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성공 라이프
천준호의 고향은 경북 의성군에 있는 면 단위의 마을이었다. 사이좋은 부모님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주변 환경이 그리 좋다곤 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부터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반에서 일 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산 입사.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말에 부모님은 엄청나게 기뻐하셨다. 하지만 오늘은 또 달랐다.
-의성의 자랑 대산 그룹 CEO 천준호.
마을 입구에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그 현수막 앞에 멈춰 섰다. 차 안에서 현수막을 확인한 천준호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 엄마는 이런 거 하지 말라니까.”
이내 천준호가 운전석을 보며 말했다.
“출발하세요.”
“네.”
최고급 세단이 다시 흙먼지를 일으키며 마을 입구를 통과했다.
차 앞에 붙어 있는 삼각형의 별.
그건 최고가를 자랑하는 벤츠라는 뜻이었다.
그중에서도 3억이 넘어가는 마이바흐 라인. 시골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차였기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를 힐끔거렸다.
이내 차가 빨간색 벽돌집에 멈춰 섰다. 이미 나와 기다리고 있던 천준호의 부모님이 격하게 아들을 반겼다.
“아이고, 우리 아들! 왔구나!”
뒷짐 진 채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도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들.”
그 눈빛에는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어머니와는 포옹까지 했으나 아버지와는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다였다.
천준호가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마을 입구에 현수막은 뭐야.”
“우리 아들 온다고 해서 엄마가 준비했지.”
“에휴, 부끄럽게 뭐 그런 걸 해.”
“부끄럽긴 엄마는 우리 아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아들 나이가 30대인데 대산 그룹 사장이잖아.”
어머니의 칭찬에 천준호가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서울 가는 건 생각해 봤어? 집은 내가 풀 세팅해서 준비해 놓는다니까. 가정부도 한 명 두고, 엄마 손에 물 안 묻히게 만들어줄게.”
천준호가 어머니의 두 손을 힐끔 보았다. 평생 농사일로 부르튼 손은 거친 논바닥을 연상케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서울 가서 뭐하니. 아는 사람도 한 명 없고.”
“왜, 회장님이 옆집으로 오래. 자기 어머니랑 친구 하면 되겠다고. 나이도 엇비슷한데.”
그 말에 천준호의 어머니가 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회장님 어머니랑 어떻게 친구가 되냐. 그리고 난 여기 있는 게 맘 편하다. 네가 새로 지어준 집도 엄청 좋아.”
천준호도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도 처음 서울에 올라가 얼마나 낯설었던가. 아마 나이가 드신 어머니는 더 할 것이다.
“일단 알았어. 들어가자.”
방으로 들어가자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다.
소고기에서부터 문어, 찜닭까지.
육해공 없는 게 없었다.
그 많은 양에 천준호가 말했다.
“이렇게 안 해도 된다니까. 남는데…….”
“남으면 마을 사람들이랑 나눠 먹으면 되지. 어서 앉아라. 식겠다.”
고개를 끄덕인 천준호가 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운전기사가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불가리.
구찌.
지방시.
엄청난 양의 명품이었다.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 겨울옷이랑 아빠 시계 좀 샀어.”
꿀꺽 마른침을 삼킨 천준호의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저, 저건 롤렉스 아니냐?”
“응. 아빠가 롤렉스 가지고 싶다 했잖아.”
그 말에 어머니가 눈을 흘겼다. 아버지는 괜한 헛기침을 토했다. 천준호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먼저 물어본 거야.”
“아무리 그래도 힘들게 돈 버는 얘한테 롤렉스라니. 그거 엄청 비싼 거잖아.”
“한 2천 정도 할걸.”
부모님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이런 선물을 처음 받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받을 때마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나 많이 버니까. 걱정하지 마. 이 정도는 별거 아냐.”
조금 정도가 아니었다. 대산 그룹 주식을 계속 사 모은 덕분에 이제 보유 주식 가치는 천억을 넘어간다. 거기에 CEO로 승진하며 올라간 연봉은 100억 달했다.
부모님께 한 번에 1억을 쓰는 건 한 달 월급도 되지 않는 것이다.
천준호가 어머니를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엄마 고생 많이 했잖아. 이 정도는 받아도 돼. 아끼지 말고 막 입어. 명품 입고 농사일 막 해도 돼. 그만큼 또 사줄 테니까.”
어머니가 천준호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났다.
“그래도 너무 비싸니까…….”
“괜찮아. 이제 엄마 아들 이 정도 써도 되는 사람이야.”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천준호.
자기 아들은 이제 청와대 초청을 받고, 뉴스에서 쫓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뉴스에서 얼핏 보긴 했었다.
스톡옵션 포함 100억.
대산에서 받는 연봉이 100억이 된다는 것을.
그런 대화도 잠시였다.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똑똑.
똑똑.
-준호 아버지 있나.
-날 세. 옆집 건이네.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문을 열며 나갔다. 건이 아버지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우리 집에 좋은 술이 하나 있어서 준호랑 먹으라고 가져왔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시지 말라니까…….”
“하하, 그럴 수가 있나. 우리 마을의 자랑인데. 그런데 혹시 우리 애가 막 대학을 졸업했는데 대산 입사가 꿈이라고 해서…… 그래도 나름 똘똘한 놈이야.”
쏟아지는 이권 청탁에 천준호의 아버지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서도 익숙하게 사람들을 상대했다.
이제는 준호가 집으로 올 때마다 생기는 연례행사였기 때문이었다.
* * *
삼성동.
그곳에 세워진 130층 거대한 마천루 앞에 검은색 세단이 한 대 멈춰섰다.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바로 차 문을 열었고, 강철이 옷매무새를 여미며 차에서 내렸다.
종로.
그곳이 좁아져 삼성동에 새로운 본사를 마련한 것이다. 130층짜리 빌딩은 그 자태만으로도 놀라운 위용을 자랑했다.
총 공사비만 약 5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돈이 전부 강철의 개인 돈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 대산 그룹이 강철에게 임대료를 내고, 이곳에 입주해 있는 것이다.
강철은 별도로 마련된 통로를 따라 바로 집무실로 이동했다. 사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보고를 시작했다.
“청담에 있는 아이온 계열사들 입주도 시작했습니다. 올해 말이면 입주 완료될 것입니다. 빈 사무실들은 대표님이 투자하신 스타트업들이 입주하게 될 겁니다.”
“그곳을 스타트업 활성화 지구로 조성하는 방안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부에서도 적극 검토 중입니다. 다만 땅값이 너무 비싸서 지역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실리콘 밸리는 땅값이 아주 비싼 지역에 속합니다. 도대체 땅값과 스타트업 활성이 왜 상충되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더구나 청담은 젊은이들이 오고 싶어 하는 곳 아닙니까. 그런 곳에 회사가 있어야지 다양한 젊은 인재들이 모이지. 저 시골에 회사 지어놓으면 누가 거기에 간답니까. 이미 사무실도 제가 다 제공한다고 말을 해두었는데.”
“알겠습니다. 다른 지역 검토는 없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말을 이었다.
“그 밖에 오늘 일정은…… 오전 리턴 언어 개발, 오후에는 척 헤이글 미팅이 전부입니다. 오늘 잡혀 있는 외부 행사는 없습니다.”
단출한 일정이었다.
대산 천준호.
아이온 김봉수.
두 사람에게 회사 일의 대부분을 맡겼기 때문에 가능했다.
“알겠습니다. 심 비서도 나가서 일 보세요.”
“네.”
비서가 나가고, 강철은 개발에 몰두했다. 과거 회사 일과 병행할 때보다 능률이나 결과물 면에서 모두 월등했다.
덕분에 리턴 언어는 빠르게 발전했고, 세계 시장에서 점유율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25%.
마틴 오맬리와 함께 개발한 리턴이 전 세계 점유율 25%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프로그램의 25%가 리턴 언어로 만들어져 있다는 뜻이었다. 전통의 강호인 C나 자바를 압도적으로 따돌린 수치였다. 덕분에 강철은 여러 상을 받았다.
-올해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래머.
-올해의 언어 3연속 수상.
-W3C 공로상.
등등 관련 분야 상은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리턴이라는 언어가 웹에서부터 OS까지. 수많은 분야를 커버하며 개발 속도, 프로그램의 성능 등등에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강철은 오후에 척 헤이글과 화상 회의를 진행했다. ‘사라’를 서치에 넘긴 후 그보다 성능이 뛰어난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척, 새롭게 올린 코드를 봤는데 데이터 전처리를 좀 바꿨던데. 어떻게 된 거야.”
-게임 NPC가 좀 더 창의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비정상 데이터도 포함돼야 할 것 같아서. 인간도 극한의 분노를 느끼면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잖아.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지.”
-그럼 NPC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감정의 변동성이 커지면 행동의 변화도 커져야지. 그래서 기존에 제거하던 데이터를 일부 포함하는 식으로 변경한 거야.
NPC(Non Player Character).
둘이 만들고 있는 인공지능이 초기에 적용될 환경이었다.
워리어.
카운터.
아이온 게임즈에서는 그 뒤를 이를 초대형 가상현실 MMORPG를 개발하고 있었다. 강철과 척 헤이글은 거기에 들어가는 NPC의 인공지능을 담당한 것이다.
“오케이. 그렇게 진행하자.”
-한번 검토해 봐. 코드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척 헤이글은 세계적인 개발자였다. 서치에서도 인정한 ‘사라’를 개발했으니까.
그런데도 강철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그만큼 강철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강철은 본격적으로 코드 검토에 들어갔다. 한번 집중하면 무섭게 달려드는 성향을 지닌 만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집중하며 일을 해나가던 중.
삐빅.
삐빅.
삐빅.
하는 알림이 들렸다. 어느새 저녁 6시가 된 것이다.
퇴근 시간.
강철은 미련 없이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보다 중요한 일이 한 가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한남동.
500평 부지의 2층 단독주택이 강철의 신혼집이었다. 강철이 집에 들어서고, 얼마 뒤 스케쥴을 마친 엘리의 차가 차고지로 들어섰다.
안방에서 막 옷을 벗던 강철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엘리를 맞이했다.
“딱 맞췄네.”
“그래야지. 오늘 중요한 날이잖아.”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시점이기 때문이었다. 엘리는 팀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결혼 후 얼마 동안 임신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마지막 방송을 마쳤고, 본격적으로 아이를 가지기로 한 날이었다.
강철은 무대 화장을 한 엘리를 바라보았다. 화장까지 한 미모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강철이 한발 다가가자 엘리가 머뭇거렸다.
“지금? 나 아직 씻지도 못했어.”
하지만 땀 냄새는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극적인 페로몬 향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내 안방은 후끈 한 열기로 가득 차버렸다.
* * *
김봉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앞에 앉아 있던 진선미가 다리를 꼬며 그를 보았다.
“별로 말씀이 없으시네요.”
“하하…… 네. 제가 회사, 집, 회사 집만 반복하다 보니 말주변이 부족해서요. 음식이 입맛에는 맞으세요?”
진선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만해요. 봉수 씨는요?”
“하하, 저도 맛있습니다.”
김봉수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일할 때는 불도저 같은 성격이 여자 앞에만 서면 순한 양이 되었다. 둘은 프라이빗한 CEO 모임에서 만났다.
전선미가 적극적으로 대시해 오늘 개인적인 만남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
“아시겠지만 제가 나이가 있어서 결혼을 좀 서둘러야 해요.”
그 말에 김봉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하, 네 저도 나이가 있어서 빨리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다만……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하고 싶어요.”
그 말에 진선미가 픽 실소를 흘렸다.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 사람과 똑같은 소리를 하네.’
이강철.
그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회장에 그 대표라는 뜻인가. 그러나 김봉수는 진선미의 웃음을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하하, 마음이 맞는다 말이 조금 진부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보니 이런 단어는 어울리지 않더군요.”
진지한 그의 말에 진선미가 살짝 손을 흔들며 답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그냥 옛날 일이 생각나서 웃었어요. 그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있거든요.”
김봉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진선미가 그런 김봉수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깊게 파진 앞섶 사이로 하얀 살덩이들이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사람이랍니다.”
김봉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아주 혈기왕성한 남자였다. 매일 열심히 운동한 덕분에 아주 건강하기도 했다. 그런 김봉수에게 진선미는 치명적이었다.
“그, 그러시군요.”
“저도 마음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마음이 맞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으니까요.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하, 네. 뭐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럼 마음이 맞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발적인 진선미의 눈빛을 김봉수가 살짝 회피했다. 더 보다간 얼굴이 홍당무로 변할 것 같았다.
김봉수가 떨리는 흥분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답했다.
“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으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오늘부터 같이 지내볼까요?”
진선미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과거 소극적인 대처로 이강철을 놓쳤던 뼈아픈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네, 네?”
“시간을 보내야 마음이 맞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렇죠.”
“그러니까. 그 시간 같이 보내보자고요.”
김봉수가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미의 미모는 연예인을 버금가는 것이었다. 잘 관리된 몸매는 20대 못지않았다. 더구나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그녀의 지적 능력은 자신을 뛰어넘었다.
김봉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 그럼 같이 술 한잔…….”
진선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술 좋죠. 서로 알아가는 데 그보다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오늘 뭔가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봉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 * *
비슷한 시각.
다른 호텔에서 다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천준호입니다.”
“네. 최윤아예요. 반가워요.”
최윤아와 천준호의 소개팅 자리였다.
둘 역시 경제인 모임에서 만났고, 함께 골프를 치는 지인을 통해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특히나 최윤아가 적극적이었다.
‘꿩 대신 닭이라도…… 잡아야지.’
이강철은 놓쳤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강철이 차기 후계자로 점찍은 사람이었다.
그만큼 능력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지인에게 슬쩍 소개팅 자리를 말했고, 오늘 자리가 성사된 것이다.
“이런 자리는 너무 오랜만이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같이 밥 한번 먹고, 서로에게 호감이 있으면 만남을 이어 가면 되는 거죠.”
고개를 끄덕인 천준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저희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계세요. 윤아 씨…… 윤아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윤아 씨 부모님과는 다른 삶을 사신 분들이죠.”
“그건 이미 혜경이 통해서 들었어요.”
이혜경.
둘을 연결해 준 사람으로 천준호가 기업인 모임에서 알게 된 지인이었다.
“그 말씀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천준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혜경에게서 듣긴 했었다.
-윤아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걔가 신경 쓰는 건 오직 하나야.
-뭐?
-남자의 능력. 너 정도면 능력은 충분하잖아.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긴 해.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뭐?
-바람 피우지 않고,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행복이라…….’
재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낯선 단어였다. 그랬기에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천준호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아시겠지만 전 정략결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대산에서 이직해 다른 곳으로 갈 생각도 없고요. 이 회장님과 평생 같이 갈 생각입니다.”
“제가 VK로 옮겨와 달라는 말을 할까 봐 그런 건가요?”
천준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가의 차녀가 제게 관심을 보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저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나는 건 딱 질색이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능력 있고, 가정에도 충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아시겠지만 재벌가는 그리 깨끗하지 못하니까요.”
솔직한 말에 천준호가 색다른 눈으로 최윤아를 보았다. 자신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셨군요.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이런 만남이 익숙지 않아서.”
“이해해요. 여러 사람을 만나 봤지만 제가 재벌이라는 걸 아는 순간 자격지심에 도망간 사람도 있었으니까요.”
“하하, 도망이요?”
“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요…….”
최윤아가 입을 열었고, 천준호는 그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떠들다 보니 순식간에 몇 시간이 지나 버렸다. 천준호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렇게 말이 잘 통했나…….’
확실히 비슷한 위치에 있다 보니 통하는 게 많았다. 이제는 대학 동기들을 만나도 서로가 불편했다. 동기 중에는 대산에서 과장 직급으로 일하는 친구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최윤아는 달랐다. 아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천준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자리 옮겨서 이야기를 더 나눌까요? 이제 저녁 시간이니 술은 어떠세요?”
최윤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술 좋죠. 제가 조용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알아요. 일식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말을 하는 천준호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이 만남 몇 번을 더 이어가도 될 것 같았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엘리와 함께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찾았다. VIP 통로로 이동해 바로 병원 최고의 산부인과 교수에게 안내되었다.
“임신 축하드립니다.”
그 말에 강철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임신.
자신이 곧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었다. 엘리가 강철을 돌아보았다. 교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임신 초기에는 2주에 한 번씩. 중기로 접어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원해서 검사받으시면 됩니다. 아직 젊으셔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검사를 마치고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병원장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병원에서 책임지고 산모, 아이 모두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감사하죠.”
병원장이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500억.
강철이 병원에 기부한 금액이었다. 그 돈 때문이라도 병원장은 강철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강철이 그런 병원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강철은 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그러자마자 가장 먼저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임신이래.”
전화기 너머로 들뜬 최용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아들이야. 딸이야?
“아직 임신 초기라 그것까진 안 나와.”
-아이고, 수고했다. 엘리한테도 수고했다 전하고. 임신 초기는 항상 몸조심해야 해. 방송일은 이제 않는 거지?
“어, 아이 낳고, 당분간은 안 할 거야.”
-전화 좀 바꿔봐라. 오랜만에 목소리 좀 듣자.
이내 강철이 전화기를 넘겼고, 엘리와 최용희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네. 어머니.”
“네. 그럴게요.”
“헤헤, 네. 감사합니다.”
“네.”
그렇게 통화가 끝나고.
강철은 다시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네. 임신 맞다고 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엘리가 고생이 많죠.”
“네. 알겠습니다.”
이내 강철이 엘리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어, 엄마.”
“알았어.”
“몸조심해야지.”
“당연하지. 오빠도 잘해줘. 앞으로는 몸조리에만 신경 쓰려고.”
“응. 알았어. 한번 찾아갈게.”
그렇게 양가 부모님께 통화를 마친 강철이 엘리를 보며 말했다.
“앞으로 더 잘할게.”
엘리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서울 도심을 가로질러 둘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그렇게 10개월이 흐르고.
같은 병원에서 힘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응애.
응애.
응애.
두 눈을 꼭 감고, 손발을 꼭 쥐고 있는 예쁜 여자아이였다.
“아이와 산모 모두 건강합니다. 탯줄 자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강철에게 의사가 가위를 건네주었다.
스륵.
탯줄이 잘리고, 추후 처치가 이어졌다.
잠시 후 가림막이 치워지고, 아이를 안고 있는 엘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힘을 썼는지 이마에는 땀에 전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강철이 그런 엘리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수고했어.”
“여기 봐봐. 우리 아기야 이쁘지?”
엘리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예쁜 여자아이.
이름은 이미 정했다.
이윤설.
눈처럼 하얀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 강철이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러네. 널 닮아서 그런지 예쁘다.”
의사가 그런 강철에게 말했다.
“한번 안아보시겠습니까?”
“네.”
그 말에 간호사가 재빨리 움직였다. 엘리에게서 아이를 받아 강철에게 넘겼다.
응애.
응애.
응애.
강철이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윤설아. 아빠야.”
아이는 마치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잠시 울음을 멈추었다. 아주 작고 여린 생명체를 안고 있자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행복하다.’
과거의 삶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강철은 이 행복을 꼭 지키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회귀자의 성공 라이프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