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둘 사이에서
한남동.
최서훈이 자택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최윤아를 보고 있었다.
“강철이 그놈을 만났다고 하던데 결국 해낸 거냐?”
최윤아가 앞에 놓여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직 몰라요. 그냥 편하게 가끔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 있냐고 해서 알았다고 한 것뿐이죠.”
최서훈이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쪽 세계에서 편하게 이야기 나누자고 한 거면 끝난 거나 마찬가지지. 어떤 재벌이 서로에게 속내를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겠느냐.”
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벌.
그 세계의 복잡도는 일반 시민들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가족들에게조차 편하게 속내를 터놓기가 쉽지 않았다.
경영권 분쟁.
추후 그 분쟁에서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최서훈이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최서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제야 한시름 덜었어. 네가 시집가는 것까지 보고 나면 후계구도 정리하고, 아빠도 물러날 생각이다.”
“저는요? 시집을 가더라도 계열사 한두 개 정도는 가져가야 제 면이 서잖아요.”
“V스토어 상장시켜서 따로 떼줄 테니까. 그거 가져가. 그리고…… SNS 사업도 하나 있는 거 네가 하고 있지?”
VK 에스엔에스.
거기에서 서비스 중인 SNS 서비스는 폐업을 앞두고 있었다. 결국, V스토어 하나를 주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 생각을 읽은 최서훈이 최윤아를 다독였다.
“우리가 하면 망했지만 이강철. 그 친구가 하면 또 다를 수도 있을 거다. 그 친구가 성공시킨 서비스만 해도 몇 개인지 너도 잘 알 테니까. 마침 IT 쪽에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고.”
그 말에 최윤아가 혀로 입안을 굴렸다.
‘하긴 강철 씨가 하면…… 또 다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이강철은 현재 IT 업계의 미다스 손이다. 각종 서비스에서부터 하드웨어까지. 그가 손대서 성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까.
“알았어요. 아빠도 기업이 둘로 쪼개지는 건 보고 싶지 않을 테니까요.”
최서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건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만나서 어땠어? 정말 괜찮은 놈 같더냐?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보거라.”
그 질문에 최윤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첫 만남부터 너무 일 이야기만 해서 그런지 절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어요. 그런데 아시잖아요. 재벌들에게 데이트는 사치라는 거. 중간에 갑자기 일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그래?”
“제가 일 있으면 어서 가보라고, 전 아무렇지도 않다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함께 가서 걱정해 주고 응원해 주고. 고생한 직원들에게 커피, 도시락도 제공하니까…….”
최윤아가 말을 늘어뜨렸고, 최서훈의 궁금증은 한 층 더 커졌다.
“그러니까?”
“절 보는 눈빛이 조금 변하긴 하더라고요. 약간 호의적으로? 지금은 거기까지예요.”
최윤아가 대화를 마치려 했지만, 최서훈의 생각은 달랐다.
“더 자세히 말해봐 봐.”
“아니, 딸 연애사를 왜 이렇게 궁금해하세요.”
“이 녀석아! 딸이니까. 궁금해하지!”
최서훈의 성화에 최윤아는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말을 하면 할수록 느껴졌다.
‘매력 있어.’
이강철.
그가 매력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파며 중얼거렸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옆에 있던 이희진이 말했다.
“엘리 아냐? 얼마 전에 밥도 먹고 왔다면서.”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이희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강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희진을 보았다.
“비서가 말해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자신의 일정은 대부분이 대외비였다. 그런 일정을 꿰고 있는 건 비서밖에 없었다.
하지만 심 비서는 자신의 심복.
가족이라 해도 함부로 일정을 노출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설마…….
“엘리가?”
이희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나랑 동갑이잖아. 우리 친구 하기로 했어.”
연예인과 친구라…….
아마 자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희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빠 덕 좀 봤지. 그리고 대화해 보니까. 말도 잘 통하고 착한 친구더라. 잘해줘.”
엘리라는 말에 최용희도 관심을 표했다.
“엘리라면 그때 태국에서 그 처자 말이냐? 엄마는 찬성이다.”
강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 만나는 사람 따로 있어.”
놀란 두 여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뭐?”
“뭐!!”
“최윤아라고 VK 그룹 차녀.”
VK 그룹.
한국 최대 재벌가 중의 하나였기에 두 여자는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브, 브이 케이 그룹?”
“거기 브이 케이 통신사 운영하는데, 맞지?”
“아마도.”
딸꾹.
최용희는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VK 그룹의 차녀.
그건 마치 상상 속에서 용을 만났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최용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리한테 너무 과한 거 아니냐…… VK 그룹이면 재벌가인데…….”
엄마 최용희의 말에 강철이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엄마. 우리도 재벌이야.”
“으, 응?”
“엄마 아들이 괜히 청와대 가서 대통령 만나고, 서치 회장이나 오성전자와 협업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가진 개인 재산이 얼마냐 하면…… 우리나라에서 한 3위쯤 할걸요?”
강철도 자세히 세보지 않아서 알지 못했다. 재산이 미국, 중국, 한국 등지에 퍼져 있기 때문이었다.
주식.
부동산.
현금.
채권.
금.
은.
비트코인까지.
여러 형태로 퍼져 있었다. 그랬기에 어디에 얼마가 있는지는 신주영이 가장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한번 명세서를 뽑아달라고 해봐야겠어.’
최용희가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강철에게 물었다.
“3, 3위?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 아들이 가진 재산이 우리나라에서 3번째라는 말이잖아.”
그 말에 이희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진작 알고 있었지. 경제 뉴스만 봐도 나오는 얘기잖아.”
최용희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우리 집도 이제 VK 그룹 못지않으니까.”
이희진이 콧대를 더 높이 세우며 말했다.
“오히려 그쪽이 우리 집안에 비하면 떨어지는 감이 있지. 아이온이나 대산 그룹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지만, VK 그룹은 현재 성장이 정체되어 있거든.”
최용희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 이 말이 정말이냐?”
강철이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정말 우리 회사는 오늘도 내일도 성장 중이니까. 요즘 잘나가는 워리어로 한 해 벌어들이는 순수익만 조 단위야.”
그 말에 최용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새삼 자기 아들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이희진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까. 지금 오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일지도 모른다 이 말씀. 즉 오빠 만나겠다는 여자는 일렬종대로 운동장 10바퀴 줄을 서 있다는 말이야.”
이희진의 허세에 강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VK 그룹의 딸이라고 해도 전혀 부담가질 필요 없어. 만약 엄마한테 함부로 하면 내가 먼저 싫다고 할 테니까.”
최용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IJ 엔터 안무연습실.
트리플 멤버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오른쪽. 돌아! 엘리 뭐 해? 정신 안 차릴래!”
“자, 다시!”
안무 선생님의 말씀에 엘리가 입술을 악물며 두 손으로 뺨을 짝 때렸다.
하지만.
다시 연습해도 틀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엘리. 오늘 컨디션이 별로야?”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틀리는 거야.”
“죄송합니다.”
“정신 차려. 너희 아직 데뷔한 지 5년밖에 안 됐어. 롱런 하려면 초심 잃으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네!”
“다시 시작한다.”
고개를 끄덕인 엘리가 다시 춤 연습에 열중했다.
하지만 머릿속 한편으로 자꾸 다른 생각이 치고 들어왔다.
-오빠 여자 생겼다네.
지난번 태국 공연 이후로 친해진 강철의 동생 이희진.
그녀에게서 온 연락 때문에 연습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엘리! 너 또 틀렸잖아.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야.”
안무 선생님의 호된 질책에 엘리가 급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너 평소에는 안 그러더니 무슨 일 있어? 좀 쉬다가 할까?”
평소 그녀는 마치 기계처럼 안무를 딱딱 맞추었다. 그런 그녀가 이상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에 안무 선생님의 얼굴에도 걱정이 서렸다.
“아니에요. 다시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안무가의 생각은 달랐다.
“오늘은 안 되겠다. 일단 좀 쉬면서 정신 좀 차리고 다시 하자. 스케쥴은 매니저랑 협의해 볼 테니까.”
“네…….”
그렇게 안무 연습이 끝나고 가장 먼저 나은이 물었다.
“뭐야. 너 진짜 무슨 일 있어?”
다른 멤버인 여름의 얼굴에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엘리야. 너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 몸이 안 좋아?”
둘의 질문에 엘리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아. 조금만 쉬면 될 것 같아.”
“혹시 그날?”
이번에도 엘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나은이 엘리를 끌고 조용한 방으로 이동했다.
“너 설마…… 희진이가 말한 것 때문에?”
이희진.
그녀는 엘리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성격 좋은 나은과도 절친이 되어 있던 것이다.
엘리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본 나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사실 만나는 사람이 없는 게 더 이상하긴 했어.”
“너…… 진짜 많이 좋아했구나.”
엘리는 말없이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연습생 생활까지 하면 10년 동안 함께 지내온 사이였다. 친자매보다 아끼는 동생의 풀죽은 모습에 나은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일어나 봐.”
“왜. 뭐 하려고.”
“골키퍼 없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거 아니다.”
“……응?”
“더구나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들어보니까. 최근에 한두 번 만난 모양이더라. 그 정도 썸이라고 할 수도 없지.”
나은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리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왜, 도, 도대체 뭐 하려고.”
“너랑 나랑 희진이랑 무슨 사이야.”
“치, 친구 사이지.”
“친구 사이면 서로 집에 놀러 갈 수도 있는 거 아냐?”
“설마…….”
“옷부터 사러 가자. 그 오빠 좋아하는 스타일로 쫙 빼입고 가면 바로 생각이 바뀔걸. 누가 뭐라 해도 현재 대한민국 미모 원탑은 바로 우리 엘리니까.”
미모 원탑.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랬기에 드라마나 영화 쪽 연기 문의도 꾸준했고, 엘리도 연기 교습을 받으며 관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은이 엘리의 손을 잡고 이끌며 말했다.
“언니만 믿고 따라와. 너한테 한 방에 뻑 가게 해줄 테니까.”
엘리가 느끼던 불길함의 실체였다.
* * *
나은의 가장 큰 장점은 추진력이다. 그녀는 바로 이희진과 함께 엘리를 대동하고 조용히 백화점을 훑었다.
“그러니까. 강철 오빠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거지.”
이희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니까. 내가 대학 시절부터 오빠가 만나는 사람들 봤는데 대부분이 이런 스타일이었어.”
그 결과물이 몸매를 드러내는 스키니 진에 티셔츠였다.
그걸 입은 엘리가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며 말했다.
“이거 너무 붙는 거 아냐? 움직이는 게 조금 불편한데…….”
나인은 엄지를 척 내밀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딱 좋아. 정말 좋아. 내가 우리 동생 볼륨감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엘리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은이 그런 엘리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가슴을 쫙 펴! 당당하게 나가란 말이야. 나 이런 사람이다. 그래야 사랑도 쟁취할 수 있는 거야. 희진아 준비됐지?”
이희진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오늘 오빠 집에 있다고 했어. 그래서 엄마가 오랜만에 솜씨 발휘하고 있고.”
엘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찾아가면 실례 아닐까.”
“실례는 무슨 내가 미리 친구들 놀러 온다고 해놨지.”
이희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흐흐, 그 친구가 엘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리는 살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긴장된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 상황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은과 희진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셋은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강철의 집.
강철은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을 게임과 함께 즐기고 있었다. 바로 자신이 만든 워리어 VR을 하면서.
“탑 뭐 하세요. 빨리 지원 와야죠.”
“정글. 거기서 파밍만 하면 어떡합니까!”
“아나 진짜. 제대로 합시다. 제대로.”
게임 할 때는 영락없는 30살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온몸을 움직이며 게임을 하다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게임을 하면서 운동도 되고 있던 것이다.
띠띠띠띠.
덕분에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얼마 전 100평대 한남 고급 주거 단지로 이사했다. 강철의 방과 상당이 떨어져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벌컥거리며 열리는 자신의 방문 소리를 듣지 못한 건 실수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희진이 소리쳤다.
“오빠!”
그녀의 뒤로 엘리와 나은이 서 있었다. 그 둘은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며 소리치는 강철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라인 주도권도 없는데 갱킹을 왜 합니까.
-아나 진짜 답답하네.
-거기 바텀 뭐 해요. 게임 포기할 겁니까.
-아오. 진짜!
강철이 열을 내며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평소에 보았던 근엄하고 스마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은이 멍한 표정으로 엘리를 보며 말했다.
“정말…… 같은 사람 맞지?”
하지만 엘리는 놀란 와중에도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희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서는 저렇게 게임이나 주야장천 하는 사람을 뭐가 좋다고…….”
그러던 이희진이 가까이 다가가 강철의 등을 툭 쳤다.
“오빠 내 친구들 왔어.”
“이거 지면 등급 떨어져. 그럼 너 용돈 깎는다.”
“그냥 친구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지.”
“그럼 어떤 친군데.”
“엘리.”
그 말에 강철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뭐?”
“엘리랑 나은. 트리플 멤버들 놀러 왔다고. 내가 말했잖아. 오늘 친구들 온다고.”
“그러니까. 그 친구가…… 그 친구…….”
강철이 슬그머니 VR 기기를 벗었다. 그러자 정면에는 정말 엘리와 나은이 서 있었다. 그 둘이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은이었다.
“대표님. 오랜만이에요. 호호, 희진이가 하도 놀러 오라고 해서 한번 와봤어요. 집 너무너무 좋은데요.”
“아, 네.”
이내 엘리가 입을 열었다.
“오랜…… 만이에요.”
강철이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엘리의 사복 패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청색 스키니진과 남색 티셔츠가 몸에 찰싹 달라붙어 볼륨감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민국 미모 원탑이 더해지자 강철도 눈을 떼기 힘들었다.
“네. 오랜만이에요.”
다행히 어색한 인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다했다. 와서 밥 먹어!
최용희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 * *
잠시 후.
식탁에 두런두런 둘러앉아 식사가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주도한 건 나은이었다.
“집밥 진짜 오랜만이에요. 정말 맛있어요.”
“많이 먹어. 우리 희진이 친구라고?”
“헤헤, 네. 희진이랑은 아주 절친이에요. 절친. 서로 가슴 크기까지 아는.”
나은의 넉살에 최용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우리 희진이 친구 중에 이런 게 이쁜 친구가 있는지는 몰랐네.”
“제가 한 미모 하긴 하죠. 물론 희진이도 예쁘기는 하지만요.”
강철과 엘리는 조용히 식사에만 열중했다. 딱히 할 말이 없었거니와 최윤아를 만난 이후 엘리는 만나는 것이 조금 껄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오늘 쉰다더니 뭐 해요?
-집에서 게임 하고 있어요.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 갈래요?
-그럼 점심 먹고 오후에 갈까요.
오후에 드라이브를 갔다가 최윤아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 사실 때문에 엘리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었다.
얼마 전 받은 편지로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쁘기는 해…….’
최윤아도 어디 가서 꿀리는 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연예인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엘리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빛.
엘리의 얼굴에서는 한마디로 빛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이 왜 자신을 좋아하는 걸까. 강철이 그런 의문에 빠져 있을 때쯤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러자마자 나은이 강철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빠 방 좀 구경시켜 주세요.”
“제, 제 방이요?”
“네. 평소 오빠가 어떻게 생활하시는지 궁금해서요.”
어느새 호칭은 오빠로 바뀌어 있었다. 적극적인 나은의 행동에 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방으로 이동했다.
이내 강철이 ‘어어’ 하는 사이에 엘리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희진아 네 방 구경하러 가자. 엘리는 잠깐 있어.
그게 강철의 방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소리였다.
문에 귀를 대고 있던 이희진이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뭐야. 왜 이렇게 말이 없지. 무슨 사달이라도 나는 거 아냐.”
“원래 엘리가 말이 별로 없긴 해.”
“흠…… 아무래도 불안해. 오늘 엘리 미모가 또 장난 아니잖아. 남자가 엘리랑 둘이 있으면서 아무 짓도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나은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넌 네 오빠를 그렇게 못 믿냐?”
“오빠니까 못 믿지. 언니도 오빠 컴퓨터에서 ‘직박구리’ 폴더를 본 경험이 있다면 그런 말 하지 못할걸.”
“……직박구리?”
“아, 언니는 모르는구나. 그런 게 있어. 남자들만의 소중한 비밀.”
나은은 대충 어감으로 알아들었다. 하지만 둘의 대화는 길게 가지 못했다.
갑자기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거 아니니까.
-……네?
-연습생 생활 10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르실 거예요. 그 중간에 포기한 친구들만 수십 명이 넘어요. 저보다 예쁜 친구도 노래를 잘했던 친구도, 춤을 잘 췄던 친구도 그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어요.
-…….
-무려 10년이에요. 그 시간 동안 노력했어요. 그리고 결국 이뤄냈죠.
엘리의 당당한 말에 나은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엘리.
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내면에는 상당한 강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으로 팬들은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한두 번 만났다고 들었어요. 그럼 저한테도 기회가 있겠죠.
-만약 스캔들이라도 나면 연예인한테 치명적입니다.
-알아요.
-……네?
-제게 치명적이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만약 스캔들이 나게 되면 대표님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도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만큼 대표님을 신뢰하고 있기도 하고요.
이번에는 이희진이 마른 침을 삼켰다.
당대 최고의 톱스타가 오빠에게 고백하고 있다. 아니, 짝사랑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의 오빠가 거부하는 상황이라니…….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대표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한번 도전해 보려고요.
도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엘리가 자신의 오빠를 차지하기 위해 도전한단다.
이희진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해 도무지 귀를 뗄 수 없었다. 그건 나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방 안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벌컥.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문에 잔뜩 기대고 있던 둘이 마른 짚처럼 우수수 쓰러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저녁 시간.
강철은 오후에 있었던 충격에 도무지 최윤아와의 만남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한테 도전한다고…… 트리플의 엘리가?’
과거 자신의 우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적극적인 구애가 당혹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두근거림을 불러일으켰다.
최윤아가 그런 강철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다른 생각하는 것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일이 조금 있어서.”
“하긴 이해해요. 우리 아빠도 항상 그랬거든요. 집에 와서도 회사 일 생각밖에 안 했어요.”
그게 아닙니다. 강철은 솔직하지 못했고, 최윤아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어렸을 때는 그런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커갈수록 제가 어떤 혜택을 받고 있는지, 어떤 걸 누리고 있는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게 될수록 조금은 이해하게 됐고요. 물론 아직도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최윤아의 솔직한 속내였다.
사적만남.
그게 시작된 이후로 최윤아도 조금씩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이 있다면 너무 부담 가지지 않아도 돼요. 미리 약속했더라도 말만 해주면 이해할 테니까요. 지난번처럼요. 호호, 물론 강철 씨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저도 나름 일하는 여성이니까.”
강철이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그냥…….”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지나다녔다. 이건 강철에게 일보다 어려운 문제였다.
그리고 최윤아는 눈치 백 단의 여성이었다.
“대충 알겠네요.”
“네?”
“우리가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지 만나보는 단계잖아요. 강철 씨 정도면 여기저기서 만나자는 사람도 많을 거고요.”
강철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요. 강철 씨는 아직 모르겠지만 재벌로 살다 보면 받는 혜택만큼 이해해야 하는 것도 많거든요. 다만…… 결혼 후 바람만 피우지 않으면 돼요.”
최윤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