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대기업의 힘
전경련.
경제인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로, 공동의 의견을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회원들 간의 분쟁에 조율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늘 박성구가 전경련 모임에 참여한 것도 조율자로서의 역할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진동만 그 친구가 도와달라고 할 때 자네도 모른 척하지 않았다.”
한 그룹 총수의 말에 박성구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저 영감탱이가…….’
뇌사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진동만의 가장 절친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박성구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할인 경쟁은 어찌 보면 기업 간의 정당한 경영 활동이지만 동만이 그 친구는 기업을 빼앗길 위기였어.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지.”
“흠…… 그건 그렇긴 하지.”
“자유로운 경쟁 활동을 막으면 안 되지.”
“시장경제를 해치는 길이야.”
그의 말에 너도나도 동조했다.
상황이 이대로 흘러가면 자신에게 불리할 게 뻔했다. 박성구가 급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은 시장경제를 해치는 게 아니라 과한 경쟁을 자제하자는 거지. 이러다간 둘 다 죽게 생겼으니까. 해외로 눈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국내에서 아웅다웅할 게 있나.”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최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시장 경쟁 아닌가. 경쟁에서 밀리는 자는 도태되고, 살아남은 자가 모든 걸 집어삼키는 승자독식. 그 구조를 바꾸자는 건가?”
박성구가 가늘게 눈을 뜨며 최서훈을 보았다.
‘저놈이 저게 제 딸을 그놈에게 주려고…….’
강철의 편을 드는 최서훈이 박성구의 눈에 고깝게 보였다.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던 전경련의 회장 권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강철 그 친구에게 말해. 과한 할인 경쟁을 멈춰달라 이 말이군.”
“네. 이러다간 둘 다 죽습니다. 외국 기업과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 기업끼리 제 살 깎아 먹기라니요. 이러다가는 우리 쪽 협력업체들만이 아니라 대산 협력사들도 줄 도산이 날 겁니다. 단가 인하하면 그 피해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흠…….”
박성구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협상을 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안 해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산에서 제 말은 전혀 듣질 않습니다. 만나자 해도 묵묵부답이고요.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다.”
한번 기세를 탄 박성구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전경련이 어떤 곳입니까. 이럴 때 회원사에 도움을 주려고 만들어진 곳 아니겠습니까.”
거듭된 부탁에 권태연의 생각이 깊어졌다. 그의 그룹사 중 한 곳인 BS 리테일은 편의점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와도 완전히 무관하다 할 수 없었다.
‘다행히 편의점은 진용민 쪽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이강철이 편의점 브랜드를 다시 런칭해서 할인 경쟁으로 밀어붙이면…….’
BS 리테일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알았네. 한번 이야기는 전해보겠네. 하지만 꼭 성사되리라는 보장은 없어.”
진동만이 부탁했을 때도 이강철은 듣지 않았다. 하물며 할인 경쟁을 멈춰달라는 말을 들을까? 권태연은 부정적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박성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최서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니 전경련이 욕을 먹지…….’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저 제안은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 * *
며칠 후.
강철은 비서를 통해 면담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는 권태연 회장님께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요.”
“이것도 그 건인 것 같은데…….”
비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마 그럴 겁니다. 그분이 전경련 회장이시기도 하니까요.”
“심 비서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에는 한번 만나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독불장군 이미지만 심어주면 추후 도움을 받아야 할 때 외면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미 LD 그룹 회장인 박성구와의 만남은 수차례 거절했다. 당장 이 치킨 게임을 멈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심하던 강철이 물었다.
“현 상황은 어떻습니까?”
“치킨 게임에서는 대산이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달 대비 매출이 벌써 20%가 늘었습니다. 수익률은 고꾸라지고 있지만요.”
“수익률은 1% 그 정도 수준만 지켜도 됩니다.”
“네. 그 수준으로 맞추도록 오더 내렸습니다.”
“그리고 최근 LD 그룹 협력체에서 공정위 제소에 언론사 신고까지 해서 시끄럽다고 하던데.”
“LD에서 단가 인하 압력을 과하게 넣은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몇몇 업체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요. 덕분에 우리 쪽으로 납품하고 싶어 하는 업체가 줄을 섰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협력업체 마진을 깎아서 할인 경쟁을 하면 안 됩니다. 최대한 우리 쪽 마진을 빼도록 하세요. 그게 곧 길게 가는 길이니까요.”
“네. 그래서 할인을 하더라도 손해 금액의 최소 80%는 대산에서 책임지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기획실 분석에 따르면 이대로 3개월 정도가 흐르면 LD 마트 7개 점포, LD 백화점 3개 점포가 추가 폐쇄될 것 같다고 합니다.”
강철이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흠…….”
“그리고 LD 마트 사업을 완전히 접게 만들려면 1년 이상이 필요하다 합니다. 그동안 대산이 받게 된 손해도 만만치 않고요. 아시겠지만 LD 그룹도 전통적인 유통의 강자입니다. 전국적으로 깔린 마트 수도 어마어마하고요. 그걸 전부 망하게 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1년 후의 시장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고요.”
비서가 조심스럽게 강철을 보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는 보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 쪽 점유율은요?”
“31%까지 올라왔습니다.”
고심하던 강철이 결론을 내렸다.
“그럼 40%. 그때까지만 합시다.”
그 말에 비서도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권태연 회장과 만남은…….”
“일단 윌마트, 넷플러스 건으로 바쁘다고 하세요. 점유율이 올라오면 그때 만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소식은 바로 박성구 회장에게 전달되었다. 박성구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가보자 이거지…….”
마트와 백화점 사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앉아 있었다. 박성구가 그런 둘을 보며 말했다.
“들었지? 그 자식이 끝까지 가보잔다. 포기 안 하겠데.”
“…….”
“잘할 수 있지?”
가장 먼저 마트 사장이 입을 오물거렸다. 백화점은 그나마 할인 대상이나 할인율이 낮았지만, 마트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게…… 그렇지 않아도 최근 협력업체에서 공정위 제소를 비롯해 언론까지 시끄럽게 구는 통에…….”
“그 정도도 알아서 처리 못 해?”
마트 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장 발생한 건은 처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게 계속 이어진다면 더 많은 협력업체가 이탈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전부 공정위로 몰려간다면…… 핸들링이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현 정부가 친서민 정부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협력업체를 쥐어짠다는 말이 계속 흘러 들어간다면 LD 그룹의 다른 사업들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박성구는 거친 숨소리만 내뿜을 뿐 고성을 뿜진 못했다.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박성구가 물었다.
“상황이 어느 정돈데?”
“이대로면 납품업체 20여 곳이 더는 납품을 못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자체적으로 단가 조사를 해봐도 그쪽 손해가 막심합니다. 지금까지 버텨온 게 신기할 정도로요.”
박성구는 당연한 의문을 꺼냈다.
“그럼 대산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거야?”
“하진기 CTO 말로는 DRP에서 발생하는 이익이 상당하답니다. 매출 자체는 아직 얼마 안 되지만 영업 이익만 40%에 달하는 고 마진 사업이라 그 돈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40%?”
“네. 그 정도면 거의 게임 업계 수준입니다. 확실히 기술 사업이 돈이 되긴 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박성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다르게 적자가 쌓이고 있다. 하지만 상대편은 버틸 수 있는 자금이 있다.
“이대로 계속되면 점포 10개를 더 접어야 한다고?”
“네. 그렇게 되면 시장 점유율도 20%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대산은 40%에 육박하게 되고요.”
“철저하게 2등 기업이 되는군.”
박성구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순간 근원적인 의문이 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걸 물어보기 위해 몇 번이나 만남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성구가 앉아 있는 둘에게 물었다.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봤는데…… 딱히 이유를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나마 가장 큰 이유라고 할 만한 건 이번 인력 빼가기 건밖에는 없습니다.”
“하진기 그 친구를 데려와서 이런 전쟁을 시작했다.”
마트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화점 사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도 같습니다. 평소 이강철은 자신의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런 마당에 인력이 넘어갔으니 화가 났을 겁니다. 그리고 막상 치킨 게임을 시작해 보니…….”
백화점 사장은 차마 그 뒷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LD 마트, 백화점을 무너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테고요.
자사가 망한다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고심하던 박성구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그럼 이대로 2주만 더 해보고 안되면 할인 경쟁 포기하자.”
“포기하면 고객 이탈이 가속화될 수도 있습니다.”
박성구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리도 살고 봐야지. 안 그래?”
회의실에 침묵이 맴돌았다.
나날이 회사 실적이 나빠지고 있다. 이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것이다.
박성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2주가 흐르고.
정말 LD 마트, 백화점은 전격적으로 할인행사를 멈추었다. 덕분에 고객들은 여전히 할인행사를 진행 중인 대산 마트 쪽으로 밀려들었다.
변형 인플루엔자.
감염병 사태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100, 200원에도 민감해진 게 소비자들이다.
하물며 500원, 비싼 것의 경우에는 몇천 원 차이가 나기에 대산 마트를 사용할 유인은 충분했다.
백화점은 또 어떤가.
비싼 만큼 수십만 원이 더 싼 물건도 많았다. 당연히 백화점은 열인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백화점, 마트 매출은 매일매일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강철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수익률 0.1%까지 남기는 수준에서 더 강하게 한 번 더 푸시 합시다.”
치킨 게임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조금만 더하면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자본력이 있는 대기업익에 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 * *
서울 중구 VK 통신사.
그곳의 최상층에 최서훈의 집무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최서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비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강철이 한 번 더 할인 정책을 펼쳤다. 이 말이지?”
“네. LD 그룹이 할인을 멈추는 순간 할인 대상, 금액을 대폭 확대해서 한 번 더 질렀습니다. 아마 이 기회에 완전히 승기를 잡으려는 것 같습니다.”
“으하하하. 그놈 참 물건이야. 상대가 싸움을 멈추는 순간 목줄을 쥐고 흔들어 버리다니.”
“확실히 사업적 감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당장 손실이 두려워 할인 경쟁을 멈추게 마련인데요.”
“그러니까 이른 시간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겠지. 이제 겨우 30이 넘었지?”
“네. 올해 32살로 알려져 있습니다.”
최서훈의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가 생겨났다.
“그런데 벌써 굵직한 M&A 건을 체결하고, 이제는 LD 그룹의 목줄까지 쥐고 흔들어 버린다…… 윤아가 확실히 남자 보는 눈이 있어.”
“네. 아가씨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사람 보는 안목이 탁월하셨으니까요.”
“흐흐, 하긴 그건 그렇지.”
대화를 나누던 최서훈이 물었다.
“그런데 얘는 뭐 하기에 이렇게 안 올라오는 거야.”
“자료 준비에 시간이 좀 걸리시는 것 같습니다.”
최서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숫자 놀음은 필요 없다니까…….”
잠시 후.
최윤아가 서류 뭉치 들고 집무실로 올라왔다. 강철에게 넘길 V 스토어 지분 30%. 그 가치를 측정한 근거들이었다. 최윤아가 자리에 앉으며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아니면 서론부터 천천히 말씀드릴까요.”
최서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보다 어떻게 돼가고 있냐.”
최윤아가 딱딱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강철. 네 사람이 된 거냐?”
최윤아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읽었다. 공적인 질문이 아니라 사적인 질문이라는 것도.
“아빠!”
“그에 따라서 V스토어 매각 대금이 결정되는 거다. 내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금액이란 그 일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야.”
“아빠. 지금이 어떤 시대예요. 21세기에요. 21세기.”
그 말에 최서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걸 움직이고 있는 건 여전히 인간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혈연. 그게 22세기가 된다고 해서 변할 거로 생각하진 않는다.”
최서훈이 픽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더 심해질걸? 감염병 사태를 겪고 나서 사람들은 더 믿을 만한 걸 찾고 있으니까. 누가 뭐라 해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가족이지.”
최윤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둘이 어떻게 되고 있냐?”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리고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요.”
“쯧쯧. 남자란 자고로 술 먹이고, 분내 좀 풍겨주면 넘어오는 족속들이라니까.”
그 말에 최윤아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날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술을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도 어떻게 맨정신일 수가 있지.’
양주 2병.
각각 한 병씩 먹었다. 그 정도가 되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테고, 지금보다 가까운 관계가 될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강철은 일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고, 맨정신으로 집으로 돌아갔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그런 최윤아를 보던 최서훈이 말했다.
“이젠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서야지.”
최윤아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아빠!”
“V스토어 가격은 너와 이강철 사이가 결판이 난 후에 결정해야 해. 어차피 안 될 사이라면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받아야 하니까.”
최윤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이강철.
그와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 싫진 않았다. 다만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도움으로 가까워진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 부끄러울 뿐이었다. 딸을 20년간 키워온 최서훈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나가봐. 내가 판 깔아줄 테니까.”
결국, 최윤아가 못 이기는 척 밖으로 나갔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전략 기획실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전략실장이 자료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LD 쪽에서 백화점 4곳, 마트 3곳에 대해 폐점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백화점은 안양, 부평, 대구, 청주 마트는 서울 3곳입니다.”
“흠…….”
“폐점하면서 관련 건물 인수자를 찾고 있는데…… 한번 입찰해 볼까요?”
“그쪽 유동인구는 어떻게 됩니까?”
“BEP(손익분기점)를 넘길 수준은 됩니다. 더구나 저희는 물류 최적화를 통해 LD보다 BEP가 더 낮게 책정되어 있어서 최소 마진이 7% 이상은 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싸게 사들일지가 관건이군요.”
“네. 그게 문제인데…… 어차피 현 경제 상황에서 대산을 제외하고 그 정도 규모 건물을 사줄 입찰자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강철이 까끌까끌하게 돋아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이번 할인 경쟁을 멈추는 조건을 들이밀면요?”
그 말에 전략실장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마 대번에 승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대신 이 건은 박성구 회장을 직접 만나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건은 박성구 회장의 판단사항이니까요. 그리고 평소 박성구 회장을 볼 때 아마 CTO님을 직접 만나자고 하실 겁니다.”
“결국, 한번 만나긴 만나야 한다.”
“네.”
고심하던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한번 추진해 보세요. 어차피 점유율 40%가 되면 멈추기로 한 작업이기도 하니까요.”
LD 백화점 점포 4곳.
LD 마트 3곳.
총 7곳을 전부 인수한다면 점유율을 40%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강철이 목표했던 수치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며칠 후.
약속은 바로 잡혔다. 약속 장소는 LD 그룹의 자랑인 용산 LD 타워. 123층에 달하는 LD 타워는 이제 서울의 명물이 되어 있었다. 그 앞에 선 강철의 감상은 간단했다.
“우리도 청담에 이런 거나 하나 만들어볼까요?”
뒤따르던 비서가 바로 답했다.
“이 정도 빌딩을 지으려면 정부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승인받아야 할 제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흠…… 알겠습니다. 차차 생각해보죠. 정 안되면 이걸 매입하는 방안도 있으니까.”
123층 빌딩.
세상 어느 누가 이걸 매입할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강철이었기에 비서는 허투루 듣지 않았다.
‘관련 조사를 해놔야겠군.’
그렇게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따라 바로 100층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박성구의 집무실이 있기 때문이었다.
집무실로 들어서자 박성구는 창가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강철입니다.”
박성구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이제야 뵙게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최근에 여러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다 보니 수습하느라.”
“하하, 괜찮습니다. 기업을 운영하다 보면 여러 일이 있는 법이니까요. 같은 기업을 하는 처지에서 충분히 이해합니다. 여기 차 좀 내와.”
이내 자리가 정해지고, 강철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가 마련되었다. 그 차를 조금 마신 박성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폐점하는 점포를 인수하고 싶다고요.”
“네. 백화점 4곳, 마트 3곳에 대해 시장에 매각 의사를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팔아주면 할인 경쟁을 멈추겠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흠…….”
강철이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박성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가 얻는 건 현상 유지에 점포 7군 데에 대한 매각 대금이군요. 거기에 추후 할인 경쟁이 벌이면 또다시 점포를 빼앗길 위기에 처해야 하고.”
박성구는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있었다. 강철도 굳이 그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박성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렇게 계속 점포를 하나둘씩 빼앗기다 보면 결국에는 사업을 접어야 할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슬그머니 강철을 보았다. 강철은 표정 변화 없이 박성구를 보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박성구가 물었다.
“혹시 화학이나 제과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강철은 그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의 주력 부분을 먹거리와 화학 쪽으로 압축시켜 나갈 생각이긴 했습니다. 변형 인플루엔자. 그 이후의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 말씀은…….”
“점포 한두 군데가 아니라 마트, 백화점 전부 인수하는 건 어떻습니까?”
파격적인 제안에 강철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
“LD 그룹의 유통 부문을 완전히 인수해 달라는 겁니다. 사업은 물러날 때와 들어갈 때를 잘 아는 게 승패의 9할을 좌지우지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지금은 들어갈 때가 아니라 나올 때고요. 시어스, 니만마커스, JC 페니 미국 백화점들이 줄줄이 파산되거나 파산 신청을 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한국에 닥치면 제값을 받지 못할 테죠. 그러나 지금은 제값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강철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LD 유통 부분을 전부 인수할 수 있다면 국내 독보적인 1위 사업자가 된다.
그 사실에 살짝 가슴이 떨려오기까지 했다. 박성구가 그런 강철을 보며 쐐기를 박았다.
“제 대답은 이겁니다.”
강철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 *
하루.
이틀.
삼일.
사일.
하진기는 LD 그룹으로 넘어온 이후 마음 편하게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이직한 이후에 대산에서 할인 경쟁을 펼쳐왔기 때문이었다.
하진기가 김정민을 보며 물었다.
“아직이야?”
“네. LD에서는 더 여력이 없어서 할인을 멈췄는데…… 대산은 금액을 더 세게 질렀습니다. 이참에 완전히 승기를 잡을 생각인 것 같아요.”
으득.
하진기가 이를 갈았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인력을 빼간 LD에 화가 났겠지.’
신입사원 때부터 이강철을 보아온 자신이다. 아마 회사 내에서는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는 결코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LD 그룹이 완전히 백기를 들 때까지 가겠지?”
“네. 아무래도…… 그것 관련해서 오늘 그룹 회장님을 만나러 온다고 합니다.”
“이강철이 직접?”
“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실지…… 이러다 낙동강 오리 알 신세가 되는 건 아닌지…… 솔직히 걱정이 좀 됩니다.”
“어차피 우리야 IT 시스템을 만들러 왔잖아. 별일 없을 거다.”
“하지만…….”
하진기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상황이 결코 자신들에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는 걸.
* * *
회사로 돌아온 강철은 바로 관련 부서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이건 먼저 철저히 대외비를 지켜야 합니다. 만약 새어나가면.”
강철이 눈을 치켜뜨며 직원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직원들이 움찔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강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철저히 책임을 묻겠습니다. 이건 그만큼 중요한 건입니다.”
강철이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직원들의 긴장감도 최고조로 올라갔다. 그런 직원들을 보며 강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LD 그룹에서 전체 유통 부문 매각 의사를 타진해 왔습니다.”
“……네?”
“유통 부문 전체요?”
“LD 그룹에서 유통은 주력 사업 부문인데 그걸…….”
회의실에 모인 사람은 총 5명.
전략 기획실장을 비롯해 부실장 그리고 강철의 비서와 회사 재무팀장 등등 하나같이 주요 요직에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강철이 직원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만남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허…….”
“그, 그게 사실이라니.”
“LD 그룹에서 전체 유통 사업부서를 매각한다. 분명 숨은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법무팀장이었다.
“이건 독과점 이슈가 있어서 공정위에서 승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3위인 LD 마트가 대산과 합병을 하면 점유율이 단숨에 시장 점유율 50%를 훌쩍 넘게 될 테니까요.”
강철이 바로 입을 열었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LD 그룹 유통 부문은 미국 사모 펀드에서 인수하게 될 테니까요.”
예상외의 말에 법무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그 말씀은…….”
“현재도 대산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진 곳은 미국 사모 펀드입니다. LD 유통 부분도 그런 식으로 인수될 것이기에 독과점 이슈는 피해갈 수 있습니다.”
“아……,”
법무팀장이 입을 다물었고, 이번에는 전략기획 실장이 입을 열었다.
“저는 박성구 회장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유통 사업은 LD 그룹의 큰 축입니다. 그걸 매각한다니…… 사실 잘 믿기지도 않고요.”
강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러나 미국의 대형 유통사들이 망하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혹시 우리가 망하길 바라는 건 아닐까.”
“승자의 저주란 말씀이시군요.”
“네. 대형 M&A 이후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사는 수도 없이 많으니까요. 현재 경제 상황은 어느 때보다 엄중합니다. 변형 인플루엔자 사태 이후 소비자들의 지갑이 닫히면서 수많은 기업이 도산 위기에 처해 있으니까요.”
“그러다 현금 흐름은 줄어들고, 오프라인 유통사업의 단점인 고정비가 급증하면…….”
“모 회사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죠. 특히나 LD그룹은 온라인 보다 오프라인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니까요. 하지만 대산이 타격받을 일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LD그룹을 인수하는 주체는 미국 사모 펀드니까요. 타격을 받더라도 그곳이 받을 겁니다.”
대산은 타격받지 않는다. 사업이 잘 안 되면 강철 개인이 큰 타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철은 어떻게든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전략기획실장이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면 승자의 저주도 해결되는 거긴 한데…….”
강철이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오히려 대산은 이익입니다. 물류나 재고, 추천 쪽 대산의 서비스를 LD에 공급하고 돈을 이용료를 받을 생각입니다.”
“흠…… 그러면야 오히려 좋긴 하겠군요.”
“그렇게 되면 대산은 미래의 핵심 업종인 ‘플랫폼’으로 한발 더 나아가 게 되는 겁니다. 오프라인 쪽은 개발을 위한 일종의 테스트 베드. 그리고 새로운 서비스 개발을 위한 아이디어 제공을 하는 공간이 될 거고요.”
자리한 직원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
“숙지하겠습니다.”
강철이 그런 직원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돌아가서 정확한 손익 계산을 해보세요. 그래야 적정 기업가치를 산정할 수 있을 테니까.”
* * *
강철이 직원들과 열심히 회의하는 사이.
LD 그룹의 회장 박성구도 자신의 복심인 비서실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박성구의 말에 비서실장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유통 부문을 넘기겠다는 제안을 하셨다고요?”
박성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유통은 그룹의 축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업 부문을 넘기시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유통.
제과.
화학.
LD 그룹의 세 가지 핵심 사업이었다. 박성구는 이중 유통을 팔겠다고 결정한 것이었다.
“이번 감염병 사태 이후 오히려 매출이 늘어난 사업 부문이 어디야.”
“……제과, 화학입니다.”
“유통은?”
“줄…… 었습니다.”
“썩은 가지가 된 거야.”
“그렇지만 서서히 매출이 회복되고 있습니다. 제과나, 화학도 이런 어려움을 거쳐서 지금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고요.”
“하하, 자네 말이 맞아.”
자신의 말이 맞는다?
비서실장은 혼란을 금치 못했다.
“회장님 그게 무슨…….”
“관성이 뭔지 아나?”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성구가 말을 이었다.
“한번 추세가 시작되면 무섭게 올라가지. 그러다가 정점을 찍고 나면 푹 하고 꺾여. 마치 바이러스가 무섭게 인류를 습격했다가 지금은 잠잠해진 것처럼 말이야.”
박성구가 앞에 놓여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잠잠해졌다. 그게 핵심이야. 지금은 잠잠해졌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이런 놈이 나타나지 않을 보장이 어디 있겠나.”
“흠…….”
“그럴 때 또다시 엄청난 고정비가 드는 유통사업을 끌어안고 있다? 불을 지고 섶으로 뛰어드는 셈이지. 계속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어.”
비서실장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성구를 옆에서 보좌한 지 20년째다. 그는 불같은 성미에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전부 냉철한 이성이 밑바탕에 깔려있었다. 비서실장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강철이라는 유통계의 신성이 나타났네. 딱 보니 사업을 확장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더군.”
“그래서 넘기는 게 이득이다.”
“그렇지 기업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이야.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도 성장하는 제과나 화학 분야에 집중하는 것이 기업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네.”
비서실장의 표정이 천천히 밝아졌다. 조금씩 박성구의 의도가 잡힐 듯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말씀은 당분간은 이 두 사업에 집중하고, 오프라인 매출이 줄면서 고정비 증가로 이강철이 사업을 꾸려 나가지 못할 때…….”
“다시 가져오면 돼.”
역시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과연 통할지 그게 의문이었다.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대산 그룹에서 제공하는 서비스가 기존 물류, 재고 관련 비용을 최소 10%, 최대 20%까지 줄여준다는 게 시장의 컨센서스입니다. 그렇다면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이강철이 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박성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도 충분히 생각해 본 시나리오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박성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이강철을 과소평가한 것이 되겠지.”
“알겠습니다.”
이후 회의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건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 * *
오전 회의를 마친 강철은 차를 타고, 중구에 있는 VK 통신 본사로 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비서가 다시 한번 브리핑을 진행했다.
“저희가 산출한 바에 따르면 V스토어 지분 30%의 적정가치는 3천억입니다. 경영권 프리미엄이 붙는다면 달라지겠지만 지금까지 진행 상황에서 경영권 이전은 불가할 것으로 보이니까요.”
“3천억 수준에서 결정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네. 다만 변수가 한 가지 있습니다.”
“최서훈 회장.”
“네. 재계에 알려진 바로 그는 좋게 말해서 욕심이 상당한 사람입니다.”
강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서훈.
그에 대한 소문은 사내 정보 수집 팀에서 충분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고, 자기 사람만 알고, 같은 편이 되면 든든한 하지만 적이 되면 골치 아픈 사람. 그게 세간의 평가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오늘 만나자고 하는 표면상의 이유는 V스토어 지분 매각이지만, 다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커.’
그가 애지중지 키운 딸 최윤아.
그녀를 자신과 엮어 주려 할 가능성이 컸다. 그의 선대에서부터 VK 그룹은 혈연을 통해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VK 통신사 역시 그가 과거 대통령의 딸과 결혼하며 사업권을 따낸 것으로 유명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차가 VK 그룹 빌딩 앞에 도착했다.
“도착했습니다.”
상념에서 깨어난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철은 대기하고 있던 직원을 따라 바로 최서훈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그곳에 가자 최서훈이 환한 낯빛으로 강철을 반겼다.
“하하, 어서 오시게.”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그래. 앉지.”
이내 둘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최서훈은 호랑이처럼 부리부리한 눈매로 강철을 쳐다보았다. 이내 최서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아.”
“네. 말씀하십시오.”
“그중에서 가장 궁금한 게 뭔지 아나?”
강철은 그게 무엇인지 직감했다.
“혹시…… 자녀분과의 관계 아닙니까?”
“으하하하, 역시. 자네가 감이 좋구만. 그래서 그런 거대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거겠지.”
강철이 살짝 입술을 훑었다. 잠시 뜸을 들이고 있자 최서훈이 천천히 말했다.
“내 딸, 어떻게 보고 있나?”
순간 강철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떠다녔다. 이렇게 직접 물어볼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좋게 말한다?
분명 V스토어 지분 가치를 조금 낮게 책정해 줄 것이다.
만약 나쁘게 말한다.
그렇게 되면 지분 가치를 높게 책정할 게 뻔했다. 고민하던 강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서훈이 원하는 건 이런 모호한 대답이 아니었다.
“결혼 생각은?”
당황한 강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강철을 보며 최서훈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결혼도 비즈니스야. 자네 처가로 VK 그룹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되는데 말이야…….”
그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V스토어 지분을 더 높게 평가하더라도 ‘결혼’을 비즈니스로 하고 싶진 않았다.
이미 한번 경험한 결혼이다. 이번에는 꼭 ‘결혼’에서도 성공하는 것이 이번 생의 목표이기도 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결혼을 비즈니스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서훈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날을 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최윤아 씨는 제게 과분한 사람입니다. 다만 서로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상태죠.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면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강철은 담담히 자기 생각을 이어나갔다. 최서훈은 조용히 강철의 경청했다.
그 말이 끝나자.
최서훈이 묘한 미소를 보이며 강철을 보고 있었다.
“하하,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네.”
“……네?”
방금은 결혼을 비즈니스라고 했다가, 이제는 자신의 말에 동의한다고?
강철은 최서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사담이 끝나고 실제 일 이야기는 채 10분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다.
3,300억.
강철이 계산한 금액에서 정확하게 +5% 정도 된 금액이었다. 이번 거래가 성공했다고 해야 할지. 실패했다고 해야 할지.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런 혼란이 가득한 강철의 머리를 맑게 해준 건 비서의 한마디였다.
“이건 대표님이 회의에 들어가 계시는 동안 들어온 첩보인데 최서훈에게 내연녀가 있다고 합니다.”
놀란 강철이 되물었다.
“……네?”
“아시겠지만 최서훈의 현 부인이 전 대통령의 따님. 두 사람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결혼을 했다는 것이 업계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비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두 사람 사이는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하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는 ‘사랑’이 없었는데 최근 내연녀를 만나면서 그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땅 때렸다.
‘그래서 그랬구나.’
최서훈의 묘한 미소.
그리고 결혼은 비즈니스라 말하면서 자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봐준 태도.
왜 그런 모습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최서훈 회장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서 자기 딸도 비즈니스가 아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길 바라는 것이고…… 오늘 만남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한 시험대였어. 만약 비즈니스를 택했다면. 그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비서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생각이 확실해졌다.
“그래서 종종 사석에서 자기 딸은 자신과 달리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면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역시나.
제 생각이 맞았다. 아마 자신이 동의했다면 +10%, +15%가 되는 금액을 더 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다면 V 스토어 지분 취득을 전면 재검토했을 것이다.
비서가 상념에 잠겨 있는 강철에게 물었다.
“오늘 회의는 어떠셨습니까?”
“대략 3,300억 수준에서 결정했습니다.”
“기획실에서 계산한 금액보다 딱 +5%가 비싼 애매한 수치군요. 비싸다고 그렇다고 싸다고 할 수도 없는…….”
강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서훈을 상대로 이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돌아갑시다.”
“네.”
이내 비서가 차 문을 열었고, 강철이 옷깃을 여미며 차에 올라탔다. 차는 빠르게 도심지로 이동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비밀리에 미국 사모펀드에서 LD 그룹 유통 부문에 대한 실사를 진행했다. 그룹의 고위 관계자들만이 아는 극비 사실이었기에 다행히 바깥으로 흘러나가지는 않았다.
부동산.
영업권.
브랜드.
경영권 프리미엄.
등등 여러 항목에 대해 값을 매기고, 지난 5년 치의 재무제표를 꼼꼼히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그가 절대적인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사업부문 매각은 주주총회를 통해 빠르게 통과되었다.
두 달.
기업 실사가 끝나고, 최종적으로 인수 계약체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이미 대산에서 경쟁사 관련 정보를 상당히 수집해 둔 덕분이기도 했다. 그 정보들이 강철을 통해 사모펀드로 넘어갔고, 신주영은 해당 정보들을 이용해 빠르게 기업 가치를 추산했다.
최종 금액 12조.
백화점.
마트.
이 두 가지 사업부문을 합친 금액이었다. 금액이 결정되고 최종 인수 계약서가 작성되자마자 강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DRP와 DSP를 LD 마트, 백화점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대산의 인력들을 대거 투입해 빠르게 API 연동 모듈을 적용했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매출 +5% 향상.
이익률 전월 대비 +13% 향상.
이미 계약서를 작성한 박성구에게 그리 달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박성구가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그 시스템이라는 게 효과가 이렇게 빨리 나타나나?”
“LD 유통 쪽 재고 관리에 비효율이 좀 많았었나 봅니다. DSP가 그걸 해결해 주면서 비용 절감 효과가 크게 나타났고요. 그리고 자사 쇼핑몰에 적용된 추천 기능이 워낙 노후화되어 있다 보니 사용자의 외면을 받았었는데 그 부분이 조금씩 해결되었고요.”
“그 말은 앞으로 이강철이 온라인 쇼핑몰을 개선하면 매출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말이잖아.”
“워낙 사용자가 없던 쇼핑몰이라 일종의 기저 효과일 수도 있습니다.”
박성구가 으득 이를 갈며 물었다.
“그렇게 비효율이 많았으면 지금까지 대산에서 넘어온 CTO는 그거 안 고치고 뭐 했어?”
“차세대 업그레이드는 내년쯤으로 계획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AS-IS 시스템을 파악 중이고요.”
“그거 파악하다가 시간 다 가겠어.”
박성구의 눈치를 살피던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통 부문도 넘겼으니…… 자를까요?”
“재고 관리야 화학이나 제과 쪽에도 필요한 거니까. 놓아둬 봐. DSP 써서 유통 쪽에서 15%나 비용 절감을 이뤄냈다면서. 조금 기다려 보지.”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마트 매출, 이익이 동시에 올라갔다니 이러다 진짜 성공하는 거 아냐?”
그 질문에 비서실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기 생각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대답 없는 비서실장을 보며 박성구는 생각했다.
‘이거 정말 내가 실수를 한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 *
윌마트 온라인 사업부문 인수에 이어.
LD 그룹 유통부문 인수.
V 스토어 지분 인수까지.
강철은 대형 M&A를 연달아 성사시키며 가파르게 회사 몸집을 불려갔다. 그런 만큼 여러 인원이 회사에 뒤섞이며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커밋되는 코드의 양이 많아지면서 지속해서 사이드 이펙트가 발생한다는 점이었다.
“또야?”
“……죄송합니다.”
“하아…….”
천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몇 번째 발생하는 에러인지 모른다. 회사 규모가 가파르게 커지면서 섞여든 코드가 하나둘씩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알았어. 확인해 볼게.”
“네.”
모니터를 보던 천준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는 안 돼.”
벌써 이런 경우만 수십 번.
이대로라면 치명적인 문제가 생겨서 언제든지 시스템이 다운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코드가 올라가는 시점에 문제를 체크해서 커밋을 막아주는 시스템이 절실했다.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게 막막했다. 물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개발해 나가면 되겠지만 당장 LD 마트, 백화점 시스템과의 통합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 LD 쪽 개발자들이 섞여들면서 스타게티 코드가 만들어진다면…….
생각만으로 끔찍했다.
벅벅 머리를 긁던 천준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CTO님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강철의 집무실.
천준호의 상담에 강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찌 보면 CTO님의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아직 내실이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빠르게 규모를 키웠으니까요.”
강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
천준호가 벅벅 머리를 긁었다.
“이게 일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일이 갑자기 많아지니까 솔직히 감당이 안 됩니다. 미국 애들이야 일을 잘하기는 하는데 아직 커뮤니케이션에도 문제가 있고요.”
“그래서 코드 디플로이 과정을 통합적으로 체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천준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미 NCS에도 그런 서비스가 있긴 합니다. 저장, 테스트, 디플로이까지 한 번에 해주는 서비스가요. 그런데 이게 우리 쪽 실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그대로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흠…….”
“Git을 살펴보면 코드 체크 관련 오픈소스 라이브러리들이 있긴 해서 제가 직접 개발해 보려고 했는데 못 해도 한 3달 정도는 필요합니다. 그런데 당장 LD 그룹과의 API를 연동이 진행되고, 다음 달부터 시스템 통합 작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신경 쓰느라 여력이 없어서…….”
강철이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서 절 찾아오셨다.”
천준호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대표님이 하시면 한 달도 안 걸릴 거 같아서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회사에서 최고 개발자시잖아요.”
천준호가 내뱉는 불평과 칭찬 사이에서 강철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플랫폼 기업.
이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다. 그리고 기술을 만드는 건 사람이었기에 강철은 항상 기술자들과 허물없이 지내려 노력했다. 그 노력이 통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지난번처럼 설계도를 만들어서 코드 구조를 짜놓을 테니까. 코딩은 직접 해주시는 겁니다.”
천준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건 맡겨만 주십시오. 코딩은 완벽하게 해놓겠습니다.”
호기롭게 외치는 천준호를 보며 강철이 물었다.
“아참. 리턴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마틴 협회장님이 리턴 버전을 올리셨던데요.”
“아! 그 건은 데브옵스 팀에서 테스트 중입니다. 이번 달 안으로 테스트 끝나면 전사에 적용할 예정입니다. 대표님이 만들어주신 코드 변환기 덕분에 리턴으로의 전환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전사에 적용되면 대산, LD 그룹, 윌마트 온라인까지. 레퍼런스가 엄청나게 생기겠군요.”
천준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에 아이온 그룹도 추가하셔야지요. 그쪽 관계된 스타트업만 100여 개가 넘어가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아이온 그룹에도 공지해 놓겠습니다.”
“그 정도만 사용해도 단숨에 전 세계에서 점유율 50위에는 들어가겠습니다.”
“이왕 시작한 거 1등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설계 완료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천준호가 한결 근심 걱정을 던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강철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이거 오늘도 야근해야겠어.”
일은 많고 시간은 부족했다.
* * *
비슷한 시각 청와대.
강철의 LD 그룹 유통 부문 인수 소식이 공식 발표되는 순간 청와대의 고민이 깊어졌다. 국내 유통시장이 미국 사모펀드에 의해 독점 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관련해서 회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 사모펀드가 국내 유통시장을 독점하게 생겼어.”
정책실장 서종석의 말에 보좌관들이 괜히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중 한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려진 바로는 미국 사모펀드가 이강철과 아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번 LD 그룹의 유통 부문을 인수한 곳도 같은 곳이니 이강철을 불러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요?”
“자네 말은 이 일을 주도하는 게 이강철이라는 말인가?”
“그럴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간에 알려진 바로 그는 대단한 야심가입니다. 아마 이번 인수를 목적으로 할인 전쟁을 펼친 것일지도 모릅니다. LD 그룹의 유통 부문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요.”
“흠…….”
“마트는 서민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업종입니다. 한번 만나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아마 인수가 마무리되는 대로 할인 경쟁은 멈출 것이고, 어쩌면 그간의 손실을 메꾸기 위해 가격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 물가가 인상되는 효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다른 대안인 2위 사업자 홈마트를 찾아야 하는데 홈 마트도 점포를 줄이고 있으니.”
“네. 그 가격에 사야 하는 거죠. 백화점이야 크게 상관없지만, 마트는 신경 쓸 필요가 있습니다. 가이드 라인을 제시한다는 느낌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들어본다는 느낌으로 만나면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정부가 지원해 줄 게 있다면 지원을 해주고요.”
이강철.
서종석은 굳이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많이 불편한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점점 그는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