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차지하다
주주총회가 끝나고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철은 반수가 넘는 이사진을 데리고, 바로 이사회 소집을 건의했다.
하지만.
대표이사 해임을 건의하는데 대표이사가 이사회를 소집해 줄 리 만무했다. 이사회 소집은 대표이사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었다.
차학윤은 바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다수결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다른 등기이사가 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집된 이사회에서 차학윤은 바로 대표이사에서 해임되었다.
-대표이사 해임 안.
-가결.
-회장 해임 안.
-가결.
새로운 대표이사에는 강철이 외부에서 영입한 유통 전문가가 선임되었다. 그 대표이사가 회장 자리까지 맡았다.
미국의 유명 마트 체인인 윌마트에서 부사장까지 올라갔던 인물로 대산 그룹의 체질을 변경시키기 위해 특별히 모셔온 분이었다.
강철은 그 사람을 회장 자리에 앉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만 결정권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이사회가 끝나고.
진선미가 강철을 다시 찾아왔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강철이 손짓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자리에 앉은 진선미는 새삼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옛날에는 내가 오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더니…….’
이제는 아주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그리 싫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아시겠지만 ㈜대산이 가지고 있는 마트 지분은 30%밖에 되지 않아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대산은 백화점 영업을 하면서 대산마트의 지분 30%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대주주 일가가 가진 지분에 우호지분을 합쳐서 대산 마트를 실효 지배 중이었다.
“위임장을 써드릴게요.”
“주권을 이양하겠다는?”
“네. 그것도 앞으로 5년 동안.”
강철이 턱 주변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대가는요?”
“일단은 지금의 위치 보전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다른 계열사와 함께 제가 가진 지분을 교환해 주세요.”
“생각하시는 계열사는요?”
“대산 패션, 프리미엄 아울렛, 푸드.”
세 가지다 비주력 계열사였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전무님께서 가진 마트 지분이 7%였죠?”
“네. 거기에 ㈜대산 지분도 가지고 있어요.”
“하하, 그거야 이미 제가 대산을 지배하고 있으니 크게 의미 없는 지분입니다. 딱히 탐나지도 않고요.”
진선미가 가진 지분은 이제 위협이 되지 못한다. 다른 소액주주들이 회사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수 없듯이.
강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탐나는 건 마트 쪽입니다. 전무님 지분이 합쳐지면 37%. 이 정도면 경영권을 방어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긴 하군요.”
“부족할 수도 있어요. 저쪽에서 이를 갈고 있으니.”
강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진선미를 보았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제게 하시는 거죠? 사실 잘 이해가 되진 않습니다.”
재벌가.
그 자제가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더구나 자신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던가.
강철은 짧은 시간 몇 번을 고민해 보았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에요. 이 자리에서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당신이야 위임장만 받으면 끝 아닌가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5년 동안 진선미가 가진 주식에 대한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경영환경은 안정화되고, 관련해서 더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렇긴 합니다.”
“그럼 이야기 끝난 건가요?”
“네. 그런데 상세 조건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군요. 지금 진 전무님이 가진 지분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계열사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 평가가 필요하니까요.”
“상세 조건이 정해지면 다시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진선미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자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네?”
“돈을 잃은 거지, 권력을 잃은 건 아니니까요.”
진선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 버렸다.
저게 무슨 말일까.
자리에 남은 강철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답을 찾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강철이 핸드폰을 받자마자 건너편에서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세무조사 통보가 왔습니다.
“……세무조사요?”
-네. 며칠 내에 갈 테니 준비하라고 합니다.
“갑자기 왜…….”
중얼거리던 강철의 머릿속으로 진선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돈을 잃은 거지, 권력을 잃은 건 아니니까요.
한국 재벌은 공고해진 권력으로 정부 기관까지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그렇다고 세무조사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강철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성실히 임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준비를 한다고 해도 본격적으로 털고자 하면 못 털 게 없는데…….
“알겠습니다. 저도 좀 알아보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은 강철이 검지로 탁자를 두드렸다. 강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탁.
탁.
고요한 집무실에 둔탁한 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렇게 나오겠다…….”
재벌.
그들이 가진 건 돈만이 아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정, 재계 인맥이 있었다. 아마 그 인맥을 동원한 것이리라.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국세청, 검찰, 공정위 등등 정부의 수많은 기관에 표적이 되어 회사가 산산이 조각 나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흠…….”
하지만 자신은 인맥이 부족했다.
청와대.
검찰.
국세청.
정부.
국회.
그 어느 곳에도 아는 이 한 명 없었다. 알고 있는 건 해외 개발자들 그리고 한국 대학교 교수인 라영건 교수 정도?
“그렇다고 당장 검찰을 찾아가서 친하게 지내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장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잘 감이 오지 않았다. 진선미에게 연락을 취할까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게 만약 컴퓨터 시스템상의 문제라면 며칠 고민해 해결할 텐데…….
이런 문제는 영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범법을 저지른 건 없으니 문제없겠지.”
모든 일을 진행할 때 국내 최고 로펌인 이앤박의 조언을 받아 진행했다. 세금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철저하게 세무법인의 조언을 받아 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처리했다.
강철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에이글.
그 순위를 3위까지 올렸다. 조금만 더하면 1위로 갈 수 있다. 그리고 그 타이틀이 있다면 세계적으로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회사로 와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서.
* * *
비슷한 시각.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과장 김윤철이 국장으로부터 지시 사항을 하달받고 있었다.
“이번에 아이온 쪽에 세무조사 나가는 거 있지.”
김윤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거 아주 꼼꼼하게 처리해야 해. 윗선에서도 관심이 많은 건이야.”
“꼼꼼하게…… 요?”
“그래. 아주 꼼꼼하게. 너도 알겠지만 사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이 어디 있겠냐.”
“그렇죠.”
“그런데 특별세무조사까지 나가서 먼지만 털어대면 조사4국 체면이 뭐가 돼.”
김윤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한 번 나가면 제대로 털어야 조사4국의 체면이 사는 거야. 그치?”
김윤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다. 국장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깨달았다.
‘이건 아이온을 죽이라는 말이잖아.’
국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김윤철을 보았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걸 정말 실행해야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일방적으로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따랐다가 줄줄이 옷을 벗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 국장도 알아차렸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냥 있는 그대로 사실만 말해주면 돼. 대신 여러 문제가 포착된 만큼 열심히 조사해 봐야 한다. 그 말이지.”
국장이 한 번 더 강조하자 결국, 김윤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인 지시도 아닌 간접적인 강조였다.
자신은 부하직원.
거부했다가는 승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은 비단.
국세청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전담부.
그곳에서 근무하는 권도욱 검사는 갑자기 내려온 상부 지시에 혼란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대산 그룹이 미국자본에 적대적 M&A를 당했다. 그 과정에 불법 사항이 없었는지 조사해 봐라…….”
그 중얼거림을 들은 수사관이 물었다.
“뉴스에서 봤습니다. 미국 사모 펀드들이 합심해서 대산 그룹 경영권을 인수했다고.”
“그걸 좀 살펴보라고 하네요.”
수사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흠…… 그 과정에 뭐 불법이랄 게 있습니까? 저도 궁금해서 잠깐 살펴봤는데 이번 변형 인플루엔자로 인한 폭락 장에서 대산 그룹 지분을 대량 장내 매수한 것 같은데…….”
권도욱 검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과정에 대산 그룹에서 근무하는 이강철 이사라는 사람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고 합니다.”
“이강철, 이강철 이사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수사관님도 한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가장 최근에 알고리듬을 서치에 매각하면서 크게 이슈가 됐던 인물이니까요.”
수사관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60억 달러에 매각해서 단숨에 국내 10대 부호에 오른 인물 아닙니까.”
권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사람이 이번 일에 중심이 있는 것 같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네?”
“서치에서 들어온 매각 대금으로 미국에 사모 펀드를 만들어 대량으로 대산 그룹 지분을 인수했다. 이게 첩보의 주된 내용입니다. 맞았는지 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사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불법은 없습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할 일이 그 과정에 혹시나 불법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겁니다.”
수사관이 깊은숨을 내쉬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거 상부 지시라는 게 혹시…….”
권도욱이 급히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아, 알겠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상부의 지시를 정확하게 수행하는 겁니다.”
수사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검사 동일체의 원칙.
그 원칙을 검사만큼 잘 아는 게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권도욱 검사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대산 그룹 경영권이 넘어가자마자 이런 지시가 내려왔다는 건…….’
대산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마침 언론에서도 십자포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대산 그룹 적대적 M&A의 희생양이 되다.
-미국 사모 펀드의 한국 기업 수탈사.
-사모 펀드의 실체. 양의 탈을 쓴 악마들.
사모 펀드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들이 쉴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마치 검찰의 수사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듯이.
* * *
악당.
외부에서 강철을 보는 시선이었다. 하지만 회사 내부에서 강철을 보는 시선은 달랐다.
구세주.
대산 그룹을 구할 구세주로 평가받았다. 그건 바로 주가로도 알 수 있었다.
-(주)대산
-주가 : 61,500원.
변형 인플루엔자 사태 이후 5만 원 초반까지 내려갔던 주가가 단숨에 6만 원을 회복하며 오른 것이다.
그런데도 진씨 일가의 사주를 받은 언론에서는 연일 의혹 제기를 퍼부었다.
-사모 펀드의 대산 적대적 인수, 그 과정에 문제점은 없었나.
-한국 기업 수난사.
-토종 유통 기업 대산. 절체절명 위기에 빠지다.
-대산 그룹, 이대로 가면 망한다.
뉴스만 본다면 곧 회사가 망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이 연일 방송을 잠식하자 당연히 흔들리는 직원들도 있었다.
“이러다 우리 잘리는 거 아냐?”
“미국은 자를 때도 당일 통보한다던데…….”
“그렇지 않아도 최근 회사 사정이 나빠졌잖아.”
“하긴 재무구조 개선한다면서 대량 해고 한 번 하고 시작할 수도 있긴 하겠어…….”
요즘 대산 직원들이 만나기만 하면 나누는 대화였다. 그런 불안을 잠식시키기 위해 강철은 각 부서 팀장급을 대회의실로 모았다.
거대한 회의실.
이제 그곳에 진용민은 보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파란 눈의 외국인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 외국인이 통역을 통해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여러 직원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려하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회장은 자신의 견해에 강철이 강조한 사항을 추가해 전달했다.
“물론 한 가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술’.”
잠시 뜸을 들인 회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앞으로 대산은 아시아 최고의 유통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나일이나 중국의 알리바바처럼요. 그렇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기술’입니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은 도태될 것입니다. 적응하는 인원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겁니다.”
말을 하던 회장이 강철을 보며 살짝 보았다. 눈빛을 받은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핵심 역할을 여기 이강철 CTO님이 해주실 겁니다. 이 CTO님.”
그 말에 강철이 마이크를 잡았다.
“네. 이강철입니다.”
“회사 체질 개선에 관한 내용 브리핑 부탁드립니다.”
“네.”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거대한 스크린에 빔을 쏘았다. 거기에는 강철이 준비한 PPT가 쏘아졌다.
그걸 진선미를 비롯해 아직은 과거 진용민 회장과 진동만을 따르던 직원들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강철이 PPT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앞으로 대산은 ‘기술’ 중심의 회사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회사가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사업입니다.”
그 말에 PPT가 넘어갔다. 거기에는 강철이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 나열되어 있었다.
-추천시스템.
-대산 3.0
-물류 자동화 시스템.
강철이 그 화면을 보며 말했다.
“앞으로 여러분들도 일하실 때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회사의 신성장 동력이니까요.”
여기저기서 각 부서의 팀장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이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현재 이 세 가지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삑.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이 넘어갔다.
그 뒤로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강철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강철이 먼저 진선미를 찾았다.
“얼마 전 말한 지분교환 건.”
“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대산, 대산마트 지분과 말씀하신 계열사 세 개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진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아요.”
“앞으로 5년 동안 하나씩 하나씩 교환하는 것으로 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진선미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칼자루를 쥔 쪽이 상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네. 그렇게 해요.”
“그럼 상세 논의를 진행할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강철이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진선미가 그런 강철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제가 말했죠. 권력이 당신을 노리고 있다고.”
강철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철의 몸이 진선미를 향해 반쯤 돌아갔다.
“국세청 말입니까?”
“그뿐만이 아니에요. 검찰에서도 내사 중에 있다는 소식이 있어요.”
“…….”
“뿐만 아니라 공정위, 그리고 청와대에서도 관심이 있다 하더라고요.”
강철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정도면 거의 정부 전체가 관심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제가 꽤 거물이 된 모양이네요.”
“단숨에 재계 최상위권으로 뛰어오른 메기니까요. 더구나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적대적 인수를 당하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굳이 이런 어려운 일을 다른 회사에 가지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는 대산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는 일만 남았다.
“그걸 다른 재벌들도 믿어줄까요?”
역시나.
제 생각과 똑같았다. 이런 생각을 다른 사람이 믿어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진선미가 강철을 향해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재계에 몸담아 왔던 만큼 아버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요. 그들이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일은 이 정도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거예요.”
깊은숨을 내쉰 강철이 물었다.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까.”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이 있잖아요. 도와줄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는데, 관심이 있어요?”
물론 관심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있었다. 하지만 도움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진선미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공짜는 안 돼요.”
강철이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리고 또렷이 진선미를 보며 말했다.
“재벌이 가진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네?”
“그들이 가진 역사? 하하, 그게 정말 힘이 있었다면 과거 IMF 당시 대우가 그렇게 무너지진 않았을 겁니다. 누구보다 역사가 깊은 기업이었으니까. 그럼 남은 한 가지는?”
“……돈?”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국내 최대 로펌인 이앤박을 통해 그 정도 정보는 익히 듣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전 서울지방국세청장,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전 국세청 심사국장, 전 중부지방국세청 조사국장 등등 국세청 요직을 거친 이들이 속해 있는 회계 법인 ‘덕천’을 고용해 국세청 조사에 대비 중에 있고요.”
이앤박.
덕천.
진선미도 익히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유죄도 무죄로 바꾸고, 내야 할 세금도 받게 만든다고 알려진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강철의 설명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재벌들이 절 싫어한다고 하셨나요?”
진선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그건 아직 정확하게 확인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는 뇌피셜에서 나온 말이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오성전자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건 무슨 말이죠?”
“얼마 전 서치에 알고리듬을 매각했다는 소식 아실 겁니다.”
진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 오성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네?”
“같이 협력해 볼 생각 없냐고.”
“그게 무슨…….”
“그래서 관심 분야를 말했더니 좋은 생각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조인트 벤처를 같이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등을 돌린다?”
“…….”
“아마 그렇지 않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군요.”
강철이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몸을 돌려 뚜벅뚜벅 걸어가 버렸다. 진선미는 그런 강철을 잡을 수 없었다.
* * *
진동만의 서재.
진용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앤박에서 자문 수임 취소는 안 된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 자식들이 감히……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이 얼만데.”
“이강철이 더 큰 돈을 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
“그리고 덕천에서도…….”
“수임 취소는 할 수 없다?”
“네. 이강철이 단단히 돈을 먹인 모양입니다.”
진동만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대산 그룹을 빼앗기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공고히 쌓았다고 생각한 성이 가파르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 좋은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전경련을 통해 이번 일을 공론화하는 작업도…….”
“그건 또 왜? 전경련에는 내가 직접 연락을 했는데.”
“오성전자는 빠지겠다고 합니다.”
“……뭐?”
오성전자.
국내 최대 대기업으로 시가총액에서도 압도적 1위를 자랑한다. 2, 3, 4위를 다 합쳐도 1위인 오성전자에 비할 바가 아닌 정도였다.
“이강철과 조인트 벤처를 설립하기로 했답니다. 그가 가진 압축 알고리즘 기술이 자사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
으드득.
진동만이 이를 갈았다.
대산 그룹은 과거 오성전자의 호텔 사업부가 떨어져나와 유통 대기업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일종의 방계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아닌 이강철 쪽을 지지한다니…….
화가 나고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적인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진용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행히 국세청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덕천이 대응하고 있긴 하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그리고 검찰에서도 내사 착수했고요.”
진동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나름 준비를 해야 해. 마트 쪽 지분 확보는?”
“현재 소액주주들에게 위임장을 받고 있습니다. 다행히 마트는 국민연금에서도 지분을 10%나 가지고 있어서 지분 확보가 쉬웠습니다.”
“흠…… 그렇다면 진선미 그 녀석이 문제인데…….”
진용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직 회사에 붙어 있는 걸 보면 이강철에게 붙는 것도 생각 중인 모양입니다.”
“지분을 주고 계열사 몇 개라도 얻을 셈인가 보지. 마트 쪽 이사진들 단도리 잘해. 자칫 이사진까지 그쪽에 넘어가 버리면 정말 손도 못 쓰고, 끝나버리니까.”
“알겠습니다.”
그때.
진용민의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그걸 본 진동만이 눈짓을 보냈다.
“받아봐.”
“네.”
전화를 받자마자 진용민의 표정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알았어.”
“그래.”
“지금 바로 확인해 보지.”
전화를 끊은 진용민이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자 뉴스 속보로 이강철 이름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용이 자신들이 기대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흔히 미래 시대는 AI의 시대라고 하죠. 그리고 그 AI의 기본이 데이터 분석인데요.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다.
-바로 세계 최대 데이터 분석 플랫폼 회사 에이글인데요. 그 에이글에서 개최하는 데이터 분석 대회에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강철.
-대산 그룹의 임원이자 ㈜아이온의 대표이신데요. 이분이 얼마 전 에이글에서 전체 순위 1위를 찍으며 엄청난 실력을 뽐냈습니다. 그 실력을 바탕으로 세계 최대 축제의 심사위원 자리까지 제안받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인지 한 번 만나보겠습니다.
방송에서 나오는 인터뷰에는 강철을 칭찬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TV를 보던 진동만의 미간이 좁혀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방송이 끝나자마자 PD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청률이 어마어마합니다. 아시겠지만 요즘 지상파 방송이 시청률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이사님 덕분에 큰 힘이 됐습니다.
“아닙니다. 방송을 잘 뽑아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요즘 대산 그룹을 인수한 사모 펀드는 언론을 통해 악마사냥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강철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인터뷰 영상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촉매로 충분했다.
하나둘씩 긍정적인 여론이 피어난 것이다.
-mejw**** : 이야 영상 보니까. 이분 전형적으로 자수성가네. 한국에 이런 사람이 많이 나와야 돼.
-chinnn**** : 실력이 어마어마하더라. 이렇게 코딩하려면 공부를 얼마나 해야 되냐.
-anem**** : 힘내세요!! 파이팅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내용이 많았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드라마 건 있지 않습니까?
“네.”
-그건 그것대로 진행하고, 상부에서 프로그램을 하나 더 해보자고 하는데…… 혹시 괜찮으실까요?
“제가 직접 출연해야 하는 겁니까?”
드라마는 그냥 관련 내용에 대해 고문 역할만 해주면 끝이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용인해 줄 수 있었다.
-아, 이건 백원강 님의 농촌맛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프로그램인데요. 이사님이 전국에 있는 스타트업을 돌아다니며 조언을 해주는 겁니다.
“……네?”
-지난해 우리나라 신설 스타트업 법인 수가 10만8,874개입니다. 그중 고성장을 하는 기업은 불과 6%에 불과하고요.
10만 개라.
강철도 그렇게 많은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왜 자신이 과거에 그런 실패를 겪었는지 알 것 같달까.
“생각보다 많군요.”
-네. 저도 관련 조사를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뭐, 어쨌든 그런 기업을 돌아다니며 조언을 해주시는 겁니다. 기술적으로나 경영적으로나. 마침 이사님께서 벤처기업 투자에도 관심이 많다고 하셨으니 정말 쓸 만한 기업이다 싶으면 직접 투자를 하셔도 무방하고요.
핸드폰을 붙들고 있던 강철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이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공 스타트업의 리스트도 고갈되어 간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직접 리스트를 선별해 준다면 투자하기도 한결 편해질 것이다.
‘이제는 기업이나 그 기업의 주인 그리고 기술을 보는 눈도 길러졌으니까.’
옥석 가릴 눈 정도는 충분히 있었다.
-당장 결정 안 하셔도 됩니다. 생각해 보시고 말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드라마 작가님이 한번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데 시간이 언제쯤 괜찮을까요?
“일정 확인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곧 미국에 가야 해서.”
-아! 저도 봤습니다. 에이글 데이터 분석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신다고요.
“네. 거기에 가야 해서요.”
-거, 거기에 저희도 따라가도 될까요? 분위기를 스케치하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서요.
“그야 뭐 제가 오라 마라 할 사안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만약 오시게 되면…… 그쪽에서 대화를 나눠도 되겠네요. 거기에서는 시간 여유가 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강철에게 비서가 다가왔다.
“오성전자와 조인트 벤처건 회의 시간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임원급이지만 상대는 오성전자였다. 아직은 자신이 찾아가야 하는 입장이었다.
잠시 후 용산.
오성전자 본사가 있는 곳이었다.
강철은 본사 10층에 있는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그곳에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강철이 도착하자마자 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군요.”
“네. 반갑습니다. 이강철이라고 합니다.”
“손호민입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 저희도 자체적으로 알고리듬의 서비스를 사용해 봤는데, 놀랍게도 압축률이 기존 알고리즘들보다 월등하더군요.”
“하하, 네. 칭찬 감사합니다.”
손호민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래서 서비스를 이용하자마자 바로 상부에 연락해서 인수해야 한다고 했는데…… 서치가 한발 빨랐어요. 오성은 이게 문제입니다.”
손호민은 회사의 문제점을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의 직책은 펠로우.
기술직으로는 오를 수 있는 만큼 올라간 직책이기 때문이었다. 펠로우쯤 되면 중국,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회사에서도 탐낼 정도의 핵심인재였다. 그만큼 능력이 있어서 거침이 없는 것이다.
“저도 이왕이면 한국 기업에 매각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하하, 그래서 어렵게 이런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대표님이 가진 능력에 저희의 경험이 더해지면 서로 상생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둘이 모인 건 조인트 벤처 때문이었다.
조인트 벤처.
각각 지분을 출자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연구하는 회사였다. 강철이 설립한 이 벤처의 목표는 로봇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 개발이었다.
그게 개발되면 일차적으로 대산 그룹의 물류창고 관리 로봇에 사용되고, 추후 그걸 기반으로 오성전자는 로봇 산업에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네. 열심히 해서 성과를 내면 좋겠습니다.”
강철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간단했다.
‘진동만의 횡포를 막아줄 방패가 필요해.’
만약 이 조인트벤처가 오성전자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진동만의 제안을 오성전자는 거부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들어갔다. 당장 오성전자는 진동만의 연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니까.
손호민이 생각에 빠진 강철을 보며 말했다.
“제가 듣기로 대표님께서는 압축과 추천 쪽에 강점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 부분에서 작은 성과를 냈습니다.”
“그래서 이번 조인트 벤처에서도 같은 부분에서 역할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로봇의 단가를 낮추려면 저사양의 칩이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저용량의 데이터로도 작동하는 로봇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손호민이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우리가 제작하고자 하는 게 물류 관리 로봇인데, 아시겠지만 이게 자동으로 움직이려면 데이터 분석을 통한 행동 예측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쪽에서는 그 외 자기 위치 인식, 지도 작성, 하드웨어 제어 부분들을 맡겠습니다. 아무래도 그 분야는 저희가 축적된 노하우가 있으니까요.”
이번에도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드웨어 제어는 분명 오성전자가 잘하는 분야였으니까.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시작해 보죠.”
손호민이 들고 온 노트북을 빔에 연결하고, 화면에 PPT를 한 장 띄웠다. 거기에는 앞으로 이 조인트 벤처가 나아가야 할 로드맵이 그려져 있었다.
그 로드맵이 강철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수정되었다.
* * *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전담부.
권도욱 검사는 펼쳐놓은 자료들을 보며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이 정도 자료로는 한계가 있는데…….’
사모 펀드는 미국에 있어 자료 확보에 한계가 있다. 대산 그룹 이사진의 의사록을 요청해 확인해 보았지만, 딱히 문제점은 없었다.
그건 주주총회 의사록도 마찬가지였다.
‘더 많은 자료가 필요해.’
그러기 위해서는 압수수색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명분으로?
압수수색 영장을 받으려면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 근거가 빈약했다.
고민에 빠진 권도욱 옆으로 수사관이 다가왔다.
“이거 영장 요청도 어렵겠는데요.”
권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딱히 털 만한 게 안 보입니다.”
“사모 펀드 쪽은요?”
“아시잖아요. 미국 애들 비협조적인 거. 한국 검찰이 자료 달라고 하는데 주겠어요.”
“하긴 그렇긴 하죠.”
수사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내사 종결시킬까요?”
권도욱이 고개를 흔들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윗선의 눈에 들 수 없고, 그건 곧 승진길이 막힌다는 걸 말한다.
“좀 더 찾아보죠. 국세청에서도 조사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행 상황 어때요?”
“그쪽도 지금까지는 이슈 시킬 만한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덕천이라고 아시죠?”
권도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천.
퇴직한 국세청 고위직들이 대거 소속되어 있는 회계 법인이기 때문이었다.
수사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쪽에서 엄청나게 서포트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사4국에서도 전력을 다하지 않는 분위기라 합니다.”
“그래요?”
“네.”
대화를 나누던 수사관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앤박에서도 움직이고 있다 합니다.”
“이앤박에서요?”
이앤박.
권도욱도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최고의 법무법인으로 그곳에 소속된 변호사에는 전직 검사장을 비롯해 지검장까지. 권도욱이 쳐다도 볼 수 없는 엘리트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그때.
드르륵거리며 권도욱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번호를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권도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전담부 권도욱 검사입니다.”
-아, 이앤박 이흥석입니다.
이흥석.
이앤박의 ‘이’를 담당하고 있는 이로 과거 검찰 총장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평검사인 권도욱이 쳐다도 볼 수 없는 거물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하하, 그래요. 알아보니 우리 권 검사가 서울대 출신이더군요.
“네. 맞습니다.”
-우리 후배님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됩니까?
공교롭게 왜 이 타이밍에 밥 한 끼를 하자고 할까. 권도욱은 길게 고민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순간 고민되는 게 사실이었다.
‘손을 잡으면…… 탄탄대로다.’
이앤박과 손을 잡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니까.
권도욱은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탄탄대로를 걷기 위해서 이번 일을 맡겠다고 했으니까.
“알겠습니다.”
-하하, 그래요. 시간은 내일 저녁. 장소는 문자가 갈 거예요.
“네.”
그 말을 끝으로 권도욱이 전화를 끊었다. 수사관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사님 설마…….”
권도욱이 굳은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수사관은 그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알아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그와 비슷한 일이 국세청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조사4국 과장이 핸드폰을 붙들고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하하, 네.”
“감사합니다.”
“네. 크게 문제가 될 사항은 안 보입니다.”
“네.”
전화를 끊은 과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옆에 있던 부하직원이 물었다.
“덕천이에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래요?”
“그냥 뭐 이런저런 거 물어보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긴. 요즘 이런 일 잘못 처리하면 바로 옷 벗는 거 몰라? 원리원칙대로 처리해야지.”
“그러면…….”
“그래 비용 과대계상으로 천만 원 추징 처리하면 될 거 같다.”
천만 원 추징.
조사4국이 나서서 이 정도로 끝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회계 장부를 파도 더 큰 먼지가 나오지 않았다. 아마 사전에 덕천이 단단히 준비했기 때문이리라.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조사4국 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내용은 바로 진씨 일가에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