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성공 라이프-35화 (35/59)

6장 경쟁 상대(1)

인천국제공항.

귀국장에 발을 디딘 트리플의 엘리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셔터 소리에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여기요.”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경호원들의 안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언니 사랑해요!

-엘리 언니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엘리! 엘리! 엘리!

여성 팬과 남성 팬들이 뒤섞여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기 때문이었다. 엘리는 정신없는 와중에 겨우겨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촤라라라락.

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엄청났다. 이제 트리플의 인기는 한국에서만 통하는 게 아니었다. The Statup의 인기에 힘입어 한, 중, 미. 삼국에서 엘리는 뇌쇄적인 매력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외마디 외침이 엘리의 귀에 들어왔다.

“어! 이강철이다.”

그 외침에 엘리의 고개가 귀국장을 향해 휙 돌아갔다. 거기에는 정말 이강철이 단출한 짐을 꾸린 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내 엘리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자신을 찍던 기자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짜네.

-이강철? 어디 어딘데.

-뭐야, 이강철이 오늘 귀국하는 거였어.

-아이온 게임즈 상장 마치고 귀국하나 보다.

대중들은 올해의 언어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잘 몰랐다.

아이온 게임즈 상장.

대폭등으로 시가총액 430억 달러 달성.

이 두 가지 사실만이 중요했다. 이로 인해 강철은 공식적으로 국내 3위 부호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기 요소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The Statup 너무 재밌어요!

-시즌 3도 방송해 주세요!

넷플러스의 The Startup.

해당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엘리와 강철이었다. 당연히 강철의 인기가 더 높았다.

“비켜주세요.”

“지나가겠습니다.”

“잠시만요.”

“촬영은 안 됩니다.”

“기자회견은 따로 없습니다.”

강철의 앞길을 경호원들이 뚫고 지나갔다. 트리플에게 쏟아지던 플래시 세례가 강철에게로 옮겨갔다.

촤라라라락.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를 경호원들이 손으로 막았다. 경호원 숫자만 10여 명이 넘어갔다.

당연히 기자들을 비롯해 일반인들의 손길이 강철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공항을 빠져나온 강철이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기사가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비서가 새롭게 업데이트된 보고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먼저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시간에 말씀하셨던 오천억 투자 건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통령님께서 이번 올해의 언어 선정을 축하한다면서 축전을 보내오셨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네. 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넷플러스에서 시즌 3 촬영 기획안을 보내왔습니다. 중국 편 시청률도 상당히 괜찮게 나온 것 같습니다.”

“장소는요?”

“이번에는 유럽입니다. 특히나 이스라엘에 유명 스타트업이 많다 보니 그쪽을 시작으로 유럽 전 지역을 돌자고 합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비서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그 밖에도 강철이 듣고 인지해야 할 사항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중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VK 통신사에서 자사의 V스토어에 앱을 선 출시해 줄 수 있냐면서 연락이 왔습니다.”

VK 통신사.

국내 점유율 47%를 자랑하는 통신사로 V스토어라는 앱 시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선 출시요?”

“네. 최근 서치의 앱스토어가 결제 수수료를 30% 인상하기로 결정하면서 국내 앱스토어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 시기를 이용해 사용자를 늘릴 생각으로 보입니다.”

“아…….”

“그래서 아이온 쪽 게임을 비롯해서 스타트업들에서 출시하는 서비스를 자사 V 스토어에 올렸으면 좋겠다는 연락입니다.”

“생각해 보죠.”

“네. 그리고…….”

그 밖에도 강철이 인지해야 할 내용은 많았다.

아이온벤처투자

아이온미디어

아이온게임즈.

아이체크.

리민스.

딜리버리브라더스.

나인소프트 : 유우니상점.

슈퍼앤트.

…….

여러 스타트업까지 인수하면서 회사 규모가 계속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수록 강철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이내 비서가 마지막 보고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내일 대산 그룹 분할 주주총회 일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그룹 분할.

진용민과 진선미의 지분과 계열사를 맞교환하는 작업이었다. 그게 끝나면 대산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다.

“참석하시겠습니까?”

“마지막이니까…….”

강철이 일을 진행하면 할수록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비즈니스에서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 내일 가서 적으로 규정할지 아군으로 규정할지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다음 날.

대산 그룹 정기 주주총회.

대표이사가 새롭게 올라온 안건을 표결에 붙였다.

-제1안 계열사 지분교환 건입니다.

이내 표결이 시작되고, 진행자가 의사봉을 내려쳤다.

땅. 땅. 땅.

“통과되었습니다.”

가장 뒤쪽에 참석한 진선미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걸로 정리는 끝났네.”

함께 앉아 있던 진용민도 씁쓸함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어떻게 하긴 잘해봐야지.”

“나랑 협업할 생각은?”

진선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랑? 싸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진용민도 인정하는 바였기에 더는 권하지 않았다.

주주총회를 통과함으로써 과거 강철과 했던 약속대로 자신들이 가진 마트와 대산 지분을 넘기고 계열사는 자신들이 가지게 된다. 이걸로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다.

그 둘 사이에 낯선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그럼 전 어떻습니까?”

둘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진용민의 표정은 구겨졌고, 진선미는 미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신이라면 생각해 볼 가치는 있겠네요. 나스닥 상장 축하드려요. 올해의 언어 선정도.”

“감사합니다.”

진선미가 강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철이 그 가느다란 손을 맞잡았다.

진선미가 사용하는 특유의 향수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게 강철의 젊은 혈기를 자극했다.

‘휴우…….’

깊은숨을 내쉬며 가슴을 진정시킨 강철이 진용민을 보았다.

“앞으로 대산에서는 추천 플랫폼을 비롯해 재고관리 플랫폼도 제공할 예정입니다. 사장님이 사용하신다면 특별히 할인된 가격에 제공할 생각인데…… 어떠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IT팀원을 충원해 DRP나 DSP를 베낀다. 그러자면 친하게 지내는 게 이득이야.’

이강철이 칼을 감추고, 자신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자신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서일까.

자연스럽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진용민을 보며 강철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리 칼을 감춘다 해도…… DSP나 DRP를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끝이다.’

DSP.

DRP.

이건 마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OS와 같다. 그리고 OS라는 것은 한번 사용하기 시작하면 바꾸기 힘들다.

플랫폼에 종속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앞으로 진용민이 운영하는 회사는 강철의 회사에 종속될 것이다.

둘은 동상이몽에 빠진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 * *

비슷한 시각.

넷플러스 개발이사는 NRP 마무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정식 오픈 일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 왔어?”

“추천 성능 30%까지 올라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개발이사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직 그것밖에 안 돼?”

“오픈 일까지 그 이상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아…….”

추천 성능 30%.

그건 곧 추천 데이터 10개를 제공하면 그중 3개를 소비자가 선택한다는 뜻이었다.

DRP의 성능은 37%.

그에 비하면 아직 7%나 부족했다. 개발이사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이유였다.

“여러모로 방법을 찾아보고 있긴 한데…… 정말 이상합니다.”

“뭐가?”

“데이터를 표준화해서 받고 있긴 하지만 각 회사마다 데이터의 성질이 다릅니다. 옷, 자동차, 식료품, 전자기기 등등 그런데 어떻게 그런 성능을 낼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가 만들어낸 30%도 기적 같은 수치인데…….“

사실 개발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추천 플랫폼.

그걸 운영하려면 여러 다른 회사의 데이터를 분석해 적정한 결괏값을 내야 한다. 각 회사별로 데이터양이나 타입이 다른데 어떻게 37%라는 수치를 만들어낸 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 플랫폼이 37%라는 말은 대산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추천시스템은 더 뛰어난 추천 성능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운영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대산의 자체 추천시스템은 어느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는지…….“

개발이사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궁금하긴 했다.

DRP가 37%.

그렇다면 자체적으로 사용 중인 추천시스템의 성능은 어느 정도일까.

”그리고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뭐?“

”DRP를 기반으로 DSP라고 재고관리플랫폼을 거의 완성했다고 합니다.“

”재고관리 플랫폼?“

”네. 기업들이 재고관리를 최적화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작은 기업들은 그 정도의 투자가 불가능하니까 재고를 그저 엑셀로 관리하는 수준이고요. 그걸 최적화시켜 준다고 합니다.“

대화를 나누던 직원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벌써 첫 번째 고객도 구한 모양이더라고요. 그게 어딘지 아십니까?“

개발이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최근 NRP 개발을 위해 각종 논문을 살펴보고, 알고리즘 튜닝을 하느라 바깥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지냈기 때문이었다.

”윌마트입니다.“

윌마트.

그 말에 개발이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대의 오프라인 마트 체인으로 그도 종종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야?“

”네. 윌마트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들었으니 확실할 겁니다. 현재 내부 검토 중이라 하더군요. 이대로 가다가는 나일에게 완전히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해보려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DSP가 윌마트를 잡으면…….“

”아마 다른 회사들도 빠르게 몰려들 겁니다. 업계에서 DRP의 사용율이 점점 올라가는 것처럼.“

개발이사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하직원의 말처럼 된다면 이강철이 이끄는 회사가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문득 부하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보자 얼마 전 회사를 떠났던 부하직원이 생각났다. 그도 회사를 떠나기 전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설마…… 이직 생각 중이냐?“

부하직원이 어색한 표정으로 손사례를 쳤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너 표정이 꼭…….“

이번에도 부하직원은 부정했다. 하지만 개발이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긴 우리가 대산 쪽 인원을 빼내려는 것처럼 그쪽에서도 우리 쪽 인원을 빼갈 수 있겠지.’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코 넷플러스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 * *

대산 그룹 대 회의실.

드디어 오늘 완성된 DSP 시연회가 있는 날이었다.

대산 재고 관리 플랫폼.

DRP의 뒤를 잇는 서비스로 앞으로 대산 그룹의 든든한 밥줄이 될 서비스였기에 강철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했다.

“시작하세요.”

강철의 말에 개발 총괄 매니저인 하진기가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에 PPT가 한 장 나타났다.

-대산 재고 관리 플랫폼

-개발 성과 공유.

이내 제목 화면이 넘어가고 강철의 스타일 대로 발표가 진행되었다.

개발스택.

개발성과.

어떤 기술을 이용해서 어떤 걸 개발했는지 아주 짧게 만들어진 PPT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시나리오별 구동을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진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개발팀이 달려들어 각종 세팅을 마쳤다.

입, 출고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각 물류 센터에 어떤 물품을 어느 정도 양을 비치해야 하는지 알려주어야 한다. 단순히 데이터만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가공된 데이터를 알기 쉽게 표나 그래프로도 볼 수 있는 서비스가 까지 제공했다. 그래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세팅이 끝나고, 하진기가 가상으로 물품 입, 출고 데이터를 입력시켰다. 그러자마자 나타난 화면에 하진기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500 Error.

서버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놀란 개발자들이 전화기를 들었고, 사무실에서 백업하던 개발자들이 급히 로그를 살폈다.

사실 이런 일은 흔했다. 단지 그룹사 대표인 강철이 보는 상황이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당황한 하진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 이게 몇 번 테스트했지만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1분, 2분이 지나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강철의 일정은 시간 단위로 짜여 있다. 여기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면 뒤 일정이 줄줄이 밀리게 되는 것이다.

강철이 한 칸 뒤에 앉아 있는 비서에게 물었다.

“다음 일정이 뭐죠?”

“윌마트와 DSP 적용 관련 화상 회의입니다.”

더더욱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강철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켜서 바로 DLP(대산 로그 플랫폼) 시스템에 접속했다.

대산에서 사용하는 모든 시스템 로그는 이곳에 수집된다. 권한이 있다면 이곳에서 모든 시스템의 로그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철은 최상위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보자…….”

강철은 화면을 터치해 DSP의 로그 부분을 찾아냈다. 에러는 [ERROR] 태그와 함께 빨간색으로 표시되기에 한 눈에 어느 부분에서 에러가 발생하는지 알 수 있었다.

-The DSP memory heap is disabled.

-Mutexes and rk_locks use other process.

…….

거기에는 수십 줄의 에러가 기록되어 있었고, 강철은 빠르게 에러가 가리키는 부분으로 코드를 찾아 나갔다.

터치.

터치.

터치.

화면을 터치할 때마다 몇 개의 코드 뷰 창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한편.

단상에 서 있는 하진기는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아직이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김정민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아…… 원인은?”

“문제가 발생하는 건 웹서버인데 실제 그쪽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준호 말로는 데이터 분석 시스템 쪽에서 잘못된 데이터를 웹서버에 넘겨줘서 메모리 부족 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고 하는데…….”

“확실한 건 아니다?”

김정민의 목소리가 한층 기어들어 갔다.

“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시연회 날 이렇게 문제가 생기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늘 해결되긴 돼?”

“…….”

“오늘 윌마트랑 화상 회의 있는 건 알지? 회의 끝나고, 그쪽에 시스템 오픈해 줘야 하는 것도.”

김정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는 개발 일정이 계속 딜레이된 탓이었다. 원래는 2주 전 시연회를 하고, 오늘 화상 회의를 진행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미뤄지고 미뤄지다 결국 오늘 시연회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진기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너한테 뭐라고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냐.”

사실 이게 정상인 상황이었다.

과거 이강철과 함께 일할 때 버그 하나 없이 일정을 딱딱 맞춰 일을 끝냈던, 그때가 비정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CTO님…….”

CTO.

회사에서 강철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문제 해결됐습니까?”

그 말에 하진기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한 모습에 강철이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런 문제야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물론 자신이 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직원들은 자신과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다그치기만 한다면 일이 진행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진기가 그런 강철을 보며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먼저 개발자들 불러서 여기부터 봐주세요. 제가 생각할 때는 이 부분을 해결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하진기가 눈짓하자 김정민이 재빨리 개발자들을 호출했다.

양정민.

그는 대산 그룹이 IT 분야에 집중 투자를 시작하면서 입사한 인물로 국내 대표 온라인 쇼핑몰 ‘쿠키’에서 이직한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현재 내부 직원들이 보이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이 부분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양정민보다 빨리 쿠키에서 넘어온 최규범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은 없어.”

“네?”

“이걸 말한 사람이 CTO님이니까.”

그 말에 다른 직원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절대자를 믿는 종교인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아무리 CTO님이라 해도 이 방대한 시스템을 다 알지 못할 텐데…… 더구나 직접 개발에 참여하신 것도 아니잖아요.”

“후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하는 거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설명해 줄 시간이 없어. 어서 이대로 적용하고, 시연회를 잘 마무리해야 해. 내일이면 이거 타사에 오픈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몇 번 확인을 거쳐서…….”

그 말을 최규범이 잘랐다.

“그만. 시간 없다고 했잖아.”

말을 잘라낸 최규범이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함께 있던 양정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검토도 하지 않고 저렇게 바로 적용하다니…….’

선 검토 후 적용.

너무 당연한 절차가 CTO 이강철이 개발했다고 해서 생략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 더 흐르고.

최규범에게 부하직원이 다가왔다.

“적용 끝났습니다. 서버 다시 기동하겠습니다.”

이내 서버가 재기동 되었고, 테스트 전문 직원들이 시나리오대로 테스트를 진행했다.

잠시 후.

양정민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문제도 없이 시스템이 잘 기동 되었기 때문이었다.

최규범이 픽 웃으며 말했다.

“봤어?”

그 말에는 자부심이 잔뜩 묻어있었다. 양정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규범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 괜히 올해의 언어에 선정된 게 아니야.”

“하하…… 네.”

“그러니까. 앞으로 CTO님이 하시는 일에 토 달지 마. 알았어?”

양정민은 새삼 왜 최근 대산 그룹이 그렇게 ‘핫’한지. 기술적으로 뛰어나다 평가받는지 알 것 같았다.

양정민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은 바로 하진기에게 전달되었고, 시연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이후 이어진 윌마트와의 화상 회의.

강철은 DSP의 성능을 자세히 설명했고, 윌마트로부터 일단 테스트를 해보고 결정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이미 DRP를 윌마트에 공급하고 있었기에 별문제가 없다면 DSP 역시 공급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윌마트와의 회의까지 끝나고.

아직 한 가지 회의가 더 남아 있었다.

DRP 관련 회의.

최근 넷플러스에서 NRP의 개발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리기 때문이었다.

“자체적으로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NRP의 성능은 대략 30~32% 수준에서 멈춰 있다고 한 겁니다. 최근 2개월 이내 NRP 프로젝트에서 이직한 직원이 해준 말이니 확실할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보다 성능이 6~8% 부족하다는 말이군요. 그런데 우리는 그쪽보다 30% 정도의 비용을 더 받고 있다.”

“네. 그래서 일부 회사에서는 가격 면에서 우위에 있는 NRP 쪽 사용으로 마음을 돌리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흠…….”

“압도적인 성능 차이가 안 난다면 다시 돌아오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미간을 긁적거리던 강철이 다른 안을 내놓았다.

“그러면 DSP를 함께 사용하면 비용을 할인해주는 건 어떻습니까? 일종의 끼워팔기를 하는 거죠.”

“괜찮은 방법이기는 한데…… DSP 개발이 이제 오픈 베타를 시행하는 수준이라…….”

오픈베타.

시연회를 한 DSP는 자사 계열사에 서비스를 적용해 보며 한 번 더 성능 개선을 거칠 예정이었다. 그것까지 마치고 서비스가 정식으로 출시 되기까지는 앞으로 수개월이 소용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기간을 줄여보도록 하죠.”

그 말에 기획전략 실장이 물었다.

“CTO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겁니까?”

강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자 전략실장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강철이 직접 나서서 실패한 프로젝트는 지금까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바로 프로모션 기획해서 보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걸로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대산이 만들어낸 프로모션 기획안이 각 기업으로 전달되었다. 그 내용을 확인한 넷플러스 사장 테드 하트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프로모션을 해버리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인 가격 우위도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아직 우리 쪽 서비스가 10% 정도 더 쌉니다. 폰도 프리미엄 폰, 중저가 폰을 이용하는 소비자가 따로 있듯이 추천 플랫폼 역시도 그럴 거라 예상합니다.”

“그러자면 서비스 가격을 더 낮춰야 메리트가 생길 것 같은데…….”

“그래서 10% 추가 할인 프로모션을 진행해 보려고 합니다.”

넷플러스의 CEO 테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흠…….”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는 디즈니 플러스, 나일 프라임 등등 여러 서비스가 우후죽순 출시되면서 경쟁 강도가 강화되고 있었다. 신사업은 대산에 밀려 또 한 번 가격을 할인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그런 CEO에게 회사 운영 이사가 물었다.

“진행할까요?”

테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저가 서비스.

그 포지션이라도 확실히 차지하기 위해서. 하지만 불길함 예감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NRP는 강철에게 먹히고, 이대로라면 현재 캐시카우인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의 매출도 꺾일 것 같은 그런 예감이.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강철은 청담을 찾았다. VK 통신사와 협업건 때문이었다.

협업을 위해 도착한 건 최윤아. VK 통신사 회장인 최서훈의 차녀였다.

그녀는 청담으로 오자마자 아이온 밸리라 이름 붙여진 거리를 한번 보고 싶다며 강철을 이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네요. 제가 근무하는 종로 쪽은 딱딱한 정장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데.”

“어차피 개발만 잘하면 되니까요.”

이제 이곳은 강철이 입주시킨 스타트업들 덕분에 판교에 버금가는 IT 밸리로 재탄생해 있었다. 건물 곳곳에 기업들이 입주했고, 거리에는 넘쳐나는 개발자들로 활기가 가득했다.

그런 개발자들을 보며 최윤아가 말했다.

“제가 경험한 실리콘 밸리도 이런 느낌이었어요. 대표님께서는 이곳 청담을 그런 곳으로 만들려 했나 봐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한강이 보이는 곳에 근무하고 싶었어요.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근무하며 산책을 하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곳에 회사를 입주시키다 보니 규모가 커진 겁니다.”

“하긴 내가 좋아하는 건 다른 이들도 좋아할 테니까.”

강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프로그래밍도 창의적인 생각인 필요합니다. 멍하니 한강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까. 뭐 그런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 같은 건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요.”

최윤아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솔직하시네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특히나 V스토어 입점 협의를 할 때는 더욱 그럴 테고요.”

V스토어 입점 협의.

오늘 회의의 주요 쟁점 사항이었다. 대부분 협의가 되어 있었지만, 수수료를 비롯한 비용문제 몇 가지가 아직 타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합리적인 수준에서 일을 진행하신다고 들었어요.”

“하하, 네 뭐.”

최윤아가 거리에 보이는 간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회사가 많긴 정말 많네요.”

“대략 70여 개 사 정도 될 겁니다.”

한국에서 강철이 투자한 스타트업의 개수였다. 그가 투자한 회사들은 대부분 이곳에 입주해 있었으니까.

“저들 중에서 아이온 인공지능이나, 아이체크, 알고리듬 같은 회사가 또 탄생하겠죠?”

“그렇게 만들 겁니다. 그게 제가 투자를 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대화를 나누던 최윤아가 돌연 빙글 몸을 돌렸다. 진선미와는 달리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럼 혹시 V 스토어도 키워보실 생각 있으세요?”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실무선에서 이야기가 안 된 걸 보니 아마 극비로 진행하는 내용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겠지만 서치에서 모든 앱스토어 내 컨텐츠 수수료를 30% 올렸어요. 애플은 이미 과거부터 같은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고요. 덕분에 V 스토어에 아주 큰 기회가 찾아왔어요.”

“그게 제가 V 스토어를 키우는 것과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폰에 V 스토어가 설치되어 있음에도 우리 앱 스토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로 가장 많이 꼽는 게 ‘느리다’, ‘불편하다’, ‘익숙하지 않아서’, 이런 이유를 꼽고 있죠.”

“그걸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보시는 거군요.”

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의 언어 선정, 알고리듬 개발, 아이온 인공지능 개발, 에이글 닷컴 1위 등등 대표님은 국내를 대표하는 개발자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개발자입니다. 물론 단순히 그런 개발 능력만 갖추고 계셨다면 키워달라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강철이 조용히 있자 최윤아가 말을 이었다.

“사업 능력. 그것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최윤아가 말을 흐렸다. 강철은 그 뒷말에 지금보다 더 큰 계획이 숨겨져 있다는 걸 직감했다.

잠시 망설이던 최윤아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V 스토어는 오성 전자의 마르스 폰에 기본 탑재되는 ‘M 스토어와 통합도 고려하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국내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우리 스토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대표님은 현재 세계를 상대로 DRP라는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죠. DRP도 플랫폼, V 스토어도 플랫폼. 협업을 한다면 대표님이 적임자라 생각했어요.”

그 말에 강철이 두 눈을 살짝 떴다.

현재 오성 전자의 마르스는 애플의 아이폰과 스마트폰 업계의 양대 산맥이었다. 그 폰에 기본탑재되어 출시 될 수 있다면 출시하자마자 사용자 1억 명은 우습게 모을 수 있으리라.

강철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정확히 제 포지션은 무엇인가요?”

“현재는 지분투자를 통한 개발 협력을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대표님께서도 나름의 생각이 있을 수 있으니 차차 논의를 통해 결정해도 무방합니다.”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최윤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그럼 돌아갈까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다시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걸어가던 최윤아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트리플의 엘리와 사귀는 사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한 강철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네요.”

“촬영을 같이하긴 했지만 그럴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혹시 그런 소문이 어디서 돌았습니까?”

“그건 왜요?”

“제가 아닌 상대 연예인에게 치명적인 소문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소문이 돌지 않도록 조치하려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예요. 이대로 두는 게 소문을 잠재우는 가장 빠른 길이죠.”

“흠…….”

“아니면 그걸 덮을 만한 다른 사람과 열애설을 터뜨리거나.”

“네?”

“그냥 말이 그렇다고요.”

그걸로 둘의 산책은 마무리되었다. 최윤아는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끝내 말을 꺼내지 않았다.

* * *

다음 날.

강철은 청와대에 도착했다. 강철은 도착하자마자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청와대 내에 있는 밀실로 이동했다.

지난번과 비슷하게 정책실장이나 보는 것인 줄 알았던 강철은 그곳에 앉아 있는 의외의 인물에 헛숨을 들이켰다.

“반갑습니다. 천건복입니다.”

천건복.

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철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천건복이 내민 손을 맞았다.

“이강철입니다.”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하, 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강철이 떨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겨우 답했다.

“감사합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바쁘신 분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네. 물론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국가과학기술 자문위원회에서 기초과학 분야에 5천억을 투자하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강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단 정부에서도 오천억을 출연해 펀드를 조성하자. 그리고 그로 인한 수익금은 비율대로 나누자.”

자신이 한 말과 똑같았다.

“네. 인공지능, 2차전지, 신재생에너지, 5G, 자율주행차 등등 지금 나라에 기반이 되는 기술은 전부 기초과학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천건복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그려졌다.

“아주 좋은 제안입니다. 왜 이 제안이 지금까지 시행되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로요.”

“그 말씀은…….”

“오늘 오찬이 끝나면 바로 발표합시다.”

“아, 알겠습니다.”

“이 말을 하려고 따로 불렀습니다.”

“네. 그럼…….”

“일어나 볼까요.”

“네.”

아주 짧고 담백한 만남이었다. 그로 인해 강철의 뇌리에 천건복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가 조금씩 자리 잡았다.

그렇게 단둘의 회동이 끝나고.

본격적인 만찬이 시작되었다. 강철은 그곳에서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인물을 마주쳐야 했다.

“오랜만이군요.”

정책실장 서종석이 강철에게 다가왔다.

“네. 안녕하십니까.”

서종석은 그리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강철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곧 진행될 투자건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얼마 전 진용민을 만났을 때.

그가 지었던 표정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항상 성공을 기원하겠습니다.”

정책실장이 자리를 떠나고, 강철은 오찬에 참석한 다른 인물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정책실장의 마지막 말이 떠나질 않았다.

-성공을 기원하겠다.

그 말이 마치 망하길 바라는 기도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강철이 뒤돌아선 정책실장을 향해 말했다.

“실장님도 승승장구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서종석은 그 말을 들었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관련 내용이 바로 언론을 통해 흘러나갔다.

-아이온 그룹 오천억 규모의 기초과학 투자 계획 발표.

-정부-아이온 합작 기초과학 전문 투자 펀드 조성.

-수학, 물리, 화학, 지구과학 누구도 관심 같지 않은 분야에 투자한다.

뉴스가 나오고 강철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는 더 높이 상승했다.

농촌맛집.

The Startup.

그에 이어 기초과학 분야 투자까지.

그리고 개인의 인기는 대산 마트, 백화점의 매출 상승까지 이어지며 선순환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 *

서울 한남동.

VK 그룹의 회장 최서훈의 집.

그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를 쫑긋 기울였다.

“V 스토어 리뉴얼 같이 해보고 싶다고 한 게 저 친구였지?”

그의 질문에 옆에 앉아 있던 최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확실히 남다른 면이 있긴 있어. 어떤 재벌도 저 큰 금액을 기초과학에 투자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TV에서는 강철의 기초과학 분야 투자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이온 그룹은 총 5천억 규모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국내 우수한 연구진들이 많다면 그 금액은 더 늘어날 수 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뉴스를 듣던 최윤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직접 만나보니 더 괜찮더라고.”

그 말에 최서훈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너…….”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최윤아.

그녀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둘째 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관심을 표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뭐 조금…….”

“지금까지 밀려온 혼사 자리 다 싫다고 하더니. 이제야 마음이 동한 거냐?”

“만나보니까. 사람도 괜찮아 보이더라고. 다른 놈들이랑 달리 더러운 뒷이야기도 없고.”

“……정말?”

“박 비서가 알아본 거니 확실할 거야.”

그 말에 최서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비서는 자신도 신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리 한번 마련해 주랴?”

“아빠가? 아빠가 무슨 힘으로?”

“아빠 아직 안 죽었다. 그래도 나름으로 재계에서 방귀깨나 뀌는…….”

하지만 그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지금 이강철 대표 재산이 아빠를 훨씬 뛰어넘었을걸. 아이온 그룹 계열사 차차 상장하면 개인 재산으로는 오성전자 회장님도 넘어선다던데?”

“꼭 재산만이 아니라 아빠가 가진 인맥이면…….”

“어제 대통령님이랑 독대했다고 하더라.”

“…….”

“내가 알아서 할게.”

최서훈은 마른침을 삼킬 뿐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최윤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시선이 닿는 곳에는 강철의 사진이 방송되고 있었다.

* * *

미국 윌마트.

그곳에서 DSP 적용 관련 회의가 벌어지고 있었다.

“DSP 성능 측정을 해봤더니 자체 재고관리 시스템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대로라면 DSP 시스템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운영비용은?”

“DSP를 적용하면 10%가량 저렴해집니다.”

“결국, 같은 성능에 비용을 10%가량 절약할 수 있는 거군.”

“대신 기술 내재화, 재고관리의 노하우를 다른 회사에 넘기는 거고요. 그에 따른 손실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DSP 연동을 총괄하고 있는 마크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들어보니 자넨 이번 일에 부정적인 것 같은데…….”

부하직원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별로 없습니다. 이미 DRP까지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 DSP까지 적용하게 되면 윌마트가 대산에 종속될 수도 있고요.”

그 말에 마크가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플이 폭스콘에 외주를 맡겼다고 거기에 종속되었나?”

“…….”

“에어비앤비가 자체 서버를 운용하지 않고,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한다고 해서 해당 업체에 종속되었어?”

연이은 질문에 직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해. 그러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오고 있어. 선택과 집중. 이 프로젝트도 그 일환으로 추진되는 것이고. 자네 생각은 너무 과한 것 같군.”

부정적인 의견을 가진 부하직원을 조용히 만든 마크가 깊은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러면 10%의 비용 절감을 위해 해당 서비스를 사용하느냐의 문제인데…….”

그 말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성능이 조금만 더 좋았더라도 DSP 사용을 선택했으리라. 현재 DRP를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그때.

회의실에 있던 한 직원의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진 상태였기에 그 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당황한 직원이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대산 DSP&DRP 패키지 프로모션 금액 제안.

이라는 제목으로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직원이 재빨리 메일을 확인했다.

이미 DRP는 사용하고 있었다. 거기에 DSP까지 사용하게 된다면 비용을 더 할인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직원은 해당 메일을 재빨리 관련 직원들에게 전달했다. 당연히 이번 프로젝트 총괄을 맡은 마크에게도 전달되었다.

“이러면 비용이 15%가량 절약되는 거잖아.”

“네. 지금까지 나온 추정치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거 사용하는 게 이득인데…….”

매년 15%가 절약된다면 회사 내에서 수천만 달러 이상이 절약되는 것이었다.

DSP를 사용하겠다는 쪽으로 무게추가 점점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직원들과 함께 최윤아의 제안을 검토 중이었다.

“현재 V스토어의 국내 점유율이 18%입니다. 서치의 앱 스토어가 71%, 애플의 앱스토어가 11% 이렇게 삼분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들어갔을 때 최대 먹을 수 있는 게 71%라는 말이군요. 어차피 애플 앱스토어는 완전히 별도로 운용되니.”

“네.”

“물론 그렇게까지 전부 먹을 수는 없겠지만 50%까지는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강철의 질문에 시장 상황을 분석한 기획전략 실장이 자료를 보며 답했다.

“최근 서치의 수수료율 인상으로 V 스토어의 사용자가 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여러 불편한 점들을 토로하는 소비자가 많습니다. 그중 가장 큰 불만은 속도입니다.”

강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속도요?”

“실제로 앱을 이용해 보면 서치의 경우 대부분의 화면에서 부드러운 작동이 되는 반면 V스토어는 화면에 노출되는 데이터 건수가 많아질수록 느려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유 없이 앱이 죽는 경우도 많고요. 이건 V스토어에 대한 직접 설문을 통해 조사한 자료라 정확할 겁니다.”

기획 실장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두 부분만 개선돼도 사용자는 빠르게 늘어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표님이 해당 프로젝트를 직접 진두지휘한다는 소식이 퍼져 나간다면…… 정말 50%까지 먹을 수도 있고요. 국내 포털이나 메신저 서비스가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요.”

강철의 눈이 기획실장과 마주쳤다.

“제가 나선다고 해서 그렇게 된다고요?”

기획실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대표님의 인기는 생각하시는 것 그 이상이라서요. 인기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뭐랄까. 일종의 신드롬이라 해야 할까요. 아시겠지만 최근 대산 마트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빅트리 닷컴도 마찬가지고요. 내부적으로는 전부 대표님 덕분이라고 결론을 내린 상태입니다.”

“그제 저 때문이다?”

“물론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이 대표님의 인기라는 게 중론입니다.”

“그 말은 제가 직접 나서서 V 스토어를 홍보한다면 사용률이 올라갈 수 있다.”

“네. 그래서 최윤아 팀장이 직접 찾아온 걸 겁니다.”

“내가 얼굴마담이라…….”

그 말에 전략기획실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물론 대표님의 실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 인기도 만만치 않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튼 발전 가능성은 높다는 말이군요.”

“네. 이 사업은 수익성도 높아서 잘 만하면 우리 쪽에도 큰 이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건 다음 페이지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V스토어의 수익 부분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V 스토어 MOU건 관련된 회의만 1시간 가까이했다. 그다음 예정된 건 기초과학 투자 부분.

오천억이라는 자금이 투여돼야 하기에 대상자 선정에서 추후 자금 회수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또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벌써 회의만으로 3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

DSP 개발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일정을 앞당기기 위해 강철이 직접 개발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코딩을 직접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하진기, 김정민, 천준호가 회의에 참석한 상태에서 강철이 간단한 설명을 이어갔다.

“보시면 제가 각 클래스별, 메소드 명 위에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 주석을 달아놨습니다. 그에 따라 코딩을 해주시면 되고요.”

천준호가 목을 쭉 뺀 채 화면을 주시했다.

“그러니까 저기 TO-DO 부분에 적힌 대로 코딩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보면 입력 파라미터, 출력 값까지 전부 적혀 있으니까. 저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전체 설계도는 중앙 서버에 올려놨으니까. 그걸 참고하면 되고요. 설계도 개념은 숙지하고 있죠?”

하진기를 비롯해 직원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이 벌써 3번째 걸쳐 관련 내용을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강철이 그런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크게 어려울 건 없습니다. 이대로만 해주시면 돼요.”

하지만 그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천준호는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철의 레벨은 올라갔고, 그가 생각하는 적정수준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적정 수준에서 갭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못 하겠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DSP 개발회의가 끝나고.

강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팔을 쭈욱 뻗었다. 오랜 회의로 우두둑거리며 온몸의 뼈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회의실을 떠나지는 못했다.

리턴 버전업.

그와 관련된 회의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프로그래밍 협회장인 마틴 오맬리가 직접 참여 하기 때문에 빠질 수 없었다.

월 1회.

화상 회의를 하며 그간의 성과를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마틴의 실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직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리턴’은 그의 손을 거치면서 점점 범용성을 갖춰가고 있었다.

-버전 3.0에는 본격적으로 웹 프로그래밍을 위한 배려가 들어갔으면 합니다. 최근 많이 사용되는 react처럼 가상의 DOM 객체를 만들어 웹 페이지를 통제할 수 있는 컨셉으로 가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저도 관련해서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네. 그와 관련해서 제가 개발한 내용이 좀 있는데 git에 올려두겠습니다.

“네.”

물론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마 그랬다면 마틴도 이 일을 함께하지 않았으리라.

“이번에 웹프로그래밍 관련을 넣어보자고 하셔서 전 javascript 호환기를 좀 만들었습니다. 웹프로그래밍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javascript가 리턴으로 변환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리턴을 사용할 것 같아서요.”

-오 그거 괜찮은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만들어서 git에 올려두었습니다. 시간 나실 때 한번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오가는 게 있기 때문에 마틴도 열성적으로 개발에 참여하며 리턴을 버전업되었다. 그럴수록 사용자가 늘어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강철이 회사 일로 정신없는 사이.

넷플러스도 내부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The Startup이 자체 최고 조회수를 갱신했습니다.”

“시즌1? 아니면 2?”

“둘 다입니다. 사이좋게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습니다.”

“허허…….”

“더구나 3위 컨텐츠보다 The Startup의 조휘수가 30% 정도 높습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차이입니다.”

그 말을 들은 넷플러스의 CEO 테드 하트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마어마하군. 이제 넷플러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컨텐츠가 되었어.”

그 말에 컨텐츠 담당이사가 점점 말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시즌 3에서는 유럽, 시즌 4에서는 아프리카, 시즌 5에서는 아시아. 이런 식으로 규모를 키워보려 합니다. 시즌 10쯤에서는 월드베스트 선정. 뿐만 아니라 그를 모티브로 영화도 만들어볼까 합니다.”

아주 좋은 계획이었다. 이강철이라는 사람이 넷플러스와 경쟁관계에 있는 것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알았어.”

“네. 그럼 이대로 추진해 볼까요?”

테드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맞는 걸까?

이럴수록 이강철의 인지도는 올라가고 DRP의 사용자는 늘어날 것이다. 반대로 NRP의 이용자는 조금씩이지만 분명 하게 감소세를 보이고 있었다.

불과 어제만 해도 세 군데의 고객사에서 더는 NRP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해지통보를 해왔다. 그랬기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고민하던 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진행하지.”

“알겠습니다.”

이건 이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NRP는…… 한 직원의 건의대로 차라리 대산에 매각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테드 하트리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 * *

청담.

그곳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KC 빌딩의 가장 꼭대기에 강철의 집무실이 있었다. 한눈에 청담 시내가 훤히 보이고, 한강 변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에 있었다.

강철은 커피를 한잔 마시며 잠시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창밖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두꺼웠다.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내년이면 31살이네…….”

31살.

20대에 이곳으로 돌아와 30살이 넘어버린 것이다.

그간 일어났던 많은 일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계획했던 일들이 술술 잘 풀려 나갔고, 자신이 생각해도 과한 위치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 잠깐의 휴식도 그리 길게 가지는 못했다.

똑똑.

비서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온 것이다.

“들어오세요.”

강철의 말에 문이 열리고 심 비서가 들어왔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고, 넷플러스에서 NRP 사업 부문을 인수할 생각이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네?”

NRP.

넷플러스의 CEO인 테드 하트리가 직접 대산의 DRP를 인수하려는 계획까지 세워가며 추진했던 사업이었다. 그런데 그걸 매각하겠다니.

“인수 금액은 4억 달러. 물론 협의는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능이 자신들의 기준에 들어맞는다면 우리 쪽 추천시스템을 사용하겠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강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생각보다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회사의 핵심 역량을 컨텐츠 제작에 쏟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최근 유명 IP(지적 재산권)들을 사들이는 걸 보면 대표님의 말씀대로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방향을 확실히 정한 것 같습니다.”

“디즈니 플러스나, HBO 맥스, 애플 TV+같이 경쟁상대가 만만치 않을 텐데…….”

“그래서 이런 말도 전해 왔습니다. The Startup 후속작 논의를 해보자고요. 대표님을 하나의 IP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요?”

“마블의 히트작 아이언맨의 모티브가 누군지는 아실 겁니다.”

“일론 머스크.”

“그 아이언맨으로 마블은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제가 받은 느낌으로는 대표님을 그런 식으로 캐릭터화시켜볼 생각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The Startup의 후속작인 시즌 3이나 4를 비롯한 영화화나 애니메이션화도 시켜보고 싶다고 말했으니까요.”

그 말에 강철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대표님께 직접 하겠다고 합니다. 아마 극비리에 일을 추진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내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일단 NRP 사업 부문 실사부터 진행하라고 하세요. 가격만 맞는다면 인수하는 게 득일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강철이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리고 NRP 인수하는 걸 들으니 생각난 건데…….”

“네.”

“인도, 일본, 필리핀, 태국 등등 이쪽 동아시아 온라인 쇼핑몰을 인수해서 빅트리와 합쳐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말에 심 비서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빠르게 머리를 돌려 정리를 마친 심 비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본 1위 기업은 라쿠린. 온라인 쇼핑몰 부분만 떼서 본다면 20조 정도의 기업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리고 인도의 경우 최대 쇼핑몰이 빅스토어인데 이게 한 4조 정도의 기업가치를 평가받고 있고요. 필리핀이나 태국은 라자린이라는 기업이 1위 업체인데 대략 10조 정도의 가치를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것 봐도 이것들 전부를 인수하려면 34조가량의 돈이 필요한데…….”

강철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온 인공지능 매각 금액에 다른 회사들도 나스닥에 상장시킨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경영권 방어 수준의 지분만 인수하면 되니까요.”

“흠…….”

“그렇게만 된다면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를 총괄하는 쇼핑몰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후 중국에 진출해서 아시아 시장을 먹고, 러시아에 지사를 세워 유럽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식으로.”

“그때 말씀하셨던 거군요.”

“네.”

심태선.

그를 알게 된 건 온라인 쇼핑몰 시장에 대한 박사 논문 때문이었다. 논문을 읽고, 미국으로 날아가 직접 스카웃하며 했던 말이 동아시아를 제패하는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심 비서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습니다. 관련 사항을 조사해 보겠습니다.”

“네 수고 좀 해줘요.”

그날 오후.

강철은 서울 시내 회원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클럽에 도착했다. V 스토어 투자를 위한 최종 결정을 위함이었다. 사무실이 아닌 프라이빗 클럽으로 온 이유는 최윤아가 술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최윤아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하얀 얼굴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어서 오세요.”

“네. 오랜만입니다.”

“얼마 전에 또 큰 건을 하나 처리하셨더라고요.”

큰 건이라…….

설마 NRP 인수 소식을 들은 것일까.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강철을 대신해 최윤아가 입을 열었다.

“기초과학 분야 5천억 투자. 아버지도 해보지 못 한 일을 강철 씨가 했다면서 칭찬이 대단하세요.”

“아…… 네 뭐.”

“한 번쯤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다 하시는데…….”

최윤아가 말을 흘리며 강철을 보았다. 앞에 놓여 있던 물을 한잔 마신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최서훈 회장님은 저도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저야 영광이죠.”

그 말에 최윤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 한번 마련할게요.”

최윤아가 말을 하며 머리를 살짝 쓸어 넘겼다. 그러자 하얀 목덜미가 속살을 드러냈다.

그녀 특유의 은은한 향이 또 한 번 코끝을 간지럽혔다. 시각과 후각이 동시에 자극을 받은 것이다.

강철은 타는 듯한 목마름에 또 한 번 물을 들이켰다. 강철이 급히 입을 열었다.

“V스토어 건은 어떻게 진행되는 걸까요? 저희 측이 요구사항을 보냈고,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고 들었는데.”

“말씀하신 대로 아이온 쪽에서 지분 30%를 투자하고, DRP 적용 및 전체적으로 강철 씨가 만든 기술을 적용하기로 했어요. 이를테면 프로그래밍 언어에 ‘리턴’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그럼 저희 측 요구조건은 대부분 수용된 거군요. 혹시 그 밖에 따로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최윤아가 강철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어 갔다.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있는 은은한 조명이 더욱 은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최윤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몇 가지 있긴 해요. 그 첫 번째는 대표님께서 직접 와서 우리 개발자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거예요.”

“설득이요?”

“현재 V스토어는 JAVA라는 언어로 개발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걸 ‘리턴’으로 바꾼다. 개발 팀장의 말로는 반발이 엄청날 것이라 들었어요. 언어를 바꾸는 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강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최윤아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번 회사로 오셔서 ‘리턴’이라는 언어의 장점을 설명해 주시고, 개발자들을 설득해 주셨으면 해요. DRP 적용 건도 마찬가지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네.”

“지분을 20%가 아닌 30% 정도 매입해 주었으면 해요. 이걸 오성전자 마르스에 탑재해 전 세계로 서비스하려다 보니 서버 증설에서부터 마케팅 비용까지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요.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한 시점이라서.”

지분이 많으면 자신에게도 이득이었다. 이번에도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잠시 말을 흐리던 최윤아가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 저랑 끝까지 가는 겁니다.”

끝까지.

그 말에 당황한 강철의 볼이 달아올랐다. 최윤아가 술병을 열어 강철에게 따라주었다.

“이거 다 먹을 때까지는 못 가는 거예요.”

“술…… 말입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전통이에요. 사업 파트너와 꼭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라. 그리고 취했을 때 나오는 모습을 보아라.”

저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강철도 왠지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그간 열심히 일만 하느라 제대로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철이 잔을 들어 보였다.

“좋습니다.”

졸졸졸.

강철의 잔으로 황금빛 위스키가 채워졌다. 잔이 1/3 정도 채워질 때쯤 강철이 말했다.

“가득 채워주세요.”

이번에는 최윤아가 당황했다.

“……네?”

“이거 저만 마시는 게 아니라 같이 마시는 거잖아요. 제가 남자니까. 핸디캡 정도는 가져가야죠.”

그 말에 최윤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내 온더 락 잔 가득 위스키가 채워졌다.

강철은 그걸 단박에 마셔 버렸다. 30도가 넘는 알콜이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갔다.

탁.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은 강철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네요.”

최윤아는 직감했다.

‘어쩌면 내가 취할지도 모르겠어.’

자신도 어디 가서 술 못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20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직접 술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먼저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 * *

다음 날.

끄으응…….

최윤아가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타는 듯한 목마름이 느껴졌다.

겨우 손을 뻗어 협탁 위에 있던 물잔을 들었다.

“우욱…….”

하지만, 물을 채 마시지도 못하고, 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다. 한동안 화장실에서 변기를 부여잡고 있던 최윤아가 겨우 밖으로 나와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어느새 방안으로 들어와 그 모습을 본 최서훈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됐어.”

“보니까. 그 친구도 술을 어마어마하게 마시는 것 같은데?”

“내가 누구야. 아빠 딸이잖아.”

최서훈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최윤아를 보았다.

“오호…….”

“딱히 술주정은 없었어. 여자를 찾지도 않고, 약 같은 걸 원하지도 않고. 그냥 조용히 엎어져 자더라.”

“그 말은…….”

“한번 만나보고는 싶어.”

최서훈이 흐뭇한 표정으로 딸을 보았다.

어서 최윤아가 결혼해 주길 바라 마지않았다. 그런데 드디어 자신도 마음에 들고, 최윤아도 마음에 드는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다음은 아빠한테 맡겨.”

그 말에 최윤아가 질겁을 하며 소리쳤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그게 돕는 거니까.”

“넌 걱정하지 마. 아빠가 아는 인맥들을 총동원해서 연결해 줄 테니까.”

최윤아가 한 번 더 소리를 빽 질렀다.

“아빠!”

하지만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최서훈은 바로 비서를 불러 말했다.

“이강철이랑 자리 한번 마련해 봐.”

“알겠습니다.”

그 모습에 최윤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깨질 것 같은 두통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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