곧 자세를 잡았으나 발이 뒤로 미끄러지는 것은 멈출 수가 없었다.

“크윽!”

하이븐 후작은 검을 쥐고 있는 자신의 떨려오는 팔을 다른 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바르르 떨리는 자신의 검 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이럴 수가! 정확히 검 끝을 갈랐단 말인가!’

라이안의 청룡일섬은 검으로 따졌을 때 발도술과 같은 기술이었다.

단지 다른 것은 창의 뒤쪽 끝을 놓으며 휘두르는 것이었다. 시간상으로 본다면 발도술보다 시간이 걸리는 기술이었으나 얼마나 숙달되었느냐에 따라 그 속도는 천차만별이었다. 청룡일섬에는 그 궤도에서 가속이 붙기 때문이었다.

하이븐 후작은 그제야 더 이상 라이안과 싸워봤자 소용없다 생각했다.

“라이안이라고 했던가?”

“그렇다.”

“대결에 응해줘서 진정 감사하게 생각하네. 고맙네.”

하이븐 후작의 말에 단지 약간의 미소만 짓는 라이안이었다.

“또 다른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아니었나?”

라이안의 물음에 하이븐 후작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시기심도 복수심도 사라진 개운한 표정이었다.

“자네에게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만 난 이미 자네로 인해 너무도 많은 병력의 손실을 보았다네.”

라이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에드코르 제국의 황제폐하께서는 근래에 들어서 더욱 무서워 지셨지. 사실 자네와의 첫 대면 때 잃은 기사들로 인해 황제폐하께서는 에드먼드와 나를 단칼에 죽이려고 하셨네. 하지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어 이 전쟁에서 승리하라 하셨지… 아니, 분명 자네만 없었다면 아주 손쉬운 승리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지금 난 제국으로 돌아간다 하여도 황제폐하의 칼에 목을 내놓아야만 한다네.”

말을 듣고 있던 라이안이 설마 하는 생각으로 물었다.

“그래도 당신은 제국의 마스터급 검사가 아닌가? 그런 당신을 아무리 큰 과실을 범했다고 한들 그리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 같은데…….”

라이안의 물음에 쓴웃음을 짓는 하이븐 후작이었다.

“후후, 몇 년 전이었다면 분명 그러하겠지. 하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황제폐하께서는 더욱 무서워지셨네. 용서란 없을 것이라네. 난 내 한 목숨 어찌 된들 상관이 없지만, 이대로 제국에 돌아간다면 나 혼자만이 아닌 내 식솔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네.”

“아니, 전쟁에 패했다고 그 식솔들까지 죽인단 말인가?”

라이안의 놀라움에 하이븐 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좋지 않은 소문만으로도 한 귀족가의 구족을 멸하신 분이라네.”

“그런……!”

하이븐 후작이 라이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진정 나를 보내주겠는가?”

“어찌하려고 하는 것이지? 돌아간다면 가족까지 위험하다 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하지만 내가 돌아가지 않고 자네가 나를 죽였다고 공표한다면…….”

중간에 말을 끊는 하이븐 후작의 말이었으나 그것을 이해 못할 라이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 작정이오?”

“그대가 진정 날 보내준다면 산속으로 들어가 내 자신을 좀 더 갈고 닦을 생각이라네.”

라이안도 그의 말처럼 자신이 하이븐 후작을 죽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난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소. 그것이 진정 당신의 마음이라면 그리 하도록 하시오. 지금 이 순간 대륙은 당신이 죽은 것으로 알 것이오.”

“고맙군. 그럼…….”

하이븐 후작은 라이안에게 감사의 인사로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라이안도 그것을 보며 몸을 돌리려고 할 때 하이븐 후작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후에 내가 다시 한 번 그대에게 도전한다면 그것을 받아 주겠는가?”

“후훗, 언제든지.”

“후후.”

라이안의 말을 끝으로 하이븐 후작의 신형이 사라져갔다.

‘나로 인해 진정한 효웅이 대륙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는구나.’

하지만 곧 미소 짓는 라이안이었다.

“에이! 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보다 우선 나부터 좋아야 하니까. 후훗.”

그리고는 곧 손을 들어 올려 반지에 말했다.

“야! 챠둠, 이거 도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게인이 돌아온 후, 본체의 곳곳에 나있는 생채기를 보고 내심 속이 쓰린 챠둠이었다. 이는 보통 애니메이션 로봇의 미니어처나 프라모델을 손수 조립하여 고이 간직하는 사람들의 마음과도 같을 것이다.

하늘 위에서 하나의 빛줄기가 내려온다 싶은 순간 게인의 모습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 * *

에드코르 제국의 군대가 히매인 왕국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오리닌 황제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모든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쾅!

“뭐라!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에드코르 제국의 오리닌 황제는 자신이 현재 듣고 있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잇! 지금 당장 군대를 이끌었던 하이븐 후작과 에드먼드 후작을 끌고 오너라! 내 친히 그들의 목을 베고 말 것이다!”

오리닌 황제의 분노한 목소리에 더더욱 할 말이 없는 로빈스공작이었다.

‘이미 전사한 자들을 어찌 데려온단 말인가…….’

“황제폐하, 송구하오나 이미 그들은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나이다.”

“뭣이! 도대체 패배의 원인이 무엇이란 말이냐?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오리닌 황제의 물음에 요르민 공작이 나서서 말했다.

“그것은 신 요르민이 설명하겠습니다.”

“오, 요르민 공작. 그래, 그대가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게. 도대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어찌하여 벌어진 일이란 말인가?”

“전쟁의 가장 큰 패인은 이전에 히매인 왕국에 나타났다던 스피어마스터가 히매인 왕국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스피어마스터라… 그렇군. 이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구려. 하지만 어찌 마스터급 단 한 사람 때문에 전쟁에 패배할 수 있단 말이오?”

“그것은 그 스피어마스터가 일반 마스터급이 아니었기 때문이옵니다.”

“일반 마스터급이 아니라고?”

요르민 공작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미 그랜드마스터에 올라 있었다는 정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오리닌 황제가 놀라며 급히 일어났다.

“뭐…뭐라 했소. 지금? 내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오? 지금 그랜드마스터라고 했소?”

“그렇습니다. 스피어마스터라는 자는 실제 그랜드마스터급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이븐 후작이 타이탄부대를 이끌고 히매인 왕국의 군대를 맹추격하였을 때 그 스피어마스터라는 자가 오러탄을 시전하였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맞고 타이탄이 쓰러질 정도라고 했으니 정보는 분명 사실일 것이옵니다.”

“허… 어찌 몇 천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던 그랜드마스터가 그리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허탈한 듯 다시 황좌에 앉은 오리닌 황제가 탄식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그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이미 10만 이상의 피가 그곳에 흘렀다는 말이로군. 후후후, 이미 준비는 마쳤으니 대륙의 황제가 되는 일만 남은 것인가?’

오리닌 황제가 속으로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요르민 공작이 한 가지 빠뜨린 듯 한마디 하였다.

“황제폐하,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으음? 그래, 말해 보시오?”

“이것을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에드코르 제국의 군대가 노크리 성을 치기 전 어느 두 노인에게서 습격을 받았다고 하옵니다.”

“두 노인? 허허허, 노크리 성에서 노망난 늙은이들이 미쳐서 빠져나왔었나 보군.”

“그것이 아니오라… 그들로 인해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약 10만의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뭐, 뭣이! 지금 단 두 사람에게 10만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고 했소?”

오리닌 황제는 다시 놀라며 눈이 커졌다. 듣는 것마다 이렇게 놀랄 만한 소식밖에 없으니 오늘 일진이 정말 흉하다 생각하는 오리닌 황제였다.

“사실이옵니다, 황제폐하.”

“그것은 또 어찌된 일이란 말이오! 혹 그들이 둘 다 8서클 이상 가는 마법사라도 된단 말이오?”

요르민 공작이 입이 마른지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것은 아니옵고 그들도 둘 다 그랜드마스터급으로 보였다 들었습니다.”

요르민 공작의 말을 들은 오리닌 황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보시오, 공작.”

“네, 황제폐하.”

“혹 그대가 지금 나를 기만하는 것이오?”

오리닌 황제의 말에 요르민 공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어찌 황제폐하를 기만하겠습니까? 절대 아니옵니다.”

“그렇다면 그대도 한번 생각해 보시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그랜드마스터급의 전사들이 3명이나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대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그것은…….”

“그것 보시오. 공작도 믿지 못할 이야기를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한다면 내 어찌 생각할 것이라고 보시오?”

오리닌 황제가 주위를 둘러보자 모든 귀족들이 눈치를 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치 황제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목이 날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요르민 공작이 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황제폐하, 신의 말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믿어 주시옵소서.”

그때 마침 오리닌 황제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의 붉은 수정이 밝아졌고 오리닌 황제가 그 목걸이를 만지며 침음을 삼켰다.

“우선 그것에 대한 사실은 내가 직접 알아볼 것이오. 이만 회의를 마치겠소.”

오리닌 황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전을 벗어났고 귀족들 또한 황제가 나가자 한숨을 쉬며 재빨리 어전을 벗어났다.

전쟁에서 패했으니 목이 날아가도 몇이 날아가리라 생각하였으나 의외로 쉽게 마무리 되어진 상황이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그것은 오리닌 황제의 목표가 발크르스 마왕의 소환마법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 40만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면 소환마법진이 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갖추어졌으니 전쟁에 패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대륙의 황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오리닌 황제가 분노할 이유는 없었다.

오리닌 황제는 황궁의 지하로 이동하며 사악하게 웃었다.

“후후후, 마왕님께서 나를 칭찬하고자 부르는 모양이구나. 이제 얼마 뒤면 발크르스 마왕님이 현신하실 것이며 이 대륙은 내 것이 된다. 큭큭큭.”

오리닌 황제는 앞으로 있을 상황을 상상하며 희열에 빠져들었다.

오리닌 황제는 그 길로 시비들을 거느리고 지하로 내려갔고, 어느 정도 내려가자 시비들은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화를 낼 법도 하거늘 이상하게도 오리닌 황제는 당연한 듯 혼자 계단을 내려갔다. 이러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님을 말해주는 모습들이었다.

오리닌 황제가 계단을 다 내려가자 넓은 공간이 자리했으며 그것에 하나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이 보였다.

양쪽으로는 두 명의 처녀가 나신으로 매달려 있었고 문 앞에는 건장한 남자들 4명이 오리닌 황제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오르닌 황제는 그들이 말 한마디 못하고 있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그 누구도 몰라야 했다. 그래서 글조차 모르는 노예들을 사들여 말을 못하도록 혀를 잘랐던 것이다. 정말 치밀하고 잔인한 성품이었다.

“잘 준비되어있군. 문을 열고 줄을 당겨 그것들을 안으로 옮겨라.”

오리닌 황제가 명하자 두 명이 거대한 황금 문을 열었고 양 쪽에 있던 다른 두 사람이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매달려 있던 처녀들이 줄에 매달린 채 안쪽으로 이동했다.

계속해서 줄을 잡아당기던 두 건장한 체격의 청년들은 줄 끝에 무엇인가 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줄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오리닌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었다.

그들 또한 절대로 안쪽에 있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장치를 만든 것이었다.

오리닌 황제는 발크르스 마왕을 영접하기 위한 이 시설물을 만들면서도 이것을 만든 장인들을 모두 죽여 이곳에 그들의 피를 뿌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행하는 것이 대륙에 퍼진다면 에드코르 제국은 모든 나라에 고립될 것이며 동시에 침략을 받을 것임을 알았기에 철저에 또다시 철저함을 더했다.

오리닌 황제가 안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청년이 문을 닫았다.

오리닌 황제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걸었고 한참을 걷자 양쪽에 매달려 있는 두 명의 처녀를 볼 수 있었다.

그 처녀들은 잠을 자고 있다가 이곳으로 자신들의 몸이 옮겨지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고 오리닌 황제를 보며 꿈틀거렸다.

입에 재갈이 물려져 있었기에 말은 못하고 흐느끼기만 했다. 뭐라고 말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살려달라는 말이리라.

이 두 명의 처녀는 황궁에서 나온 귀족에게서 신관의 소질이 보인다는 말을 듣고 이곳에 오게 된 참이었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것이 크게 기뻐하며 따라갈 것을 승낙하고는 가족들에게는 말도 없이 귀족을 따라 말에 올랐다.

귀족의 말대로라면 신관의 시험을 받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며 해가 지기 전까지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신관의 자질을 인정받고 신관이 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이 말에 넘어갔던 것이다.

신관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신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에드코르 제국의 국민들은 대부분 주신인 라피네신을 믿고 있었다.

매달 집회를 열어 라피네신을 찬양하였고 그러던 도중 신력을 받아들여 신관이 되는 경우가 간혹 생기고는 하였다.

신관이 되면 재화가 따르고 가정에 아픈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라피네신의 축복이었으며 혹 아픈 사람이 생기더라도 신관이 된 사람이 신력으로 치료를 해주면 되니 그보다 축하할 일이 없었다.

물론 평민은 신관의 신력을 받아 치료를 받으려면 전 재산을 털어도 부족했다. 하지만 가족 중 한 사람이 신관이 된다면 아플 일도 없었으며 재산이 늘어가는 것이 당연했다. 건강이 상했을 때 들어가는 돈이란 천금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손수 마차까지 태워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 그 또한 얼마나 편하게 생각 했겠는가?

하지만 황궁에 들어서자 자신들은 마왕의 제물이 될 처지가 되어 있었으니 그녀들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희생된 처녀들의 수는 숫자로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로 인해 에드코르 제국의 수도에는 좋지 않은 소문 또한 돌았으니…….

오리닌 황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처녀에게 다가가 단검을 꺼냈다.

어둠밖에 없는 이곳에서도 그 날카로운 눈빛은 빛을 발했고 처녀는 사시나무 떨듯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우우! 우우!”

처녀는 단검을 보고는 재갈이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렀다.

오리닌 황제가 처녀의 등 뒤에 있는 줄을 잡아당기자 매달려 있던 처녀의 발이 땅에 닿을 듯 내려왔다.

“마계공작이신 발크르스 마왕님의 소환 재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크그극.”

“우우!”

스윽!

오리닌 황제는 날카로운 단검으로 처녀의 손목을 깊이 그었다.

처녀는 손목이 잘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절망에 빠져들었다. 이미 나신인 그녀의 팔을 통해 얼굴로 피가 흘렀다. 그 피는 얼굴에서 볼록 튀어나온 가슴으로, 그리고 발끝으로 흘러 땅에 떨어졌다.

“크그그극, 이것은 할수록 더욱 짜릿함을 느끼게 해주는군.”

손목이 그어진 처녀의 눈빛은 점점 몽롱하게 변해갔다. 아마도 곧 정신을 잃으리라.

맞은편에서 그러한 장면을 모두 보고 있던 처녀는 오리닌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자 온몸에서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이미 그녀의 온몸은 오소소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곧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우우우! 우우우우!”

거칠게 몸을 흔들어보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크흐흐, 그렇지. 모두가 너와 같은 반응이었느니라. 사실 이건 처음 당하는 사람이 차라리 행복하지… 크흐흐.”

오리닌 황제가 한 걸음씩 걸어올 때마다 처녀의 몸은 그 발자국 소리에 맞추듯 몸을 떨리게 하는 강도를 더했다.

처녀의 몸에 다다른 오리닌 황제는 이전에 했듯이 처녀의 등 뒤에 있는 줄을 잡아 당겼고 그녀의 몸은 발이 땅에 닿을 정도로 내려왔다.

오리닌 황제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호오! 이 정도로 미인이었다니. 너의 미모는 진정 성녀가 된다 하여도 부족함이 없구나.”

오리닌 황제의 손길은 처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처녀는 오리닌 황제의 손길에서 꼭 뱀이 자신의 몸을 기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몸을 바르르 떨었다.

오리닌 황제의 손은 처녀의 얼굴을 지나 목을 스쳐갔고 가슴에 이르자 이내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갑작스럽게 그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우흑!”

“정말 탐스럽구나. 재물로 쓰기에는 아까워. 너무도 아까워…….”

오리닌 황제의 손은 다른 쪽 가슴으로 옮겨갔고 그 가슴을 부드럽게 만졌다.

“흠… 정말 죽이기 아깝구나. 다른 재물로 바꾸고 너를 내 후궁으로 앉히고 싶은 욕망이 생길 정도로구나. 어떻게 할까?”

오리닌 황제는 처녀의 눈이 갑자기 절망에서 희망을 갈구하는 듯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만지던 가슴을 다시 움켜잡았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을 해서 그런지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지 않았다.

“흠… 왜 소리를 내지 않느냐? 그것이 지금 나에게 희열을 주어 너를 살려주게 만드는 원동력이었거늘!”

처녀는 겨우 잡은 희망이 하늘로 올라가며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또다시 처녀의 가슴을 움켜잡는 오리닌 황제는 처녀의 눈을 바라보았고 처녀는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고는 소리는 내었다.

“우흐윽!”

오리닌 황제는 눈앞의 처녀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것이 아니야. 쯧쯧쯧. 너는 일생의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마는구나.”

처녀의 눈은 더 잘할 수 있다는 듯 커졌고 재갈이 물린 입으로 소리를 질렀다.

“우우! 우우우!”

하지만 어느새 오리닌 황제의 손에 칼이 들렸는지 재빠르게 처녀의 손목을 스쳐지나갔다.

그 따끔한 느낌에 또다시 절망을 느끼는 처녀였다. 그런 절망스러운 그녀의 눈길은 자신보다 먼저 손목이 그인 맞은편의 처녀에게 고정되었다.

맞은편의 처녀는 이미 기절한 듯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배가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죽으리라.

그녀는 혼미해지는 정신으로 마지막 생각을 했다.

‘신관이 되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거늘…….’

그녀의 눈에서 마지막 눈물이 흘렀고 그녀는 그렇게 정신을 잃어갔다.

오리닌 황제는 양쪽 처녀의 발목을 그어 더욱 빠른 속도로 피가 모이게 만들었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백옥 같은 그녀들의 나신은 어두운 색으로 변해갔다. 온몸의 모든 피가 빠져나간 것이다.

그녀들의 피는 땅에 깊이 새겨져 있는 마법진으로 흘러들어갔고 오리닌 황제는 그 중앙에 서서 룬어로 주문을 외웠다.

그 주문의 영창은 상당히 길게 이어졌고 오리닌 황제의 입에서 소리가 멈춘 순간!

파앗!

붉은 피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붉은 빛을 발했고 피들은 수중기로 화해 한 곳으로 뭉쳤다. 그리고 나타나는 하나의 모습이 있었으니, 발크르스 마왕이었다.

“이 멍청한 놈! 내 지금 당장 네놈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음을 네가 아느냐!”

칭찬을 받을 줄로 알고 있던 오리닌 황제는 발크르스 마왕의 호통에 기겁했다.

“헉! 바, 발크르스 마왕이시어. 무…무슨 문제가 있는지요?”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오리닌 황제는 진정 모르고 있었다. 왜 발크르스 마왕이 저토록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책망하는지…….

“소환마법진을 어찌 만들었기에 그것이 파괴된단 말이냐! 이 아둔한 놈!”

“헉!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마법진의 결계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소환마법진이 파괴되다니요?”

“크윽! 내가 너만을 믿고 일을 맡긴 것이 실수였다.”

오리닌 황제는 발크르스 마왕의 말을 듣고서는 급함을 느꼈다.

“지금 당장 조취를 취하겠습니다. 마왕이시어,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발크르스 마왕은 무서운 눈빛으로 오리닌 황제를 바라보았고 오리닌 황제는 무엇인가 시선이 느껴지는 듯 납작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발크르스 마왕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내 너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

오리닌 황제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공한 듯 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실수 없이 일을 행하겠나이다.”

“너만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다. 내 휘하에 있는 똑똑한 놈들 다섯을 보내줄 것이니 지금 내가 각인시키는 마법진을 확대하여 땅에 각인시켜라.”

발크르스 마왕의 손가락이 보이는 순간 오리닌 황제가 엎드려 있는 마법진 앞에 또 하나의 작은 마법진이 새겨졌다.

“헉! 마왕이시어,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휘하에 있는 마족을 소환할 수 있는 마법진이다. 그것을 각각 다섯 개를 그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환 재물로 3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각각 100명씩 소비해야 할 것이다.”

“헉! 각각 100명씩 말이옵니까?”

다섯 개를 그려야 한다 했으니 3살 미만의 어린아이를 500명이나 재물로 써야 한단 말이었다.

“내 이들에게 너의 명을 필히 따르라 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이번 일은 문제없이 성사시켜야 한다. 알겠느냐!?”

“그럼 또 다시 소환마법진을 만들어 10만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인지요?”

너무 많은 병력을 손실한 결과 인두루인 제국에서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또 다시 전쟁을 벌이려 한다면 분명 인두루인 제국이 뒤를 칠 것임을 알기에 그것이 불가능했다.

“아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요?”

“바로 혼돈의 신녀를 찾는 것이다. 혼돈의 신녀를 찾아 제물로 사용한다면 그때야말로 중간계와 마계를 막고 있는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고작 신녀 하나로 그것이 가능하옵니까?”

“크그그, 넌 알아야 할 것이다. 혼돈이란 모든 것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이 혼돈이란 것을 알아라. 혼돈이란 있으되 없는 것이며 세상의 균형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혼돈의 신녀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혼돈의 신녀를 찾을 수 있는 방도가 있으신지요?”

오리닌 황제의 물음에 발크르스 마왕의 코에서 한차례 불이 뿜어지는 듯하더니 무겁게 말했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내 휘하에 있는 마족을 보내주는 것이 아니냐!”

“아……!”

“그들이 혼돈의 신녀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왕님의 분부대로 빠른 시간 안에 재물을 모으겠습니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너의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발크르스 마왕의 말에 오리닌 황제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며…명심하겠나이다. 마왕이시어.”

그 말을 끝으로 피의 수중기를 빠르게 사라져갔다.

그제야 오리닌 황제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할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소환마법진이 파괴되었단 말인가?”

오리닌 황제는 재물을 모음과 동시에 이번 전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확실히 알아야겠다고 생각을 굳혔다.

특히 히매인 왕국의 스피어마스터에 대하여 더욱 면밀히 조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피어마스터라… 죽여야겠군. 하지만 그랜드마스터급의 전사를 어찌 죽인단 말인가?”

고민에 빠져있던 오리닌 황제는 곧 뭔가 떠오른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눈이 커졌다.

“아! 크하하, 그렇구나. 마족들을 이용한다면 그깟 그랜드마스터쯤이야!”

“크하하하하.”

오리닌 황제의 웃음소리는 어둡고 음침한 지하 밀실에서 한참을 울려 퍼졌다.

* * *

두 명의 노인은 며칠 동안 초원을 가르며 산을 넘었다.

복수심과 분노가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피로 따위는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 복수심에 대한 분노가 그들의 좋은 머리를 돌과도 같이 만들었으니…….

빛과도 같은 둥근 두 물체가 하늘에서 멈추었다. 그 빛으로 이루어진 두 물체는 곧 빛이 사라지며 사람의 형상을 나타냈다.

그들은 바로 에드코르 제국의 군사들을 때려잡다가 에드코르 제국의 황성으로 가고자 했던 갈천혁과 혁마소였다.

“앞에 마을이 있군.”

“크흐흐, 드디어 에드코르인가?”

“상당히 멀군. 우리가 4일 동안이나 올 정도라니.”

“우선 마을로 내려가서 황성이 어딘지 물어보세.”

“그리 하세나.”

갈천혁과 혁마소는 땅으로 내려오고는 숲에서 마을로 걸어 들어갔다. 마을로 걸어가자 상당한 높이의 목책이 앞을 가렸다.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손쉽게 뛰어넘으려고 하던 그들의 귀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니! 당신들 미쳤소! 이보게 어서 문을 열게나! 아래 사람이 있어!”

경비를 보던 사람 중 한 사람이 급히 소리쳐 말했다.

“뭐라고! 사람이 있다고!”

그 주위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서둘러 사람이 있음을 확인 하고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주위에 몬스터가 있지는 않은지 예리하게 훑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드드드드득.

그그그그그.

굵직한 나무 갈리는 소리와 나무가 땅에 끌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갈천혁과 혁마소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열려진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문에 들어서자 커다란 나무문은 금방 닫혔다.

혁마소는 그렇게 자신 앞에 오던 사람 중 자신들에게 미쳤냐고 말했던 자에게 손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은 갈천혁에 의해 저지당했다.

“뭐냐?”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네. 무엇을 알고 그랬겠는가? 게다가 병사들도 아닌 단지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들로만 보이지 않은가.”

“크흠.”

갈천혁과 혁마소에게 다가온 몇 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아니, 노인 분들이 어찌하여 몬스터의 초원에서 걸어온단 말이오?”

“여기가 에드코르가 맞느냐?”

“네? 에드코르요?”

갈천혁의 물음에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했던 청년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는 듯 놀랐다. 갈천혁은 그들의 반응에서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의 음성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니냐?”

“아니, 어디 아프십니까? 여기가 어딘 줄 아시고 지금 에드코르 제국을 찾는단 말입니까?”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며 술렁거렸다.

혁마소가 갈천혁에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잘못 온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느냐! 분명 그녀석이…….”

그랬다. 그들은 갈천혁이 잡은 병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만 잡아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혁마소는 어이가 없었다. 그들은 제갈공명보다도 머리가 좋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네놈도 죽을 때가 다 되었나 보구나. 쯧쯧쯧.”

갈천혁은 무슨 반문이라도 할만 했지만 굳어진 눈썹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이토록 멍청한 행동을 하다니…….’

급히 고개를 처든 갈천혁이 눈앞의 청년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그럼, 지금 이곳이 어디란 말이냐?”

“헉! 무, 무슨 노인네 힘이…….”

“빨리 말하거라!”

“여, 여긴 동맹국가중 하나인 바로이탄 왕국이오. 이 손 좀 놓으시오!”

갈천혁은 허탈한 듯 청년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말했다.

“제길, 잘못 왔구나.”

“헐!”

혁마소의 탄식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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