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국내 1위가 세계 1위(1)
최윤아의 집무실.
그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네. 그럼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최윤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일 쪽에서 IBM 클라우드 사업 부문을 인수하기 위해 물밑 협상을 진행 중이라…….’
IBM 내부에서도 최고위 측만 알고 있는 대외비였다. 자신과 연결된 끈이 아니었다면 절대 알지 못했으리라.
‘확실히 급하긴 한 모양이지. 천하의 나일이 IBM의 클라우드 사업 부문까지 인수하려 한다니. 이강철에게 IBM마저 넘길 수는 없다는 뜻인가.’
최윤아는 바로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뒤적거려 보았다. 관련해서 나온 내용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비서를 시켜 IBM 관련해서 나온 정보가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유통되고 있지 않았다.
최윤아는 그걸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건 꽤 고급 정보다.’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걸 자신만이 알고 있었다.
최윤아는 바로 핸드폰을 들어 강철에게 연락을 취했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잠깐의 연결음이 지나고 ‘딸깍’ 소리와 함께 전화기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가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반가움을 뒤로하고 최윤아가 일부러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 때문에 연락한 거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네. 오해 안 합니다.
“최근 IBM 클라우드 서비스를 인수하려 한다면서요?”
-그게 거기까지 흘러 들어갔습니까? 어디서 흘러갔는지는 몰라도 내부 입단속을 한번 시켜야겠군요.
“뭐, 어쨌든 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서요.”
-어떤 말씀입니까.
“다른 회사에서도 IBM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더군요.”
-…….
한동안 전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강철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사실, 진짜입니까?
“믿을 만한 분에게서 들은 내용이니, 사실일 거예요.”
-흠…….
“자세한 내용은 전화로는 곤란하고, 만나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최윤아가 뜸을 들이자 강철이 빠르게 답했다.
-제가 미국에 있어서 당장 만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그 말에 당황한 건 최윤아였다.
이걸 핑계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전부 틀어지기 때문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사례는 다음번에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저희는 이것 관련해서 회의해야 할 것 같군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번 끊어도 될까요?
당황한 최윤아가 엉겁결에 답했다.
“그, 그래요…….”
이내 야속하게도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겨 버렸다.
전화 반대편.
강철은 바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사내 기획전략실장까지 화상통화로 연결되었다.
“IBM 클라우드 서비스를 다른 회사에서 탐내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강철의 말에 회의 참석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IBM의 클라우드 사업 부문을 인수해 단숨에 세계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는 건 강철의 역점 사업이다.
그게 틀어지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화상통화로 연결된 전략실장이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IBM 클라우드 서비스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가치를 지닌 사업입니다. 그걸 살 수 있는 회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툭 내뱉었다.
-몇 군데 있긴 하군요.
서치.
나일.
마이크로소프트.
대략 이 세 개 회사로 간추려진다. 그중 서치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클라우드 서비스에 중점적인 투자를 진행하지 않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일이나 마이크로소프트 둘 중 하나인데…….
강철은 왠지 나일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마 나일 같습니다. 우리의 추격으로 가장 위협을 받는 회사니까요. 아마…… 조바심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가격을 내리자 나일도 덩달아 바로 가격을 내렸지만,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경우는 여러 정황을 살피며 아직 유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것 말고도 이유는 충분했다. 데이비드는 자신에게 직접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자신이 추진하는 일을 방해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전략실장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대표님 말씀이 가장 타당한 것 같습니다. 그럼 나일이 IBM을 인수하려 한다는 가정하에 해결책을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 질문에는 강철도 쉬이 답하지 못했다.
고심하던 강철이 전략실장에게 물었다.
“IBM 클라우드 사업 부문 가치가 200억 달러 맞습니까?”
-네. 한 달 전 가치 평가로 그 액수가 나왔습니다. 다시 가치 평가를 진행해 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써낼 수 있는 돈은요?”
-VM 웨어를 인수하면서 대부분 자금이 동나 여력이 많지는 않습니다. 제3자 유상증자를 발행해 아이온 그룹에서 인수를 해준다는 가정하에…… 250억 달러까지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250억 달러도 큰돈이다. 한화로 27조에 달하는 액수이기 때문이었다.
“흠…….”
VM 웨어는 생각보다 조금 싸게 샀다. 그렇다면 IBM은 조금 비싸게 사도 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때.
함께 회의에 참석해 있던 신주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예전부터 계속 궁금했는데 IBM 그거 꼭 사야 하는 겁니까?”
강철이 진중한 얼굴로 답했다.
“시장 점유율을 단숨에 올릴 수 있으니까요.”
“이미 바이두, VM 웨어를 인수하면서 많은 돈을 소모하신 것으로 압니다. 비록 아이온 자회사들의 IPO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고 하지만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속칭 승자의 저주라는 말처럼요.”
생각해 봄 직한 내용이었다.
강철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강철을 보며 신주영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차라리 사는 척하면서 가격을 올리는 건 어떨까요. 반대편에서 승자의 저주에 걸리도록요. 이미 비딩이 붙어 싸게 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의 말에 비서나, 전략실장이 입을 오므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철의 앞이라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강철이 한 일 중에 실패한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무리라는 생각이 조금 있긴 했지만, 당연히 성공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강철의 입에서 조금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요. 이미 경쟁자가 나타난 이상 IBM이 가격을 낮춰줄 것 같지도 않고…….”
신주영이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차라리 최대한 가격을 올려 상대가 인수하게 함으로써 승자의 저주에 걸리게 만드는 것이 현 상황에서는 더 나아 보입니다.”
강철의 시선이 전략실장에게로 옮겨갔다.
“들으셨죠?”
-네. 들었습니다.
“관련해서 전략 한번 세워보세요. 상대 뭐, 가장 유력한 건 나일이겠지만…… 그 나일이 최대한 비싸게 IBM 클라우드 사업 부문을 인수할 방법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 * *
비슷한 시각.
비서의 보고에 데이비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IBM에서 240억 달러를 요구했다고요?”
“네. 타 회사에서 20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금액을 좀 올려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데이비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사라질 사업을 인수해 주겠다면 감지덕지 팔지는 못할망정 가격을 계속 올린다고…….”
업계 8위.
관련 부문 사업은 여전히 적자 상태였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사라질 경쟁자였다.
흥분해 거친 콧김을 내뱉는 데이비드에게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격 올릴까요?”
“우리가 쓸 수 있는 금액이 얼마까지라고 했습니까?”
“300억 달러까지는 여유가 있습니다.”
“IBM의 가치는요?”
“최대한 보수적으로 잡아서 200억 달러 정도는 됩니다. 300억 달러면 비싸게 사는 감이 있고요.”
데이비드가 턱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자칫 비딩이 붙으면 300억 달러까지 써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 금액을 주고 IBM의 클라우드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게 맞을까?
몇 번을 물어보고, 만들어진 자료를 검토했다.
혹시라도 자신이 비싸게 샀다가 승자의 저주에 걸릴까 두려웠다.
만약 이강철이라는 경쟁자가 없다면 굳이 이런 고생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까지 대산에서 가져간다면 단숨에 턱밑까지 쫓아오게 된다. 그렇게 내버려 둘 순 없어.’
강력한 적의 존재가 데이비드로 하여금 하나의 결정으로 몰아갔다.
“240억에 산다고 하세요.”
“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데이비드는 또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정말 300억 달러에 사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300억 달러.
결국 상대가 자신이 설정한 최후의 금액까지 불렀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높은 금액을 쓸 것인지 문의해 왔습니다.”
데이비드가 으득 이를 갈았다.
자신들이 써낸 금액이 290억이다. 그런데 반대편에서 300억 달러에 인수하겠다고 한 것이다.
데이비드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만약 300억 달러가 넘어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회사에 조금 무리가 가긴 합니다. 현재 보유 중인 현금성 자산은 400억 달러뿐이니까요.”
300억 달러를 사용하면 100억 달러가 남는다.
당장 대금을 현금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대금 납부까지 시간은 있고, 회사채를 발행해도 되니까.
하지만 데이비드의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파격적인 세일은 힘들어질 수도 있겠군요?”
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지금도 그것 때문에 계속 현금이 소모되고 있습니다. 100억 달러의 잔고를 가지고 그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데이비드의 고심이 깊어졌다.
다른 회사를 M&A 하는 순간 기존의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이 CEO의 결단이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인해 회사의 운명이 정해질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간 데이비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310억 달러라…….”
그걸 써서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다면 그리 비싼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때.
비서의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네.”
“가격이 올라간 것에 부담을 느껴 특허도 다수 포함시켜 주기로 했다? 얼마나요?”
“아, 알겠습니다. 바로 보고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비서가 데이비드 가까이 다가갔다.
“대산 쪽에서 300억 달러를 써내면서 IBM이 가진 특허도 함께 요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IBM 쪽에서 보유 중인 가상화 솔루션 관련 특허를 다수 포함시켜 주기로 협상을 마쳤고요.”
IBM.
거긴 전통의 강호답게 보유한 특허가 수도 없이 많았다.
데이비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파악해 보세요. 그리고 특허가 포함된다면…… 320억에도 살 의향이 있다고 전하고.”
“알겠습니다.”
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창밖의 세상은 컴컴하기만 했다.
데이비드의 기분도 비슷했다. 뭔가 계속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 * *
강철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비서가 기쁜 소식을 들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일이 최종 350억 달러에 인수 결정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했군요.”
“특허권을 추가한 게 주효했습니다. 가격을 올리면서 IBM의 가상화 솔루션 특허가 다수 포함되자 나일에서 바로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350억 달러라…… 그 정도 현금이 단숨에 빠져나가면 세일할 여력은 없겠죠?”
비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 시기를 맞춰서, 지시하신 세일 계획을 발표하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하세요. 운영 요원들에게도 절대 버그 하나 생기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시키도록 하고요. 이건 나일에 반격을 가할 기회입니다.”
“네.”
기쁜 소식을 전한 비서가 나가고, 강철이 핸드폰을 들었다.
-엘리 :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어요.
그 메시지에 아직 답을 못 하고 있었다.
이모티콘 하나 없이 보낸 문자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뭔가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 같은 강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고백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강철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결론을 내린 강철이 천천히 답장을 써 내려갔다.
-알겠습니다. 약속 시각을 잡아보죠.
그 답장을 받은 엘리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함께 있던 나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은이 쉬이 자판을 누르지 못하는 엘리에게 말했다.
“당장 오늘 보자고 해. 이런 건 빠를수록 좋아. 생각할 게 뭐 있어.”
작게 고개를 끄덕인 엘리가 터치스크린 위에 떠 있는 자판을 두드렸다.
-혹시 오늘 괜찮나요?
그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도착했다.
-네. 좋아요. 시간은 언제가 좋으세요?
그렇게 몇 번의 메시지가 더 오가고 나서 약속 시각이 잡혔다.
시간은 저녁 7시.
지금 시간이 오후 2시니까. 시간은 넉넉했다.
나은이 엘리를 보며 눈을 빛냈다.
“결전의 날이다. 풀 세팅 가자.”
강력한 의지가 느껴지는 모습에 엘리가 살짝 몸을 떨었다.
함께 있던 이희진이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참고로 오빠는 베이글 스타일 좋아해.”
나은이 입을 꾹 다문 채 엘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럼 엘리의 강점인 가슴을 강조하면서, 살짝 각선미도 드러내는 게 좋겠어. 자고로 미인계에 속살을 드러내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엘리의 불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몇 시간 후.
서울 시내 VVIP만 드나들 수 있는 회원제 레스토랑에 강철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소개팅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휴우…….”
긴장감을 없애기 위해 애써 몸을 털어보고, 앞에 놓인 냉수를 한 잔 마셔보았다.
그런데도 심장의 두근거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을 더 기다리자 밖에서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러자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장미 향이 코를 간질였다. 처음 보는 살색 향연이 눈을 어지럽혔다. 코와 눈이 마비되는 것 같은 자극이었다.
일순 강철은 인사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먼저 인사한 건 엘리였다.
“오랜만이에요.”
강철이 어색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네.”
“오늘 고마워요. 이렇게 나와주셔서…….”
겨우 정신을 수습한 강철이 입을 열었다.
“먼저 자리에 앉으시죠.”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엘리가 자리에 앉고 나서 본격적으로 음식이 차려졌다.
하지만 엘리가 가장 먼저 손에 든 건 술이었다.
벌컥.
거리며 독한 양주를 한 모금 마신 엘리를 강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잠시만요. 천천히.”
엘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두 잔을 마셔버렸다.
이곳에 온 건 음식을 먹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이 알딸딸해지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정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강철이 고개를 주억거리자, 엘리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이 맞는 걸까. 이렇게 해도 되나.”
역시 강철은 자신의 직감이 맞음을 확신했다.
‘온다.’
고백이 온다. 현시대 최고의 톱스타이자 한때 삼촌 팬의 마음으로 응원했던 연예인의 고백이 오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질질 끌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저 스스로에게도 대표님에게도 손해를 끼치는 것이니까요.”
“…….”
강철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들어주었다. 이럴 때 함부로 입을 여는 것이 아니다.
엘리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이미 알고 있죠?”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네…… 대충.”
“그런데 왜 아무 답도 안 해주는 거예요?”
“그건…….”
엘리는 술기운을 빌어 평소 궁금했던 점을 쏟아냈다.
“제가 너무 성급한 건가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일을 하느라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긴, 워낙 바쁘신 분인 건 저도 알아요.”
강철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네.”
말을 하던 엘리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입 냄새가 났으리라. 하지만 엘리의 입에서는 달콤한 알콜 향이 날아들었다.
그게 강철의 정신을 강타했다. 강철은 타는 듯한 목마름에 한 번 더 냉수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식탁 위에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지만, 누구 하나 손대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엘리가 두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왔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사랑해요.”
꿀꺽.
강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진심이에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엘리가 고개를 들어 강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반짝거렸고, 표정은 한없이 진지해 보였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까지 물어보는데 더 피하기만 할 순 없었다.
심호흡을 한 강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알리바바 대표 허융이 보고 있던 신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아이온 그룹 자회사 줄줄이 나스닥 행.
-천문학적인 현금을 손에 쥔 대산의 다음 행보는.
-나일 IBM 클라우드 사업 부문 인수.
최근 IT 업계에서 일어나는 지각 변동이 신문의 헤드라인이었다.
허융이 비서의 보고에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시나닷컴이 대산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단 말이지.”
“네. 그래도 우리 쪽에서 꽤 큰 고객사였는데…… 뼈아프게 됐습니다.”
“요금을 할인해 준다고 해도 소용없다고 했다면서?”
“네. 대산 쪽에서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 대산보다 무조건 싸게 해준다 해도 싫다고 했습니다.”
허융이 한 단어를 읊조렸다.
“기술자문…….”
비서의 생각도 비슷했다.
“아마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시나닷컴에서 최근 검색 엔진 업그레이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강철이 그와 관련해서 조언해 준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탈한 업체가 총 몇 개지?”
“현재까지 15개 업체입니다.”
덕분에 점유율은 7%가 떨어졌다. 개중에는 시나닷컴 같은 대형 고객사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VM 웨어까지 인수했다. 클라우드 서비스에 완전히 올인 하는 형국이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점은 IBM은 나일이 인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까지 대산에서 가져갔으면 단숨에 세계 2위로 치고 올라갔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 내 점유율은 말할 것도 없고요.”
보고를 들은 허융이 미간을 긁적거렸다.
“나일도 급하긴 하겠지. 어떤 마음인지 대충 짐작이 가.”
동병상련.
그 단어가 오늘처럼 와닿은 적은 없었다.
고심하던 허융이 비서에게 물었다.
“그래서 차오스 상무위원과 약속은?”
“오늘 저녁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강철과 관련된 내용을 이야기할 거면 나오지 않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 말에 허융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그 정도로 깊은 사이야?”
“중국에 만들어진 조인트 벤처에 차오스 라인에 서 있는 사람들의 돈도 상당히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제 윗선을 움직여서 사업 확장을 막는 건 어렵게 됐습니다.”
“규모가 너무 커졌다, 이건가.”
비서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강철을 건들게 되면 자칫 다치는 사람이 너무 많이 나오게 될 수 있습니다. 4급에서 10급까지 여러 직급의 공무원들이 투자를 진행한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허융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실력으로 상대가 된다면 더 일찍 했을 것이다. 그게 안 되니까 고위층을 찾는 것인데…….
“현재 개발자들이 업그레이드 버전을 준비하고 있긴 한데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공개된 코드인 DVM 2.0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걸 사용하면 비슷하게는 쫓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이 안 돼서 우리 쪽에 대산 솔루션을 이용하자?”
“어쩔 수 없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허융의 표정이 사납게 변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만약 그렇게 됐을 때 속도는 빨라지겠지만 우리가 기술력이 떨어진다는 걸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그 말에 비서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오픈소스라 직원들 입단속만 시킨다면 DVM 2.0을 사용한다는 게 흘러나갈 일은 없습니다. CTO 급에서 코드를 살짝 바꿔 우리 쪽에 적용한다면 우려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제야 허융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네.”
“자신 있어? 코드 가져다 써도 다른 이들한테 들키지 않을 자신.”
“그건…… CTO 호출할까요?”
허융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비슷한 시각.
한국 최윤아의 사무실.
최윤아가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나일, IBM 클라우드 서비스 사업 부문 350억 달러 인수.
-승자의 저주인가. 미래를 위한 준비인가.
-공룡 기업의 탄생.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의 앞으로 향방은.
일을 도와주려 했건만 자신 때문에 일을 망친 것 같기 때문이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IBM 사업 부문 인수는 강철의 역점 사업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틀어진 것이다. 하필이면 자신이 전화를 건 이후로…….
미안함에 제대로 연락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
삐리리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터폰에서 소리가 울렸다.
“뭐?”
“그게 말이 돼요?”
“확실한 겁니까?”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최윤아의 손에서 힘없이 송화기가 툭 떨어져 내렸다.
“둘이 사귀기로 했다고…….”
비서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힌 최윤아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기다리던 이강철이 보낸 메시지였다.
-이강철 :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비서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 * *
-리민스 상장 첫날 50% 상승. 시가총액 50억 달러 기록. 아이온, 대산의 성장에 따라 나도 성장한다.
-시가총액 60억 달러 딜리버리 브라더스. 해외 진출 본격 선언.
-이미지 인식 분야 절대 강자 아이체크. 100억 달러 신화를 쓰기까지.
-퀀트 시스템으로 시장을 이긴다. 슈퍼앤트 20억 달러 나스닥 상장.
강철의 자회사들이 속속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면서 현금으로 손에 쥔 금액만 50억 달러가 넘었다. 그 돈으로 가장 먼저 한 건 어머니와 함께 백화점을 가는 것이었다.
어차피 한도 무제한의 카드를 드렸기에 마음껏 사용하셔도 되지만 수십 년간 살아오신 버릇 때문에 카드 사용을 제대로 못 하시고 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에 가자마자 어머니 최용희가 가격표를 보며 망설였다.
-2,500,000원.
간단한 셔츠 하나의 가격이 200만 원을 넘어갔다. 옛날 한 달간 국밥집에서 열심히 일해도 180만 원을 벌었다.
그걸 생각하면 엄두도 나지 않는 가격이었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니니…….”
“괜찮아. 엄마도 이제 알잖아. 내가 돈이 얼마나 많은지 이번에 회사 상장하면서 얼마나 들어왔는지 알아?”
“얼만데?”
“5조.”
놀란 최용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뭐?”
“현금으로 5조 넘을걸.”
그 말에 함께 있던 이희진이 마른 침을 삼켰다.
강철이 돈을 많이 번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액수까지 자세히 알진 못했다.
놀란 최용희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엄마 아무것도 모른다고 장난치는 거 아냐?”
“뉴스에서도 나왔잖아.”
“보긴 했는데…….”
보는 정도가 아니라 신문을 구독해 하나씩 스크랩을 해놓았다. 최용희의 가장 큰 기쁨은 아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거기에서 절반 이상은 내 개인 돈이야. 돈이 쌓일 때마다 회사에 투자해놨거든.”
그런 강철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 시간이 밤 9시 30분.
백화점은 폐점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프라이빗 쇼퍼를 거느리고, 아주 여유롭게 쇼핑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가다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명 연예인이나 TV에서 보던 재벌 집사람들이었다. 즉 그들과 동급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최용희의 착각이었다.
“어머, 저기 이강철 아냐?”
“그 대산 그룹 오너?”
“이번에 아이온 그룹 자회사들 나스닥 상장으로 대박 났잖아. 보유 현금만 수십 조에 달한다고 하던데.”
“수, 수십 조?”
“이번 IPO한 회사 대부분이 이강철 개인 돈이잖아. 모르긴 몰라도 세계 10대 부호에 들었을 거야. 더구나 최근에 대산이랑 아이온 그룹 주가가 엄청나게 올랐잖아. 아이온 게임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지분 대부분을 저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니까.”
“하긴…….”
그러면서 한 번씩 강철을 힐끔거렸다.
쇼핑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사는 물건이 아니라 이강철이었다. 그 눈빛에는 선망이 가득했다. 즉 그들과 동급이 아니라 그들보다 위에 있는 것이다.
잠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최용희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엄마. 이 옷 괜찮다. 이것도 하나 사자.”
강철의 말에 최용희가 고개를 돌렸다.
“이런 외출복은 이미 많아. 더 입을 것도 없다니까.”
“또 알아. 사두면 혹시 입을 일이 있을지.”
“내가 나갈 일이 뭐가 있다고…… 요즘 네 덕분에 엄마도 유명인사가 돼서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못하겠더라.”
“아니, 나중에 상견례 같은 것도 해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최용희의 눈동자가 또 한 번 커졌다.
“뭐, 상견례 너 설마…….”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겼어. 이제 좀 만나보려고.”
“누군데?”
“엄마도 알 거야. 지난번 우리 집에 왔던 엘리라고.”
“그렇게 이쁜 친구가 왜 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나이도 어리고 예쁘고, 참하던데…….”
그 말에 옆에 있던 이희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내가 봐도 이해가 안 되긴 해. 걔는 오빠 뭘 보고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컴퓨터에 ‘직박구리’ 폴더에서 뭘 보고 있는지 알면…… 웁웁.”
강철이 급히 이희진의 입을 막았다.
“더 입 열면 넌 오늘 빈손으로 돌아갈 줄 알아.”
“아잉, 오빠아.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한국 최고의 쾌남이 왜 이렇게 쪼잔하실까.”
“나 쪼잔한 거 이제 알았어?”
가족.
그들과 함께 있으면 거대 담론을 다루는 재벌이 아닌 한낱 인간 이강철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 강철에게 이희진이 치근덕거렸다.
“오빠아~ 나 가지고 싶은 거 사주기로 했잖아아~”
거머리처럼 찰싹 붙은 이희진을 떼려 실랑이를 하던 강철의 시야로 한 여성이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어, 여기서 만나네요.”
엘리.
그녀가 강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강철의 시선이 옆에 있던 이희진을 향했다.
“너…….”
“헤헤, 나 잘했지? 어차피 쇼핑할 거같이 하면 좋잖아. 끝나고 밥도 먹고.”
엘리가 먼저 최용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네요. 서지희라고 합니다.”
엘리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 보였다.
여자 세 명이 뭉치자 강철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머님 이것도 잘 어울리세요.”
“그, 그래?”
“네. 한번 걸쳐보세요.”
엘리는 적극적으로 쇼핑에 개입했다. 얼음 공주라 믿기 힘들 정도의 친화력이었다.
엘리가 추천한 옷을 걸쳐본 최용희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괘, 괜찮긴 하구나.”
옷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연예계 선배 연기자분들 스타일리스트들이 연세 있는 분들에게 회색 톤 추천을 많이 하더라고요. 앞으로 옷 쇼핑은 제게 맡기세요. 시간 나는 대로 도와드릴게요.”
강철이 거울로 시선을 향했다. 옷을 바꿔 입자 정말 자신의 어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귀티가 철철 흘러넘쳤다. 엘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옷만이 아니라 제가 잘 아는 피부과가 있는데 거기서 관리도 한 번 받으세요. 피부만 달라져도 확 달라 보이거든요.”
“그래, 엄마도 그런데 좀 다녀. 내가 카드도 줬잖아. 왜 이렇게 아껴 쓰는 거야.”
그게 답답했다. 자신이 천문학적인 돈을 번지도 수년이 흘렀건만 어머니의 씀씀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마 어머님이 가시면 할인도 될 거에요. 요즘 대표님이 워낙 핫한 인물이라서…… 그런 사람들 관계자가 오면 싸게 해주는 게 있거든요.”
할인이라는 말에 최용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정말이에요?”
“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평소에 이렇게 말이 많았을까 싶을 정도로 엘리는 대화를 주도했다. 강철이 그런 엘리를 의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렇게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나…….’
그 이유는 쇼핑이 다 끝나갈 때쯤 알 수 있었다.
최용희가 이희진의 옷을 골라주는 사이 엘리가 강철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부담스럽지는 않았어요?”
“하하, 네. 이렇게 친화력이 좋은 분인 줄 몰랐습니다.”
“저도 어른들에게는 잘해요.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아…….”
“어머니를 엄청 소중하게 생각하신다고 들었어요.”
강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잘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이건 뭐랄까. 마치 프로포즈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진지하게 만나기로 한 지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았는데 엘리는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엘리가 멍하니 있는 강철에게 말했다.
“지난번에 말했듯이 전 진지해요.”
이내 강철이 입을 떼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엘리! 이것 좀 봐줘. 이거 어울리나.”
옷을 고른 이희진이 그녀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강철은 살짝 윙크를 한 채 멀어져가는 엘리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비슷한 시각 나일.
그곳의 수석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스티브는 최근 심각한 갈등 속에 있었다.
“너 계속 다닐 거냐?”
가장 친하게 지내며 속내까지 전부 털어놓는 동료 개발자의 말에 스티브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스티브에게 동료가 말을 이었다.
“마이클도 갔잖아. 회사는 엉뚱하게 IBM 클라우드 사업 부문을 인수하는 데 돈이나 쓰고. 승자의 저주로 이제 서서히 침몰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
스티브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설마 그렇게 될까.”
자신이 이곳에 다닌 지도 7년이 넘었다. 한 회사에 이렇게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건 능력에 대한 대우, 성장하는 과실이 자신에게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7년은 절대 헛되지 않았고, 회사도 자신도 크게 성장해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제2의 집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스티브를 동료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았다.
“회사 무너지는 거 한순간이다. 너도 알잖아. 과거 거대 IT 기업들이 순간의 방심으로 어떻게 무너져 갔는지. 블랙베리가 저렇게 될지 누가 알았어? 마이스페이스는 또 어떻고.”
“……그래서 넌 이직하려고?”
동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야지. DVM 2.0 코드 봤냐? 환상적이더라. 마이클이랑 강철이 힘을 합치니까. 아주 괴물이 탄생했어.”
“그건…… 나도 보긴 봤지.”
DVM 2.0.
이제는 오픈 스택보다 인기 있는 가상화 솔루션이 되었다. 속도는 더 빠르고, 설치는 더 간편한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세계 최고의 개발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강철이 관심을 가지고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기 때문에 버그 픽스되는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리턴으로 그렇게 까지 만들 수 있을지 누가 알았겠냐. C나 자바로 만들었으면 저런 속도 안 나왔을 거야.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최초 리턴은 대용량 데이터 처리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지. 그걸 마틴이랑 협업해서 만능 언어로 만든 거고.”
동료의 이강철에 대한 찬양은 끝이 없었다.
“진짜 환상적이지 않냐? 언어의 마술사 마틴과 협업해서 만능 언어를 만들어내고, 가상화 솔루션의 아버지 마이클과 협업해서 DVM 2.0을 만들고. 이제 그와 함께 작업하면 세계 최고의 결과물이 만들어진다는 게 사람들에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동료의 말이 사실이기에 스티브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7년간이나 다닌 정든 회사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넌 결심했구나.”
동료도 함께 입사해 7년을 같이한 사람이었다. 그는 완전히 생각을 굳힌 것 같아 스티브는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야지. 여기는 더 나를 성장 시켜 줄 것 같지가 않아. 어쩌면 침몰하는 배일지도 모르고.”
“…….”
“넌 안 갈 생각이지?”
고심하던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남으려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회사에서 3분기 실적 발표를 진행했다.
-영업이익 : -2억 달러.
과도한 세일로 인해 나일 사상 최초로 적자가 발생한 것이다.
비록 적자액수는 2억 달러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장을 비롯해 구성원들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왜냐하면, 대산은 또 한 번 어닝서프라이즈를 기록하며 성장을 구가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즉 나일이 이제 침몰하는 배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 * *
영업이익 : -2억 달러.
상상하기 힘든 성적표를 받아든 데이비드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적자를 기록했단 말이지. 적자를…….”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보다 못한 비서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진행 중인 세일을 바로잡으면 바로 정상화가 될 겁니다. 이번 주를 기점으로 쇼핑몰이나 NCS에 대한 특별 세일 기간이 끝나니까 곧 흑자로 돌아설 겁니다.”
“같이 세일을 했는데도 대산은 또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다고 하던데…….”
그 말에 비서의 표정도 굳어졌다.
“네. 1조가량의 흑자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전 분기 대비 30% 이상 성장한 수치로 중국 진출이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IR 자료를 통해 밝혔습니다. 이 기세라면 올해만 5조가량의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강력한 세일 정책으로 인해 적자를 기록했고.”
“맞습니다.”
으드득.
데이비드가 이를 악물었다. 자존심이 상해 견디기가 힘들었다.
깊은숨을 내쉰 데이비드가 물었다.
“그래서 주가는요?”
“현재 –8% 정도 하락하고 있습니다. 재무적 투자자들도 조금씩 지분을 줄여가고 있고요. 그때부터 더 과하게 하락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승자의 저주에 대한 우려도 강하게 반영되고 있고요.”
“지금 이 시장은 선점이 중요합니다. 승자의 저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사측에서도 해당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해명을 하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성장 산업이다. 먼저 점유율 선점이 중요하다.”
“알겠습니다. 이만 나가보세요.”
“네.”
살짝 고개를 숙인 비서가 자리를 떠났다. 데이비드가 팔짱을 낀 채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뭔가 잘못되고 있어…….’
한 번도 흑자기조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세일 조금 했다고 적자를 기록하다니.
데이비드는 심적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조금 힘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의 협업에 드론 출시. 그리고 IBM 인수까지 진행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한 셈이야. 그런데도 성장을 못 한다…….’
만약 이럼에도 회사가 더 나아가지 못하면 이건 자신이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강철.
그 사람이 너무 잘하기 때문이다. 마치 나일이 폭풍 성장할 때 기존의 대형 서점들을 빠르게 잠식한 것처럼.
그때의 기억이 데이비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걸 이겨내지 못한 내가 잡아 먹힌다는 뜻이 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살짝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데이비드가 책상 위에 있던 인터폰을 눌렀다.
“개발팀장들 전부 회의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뭐라도 해야 했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고.
스티브는 팀장으로부터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당장 6개월 안으로 대산보다 더욱 빠른 성능의 가상화 시스템을 만들라는 말씀이세요?”
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6개월 안에. 보스 특명이야.”
“그 건은 추진하다가 실패했잖아요. 그래서 내부적으로 차라리 DVM 2.0을 적용하자고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다고 하셨고요.”
“보스 생각이 바뀌었어. DVM 2.0을 적용해도 된다고 하더라. 대신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안 돼.”
“그런데 팀장님도 아시다시피 그걸 적용한다고 해도 마이크로 소프트에서 만들어준 OS와 최적화가 안 돼 있어서 대산만큼의 속도는 안 날 텐데요.”
팀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이대로 기술력이 계속 뒤처지다간…….”
팀장이 뒷말을 삼켰다. 스티브도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올지 대충 짐작이 갔기에 표정이 심각해졌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요.”
“점유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으니까. 너도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 써봤잖아. 우리 것이랑 그게 있다면 누구 거 쓰겠어?”
“저는…….”
이번에는 스티브가 뒷말을 삼켰다.
“아마 다 비슷할 거야. 다만 마이그레이션이 어려우니까. 주저하는 것뿐. 애저 다니는 친구도 비슷하다고 하더라. 다들 대산으로 넘어가려는 추세야.”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 최대한 빨리 만들어보자. 안 그러면 정말 힘들어질 것 같으니까.”
스티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혹시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한국.
강철은 20명은 족히 들어갈 법한 회의실에서 주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고를 한 건 기획전략 실장이었다.
“현재 전체 점유율 27%로 16%에 불과한 애저는 완벽하게 따돌렸습니다. 다만 나일이 최근 IBM을 인수하면서 점유율이 39%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다시피 수익률이 악화되어 사상 최초 영업 적자를 기록했기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략실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구나 나일은 마이크로소프트에 OS 사용 로열티를 비롯해 여러 비용이 나가지만 우리는 자체 개발이 대부분이라 OPM이 30% 넘고요. 덕분에 이번 분기에도 어닝 서프라이즈를 기록했습니다.”
강철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하는 전략실장의 목소리도 올라갔다.
“현 추세로 보면 올 한 해 영업이익이 대략 6조를 기록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년 10조 달성도 무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에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두 클라우드 사업부 인수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음 주에 잔금을 치르고 나면 완전히 마무리됩니다. 그러면 바로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로의 마이그레이션이 시작됩니다. 마이그레이션 비용을 대산에서 지급한다고 하자 기존 서비스 이용자들의 100%가 대산을 선택했습니다.”
“VM웨어는요?”
“VM웨어 잔금일은 한 달 후입니다. 해당 업체가 가지고 있는 특허권에 우리가 출원한 특허를 합치면 전 세계에서 클라우드 서비스 관련 특허 출원 건수로는 대산이 1위가 됩니다.”
특허 출허 1위.
그 사실을 말하는 전략실장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강철은 표정을 굳혔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대대적인 투자 단행으로 회사가 가파르게 몸집을 불린 만큼 한 발 삐끗하기만 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다들 열심히 한 덕분에 회사가 폭발적인 성장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분기에 특별 상여금을 지급하도록 하죠. 박성철 본부장님.”
박성철 본부장.
사내 인사를 담당하고 있는 임원이었다. 박성철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본봉의 50% 수준에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강철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임원들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조금만 더 수고합시다. 세계 1위가 눈앞까지 왔으니.”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0여 명이 넘는 임원진이 강철의 한 마디에 고개를 숙였다. 이제는 완전히 한 기업의 오너 다운 모습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강철은 다시 회의실을 찾았다. 회사의 핵심 개발자인 천준호가 ‘리턴’ 언어 관련 회의요청을 해 왔기 때문이었다.
천준호가 강철을 보며 툭 농담을 던졌다.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듭니다. 이러다 우리도 전부 잊어버리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하하, 천 팀장님을 잊어버리면 어떡합니까. 그러면 우리 회사 기둥이 뽑히는 건데.”
“농담이라도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렇게 잠시 사담이 오가고 천준호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리턴’언어 관련해서 마틴이 중요한 제안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대표님께서 최근 바쁘셔서 확인을 거의 못 하시는 것 같아서요.”
“보긴 봤습니다. 언어의 구조 자체를 변경하고 싶다는 제안을 했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천 팀장님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누려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야기 나누기가 편할 것 같습니다. 마틴의 의견은 리턴을 C처럼 좀 더 머신에 가깝게 만들어 속도를 높이자는 제안인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아시겠지만 리턴은 개발 편의성을 위해 자바의 JIT 같은 컴파일러가 있어서 동적으로 번역해 널 참조나 배열 인덱스 범위를 확인해 줍니다. 하지만 편의성은 높지만, 속도는 조금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죠.”
천준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대표님의 노력 덕분에 C만큼의 성능을 내고 있지만, 마틴은 더 빠른 성능을 위해 C처럼 처음부터 기계어로 컴파일을 하자고 합니다.”
이를테면 컴파일에서 단계를 하나 빼자는 말이었다. 그렇게 되면 속도는 확실히 빨라지지만, 개발 편의성은 떨어지게 된다.
천준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말 그게 된다면 현재 개발 중인 DVM 3.0의 성능이 한층 더 빨리 지게 될 것 같기는 한데…… 아시겠지만, 편의성이 떨어져 버그가 더 생기거나 개발 기간이 더 늘어날 우려가 있긴 합니다. 모든 개발자가 마틴이나 대표님처럼 실력이 좋은 건 아니라서요.”
“흠…… 그러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기계어로 바로 번역이 되면서 편의성이 높은 것이군요.”
“네.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기계어 번역 전에 과정을 하나 더 두면 그 과정만큼 속도가 느려질 테니까요.”
고민하던 강철이 툭 하고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러면 기계어로 번역하고, 널 참조나 배열 크기 확인 같은 편의성을 제공하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천준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네?”
“기계어란 곧 어셈블리어. 그 수준에서 여러 편의 기능을 제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표님 어셈블리어가 간단한 게 아닙니다. 그 안에서 참조 값이나 배열 크기 같은 것을 확인한다는 게…….”
그 말에 강철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마 마틴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요. 이참에 지금 바로 연락을 해보죠.”
강철의 그 말에 바로 화상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마틴의 생각은 강철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하하, 역시 말이 통해서 좋습니다. 지금 연구를 하고 있긴 한데…… 확실히 어셈블리 레벨에서 처리하려니 쉽지가 않더군요. 휴리스틱 하게 해결해 보려 하고 있는데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어떻게 최적화하느냐의 문제일 겁입니다. 몇 가지 생각해 둔 알고리즘이 있으니까. 저도 한 번 테스트해 볼 테니 코드 올려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옆에 있는 천준호는 놀란 눈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깨닫고 있었다.
‘난 아직 멀었어…….’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따라왔다고 생각했지만, 강철은 어느새 또 수십 보 앞에서 걷고 있었다.
천준호는 마틴과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강철을 존경 어린 눈빛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