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거세지는 견제(1)
한국 충주.
강철이 비서와 함께 충주를 찾은 이유는 오늘 드론 공장 가동식이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공장 가동 시작하겠습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공장장이 지시했고, 이내 거대한 공장의 전등이 하나씩 켜지며 가동을 시작했다.
위이이이이잉.
공장 안에 가득 찬 기계들에 전원이 들어가면서 소음을 일으켰다. 강철에게 그 소리가 마치 아름다운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1번 라인 이상 없습니다.
-2번 라인 이상 없습니다.
-3번 라인 이상 없습니다.
…….
라인별 이상 유무 보고가 끝나고, 공장장이 최종적으로 한 번 더 체크 했다.
“전체 라인 이상 없어?”
중앙통제실에서 화면을 보며 지켜보던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럼 가동 시작하자.”
“네.”
이내 공장장이 버튼을 누른 후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지금부터 작업 시작하겠습니다. 작업자분들은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OK 신호가 떨어지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공정의 60%가량은 자동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사람이 해야 하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강철이 뒤에 있는 비서를 보며 물었다.
“자동화율 90% 달성은 언제쯤 됩니까?”
“현재 뉴욕 랩스와 디스트릭에서 함께 산업용 로봇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마 올해 말이면 구체적인 성과가 나와서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 100%가 되도록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네. 관련해서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전면에 설치된 유리를 통해 공장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서서히 기계들이 움직이며 드론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 강철에게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나일의 회장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 비밀리에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요?”
한 기업의 수장들은 무척이나 바쁜 사람들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만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럼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클라우드 서비스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최근 애플을 고객사로 만들면서 단숨에 빅 4로 올라섰습니다. 거기에 유럽, 미국 지역에 데이터 센터 건설을 발표함으로써 우리가 강력한 경쟁자가 되겠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강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담합을 할 것 같진 않은데…….”
“기획팀에서는 기술 제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OS의 절대 강자입니다. 우리가 만든 원스 같은 OS를 만드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에 강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나일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손을 잡으면 가능성이 크긴 하겠군요.”
하지만.
1, 2개월 사이에 만들어지진 않을 것이다. 이건 자신을 비롯해 최고의 천재들이 모여 만든 OS다. 마이크로소프트에 자신과 비슷한 천재들이 수두룩하면 모르겠지만…….
‘하긴 거긴 천재들이 모인 곳이긴 하지.’
아직 자신도 그들의 저력을 잘 모른다. 당장 얼마 전 나일에서 건너온 NCS 총 책임자도 아주 뛰어난 사람이었다.
자신보다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에 근무하는 개발자들 수준은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최소한 1년은 걸릴 것이다.
“기획팀에서 예상하기로는 6개월 정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래서 대산에서도 관련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왔습니다.”
“6개월로는 안 될 겁니다. 최소 1년은 필요해요.”
강철의 확신에 찬 말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1년이군요. 그럼 기간 설정은 그렇게 하고, 대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반론을 폈을 것이다. 하지만 강철과 함께 하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의 말에 수긍하는 순간이 늘어났다.
“네. 그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합시다. 리얼리티 디바이스 매각 건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 건은 다음 달 마지막 잔금 일입니다. 잔금이 끝나면 계약도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이후에…….”
드론이 만들어지는 와중에도 비서의 설명이 이어졌다. 강철은 중앙통제실에서 드론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며 그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강철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 할 때.
삐빅.
거리는 경보음이 들렸다.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수가 없었다. 강철이 몸을 돌리며 공장장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별일 아닙니다. 불량품이 하나 생겼다는 뜻인데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강철이 예리한 눈빛으로 공장장에게 물었다.
“드론 생산 예상 수율이 어떻게 됩니까?”
“현재 88%로 예상 중입니다. 생산해 나가며 보완책을 마련해 90%를 만들 생각이고요.”
“그 방안은요?”
“회사 내부 데이터 분석팀에서 센싱된 데이터를 수집해 수율 관리를 해주기로 했습니다.”
공장장의 막힘 없는 대답에 강철이 비서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현재 그렇게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순간.
또 한 번 삐빅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불량품이 만들어졌다는 뜻이었다. 공장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 하하. 이게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88%의 확률로 불량이 발생할 수 있는 거라…….”
하지만.
또 들리는 ‘삐빅’ 소리에 공장장의 이마에서 삐질 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강철이 미간을 찌푸리며 통제실 직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현재 수율이 얼마나 됩니까?”
회사 대표의 질문에 직원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현재까지 80%입니다.”
20%의 불량품.
금액으로 치면 엄청난 돈이었다. 강철이 비서를 보며 지시했다.
“이 건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또다시 삐빅.
그리고 직원이 보고 있던 화면에서 80%에 달하던 수율이 1% 떨어졌다.
79%.
결국, 80% 선도 깨진 것이다. 그러자 강철이 비서에게 지시했다.
“여기에 제 자리 세팅하세요. 아무래도 해결하고 서울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 *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그곳에서 OS를 개발하고 있는 토니 에임스가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버스를 하긴 했는데…… 이해가 안 되네.”
“뭐가?”
“이거 만든 언어 자체가 처음 보는 거야.”
옆에 있던 동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대부분 OS가 C로 만들잖아. 그런데 이건 C, 자바, C++ 어느 것도 아냐. 완전 첨 보는 언언데.”
토니가 보고 있는 건 강철이 만든 OS인 ‘원스’. 그걸 리버스해서 살펴보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가상화 환경에 최적화된 OS를 개발하라.
위에서 그런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버스 과정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 언어를 유심히 보던 동료가 한 단어를 중얼거렸다.
“이거…… 리턴 아냐?”
“리턴?”
“왜 얼마 전에 새롭게 보고된 프로그래밍 언어. 이강철이 대용량 데이터 처리에 적합하게 만들었다고 했던 거.”
“아…… 그거. 그런데 그걸 왜 OS 개발하는 데 썼지? OS는 특히나 커널과의 연동이 중요하잖아.”
“너 마틴 오맬리 알지?”
토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틴 오맬리.
업계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였다. 토니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동료가 그런 토니를 보며 말했다.
“마틴이 리턴 개발같이 하고 있잖아.”
“진짜?”
“너야 이 골방에서 OS 연구하느라 모르겠지만 그래서 요즘 리턴이 꽤 화젯거리인가 봐. 버전이 업데이트될수록 대용량 데이터 구현에서 만이 아니라 웹 환경, 모바일 환경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범위가 넓어지고 있어서.”
“그러면 성능이 떨어지잖아.”
그 말에 동료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마틴 그렇게 만들었겠냐?”
“아…… 하긴.”
“마틴이 항상 말했잖아. 전 세계를 하나의 언어로 통일하고 싶다. 현실 세계에서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불어 등등 여러 언어가 존재하지만, 굳이 온라인 세계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럼 이게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마틴이 찍은 언어란 말이지?”
동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좀 신기하긴 하다. 이걸로 OS도 만들 수 있다니…….”
그러면서 유심히 리버싱된 화면을 살펴보았다.
리버스를 한다고 해서 코드를 원본 그대로 복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리턴 특유의 간결한 문법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흠…… 리턴, 리턴이라…….”
“이참에 우리도 리턴으로 만들어 볼까?”
그 말에 토니가 오돌토돌 돋아난 턱수염을 문질렀다.
“리턴으로?”
“이강철도 리턴으로 이걸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토니는 부정적이었다. OS 세상에서 C보다 더 빠른 언어는 어셈블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셈블리로 이걸 개발할 수는 없기에 C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토니는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냥 C로 하자. 괜히 어설프게 건들여 봤자. 오히려 예상치 못한 버그만 터져 나올 수도 있어.”
“뭐, 하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일단 대략적인 설계는 머릿속에 그려 놓기도 했고. 오로지 가상화! 그렇게 되면 OS 자체도 엄청나게 가벼워지니까.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지도 않더라.”
토니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동료는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토니 에임스.
누가 뭐래 하도 최고의 OS 개발자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었다.
* * *
데이비드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최근들에 들은 보고 중 그나마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설계는 끝났다고 합니다. 곧 개발에 착수하면…… 앞으로 2달 정도면 프로토 타입은 완성될 거라고 합니다.”
“2달이면 초기 버전을 볼 수 있다. 확실히 빠르군. 빨라.”
“아무래도 OS 전문가가 모인 집단이다 보니 확실히 속도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론 개발 팀장도 낭보를 전해 왔습니다.”
“어떤?”
“서치에서 넘어온 머신 러닝 전문가가 관련 시스템 개발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최신 드론에 적용해서 테스트를 진행해 보니 트리스 원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성능 정도를 구현했다고 합니다.”
“비슷하다?”
“네. 벤치마킹 테스트를 해보면 종합 점수에서 조금 떨어지기는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느낄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좀 더 테스트를 해봐야 하긴 하는데…… 일단은 고무적인 결과가 나온 모양입니다.”
데이비드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주 좋군요. 이렇게만 되면 곧 대산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요즘 대산의 동향은요?”
“최근 한국에 건설된 드론 공장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문제?”
“네. 수율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해서 이강철이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다 합니다.”
그 말에 데이비드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거 이렇게 삼 박자가 딱딱 맞아서야. 우리에게 완벽한 기회가 찾아온 격이군요.”
“하지만…… 조지 케년은 여전히 같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네. 여전히 지분을 매도할 투자자를 찾아다니는데 사이즈가 너무 커서 여러 사모 펀드에 일정 부분씩 매도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데이비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어차피 나일은 다시 날아오를 테니까.”
* * *
최윤아가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아직도 작업 중이라…….”
강철의 비서에게 연락했더니 충주 드론 생산 공장에서 수율 개선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어 연락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전혀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윤아는 예전처럼 마냥 기다려 줄 수 없었다. 아주 강력한 경쟁자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리플 엘리.
최근 연예계를 중심으로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염문설이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 기획사를 통해 살짝 압박을 넣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침없이 달려드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덕분에 최윤아의 불안감은 조금씩 커졌다.
“설마 걔랑 있는 건 아니겠지.”
그때.
달칵 소리와 함께 최윤아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최윤아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온 비서에게 물었다.
“위치 파악됐어요?”
“네. 현재 드론 생산 1공장에 있는 건 맞습니다. 최근 수율 문제를 겪고 있어서 그걸 해결하려 직접 두 팔을 걷어붙였다고 합니다.”
“엘리는요?”
“5집 준비를 위해 잠시 휴식 기간이라고 합니다. 이후는 개인의 사생활이라 파악해 보진 않았는데…… 사람 붙여 볼까요?”
그 말에 최윤아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자칫 잘 못 하다가는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추후 생각해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엘리가 이강철 대표님의 동생분과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희진?”
“네. 둘이 아주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간.
최윤아는 머리를 커다란 돌로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맞다. 이희진…….’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그 주변 사람부터 공략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었다. 하물며 이희진은 자신의 미래 시누이가 될 사람이 아닌가.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왜 생각을 못 했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최윤아는 핸드폰을 들었다. 번호는 이미 저장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후.
이희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압구정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이희진이 모자와 마스크, 선글라스로 중무장한 엘리를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최윤아 씨. 우리 오빠랑 같이 일을 하시는 분.”
이희진이 이번에는 최윤아를 보며 말했다.
“여기는 트리플의 엘리예요.”
최윤아가 엘리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괜찮…… 습니다.”
“희진 씨에게 아주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그리고 희진 씨 이제 그냥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줄 수 있어요? 저도 편하게 희진아라고 부르면 어떨까 하는데.”
이희진이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 네. 그럴게요. 언니.”
최윤아.
무려 VK 그룹의 자제였다. 그런 사람이 하는 부탁을 평범한 소시민인 이희진이 차마 거절하기 힘들었다. 최윤아가 없을 때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지만, 막상 앞에서 만나니 쉽게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최윤아가 그런 이희진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희진이도 알겠지만 최근 강철 씨와 여러 작업을 하면서 서로 호감을 느끼고 만나는 중이야. 그런데도 내가 강철 씨 동생인 희진이에게 너무 신경을 못 써준 것 같아서.”
마치 선전포고 같은 그 말에 엘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중무장했기에 다른 이에게 보이지는 않았다.
“아…….”
“일단 같이 기분전환부터 하러 갈까? 언니가 오늘 풀코스로 대접할 테니까.”
이희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최윤아를 보았다.
“푸, 풀코스요?”
그런 이희진을 최윤아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미용실.
메이크업.
그리고 백화점 VVIP실까지.
최윤아는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은 이희진의 욕구를 꿰뚫어 보았다.
“언니 이거 너무 예뻐요.”
“그래? 그럼 하나 사자.”
그 말에 이희진이 급히 가격표를 확인했다.
‘일, 십, 백…… 이천?’
이희진이 고른 팔찌 하나의 가격이 이 천만 원이었다. 그걸 최윤아가 선뜻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그 모습에 엘리의 동공이 지진이 난 것처럼 떨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차마 집으로 가지도 못 하고, 둘을 쫓아다닌 것이다.
엘리도 전 세계에서 인기를 얻는 톱스타였다. 돈은 있을 만큼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하나에 수천만 원 하는 액세서리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 나도…… 사줄게. 골라봐.”
그 말에 이희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최윤아를 보면서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괘, 괜찮아요. 언니. 이런 거 받으면 저 오빠한테 쫓겨나요.”
그 말에 최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 응? 왜 쫓겨나?”
“저한테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주지도, 함부로 받지도 말라고 했거든요. 만약 받는다면 네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받으라고.”
“아…….”
“메이크업이나 미용실은 나중에 제 용돈으로 어떻게 보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도저히…….”
이희진이 고개를 절레 흔들며 들고 있던 팔찌를 내려놓았다.
현재 한 달 용돈이 100만 원이었다. 팔찌는 그 돈으로도 감당이 안 되는 돈이었다.
이걸 받았다가 오빠에게 걸리면 아마……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최윤아가 이희진의 그런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그 오빠에 그 동생인가…….’
그 눈빛에는 호감이 깃들어 있었다. 재벌이라고 해서 돈을 펑펑 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절제.
검소.
절약.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런 교육이었다. 이희진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마음만 받을게요.”
“그래. 그럼 다른 거 골라봐. 언니가 첫 만남을 기념해서 하나 사주고 싶어서 그래.”
하지만 이희진은 마른 침만 삼킬 뿐 쉽사리 고르지 못했다. 최소 몇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물건 들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것들을 사 들고 들어간다면 오빠에게 걸리지 전에 엄마한테 다리가 부러질 것이다. 하지만 눈빛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집안의 제재로 인해 사지 못할 뿐 그런 욕망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희진을 보며 최윤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머님 선물 하나 골라볼래? 지금까지 선물 하나 못 사드린 것 같아서. 이왕이면 너도 할 수 있고, 어머니도 할 수 있는 그런 범용적인 걸로.”
“어, 엄마 선물이요?”
최윤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어머님 선물. 네가 보는 눈이 가장 정확할 거 아냐. 지금까지 선물도 하나 못한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쓰여서.”
엄마 선물이라…….
그러면 오빠도 아무 말 하지 못할 것이다. 엄마도 당연히 말을 못 할 테고.
이희진의 입가에 미소가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 그럴까요?”
최윤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골라봐. 꼭 어머니가 좋아하실만하신 거로. 나도 네 오빠한테 점수 좀 따야지.”
“오빠야 엄마한테 껌벅 죽죠. 워낙 어릴 때부터 잘못한 게 많아서. 엄마한테 선물하면 엄청나게 좋아할 거예요.”
그런 모습을 엘리가 입을 떡 벌린 채 보고 있었다.
‘여우다…… 그것도 백 년 묵은 여우야…….’
그리고 절감했다. 자신이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비슷한 시각.
강철이 귀를 후비며 중얼거렸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탁탁.
손에 묻은 이물질을 털어낸 강철이 팔짱을 낀 채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시뮬레이션 결과 수율이 88%까지 올라왔습니다.
모니터에는 사내 채팅으로 본사에 있는 인원들의 보고가 올라와 있었다.
강철이 답장을 보냈다.
-95%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한 몇 주는 더 소요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사용 중인 알고리즘에서 다중공선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어서요.
-그 문제는 일단 제가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 이 틀 정도면 해결될 거 같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더 짧아질 겁니다.
-네.
대화를 마친 강철은 듀얼로 설치된 다른 모니터를 보았다.
Gradient Boosted Trees.
현재 수율 개선에 사용되고 있는 알고리즘이었다. 이 알고리즘을 적용해 특정 환경에서 예측되는 수율을 계산했고, 가장 높은 수율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강철은 최적의 환경이 나올 때까지 알고리즘을 개선하며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있었다.
그런 강철에게 비서가 다가왔다.
“나일에서 가상화 전용 OS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걸 적용한 서버들이 테스트 환경에 올라왔고, 오픈 베타 사용자들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성능은요?”
“원스와 벤치마크 결과 부팅속도 만 보면 더 빠르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확실히 이를 갈고 만들었나 보군요.”
“마이크로소프트와 합작해서 만든 결과물이니까요. 아마…… 상당한 성능을 자랑할 것 같습니다. 벌써 개발을 완료해 오픈 베타를 진행한다는 건 앞으로 몇 달 안에 상용화될 거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택배 드론 버전 2를 발표했습니다. 이 드론도 자사의 드론처럼 실내 배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 테스트 영상을 아이비디오에 올렸고요.”
비서가 태블릿으로 해당 영상을 플레이해 보였다. 연출된 영상 속에서 나일의 택배 드론은 트릭스 원과 비등한 모습을 선보이며 건물 내에서의 배송에 멋지게 성공했다.
강철이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주리룬의 말에 따르면 뉴욕 랩스와 협업으로 트릭스 3을 곧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긴 하지만 나일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기술격차를 좁힐 줄은 몰랐는지 꽤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도 좀 당황스럽군요. 이대로 몰락하지 않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확실히 저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최소한 1년.
그 정도의 기술격차는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따라잡힐 줄은 몰랐다.
강철의 표정을 살피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출시기념 할인 판매를 진행하면서 우리 쪽에 치명타를 가하려 할 가능성이 큽니다.”
공장 수율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마당에 드론과 가상화 솔루션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었다.
“일단은 가상화 쪽은 마이클에게 드론은 주리룬에게 맡겨봅시다. 그래도 안 되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면서 상황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일에서도 원클릭 서비스를 출시하고, 드론 택배를 실전에 배치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비서의 예상대로 가격 할인을 통해 고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MoM +14%.
최초 역성장을 딛고 바로, 플러스 성장을 일궈낸 것이다. 그건 곧 대산의 점유율이 떨어진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MoM +30%.
전월 대비 80%씩 성장하던 클라우드 서비스의 성장률이 반 도막이 나버린 것이다.
강철도 더는 충주 공장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 * *
윌마트.
그곳의 CEO 피셔 에임스는 요즘 여느 때보다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지난달 대비 성장했습니다.
성장, 성장, 성장.
강철의 온라인 쇼핑몰이 끌고, 자신들의 오프라인 매장이 밀면서 회사가 매달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 고무적인 점은 그 성장이 미국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인도.
필리핀.
태국.
유럽.
등등 한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윌마트의 온라인 부문을 넘기면서 한국을 제외한 해외지역 온라인 사업은 대산이 맡고, 오프라인 사업은 윌마트에서 맡기로 했다.
해외지역 빅트리에서 판매되는 상품 역시 윌마트를 통해 유통되는 것이 핵심이었다. 덕분에 빅트리의 성장이 윌마트의 성장으로 연결된 것이다.
하지만 그 성장에 처음으로 제동이 걸렸다.
“나일에서 너무 공격적으로 나오는 것 나오는군요.”
그 말에 화상통신 반대편에 있는 강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저희 쪽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전 세계에 걸쳐 대대적인 할인 판매를 진행했다. 가격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피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도 할인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윌마트 만이 아니라 빅트리에서도 일정 부분 부담을 지면서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일단 저희 쪽에서도 고민 중이니 곧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중국 진출 건은 아무래도 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국 내 산업 보호 조치로 인해서 오프라인만이 아니라 온라인 유통도 힘들 것 같습니다. 저희가 몇 번이나 뚫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더군요.”
-그 건에 대해서는…… 저희도 라인이 있으니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윌마트에서 진출하지 않는다면 저희 자체적으로 진행해도 되는 문제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리스 차기 버전에 대한 내용인데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건 현재 개발 중에 있습니다. 전사적으로 역량을 집중하고 있으니 곧 구체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 중입니다.
피셔가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나일의 자본력은 어마어마합니다. 우리가 가격전쟁을 벌일 수 있는 기간이 한정적이라는 뜻입니다. 결국에는 패배할 테니까요. 최적의 타이밍에 승부를 봐야 합니다.”
피셔가 고개를 끄덕이는 강철을 향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과거처럼 트리스 차기 버전이나 새로운 VR 기기 발표 같은 빅트리에서만 팔 수 있는 제품을 출시 한 이후 강력한 세일을 통해 소비자를 끌어모아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철이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뚝.
화상 통화가 끝나고, 강철이 두 손을 깍지 낀 채 전면에 설치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MoM +30%.
나일이 차기 OS, 택배 드론을 발표하고 대대적인 세일을 진행하자마자 대산의 성장률이 반 토막이 나버렸다.
애플이 자사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이것마저 지키기 쉽지 않았으리라.
“개발 상황은 어떻습니까?”
“트리스 3는 6개월 정도가 소요될 것이라 보고했습니다.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의 업그레이드도 비슷한 시간이 걸릴 것이고요.”
“그때가 되면 성장률이 반 토막이 아니라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르는데…….”
“현재도 가용한 인원을 최대로 돌리는 중이라서 개발 기간을 앞당기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1. 드론 생산 수율.
2.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
3. 차기 드론 개발.
혼자서 이 세 가지를 전부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당장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가격으로도, 기술로도 당장 앞서 나갈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좋은데…….’
고심하던 강철이 비서에게 물었다.
“혹시나 가격이나 기술 말고 나일과 경쟁할 부분은 없습니까?”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한 가지 있긴 합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혹시 이번 ‘디벨로퍼’ 관객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1,400만을 넘었다고 하더군요. 집으로 가면 매일 스코어를 듣고 있어서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넷플러스를 통해 방송되는 영상은 아직도 1위를 기록 하고 있습니다. 과거 촬영하셨던 ‘더 스타트업’이 그 뒤를 잇고 있고요.”
강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가 그런 강철을 보며 말했다.
“덕분에 회사 이미지가 아주 좋아졌습니다. 대표님은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에 비교되고 있고요. 대중들은 이런 스타 CEO 기업들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CEO와 해당 회사의 제품을 동일하게 여기며 제품 자체를 섹시하게 느끼는 거죠.”
마케팅 효과가 있다는 말이었다. 강철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다행이군요. 마케팅 효과가 통하고 있어서.”
“아이폰은 가격이 더 비쌈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충성 고객이 상당합니다. 여러 벤치마크 결과에서 마르스 폰이 더 뛰어남에도. 말씀하신 마케팅 효과죠.”
“흠…….”
“또한, 세상에 여러 전기차가 존재하지만, 테슬라는 전기차의 대명사라 여기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테슬라와 비슷한 성능의 전기차는 이미 존재합니다. 또한, 테슬라의 장점인 자율주행기술의 경우에는 GM에 비교해서도 아래에 있다고 여러 매체에서 이미 발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시가총액은 월등하고, 소비자들은 테슬라를 선택합니다. 마치 미래 테슬라만이 남을 것처럼 생각하면서요.”
“마케팅 효과다…….”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닐 겁니다. 시장을 선점했으니까요. 하지만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걸 잘 이용하면 우리 쪽에서도 기회가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흠…….”
“트리스 원, 원스, 리턴, 아이체크, 아이온 게임즈. 지금까지 대표님이 만들어내신 것들은 전부 혁신의 아이콘이 되어 있습니다. 워리어의 경우는 이미 충성 고객이 엄청나고요. 마케팅만 제대로 한다면 빅트리나 대산 클라우드 서비스에서도 그러한 고객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최초로 온라인 마켓이나 클라우드 서비스를 만들진 않았지만 원클릭 서비스나 드론 택배는 최초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 부분과 대표님을 잘 부각하면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가 살짝 흥분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물론 단순 비교는 어렵습니다. 빅트리는 고유의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심 비서 말을 종합해 보면 마케팅을 통해 이 난국을 타파하자는 말이군요.”
“네.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고심하던 강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일단 마케팅 시나리오 한번 봅시다. 그 시나리오로 진행되었을 때 매출이나 영업이익이 어떻게 되는지도.”
그 말에 비서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여기 준비해 둔 마케팅 방안입니다.”
강철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역시 제가 비서는 참 잘 뒀습니다.”
강철의 칭찬에 비서가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했다.
* * *
마케팅.
그걸 한다고 무작정 TV 광고를 하는 건 아니었다.
강철의 강점은 ‘기술’이다. 마케팅팀에서는 이 점이 부각되길 원했다.
-원스 논문 발표.
-‘리턴’ 언어 학회 발표.
-W3C(World Wide Web Consortium) 기술 제안
-DVM 버전 업 설명회.
등등.
강철이 기술 관련 활동을 강화하는 것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았다.
이런 강철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아이비디오를 통해 내보내면서 ‘기술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어필 하는 것이다.
또한, 자사의 비핵심 기술을 오픈 소스로 공개해 폐쇄적 정책을 펴는 나일과는 반대편에 서도록 기업의 포지션을 잡았다.
마치 안드로이드 진영의 반대편에 애플이 있는 것처럼.
그러던 차.
또 하나의 낭보가 날아들었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공공 기관 클라우드 서비스로 자사 제품을 선택했습니다. 첫해에만 400억 규모로 발주가 나고, 차차 2천억까지 규모를 늘려갈 것이라 합니다.”
애플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까지.
대형 고객사 두 곳을 유치함으로써 단숨에 손익 분기점을 넘어 영업이익이 수백억을 넘긴 것이다.
이는 곧 할인 여력을 키워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데이비드도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었다.
“가만히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군요.”
“네. 하지만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기술에서부터 현금 동원력까지 어느 것 하나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가상화 OS 테스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제 서버 300대에 테스트 중입니다. 이번 테스트를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실 서버에 적용될 겁니다. 원클릭 서비스는 다음 주부터 오픈될 거고요.”
“드론은요?”
“새로운 드론이 현재 300대가량이 실 운용 중입니다. 확실히 대산의 드론보다는 성능이 조금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소비자가 느끼는 차이는 미미하다 보니 세간의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쪽 공장에 추가 발주가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물류비도 줄어들 테니, 줄어드는 만큼 해당 건에 대해 세일을 진행하세요. 윌마트-빅트리 연합에서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가격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듣자 하니 대산 쪽에서 기술 기업으로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서 각종 학회 참가, 논문 발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하던데…….”
“그뿐만 아니라 비핵심 기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공개하면서 오픈 소스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개발자들의 호응을 받고 있고요.”
“흠…….”
“NCS나 대산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 고객층이 개발자들이다 보니 꽤 많은 수가 다시 대산 쪽 서비스 이용을 검토하는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우리도 조치를 취할 까요?”
“그럼…… 우리도 지금까지 나온 기술들 중 선별해서 쓸만한 것들로 대중에 공개하도록 합시다. 서치나 페이스북처럼 오픈 소스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도록 하고. 이왕이면 첫 시작으로 그게 좋겠군요. NVA.”
NVA.
NCS의 기반 시스템이 되는 가상화 솔루션으로 강철이 공개한 DVM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기술이었다.
데이비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물론 전부를 공개하는 건 안 됩니다. 논문 수준으로 발표하면서 과거 초기 버전에 대해 공개하도록 합시다. 그 정도는 발표돼도 우리 시스템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테니까요. 개발자들에게 충격을 던지면서 실리는 취하는.”
“알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github NCS 카테고리에 새로운 코드가 하나 올라왔다.
NVA(NCS Virtual Architecture.)
지금까지 나일이 이런 식으로 코드를 공개한 적이 없었기에 수많은 개발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다운을 받았다.
물론 그중에는 강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데이비드는 이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비록 초기 버전이지만 그걸 본 강철이 어떤 걸 만들어낼지.
* * *
강철의 집무실.
비서가 강철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이번에 나일에서 자사의 NVA라는 프로젝트를 공개했습니다. 마이클의 말로는 NCS를 만들 당시의 초기 버전이라는데 현재 DVM에 적용할 만한 게 없는지 검토 중입니다.”
강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갑자기 공개라니 더구나 말씀하신 대로라면 핵심 프로젝트 같은데요. 그걸 그렇게 간단하게 공개했단 말입니까?”
“같이 발표한 논문을 살펴보면 초기 버전으로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이클도 당시 개발에 관여했지만, 지금은 아예 쓰이지 않는다고 했고요.”
비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최근 대산이 DVM을 비롯해 여러 시스템을 오픈소스로 공개하고, 기술 활동을 펼치자 그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것으로 파악 중입니다. 우리가 기술 기업으로의 이미지를 가져가는 게 못마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걸 던져서 NCS를 이용하는 주류인 개발자들에게 호응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게 기획팀의 분석입니다.”
강철이 턱 주변을 문질렀다.
“흠…….”
“관련해서 자세히 검토 후에 적용할 부분이 파악되면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네. 그 건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드론 개발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를 한 장 넘겼다.
“하드웨어는 개발이 완료되었고, 그 안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테스트를 진행 중입니다. 과거보다 속도는 빠르고, 전력은 더 적게 소모되도록 설계되어 한 번 기동을 시작하면 최소 2시간은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2배 늘어나는 덕분에 운용 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합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기에 딱히 나무랄 만한 점이 없었다.
“공장 수율 문제는요?”
“그건 마지막으로 대표님이 작업해둔 다중공선성 문제 해결 코드를 기반으로 천 팀장님이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앞으로 한 달 이내로 수율을 9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약간 노가다성 작업이 많으니까. 천 팀장을 최대한 도와주도록 하세요. 천 팀장이 노가다성 문제를 특히 싫어해서.”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가 끝나고.
강철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비서가 보고한 NVA라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일이 최초 개발한 가상화 솔루션을 공개했단 말이지…….”
그것도 논문과 함께 공개했다. 최초 마이클 설리번이 입사했을 때 관련 내용에 대해 듣긴 했었다.
하이퍼바이저 기반의 가상화 솔루션.
리눅스 OS 위에 NVA가 올라가고, 그 위에 개별 서비스들을 제공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돌아간다고 했다. 코드 단위 공개는 비밀유지에 위반되기도 하고,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기에 확인을 못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일에서 직접 보여주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강철은 먼저 논문을 확인했다.
-Individual Computing Power Integration Methodology.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는 논문에는 자신이 DVM을 개발할 때 했던 고민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때 이걸 봤더라면 더 빨리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 속에 논문을 살피던 강철의 눈가에 처음 보는 알고리즘이 들어왔다.
-Cloud Stack algorithm.
이 알고리즘의 핵심 역할은 실 서버 컴퓨팅 파워의 적절한 배분이었다.
CPU.
RAM.
STORAGE.
NETWORK.
가상화의 핵심은 이런 컴퓨팅 파워를 어떻게 하면 적절하게 배분하는지다. 즉 이 알고리즘이 나일이 발표한 논문의 핵심내용이라 할 수 있었다.
강철의 눈이 그 어지러운 수식을 보며 반짝였다.
“이거 우리 쪽에도 적용할 만한 내용이 있는 것 같은데…….”
DVM이나 원스에도 비슷한 알고리즘이 적용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 버무려 넣으면 더 빠른 성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직감이 들었다.
강철이 두 손을 비비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한번 건드려 볼까…….”
비슷한 시각.
나일에서 넘어온 마이클 설리번도 NVA 코드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이걸 개발했을 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밤새워서 개발했었는데…….”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었다. 마이클이 관여한 부분은 여기서도 핵심인 ‘Cloud Stack algorithm.’. 그때의 실력을 기반으로 나일에서 최고 개발자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이클의 고민도 그때와는 조금 달라졌다.
“이걸 우리 쪽에 적용하면 성능이 좀 더 나아질 것 같은데…….”
강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코드를 차분히 살펴보던 차.
모니터에 오른쪽 아래에 알람이 하나 나타났다.
-이강철 :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NVA를 살펴보니까. 우리 쪽에 적용할 만한 내용이 있어서요.
마이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마이클 : 하하. 네 좋습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마이클이 이곳으로 이직한 이유가 자신을 불러줬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마이클은 강철과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확신했다.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나일에서는 자신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 덕분에 자신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있는 이도 없었다.
그런 환경에 처하자 마이클은 더는 자신이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체.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달라졌다.
이강철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정체된 느낌이 사라지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아마 마이클이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Cloud Stack algorithm에서 사용하는 자원 배분 방식의 단점은 빠른 속도 대신 병목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걸. 그래서 초기 NCS에서는 아마 문제가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불과 몇 시간 만에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런데 우리가 현재 사용 중인 DVM은 병목 현상을 줄여 안정성을 높이고 속도가 조금 떨어지잖아요. 물론 그걸 원스를 통해 해결하긴 했지만요. 이걸 합성하면 DVM의 속도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 같은데…… 특히나 이 부분.”
강철이 수식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여기를 조금 바꾸면 그게 가능할 것 같아서요. 자세한 방법이 어떻게 되냐 하면…….”
강철이 보드 마커를 이용해 수식을 수정해 나갔다. 개선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마이클의 시선이 강철이 짚은 수식을 향했다.
“어떻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은데…….”
마이클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격한 토론이 시작되었고, 둘은 근 3시간 동안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비슷한 시각.
서울 변두리 모처의 한 조용한 카페.
트리플의 멤버인 엘리와 나은이 마주 보고 앉은 채 대화를 하고 있었다. 특히나 나은은 거친 콧바람을 뿜어내며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럼 나한테 먼저 말을 했어야지.”
“그때 언니 휴가 중이라 괜히 신경을 쓰게 할까 봐.”
“지금 내 동생 결혼이 걸린 문제가 발생했는데 내 휴가가 대수야!”
나은은 엘리를 떠보려고 일부러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뭐, 뭐야…….’
하지만 이어진 반응이 나은을 당황 시켰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엘리의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결혼이라는 단어에 엘리는 아무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연애도 하지 않았는데…….
나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엘리를 보았다.
“너…… 정말 장난 아니구나.”
매번 그녀의 진심을 알 때마다 놀라웠지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엘리의 입에서 당돌한 말이 흘러나왔다.
“결혼 안 할 거면 뭐하러 연애를 해.”
“으, 응?”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 한번 만나기 시작했으면 결혼까지 가야지.”
당황한 나은이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엘 리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여튼 갑자기 강력한 경쟁자가 나타났어. VK 그룹의 차녀. 최윤아. 재벌 집 여자라 그런가? 포스가 남다르더라. 외모도 예쁘고, 몸매도 시원시원하고.”
“또?”
엘리가 고개를 모로 꺾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돈도 시원하게 쓰고.”
나은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돈? 얼마나 썼는데?”
“4,300.”
나은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사천삼백? 내, 내가 아는 그 사천삼백이 맞지?”
엘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4,300만 원입니다.
점원의 그 말에도 최윤아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카드를 건넸다. 그러고는 일시불로 4,300만 원을 긁어버렸다.
톱스타의 반열에 올라서면서 많은 돈을 벌게 된 엘리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를 떠올린 엘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재벌은 재벌이더라.”
“후우…… 강적은 강적이다. 희진이 고년은 그걸 덜렁 받았다 이거지.”
엘리가 살짝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더라고. 이거 받으면 오빠한테 혼난다고. 그랬더니 최윤아가 멋들어지는 명분을 만들어주더라.”
“어떤?”
“어머니 선물이라면서.”
그 말에 나은이 감탄을 터뜨렸다.
“오오…….”
“확실히 머리가 좋아. 여우야.”
왜 엘리가 강적이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은이 보기에 엘리도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렇지 여우과였다. 정글이 아닌 설산에 사는 여우랄까.
“일이 상당히 어렵게 됐네…… .”
“그래서 언니한테 이렇게 털어놓는 거야. 뭐 좋은 방법이 없나 해서. 그때 언니의 조언대로 위문 공연했더니 반응이 꽤 좋았거든.”
나은이 팔짱을 끼며 입술을 오므렸다. 생각에 잠길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좋은 방법…… 좋은 방법이라…….”
“그때처럼 내 장점을 살리면서 매력 어필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면 좋을 것 같은데…….”
노래는 한 번 써먹었다.
남은 건.
“그럼 이번에는 연기로 승부를 보자.”
“연기?”
“가련한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은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고로 여자의 눈물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남자 없는 법이야. 나만 믿어 한 방에 넘어오게 할 테니까.”
나은이 자신 넘치는 목소리로 설명해나갔다. 그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엘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통한다고?’
하지만 나은은 자신만만했다.
“이건 무적이야.”
그 말에 엘리도 일단은 따르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니까.
나은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러자면 일단 만나야 하는데…….”
그 말에 엘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희진이 부를까?”
엘리의 눈빛에서는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강렬한 열의가 느껴졌다.
그 눈빛에 나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