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친구 따라 전쟁터에 가다
타미르안의 레어에서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나 이제 밖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라이안의 이러한 말에 챠둠이 정색하며 말했다.
“갑자기 어딜 가신단 말입니까?”
“친구들이 걱정이 되어서 말이지… 그들도 내가 죽은 줄 알고 상심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챠둠. 이제 마법도 배웠고, 정령술까지 사용할 수 있잖아. 그리고 강식장갑도 최고치까지 사용하는 법을 알았고… 다시는 다치는 일이 없을 거야.”
“그렇다면 제가 드리는 옷을 입고 가주시기 바랍니다.”
“옷? 뭐 좋은 거 만들었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워프!”
챠둠의 말에 갈색 옷이 한 벌 나타났다. 그 옷은 미칼투 대륙에서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아주 흡사하게 생긴 상등급의 여행복이었다.
“호오? 상당히 괜찮은데? 이 옷도 무슨 기능 같은 것이 있는 거야?”
“장갑과 신발은 신금속 소재로 만들어서 검강도 막고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강도를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옷의 단추 하나하나에 전부 주인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추적장치가 부착되어 있지요.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어? 이거 반지네? 오, 멋있게 생겼는데? 심플하고.”
전체적으로 은색을 띠고 있었으나 부분마다 아주 약간의 색이 들어간 반지였다.
“그것은 저와 통신이 가능한 반지로 어떠한 정보도 홀로그램으로 전송시켜 드릴 수 있는 물건입니다. 통신의 신호를 최대치로 잡아 놓았기 때문에 주인님께서 이 대륙 어디에 있어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챠둠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짓는 라이안이었다.
“이래서는 떠나도 떠나는 것이 아니잖아…….”
타미르안도 라이안에게 무엇인가를 전해 주었다.
“이것을 받게나.”
“어? 구슬… 같은데?”
“위험한 순간에 이것을 꽉 눌러 깨트리면 한순간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스크롤 같은 것이라네.”
“스크롤은 종이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어험, 난 위대한 골드드래곤이라네. 드래곤이 무엇인들 못 만들겠는가?”
“하긴, 드래곤이 능력이 좋기는 한 것 같아. 어쨌든 걱정해줘서 고마워. 잘 간직하고 있을게.”
어머니를 바라보며 라이안은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
“엄마도 재밌는 마법 많이 배우세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부디 다치지 않게 몸조심 하거라.”
“네, 알았어요. 엄마.”
그러던 라이안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챠둠을 바라보았다.
“아차! 챠둠? 할아버지들 하고는 아직 연락이 안 된 거야?”
“크흠, 아직 연락이 안 되었습니다. 며칠 뒤 그쪽으로 가서 다시 연락을 넣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챠둠의 행동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낀 라이안이 챠둠을 째려보며 물었다.
“너 혹시 거짓말 하는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쳇! 뭔가 숨기기는 숨기는 것 같은데… 뭐 우선 넘어가지.”
그러한 말과 함께 레어 밖으로 나서는 라이안이었다. 하지만 이내 도로 들어온 라이안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몰라… 히잉.”
그 말에 모두가 휘청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무작정 나간다 했더니. 내가 대륙의 지도를 챙겨주겠네.”
타미르안의 말에 챠둠이 나서며 막았다.
“주인님, 지도보다 주인님의 반지 둘레에 색이 다른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 파란 부분을 누르시면 위성에서 전송되는 지도를 보실 수 있습니다.”
“아, 그래?”
그 말을 들은 라이안이 손을 들어서 반지의 파란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하나의 둥근 행성이 나왔다. 그것이 바로 미칼투 대륙이었다.
“이거 너무 크잖아?”
“그 홀로그램에도 터치기능이 있습니다. 홀로그램에 보시면 현재 위치가 파란색으로 나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시고자 하는 부분을 홀로그램에 대륙공통어로 적으시면 그 부분이 확대되어 나타나게 됩니다.”
챠둠의 말에 따라 라이안이 원형의 홀로그램에 손가락으로 스피린 영지라고 쓰자 지금 있는 곳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의 행로가 나타났다.
“와! 이거 무척이나 편한데? 지구의 네비게이션이랑 똑같은 것 같아. 그런데… 이거 너무 먼 것 같은데…….”
역시나라고 생각한 타미르안이 나서서 말했다.
“그곳까지는 내가 텔레포트로 보내주겠네.”
“앗! 타미르안, 그래 주겠어?”
“어려운 일도 아니라네.”
“하하하, 챠둠보고 데려다 달라고 해도 금방이겠지만 그래도 혼자 가는 게 편하거든.”
“좌표를 히매인 왕국의 스피린 영지로 맞추었으니… 자, 시작하겠네. 텔레포트!”
타미르안의 말과 함께 라이안의 몸이 밝은 빛에 둘러싸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져갔다.
“흠, 이제 라이안도 없으니 우린 하던 것이나 마저 해보세.”
“아! 그러면 되겠군. 이곳에 타이탄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었지? 나도 내가 항상 구상하던 로봇이 있었지.”
“어떤가? 내가 만든 타이탄과 자네가 말한 로봇이라는 것을 만들어 맞붙여 보는 것이?”
“그거 재미있겠군.”
인간세상에서는 드래곤이 만든 타이탄이라면 무적의 최강병기였지만 역시나 이들에게는 작은 장난감놀이에 불과했다.
* * *
스피린 영지의 외곽. 밝은 빛과 함께 나타난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의 잘생긴 소년이 있었으니, 바로 라이안이었다.
“에구, 아직은 어지럽군.”
텔레포트가 익숙하지 않은 듯 살짝 휘청거리다가 자세를 잡는 라이안이었다. 라이안은 우선 여관이나 술집을 이용해 친구들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시각. 헤인드 일행은 바치스 공작가의 저택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팔튼이 어제 떠났어…….”
“어떻게 하지요? 저대로 팔튼 오빠만 전쟁터에 보내야 하는 것인가요?”
디로안이 에나의 말을 받으며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팔튼을 도울 길이 없잖아. 우리가 검사이기는 하지만 기껏해야 하급 용병일 뿐인데…….”
“그렇지요. 팔튼은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이고 우리는 하급 용병인 것이지요.”
라드이라의 마지막 말에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능력만 있다면… 크윽!”
“이럴 것이 아니라 최대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어떻겠나?”
“디로안 오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니요?”
“팔튼을 가까이에서 도와주지는 못하지만 먼 곳에서는 도와줄 수 있잖아.”
“어떻게 하려고?”
헤인드의 물음에 디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쟁으로 인해 병사를 뽑는다고 하는군. 난 거기에 지원할 것이네.”
“병사지원!”
“다른 사람들은 각자 갈 길을 가게나. 난 병사에 지원하겠네.”
그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디로안이었다.
턱!
드로안이 나가려고 하자 헤인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봐, 우린 다 같은 친구인데 자네 혼자 어딜 가려고? 같이 가자고.”
“자네…….”
그것을 바라보며 에나가 심통을 부렸다.
“칫! 하여간 자기들만 멋있는 척을 해요. 솔직히 저하고 라드이라가 병사지원에 더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시나요? 나이에 비하면 저나 라드이라는 어딜 가도 비싸게 팔린단 말이에요!”
“에나, 너…….”
“그래요, 같이 가야죠. 우린 친구라면서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시선에서 정을 느끼는 그들이었다.
헤인드 일행은 그 길로 바치스 공작에게 떠남을 알렸고, 바로 저택을 나섰다. 바치스 공작도 그들을 말릴 수 없었다. 나라를 위하여 싸운다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단 말인가.
바치스 공작의 저택에서 약 10여 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한 병사가 소리치고 있었다.
“우리 히매인 왕국을 간악한 에드코르에게서 구하고자 하는 용감한 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시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우리의 나라를 적국에게서 구해냅시다!”
병사는 계속해서 떠들고 있었고 사람들은 많이 모여 있었지만 선뜻 지원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전쟁병사로 지원하게 된다면 돈은 많이 받을 수 있었지만 죽으면 그깟 돈이 다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 모두의 생각이었다.
“전쟁병사에 지원하시오! 저 치졸한 에드코르에게서 우리나라를 구해야 하지 않겠소?”
근처를 서성이던 라이안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을 보고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곁에 선 중년의 남자에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저기… 아저씨,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에잉? 이 사람이 어디 산에서 왔수? 전쟁이 난 것도 모르나 보네?”
“전쟁이요?”
“허허,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구먼. 지금 에드코르 제국에서 우리 히매인 왕국을 침략하려고 한단 말이오! 귀 좀 열고 다니시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라이안이 답답하다는 듯 중년의 남자는 라이안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피… 왜 화를 내고 그러는지…….”
라이안이 투덜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소리치고 있던 병사 쪽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지원하겠소!”
웅성웅성.
웅성웅성.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
“쯧쯧쯧, 또 돈에 눈이 먼 용병들이로군.”
“누가 아니래요? 나가봐야 어차피 살아 돌아오지도 못할 것을…….”
“또 멀쩡한 사람이 죽으러 가는군.”
라이안은 주위의 그러한 숙덕거림을 들으며 고개를 내밀어 중앙을 바라보았다.
‘앗! 헤인드! 어? 에나하고 디로안, 그리고 라드이라까지 다 있잖아?’
반가움에 소리치려고 하던 라이안이 곧 그 손을 내렸다.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다.
라이안은 근처 골목으로 가서 축골공으로 골격을 변형시키고 역용술로 20대 중반의 얼굴로 바꾸었다. 그러자 조금 더 건장하고 힘 있어 보이는 청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그렇게 모습을 바꾸고는 병사에게서 지원신청을 하고 있는 헤인드에게 다가갔다.
“나도 지원하겠소.”
라이안의 그 말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또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헤인드 일행도 모두 그를 보았다.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그것을 못 알아보는 것에 라이안은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모른 척 지원신청서에 서명을 했다.
“지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나를 따라오시오!”
총 30여 명의 사람들이 병사를 따라서 이동했고 마차를 탔다. 운 좋게도 라이안과 헤인드 일행은 같은 마차에 탈 수 있었다.
라이안이 먼저 헤인드에게 다가가며 인사했다.
“아까 나랑 같이 서명하던 사람이구만? 안녕하시오.”
“아, 아까 그 사람이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라디안이오.”
“라디안?”
“으음?”
헤인드 일행이 그 이름을 듣고서 모두 라이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니, 뭐가 잘못되었소?”
그때서야 비슷한 이름일 뿐이란 것을 안 헤인드가 말했다.
“아, 아니오. 그냥… 우리 친구와 이름이 조금 비슷해서 놀랐을 뿐이오. 난 헤인드라고 하오. 잘 부탁하오. 그런데 라디안, 당신도 돈 때문에 지원한 것이오?”
“하하하, 뭐 살기가 힘들어지다보니 그렇지요. 헤인드 당신은 왜 전쟁병사에 지원한 것이오?”
“후후후, 난 친구를 돕기 위해 가는 것이라오.”
“친구? 친구가 전쟁에 참가하는 것이오?”
“그렇지요. 후후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아마 웃을지도 모르겠소.”
“무슨 말인지 우선 들어나 봅시다. 마차가 도착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으니.”
“하하하, 그렇겠지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요. 그럼 말하리다…….”
“사실 믿을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친구는 귀족이라오.”
평민의 친구가 귀족이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 같은 경우에는 미친놈이라고 했을 것이나 라이안이 가만히 듣고 있자 헤인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상당히 높은 직책을 맡았소. 가장 먼저 죽을지 모르는… 그 소식을 들은 내 친구는 며칠 전 그곳으로 길을 떠났지요. 하지만 우린 그를 그렇게 혼자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소. 그래서 멀리서나마 그를 돕고자 이렇게 전쟁병사에 지원하게 된 것이라오.”
그 말을 다 들은 라이안이 말했다.
“상당히 절친한 친구였나 보구려.”
“그렇지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소중한 친구이지요.”
헤인드에게서 그런 말을 듣자 잠시 코끝이 시큼해진 라이안이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 눈물을 참았다.
‘팔튼이 곤경에 처했구나… 그런데도 난 이들을 놔두고 그렇게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니…….’
자신만 마음 편하게 있었던 것이 미안해지는 라이안이었다.
그는 눈을 다른 곳에 돌리다가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과 같은 색의 진한 파란색의 창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보았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런 색의 창을 들고 있는 것이오?”
헤인드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얼마 전 나치키 영지에서 스피어 마스터가 나타났었지요. 그것을 따라한 것이라오.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것이겠지요.”
“아, 그렇군요.”
“라디안, 당신도 같은 색의 창을 쓰는 것이 아니오? 당신도 같은 이유에서 쓰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구려?”
“아… 아! 맞지요. 저도 그런 이유이지요. 하…하하.”
다행히 창을 천으로 대충 말아놓아서 들키지 않았지만 아차 실수로 창 때문에 들킬 뻔했다.
라이안의 창은 다른 창들과 다르게 날이 일반 창보다 몇 배는 길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헤인드 일행이었으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이후 나무를 갈아서 물을 먹인 후 내공을 사용하여 날이 있는 부분에 붙이고 파이어마법으로 그것을 굳혔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한 작업을 하고 지나가다가 파란색 꽃을 따서 다 굳은 나무의 부분에 문지르자 본래의 창 색과 비슷하게 변했다. 어느 정도 휘둘러서는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검강을 사용한다면 가루로 변하여 날아갈 것이지만.
그렇게 이동하던 그들은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노크리 성에 마차가 도착했다. 노크리 성 안쪽으로 당도하자 한 병사가 크게 소리쳤다.
“모두 마차에서 내리시오! 각자 자신 있는 무기를 선택하시오. 본래 자신이 들고 있는 무기를 사용해도 좋고 무기가 없는 자들은 저쪽에 무기가 있으니 각자 자신의 무기를 고르고 정해진 자리로 서기 바라오!”
미리 준비해 둔 듯 한쪽에 검과 창이 정돈되어 있었다.
10여 명 정도가 그쪽으로 가서 각자의 무기를 골랐다. 그것을 확인한 병사가 다시 소리쳤다.
“검을 고른 자는 오른쪽 창을 고른 자는 왼쪽에 서시오. 그리고 뭔가 특별한 특기나 능력이 있는 자는 나에게 말하시오!”
그 말을 듣고 에나와 라드이라가 앞으로 나섰다. 에나는 앞으로 나서며 헤인드와 디로안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빠들, 무사해야 해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너나 조심하렴.”
에나와 라드이라가 다가오자 병사가 물었다.
“특기사항을 말하시오.”
“전 3서클 마스터에요.”
“전 중급신관입니다.”
“헉! 마법사님과 신관님이셨군요. 여기 이쪽으로 오시지요.”
역시나 대우가 다른 마법사와 신관이었다. 실제로 헤인드와 디로안은 4급 용병이지만 에나와 라드이라는 2급 용병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그만큼 마법사와 신관을 중요시 하는 점이 많았던 것이다. 에나의 나이로 3서클 마스터라는 것도 대단한 경지였다.
그렇게 각자의 소임이 정해지자 자리배치가 이루어졌다. 일부러 헤인드와 디로안의 곁에 찰싹 달라 붙어있던 라이안은 그들과 같은 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라이안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고 하다가 왠지 처음에 속인 것이 쑥스러워서 이대로 있기로 했다.
그들은 왼쪽 성벽의 외곽에서 보초를 섰다. 이날따라 바람이 냉기를 품고 불어 닥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혔다.
“히야, 이거 날씨 한번 서늘하구만.”
“이제 곧 겨울이 올 테니 당연하지.”
헤인드와 디로안은 서로 춥다며 바들바들 떨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창대를 매고 있는 라이안을 쳐다보았다.
“라디안, 자네는 전혀 춥지 않은 것 같군.”
“하하하, 난 원래 추운 것을 좋아한다네.”
“별 이상한 사람도 다 있군.”
“그나저나 팔튼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글쎄…….”
* * *
그 시간 팔튼은 아버지인 와이파른 백작과 인상을 찡그리며 정보로 들어온 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아버님,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삼일 뒤에 에드코르 제국의 대군이 이곳에 당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구나. 그 숫자가 60만에 이른다고 하니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야.”
“그렇다면 지금 한참 추워지고 있는 날씨를 방패삼아 최대한 버텨야겠군요.”
“그렇기는 하다만 보고에 따르면 대군을 이끄는 자들이 에드먼드 후작과 하이븐 후작이라고 하던데 그들은 마스터급의 검사가 아닌가…….”
“그것을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당도한다면 그들에게 일기토를 신청하겠습니다.”
“일기토?!”
“아들아, 내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그들은 소드 마스터란 말이다. 우리 군의 누가 저들과 일기토를 한단 말이냐?”
와이파른 백작의 말에 팔튼이 자신의 아버지의 눈을 자신 있게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나갈 것입니다.”
“아니 네가?”
“그렇습니다.”
“크흠, 팔튼아 잘 듣거라. 네가 현재 우리 히매인 왕국에서 천재검사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런 것을 믿고서 마스터급의 검사를 상대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검의 끝을 바라보는 자들이란 말이다.”
“검의 끝이라… 마스터급이라고 해서 검의 끝을 보았다는 것은 아버님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뭐가 틀렸단 말이냐?”
와이파른 백작의 말을 끝으로 팔튼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면서 검을 뽑았다.
“전 제 친구로부터 진정한 검에는 끝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검의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타앗!”
부우우우우웅!
“헉! 오, 오러…블레이드?!”
“그렇습니다. 오러블레이드입니다.”
“정녕 네가 소드 마스터에 올랐단 말이냐? 이, 이렇게 기쁠 수가!”
“예비기사의 여행에서 아주 소중한 친구를 만났지요. 그에게서 전수 받은 능력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습니다. 저는 반드시 저들 중에서 하나라도 죽여야만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팔튼은 알고 있었다. 이쪽에서 일기토를 신청한다면 반드시 그들 중 한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반드시 라이안의 복수에 한걸음 나아가고자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
“자신 있느냐?”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흠… 그래, 너를 믿어 보겠다. 부디 승리하길 바란다.”
와이파른 백작은 자신의 아들이 마스터급의 검사가 되었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적군이 바로 앞까지 와 있는 이때 언제까지 감상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적군이 오기 전, 라이안은 보초를 서며 지루함에 하품을 하고 있었다.
“아함, 도대체가 적들은 언제 오는 거야?”
그 말을 들은 헤인드와 디로안이 황당한 얼굴로 라이안을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 그렇게 빨리 죽고 싶은가?”
“그러게 말이네. 난 벌써 긴장해서 안 그래도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손이 더 꽁꽁 얼어서 떨리고 있는데.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는지 원.”
그렇게 라이안을 보며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라이안의 눈에서 귀광이 번쩍거렸다. 평소 때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아닌 굳은 목소리로 라이안이 말했다.
“오는군.”
“응? 뭐가 온단 말인가?”
“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라이안이 그들을 보며 두 사람의 어깨를 잡고는 말했다.
“절대로 내 주위를 벗어나면 안 되네. 알겠는가?”
“아니, 라디안 이 친구야. 왜 이러는 것인가?”
헤인드의 말에 라이안은 저 멀리 있는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자 성벽 위에 있던 사람들도 멀리서 일어나는 먼지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병사가 나팔을 불었다.
부우우우우우우우!
“적군이 쳐들어왔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어라!”
“적군이 몰려온다!”
나팔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각자 자신의 위치를 잡으며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이었다.
라이안과 헤인드, 그리고 디로안은 본래 위치가 그곳이어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일 없이 적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에드코르 제국의 대군이 엄청난 먼지를 일으키며 노크리 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아래쪽 성문이 열리더니 노란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나가는 게 아닌가. 헤인드와 디로안은 그가 팔튼임을 알고 경악하였다. 라이안 또한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두두두두두두두!
대군이 움직이다가 깃발 신호에 동시에 멈추었다. 상당히 훈련을 받아온 듯했다.
“에드먼드 후작각하! 앞쪽에 기사로 보이는 자가 있습니다.”
“으음? 혹 백기를 들고 있지는 않느냐?”
“그것은 아니옵니다. 말을 타고 노크리 성 앞에 홀로 서 있습니다.”
“하하하, 기백이 대단한 자가 히매인에 있었군.”
“내가 가볼 것이다. 비키거라.”
“하지만 후작각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후훗, 저깟 나약한 왕국을 상대로 위험은 무슨 위험! 썩 비키거라!”
에드먼드 후작이 말을 타고 팔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이븐 후작도 굳이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두두두두두, 이히히히힝!
에드먼드 후작이 팔튼의 앞에 멈춰 서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대 에드코르 제국의 에드먼드 후작이다! 너는 무슨 일로 이곳에 그리도 당당히 서 있느냐!”
“나는 히매인 왕국의 팔튼 콘 포르베이다! 에드코르 제국에 일기토를 신청한다!”
“뭣이! 일기토?”
“그렇다!”
“크하하, 감히 히매인 주제에 우리 에드코르 제국에게 일기토를 신청하다니. 가소롭구나!”
“흥!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것이냐!”
“좋다! 내가 상대하겠다. 덤벼 보아라!”
말을 마친 그들이 대치하여 섰다. 그리고 이내 서로 말을 몰며 랜스를 들고 달려드는 두 사람 이었다.
파캉!
파캉!
“제법이구나! 그렇다면 이것도 받아보아라!”
에드먼드 후작의 랜스 끝에서 오러가 방출되기 시작했다. 에드먼드 후작은 당연히 자신의 오러에 앞에 있는 자가 꼬치처럼 꿰뚫려 죽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의 생각이었다.
파캉!
또 다시 충돌음이 터져 나왔고 에드먼드 후작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팔튼의 랜스에도 똑같이 맺힌 오러를.
“이, 이럴 수가! 마스터급이었단 말인가!”
“뭐를 그리 놀라느냐? 마스터가 별거더냐? 어찌 너희에게만 마스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이냐?”
팔튼의 말을 들은 에드먼드 후작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좋은 상대를 만났구나. 이대로는 끝이 안날 것 같으니 검으로 승부하자!”
“좋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리며 검을 뽑았다.
차앙!
차앙!
“부디 좋은 승부가 되기를 바란다. 덤벼랏!”
“흥! 난 승부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너의 목을 원할 뿐!”
파캉! 깡!
에드먼드 후작은 눈앞에 있는 자의 생김이 어딘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그러고 보니 너는 그 때 그 애송이가 아니냐!”
갑옷 때문에 잘 보지 못하다가 지금에서야 그가 누군지를 떠올린 에드먼드 후작이었다.
“그렇다! 너의 목을 가지러 내가 이곳에 왔다! 챠앗!”
퍼벙!
팔튼이 오러를 일으키며 공격하자 에드먼드 후작도 오러를 형성시켜 상대하였다. 그로 인해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닌 무엇인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내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닷! 천환!”
팔튼이 시전 한 것은 바로 삼재검법의 천의 초식이었다. 수련도중 변화의 깨달음을 얻음으로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만든 초식이 이것이었다.
팔튼이 시전한 천환은 하나의 천이 아닌 동시에 네 개의 천이 내리그어지는 것이었고, 에드먼드 후작은 미처 그것을 다 막지 못하여 팔에 상처를 입었다.
“크윽! 이, 이럴 수가! 모두가 진짜란 말인가!”
에드먼드 후작은 무엇인가 마법의 도움을 받아서 환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세로로 막았으나 하나의 공격만 막히고 나머지 검들은 휘어 들어오며 그의 팔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로 빠르게 빠져나와서 작은 상처로 끝난 것이 천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팔은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잘려 나갔을 것이다.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는 라이안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저 녀석… 저것을 저토록 변형시켰을 줄이야…….”
라이안도 팔튼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저 정도일 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먼드 후작은 자신의 팔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자신의 옷을 찢어 급히 감싸며 물러섰다.
에드먼드 후작은 한참을 계속해서 밀려나갈 수밖에 없었고, 저 멀리 뒤에 있던 하이븐 후작 역시 주먹을 쥐며 그곳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저 대결이 일기토임을 알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제국의 기사가 일기토에 밀려 도움을 받는다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그 수가 많다고는 하나 사기가 한순간 줄어들었을 때의 피해는 천지차이였다.
하지만 승부보다 그의 목을 원하는 팔튼은 계속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크윽! 어쩔 수 없군. 헤르시안!”
번쩍!
촤카가가각!
한 순간 밝은 빛이 흘러나오며 팔튼의 눈을 가렸고 그로 인해 팔튼 역시도 잠시 물러났다. 빛이 사라지고 앞을 보는 팔튼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검을 더욱 꽉 잡았다.
팔튼에게는 아직 헤르시안 같은 마도시대의 병기가 없었던 것이다. 에드코르 제국은 고대 던전의 발굴로 인하여 수많은 헤르시안과 타이탄을 발견하였다.
물론 그러한 소식을 들은 다른 주변 국가들도 서둘러 던전 발굴에 힘썼으며 곳곳에서 유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히매인 왕국 역시도 던전을 찾고 발굴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에드코르 제국의 감시와 압박으로 인하여 그러한 작업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그 수가 무척이나 적었다.
히매인 왕국에서 기껏해야 나온 것이라고는 헤르시안 3개와 타이탄 6기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조차 아직 그 누구에게도 보급이 되지 않았으니 팔튼으로서는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치사한 놈!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자!”
“쳇!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 헤르시안 역시 무기의 일종이다. 좋은 무기를 가지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무엇이 치사하단 말이냐. 큭큭큭.”
“빌어먹을!”
에드먼드 후작이 헤르시안을 착용하자 팔튼은 조금 전보다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 서서히 다가오는 에드먼드 후작의 발걸음에 팔튼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황제폐하께서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바라신다.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로부터 접전은 계속해서 벌어졌다. 에드먼드 후작과 팔튼의 싸움은 끝이 날 줄 몰랐다.
힘이나 빠름에서는 에드먼드 후작이 앞섰으나 에드먼드 후작은 이상하게도 팔튼의 발놀림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어찌하여 저토록 움직임이 빠르단 말인가! 검의 속도는 별반 차이가 없지만 저 다리의 움직임은 따라갈 수가 없구나…….’
에드먼드 후작의 생각과 달리 팔튼은 점점 조급해졌다. 겨우 신법으로 버티고 있기는 했지만 에드먼드 후작과 검을 부딪칠수록 자신의 오러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헤르시안의 마나증폭이 얼마나 유용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일기토임을 자처해서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팔튼으로서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너의 움직임이 느려진 것을 보니 그것이 한계인가 보구나! 받아랏!”
퍼벙!
서걱!
에드먼드 후작의 두 번의 휘두름이 있었고 두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는 겨우 에드먼드 후작의 공격을 막은 소리였고 나머지는 이미 오러가 사라진 팔튼의 검이 잘리는 소리였다.
팔튼은 검이 잘리는 순간 급하게 뒤로 몸을 던져 겨우 가슴이 스치는 것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에게는 이제 마나도 무기도 없었으니 팔튼의 큰 위기였다.
“헉헉헉, 제길! 헤르시안만 아니었어도! 헉헉헉.”
팔튼은 가쁜 숨을 내쉬며 서 있기도 힘든 듯 무릎 꿇고 나머지 반만 남은 검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에드먼드 후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무리를 위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마스터급으로 성장했을 줄이야. 너의 대단함은 인정을 해주지. 하지만! 이 시간 이후부터 히매인 왕국은 사라질 것이다. 물론 지금 너의 목숨까지도…….”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검을 들어 올리는 에드먼드 후작이었고, 그를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팔튼은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에드먼드 후작을 노려보았다.
“잘 가거라! 챠앗!”
성벽에서 그것을 보던 헤인드와 디로안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안 돼!”
“팔튼! 피해!”
다른 쪽에서 그것을 보고 있던 에나 역시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움츠렸다. 에드먼드 후작의 검이 팔튼의 머리로 떨어지려고 하는 그 순간!
크아아아앙!
엄청난 사자후와 함께 에드먼드 후작에게 황금빛의 강기가 쇄도했다.
“어헉!”
꽈과광!
에드먼드 후작은 급하게 몸을 뒤로 피했다. 하지만 강기의 충격이 더 빨랐기에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날아가 몇 번을 굴러버렸다.
헤인드와 디로안은 뒤에서 무엇인가 엄청난 빠르기로 자신들을 스쳐지나갔음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에 떠있는 존재를 볼 수 있었다.
“감히! 어느 누가 나의 친구를 핍박한단 말인가!”
버략 같은 소리를 지르며 성벽에서부터 팔튼이 있는 곳까지 날아가는 사람을 본 모든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찌 사람이 저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간단 말인가…….”
“저, 정말 날고 있…어…….”
“저것은?!”
터덕!
무언가가 팔튼의 앞으로 떨어졌고, 뼈가 맞추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자 팔튼은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라, 라이안?!”
팔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 존재를 평생 마음속에 두고 살아가고자 했던 이가 자신의 눈앞에 멀쩡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제 상당량의 마나를 사용할 수 있어 초상비를 펼치며 날아온 라이안이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라이안이 날아서 그곳까지 간 것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미리 허공에 몇 개의 돌을 던지고 그것을 밟으며 초상비를 펼쳤던 것이다.
팔튼은 눈을 크게 뜨고 라이안의 발끝부터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오랜만이야, 팔튼.”
“이…이 자식! 살아 있었구나! 크흐흑!”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듯 보였던 팔튼이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라이안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미안해. 내가 너무 걱정시켰지?”
“크흐흑! 이, 이 나쁜 자식… 왜 이제야 나타난단 말이냐! 난 네가… 크흐흑!”
“미안, 정말 미안해.”
성벽에서도 헤인드와 디로안이 라이안을 확인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라이안을 불렀다.
“라이안! 이 나쁜 자식! 살아 있었구나! 크흑.”
“너 이 자식! 이리 오기만 해봐! 크흐흑.”
헤인드와 디로안의 감격에 겨운 목소리에 라이안은 그들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이내 무엇인가 땅에 박힌 것을 꺼내어 하늘 높이 들었으니… 그것은 진한 파란색의 창이었다.
“와! 스피어 마스터닷!”
“스피어 마스터가 우리 히매인 왕국을 돕기 위해 왔다!”
“스피어 마스터 만세!”
“스피어 마스터 만세!”
그러한 모습에 히매인 왕국은 더 큰 환호성을 내질렀고 에드코르 제국에서는 뭔가 엄청난 실력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혼란이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에드먼드 후작이 일어나 라이안을 쳐다보았다.
“역시 살아 있었군!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일기토에 끼어든단 말이냐! 기사의 율법도 모르느냐!”
전쟁에서 일기토를 행할 경우 암묵적인 법으로 일기토에는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역시 우리의 라이안.
“응, 몰라.”
역시나 라이안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는 듯 대꾸했다.
“이…잇! 가만두지 않겠다!”
화를 참지 못하고 검을 고쳐 잡으며 달려드는 에드먼드 후작이었다. 에드코르 제국 진형에 있던 하이븐 후작이 급히 그것을 말리려고 하는 찰나!
“에드먼드! 멈춰!”
퍼컹!
하이븐 후작조차 보지 못하였다. 단지 라이안이 흐릿해졌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후 하이븐 후작이 본 것은 라이안이 뻗은 창의 끝에 매달린 에드먼드 후작의 머리통이었다.
순간 청룡창 이초인 청룡출해를 펼쳐 에드먼드 후작의 머리를 뚫어버린 라이안이었다.
하이븐 후작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이…이런 비겁한 자식!”
“안됩니다. 후작각하! 위험합니다!”
“이것 놔라! 에드먼드가… 에드먼드가 죽었단 말이다! 죽여 버리겠다!”
급히 말을 타고 달려 나가려는 하이븐 후작을 나머지 귀족들이 붙잡으며 말렸다.
“후작각하께서는 이곳의 총사령관이십니다. 어찌 이리 경거망동하신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들은 하이븐 후작이 말을 타던 것을 멈추었다. 참을 수 없는 화가 밀려왔으나 그들의 말은 틀림이 없었다.
“크윽! 귀, 귀관들의 말이 옳소… 우선 이곳에 군의 진영을 펼치시오…….”
흥분을 가라앉힌 하이븐 후작이 시뻘겋게 충혈이 된 눈으로 명령을 내렸다. 아마도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리라.
다른 귀족들도 하이븐 후작과 에드먼드 후작의 관계를 알고 있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휘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 * *
에드코르 제국의 군대가 뒤로 조금 후퇴하며 그곳에 군영을 설치한 후, 노크리 성으로 팔튼을 부축하고 들어간 라이안은 모든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와이파른 백작이 급히 달려 나오며 팔튼의 몸을 살폈다.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단지 마나를 너무 많이 소진했을 뿐입니다.”
“그것 다행이구나. 그런데 이쪽은…….”
“이 녀석이 바로 죽은 줄만 알았던 저의 친구이지요. 인사하게. 나의 아버님이시라네.”
“안녕하세요. 팔튼의 친구 되는 라이안이라고 합니다.”
와이파른 백작은 뭔가 귀족의 예의에 어긋나는 듯한 인사에 이상했지만 그 말투가 점잖고 부드러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
그때 라이안의 눈에 한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헤인드와 드로안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에나와 라드이라도 보였다. 라이안은 급히 와이파른 백작의 옆으로 가서 말을 건넸다.
“이곳에 저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같이 가도 되겠는지요?”
“허허허, 위대한 스피어 마스터의 친구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네. 그리 하도록 하게.”
“헤인드! 디로안! 에나! 라드이라! 모두 이쪽으로 와.”
라이안의 말에 그들은 기쁨의 미소를 띠우며 기다렸다는 듯 뛰쳐나왔다.
그들도 라이안을 보고 기쁨에 진즉에 나오고 싶었지만 이곳은 군대였고 규율이 있었다. 백작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총사령관과 함께 있었으니 더욱 라이안을 보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라이안이 자신들을 불러주자, 왠지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들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어깨에 힘을 주며 나왔다.
“라이안!”
“라이안!”
“라이안 오빠…….”
“살아 있었군요.”
모두는 반가움에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모두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 녀석!”
갑자기 헤인드가 라이안의 목을 감싸 쥐고 꿀밤을 때렸다. 그것을 본 모두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다 같이 달려들었다.
“으아악! 미안해! 미안하다고! 악! 아파!”
모두에게 한참을 그렇게 몰매를 맞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던 라이안이었다. 머리가 삐쭉삐쭉 선 채.
“히잉… 내 머리 봐. 이게 뭐야…….”
“그러게 왜 이렇게 늦게 와서 사람 걱정시켜욧!”
“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엇! 이 녀석이 아직도!”
또 다시 달려들려는 헤인드를 피해 라이안이 재빨리 팔튼의 뒤로 도망갔다.
“아, 알았으니 그만하자. 헤헤헤.”
“하하하.”
“하하하하!”
“호호호호!”
그런 그들의 행동에 모든 병사들 또한 그들의 포근한 정을 느끼며 웃을 수 있었다.
“하하하, 이제 그만 들어가세.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