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힘을 합치면(1)
과반수의 지분을 확보한 강철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투자 목적 변경이었다.
-리턴 펀드 투자 목적 변경
-단순 투자 -> 일반투자.
-라이트닝 펀드 투자 목적 변경
-단순 투자 -> 일반투자.
-블랙데이 펀드 투자 목적 변경
-단순 투자 -> 일반투자.
단순투자와 일반투자의 가장 큰 차이는 주주 활동의 적극성이었다. 법인이란 결국 주주들의 것이다.
그 주주들이 적극적으로 법에서 보장하는 활동을 하겠다는 것이 일반투자였다.
구체적으로.
배당금 상향 건의.
자사주 매입 건의.
기타 회사 미래 비전 건의.
등등이 목적을 변경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즉 회사에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진용민이 분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새끼들 도대체 목적이 뭐야.”
비서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아직……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젠장, 어떤 자식들이 감히 내 회사에.”
그때.
전략기획실장 이철휘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호들갑 떨지 말고 들어와 앉아.”
“네.”
이철휘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진용민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일단 세 사모 펀드 중 리턴 펀드에 가장 먼저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 펀드의 요구사항을 전달받았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배당금을 올려달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내에 현금을 4천억이나 쌓아놓을 필요가 있냐면서.”
그 말에 진용민이 이를 갈았다.
“이 자식들이 진짜.”
“두 번째는 자사주 매입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가장 중요한데…….”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철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현재 등기이사 중 한 명인 황희석을 해임하고, 거기에 자신들이 추천하는 인물을 앉혀달라고 합니다.”
등기이사.
그건 곧 경영권에 참여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철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사내 중점 사업인 빅트리 프로젝트를 실패한 능력 없는 등기이사를 왜 계속 쓰는지 모르겠다면서…….”
“무시해. 그래 봤자 어차피 리턴 펀드 지분은 8%밖에 안 되잖아.”
마른침을 삼킨 이철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추가로 3% 지분을 더 매입했다고 공시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나머지 2개 펀드를 비롯해 월스트리트 자본들에서 위임장을 받아서 확보된 지분이 40%에 달합니다.”
“……뭐?”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지분이 아닙니다.”
진용민의 손에 힘줄이 돋아났다.
40%.
그 정도 지분이면 오너일가보다 많은 지분이었다. 물론 우호지분까지 합치면 비등하겠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뭐 한 거야!”
이철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변형 인플루엔자 때문에 그걸 극복하는데 역량을 쏟다 보니 해외 쪽 지분 동향 파악에 미흡한 점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이 새끼들은 여기에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진용민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트.
백화점.
그건 현재 사양산업이었다. 미국의 백화점은 전염병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파산 지경에 이르렀고,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지분 매입을 하며 달려들다니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순간 진용민의 머릿속으로 한 인물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이강철 그 친구한테 가 있는 지분이 몇 프로지?”
“법인끼리 교환된 지분까지 합치면 총 11%입니다.”
놀란 진용민이 입을 떡 벌리며 중얼거렸다.
“그거 합치면 51%잖아.”
이강철이 미국 쪽에 붙는 순간 대산이 넘어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비서와 이철휘도 온몸에 전기를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진용민이 급히 비서에게 물었다.
“이강철 이사 지금 어딨어?”
“화, 확인해 보겠습니다.”
“당장 확인해서 올라오라고 해.”
“네.”
고개를 끄덕인 비서가 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본사 건물 10층에서 물류 자동화 시스템의 기초 설계를 진행 중이었다. 시스템은 코드를 처음부터 다시 짜야 할 정도로 최악이었다.
한창 설명을 진행하고 있는 강철의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회장님이 지금 좀 뵙자고 하십니다.
물어보지 않아도 왜인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강철이 이제는 심복이 된 천준호에게 일을 맡기고 회장실로 들어갔다.
전략기획실장.
비서.
그리고 진용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강철이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앉지.”
“네.”
강철이 자리에 앉자마자 진용민은 그저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강철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렇게 수십 초가 흐르고 나서야 진용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공시가 하나 올라왔는데 알고 있나?”
강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 미국 사모 펀드에서 대산 그룹 지분을 대량으로 확보했어. 전염병 사태 때문에 주가가 급락한 사이 들어온 놈들이지.”
진용민의 말에 비서와 이철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용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단순투자로 진행하다가 갑자기 일반투자로 목적을 바꿨어.”
그 말에도 강철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라…… 제가 지분을 매입할 때 들었던 내용이긴 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이철휘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주주 활동을 하는지가 핵심입니다.”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회사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하는 상황이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네에게도 꽤 많은 양의 지분이 가 있더군.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혹시 최근 미국에서 연락받은 적 있나?”
“없습니다.”
“그래, 그렇군. 앞으로도 만약 연락이 온다면…….”
“먼저 보고드리겠습니다.”
“하하, 그래. 회사가 괜히 분란에 휩싸이면 피곤할 뿐이야.”
“맞습니다.”
“바쁜데 괜히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진용민이 잔뜩 자비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른 불편한 점 있나?”
이번에도 강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하하, 그래 애로사항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최대한 해결해 줄 테니까.”
진용민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바로 얼마 전 진선미와의 회의에서 보였던 강압적인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가서 일 봐.”
살짝 고개를 숙인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미국 샌프란시스코.
그곳의 미주한인일보 기자 진창우는 오랜 추적 끝에 밝혀낸 사실을 마주하곤 깊은 탄식을 쏟아냈다.
“그럼 이게 정말 한국인의 것이었다고…….”
-이름 : 이강철.
-나이 : 28세.
-학력 : 선강대학교.
상세정보
-(주)아이온 대표이사.
-대산 그룹 온라인사업 부문장.
…….
상세정보에는 진창우가 믿지 못할 내용이 가득했다.
-수개월 전 알고리듬 본사에 찾아와 인수 제의.
-알고리즘 성능 향상 및 대규모 자금 투자를 통해 지분 확보.
-서치에 60억 달러 매각.
(중략).
테크 업계에서는 그 금액에 집중하고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알고리듬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한국에 사는 이강철이라는 인물이었다.
지분을 어느 정도 가졌는지 알아내진 못했지만, 최소한 50%만 가지고 있다고 해도 30억 달러. 한화로 3조 5천억에 달하는 돈이었다.
그 보고를 들은 편집장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기에 한국에서 알고리듬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투자를 진행한 거야. 그리고 그 알고리즘의 핵심 개발자라니…… 그 정도면 거의 천재급 아니냐.”
“이거만 해도 특종 아닙니까? 한국 언론들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던데.”
“그렇긴 하네. 나한테는 사기꾼이라는 것보다 이게 더 충격적이긴 하다.”
“저, 저도요.”
“속보로 기사 올리자. 그러면 한국 언론에서 미친 듯이 퍼가지 않겠어?”
“그럼 트래픽이 확 늘겠네요.”
“흐흐, 그래. 오랜만에 밥값 한번 해야지.”
“알겠습니다. 바로 정리해서 기사 띄우겠습니다.”
진창우가 기사를 올리고 얼마 뒤.
그걸 확인한 한국 언론사에서 관련 기사를 받아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테크 전문 신문사에서 관련 뉴스를 실었다.
-제목 : 알고리듬, 서치에 60억 달러 매각 계약 체결.
-내용 : 미국의 유명 스타트업 알고리듬이 서치에 60억 달러로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알고리듬은 라이트 알고리즘이라는 압축률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알고리즘을 서비스하는 회사로 최근 인터넷 트래픽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주목받는 회사다. 특이한 점은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한국의 개인투자자라는 사실이다. 미주한인일보에 따르면 그 이름은 ‘이강철’이라는 사람으로…….
거기에 나온 이강철이라는 사람이 대산 그룹에서 임원으로 근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까지는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강철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지 각종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이 요청에 일일이 응하다가는 일할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전화기를 아예 무음으로 해둔 강철이 다시 일에 집중하려 할 때.
이번에는 인터폰이 울렸다.
-이사님. 진 전무님 오셨습니다.
살짝 한숨을 내쉰 강철이 입을 열었다.
“네.”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온 진선미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집무실로 들어오자마자 진선미가 물었다.
“이 뉴스 진짜예요?”
진선미가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알고리듬으로 초대박. 이강철 그는 누구인가.
-대산그룹 임원 이강철. 개인으로 알고리듬 투자로 수백 배 수익.
종이에는 강철에 관련된 뉴스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입니다.”
“……그럼 투자수익만 해도 조 단위라는 게.”
아직 자신이 지분을 얼마나 가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진선미도 강철이 얼마나 벌었는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뭐 그쯤 되는 것 같네요.”
“……허.”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진선미가 고개를 흔들며 강철을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
“전무님 죄송하지만 지금 물류 자동화 시스템 기초 설계 작업 중입니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진선미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리에 앉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앉아봐요. 이번에는 정말 거부하지 못할 제안을 가져왔으니까.”
강철이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마자 진선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국 사모 펀드에서 일반투자로 투자 목적 변경한 사실 들었어요?”
“네.”
“그리고 당신이 우리 회사 지분을 11%나 가지고 있죠.”
“맞습니다.”
“거기에 제가 가진 지분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말에 강철이 두 눈을 반짝였다.
“……네?”
“저, 이강철 이사, 그리고 미국 사모 펀드가 연합 전선을 구축하자는 말입니다.”
강철이 입을 꾹 다문 채 진선미를 보았다. 저 말이 진심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이내 진선미가 잔뜩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차피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전 회사를 떠나야 해요. 그럴 바에야 뭐라도 해보는 게 낫죠.”
“지금 미국에 붙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진선미가 묘한 미소를 띠며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될 거 있나요?”
안 될 거 없다. 그 미국 사모 펀드도 어차피 자신의 것이다.
강철은 호랑이 굴에 스스로 들어오겠다는 진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없죠.”
“그럼 동의하신 겁니까?”
하지만 아직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장난치시는 거예요?”
“믿지 못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 관계가 형성되나요?”
“보유지분을 그쪽에 넘기든, 그쪽 지분을 우호지분으로 끌고 오든 결과부터 보여주세요. 이 이야기는 그 이후에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진선미가 살짝 입술을 깨물며 강철을 보았다. 강철이 그런 진선미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참고로 진 회장님도 절 호출하셨습니다. 제가 가진 지분과 미국 쪽 지분을 합치면 정확하게 딱 51% 된다고 하더군요.”
진선미가 마른침을 삼켰다.
51%.
아주 교묘한 숫자였다. 그리고 강철이 이 일의 ‘키’를 쥐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 * *
진선미가 떠나고.
강철은 그녀가 떠난 문가를 잠시 바라보았다.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 내가 11%가 아니라 51%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회사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이제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을 회사 내 누구도 모를 것이다.
묘한 쾌감이 몰려왔다. 신입사원으로 시작해 회사 자체를 집어삼키다니.
이제 회사가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거나, 새로운 이사나 감사를 선임하거나, 이사나 감사의 급여 퇴직금 등등 주주총회 승인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왜냐.
강철이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승인하지 않으면 주주총회에서 결의가 되지 않아 일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승인을 요청하는 처지가 아니라 해주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 사실이 강철을 묘한 쾌감에 휩싸이게 했다.
“이제 거의 다 왔군.”
강철이 감상에 휩싸여 있는 그 순간에도 핸드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그만큼 뉴스 내용이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강철은 모르는 번호는 일절 받지 않았다. 그러다 핸드폰에 익숙한 글자가 나타났다.
신주영.
그 이름이 뜨자 강철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신주영은 이미 알고 있었다. M&A 계약을 진행한 당사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60억 달러라는 숫자는 다시 봐도 놀라운 것이었다.
“하하, 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고 대산 그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정확히는 진 전무 측에서요.
“뭐라고 하던가요?”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협력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강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날 만나고 바로 연락을 취했다. 떠보기 위해 한 행동은 아니라는 뜻인가…….’
하지만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는 알 수 없었다. 강철이 더 자세한 상황을 물었다.
“협력이요?”
-네. 자신의 지분과 합쳐서 대산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단은 생각해 보겠다고 했는데 어떻게 대응할까요?
“먼저 상세 조건을 달라고 하세요. 힘을 합쳤을 때 그쪽에서 줄 수 있는 게 뭔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끝나자마자 아이온게임즈 대표로 있는 김봉수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알고리듬에 강철이 투자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 이거 진짜입니까?
“하하, 네.”
-허…… 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리듬을 사용했던 거구나…….
“겸사겸사죠.”
그밖에도 아이체크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고, 사무실 인원들로부터도 계속해서 축하 인사를 받았다.
* * *
비슷한 시각.
진동만의 서재에 진용민을 비롯해 진선미, 그리고 전략기획실장까지 모여 있었다. 회사에 일어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진동만이 으득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불길하더니 결국 일이 이렇게…….”
눈치를 보던 진용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내부 단속부터 했습니다. 특히 이강철 이사는 우리 쪽 우군이 되어주기로 확답을 받았습니다.”
진동만이 툭 물었다.
“위임장은?”
위임장.
주식 권리를 위임하는 문서였다. 그 말에 진용민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로 하는 약속은 누가 못하겠어.”
“내일 당장 위임장부터 받겠습니다.”
진동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안 주면?”
“…….”
“그 친구 지분을 합치면 딱 51%라며.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놈이야. 그냥 가서 위임장 써달라고 하면 써줄 것 같아?”
뭐라 말하려던 진용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솔직히 자신도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진동만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안 써줄 거야. 뉴스를 보니 서치와 60억 달러짜리 M&A,도 성사시켰다면서? 그런 놈이 자신이 가진 걸 순순히 내어줄까?”
“그래도 제가 잘 말하면…….”
“아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줘야 할 거야. 그게 전혀 작지 않을 테고. 그래도 시도는 한번 해봐.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게 무엇인지도 한번 들어보고. 무리한 내용이 아니면…… 휴우.”
긴 한숨을 내쉰 진동만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들어줘야지.”
“알겠습니다.”
“어차피 40%의 지분으로는 당장 대표이사를 변경하진 못해. 이사회는 우리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미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황희석 등기이사를 해임하고, 자신들 쪽 사람을 앉히라고.”
“일단은 생각해 본다면서 시간을 끌어. 그사이…… 이 실장.”
그 말에 이철휘가 즉답했다.
“네.”
“미국 쪽 라인 동원해서 다시 우리 쪽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어차피 지분이 각각 쪼개져 있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바는 조금씩 다를 거야.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블랙 펀드나 라이트닝 펀드부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서 최대한 들어주면서 위임장 확보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국민연금은…….”
그 말에는 진용민이 답했다.
“스튜어트쉽 코드는 발동하지 않을 거라 확답받았습니다. 우리 쪽 경영 능력에 대해서도 크게 의문을 표하진 않고 있고요.”
“내가 청와대 쪽에 연락 넣어둘 테니까.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남은 건 소액주주인데…….”
이번에도 진동만이 재빨리 답했다.
“그쪽은 언론사 통해서 여론전을 펼치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습니다. 곧 한국 기업을 탈취하려는 미국 자본으로 기획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래, 일단은 그 정도면 되겠어.”
대충 상황 정리를 마무리했다고 생각한 진동만이 진선미를 보며 물었다.
“선미, 네 생각은 어떠냐?”
“제 생각에도 현 방법이 최선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진선미는 내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자기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앞으로 제 밥그릇은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오기 전 리턴 펀드에 연락해 놓은 참이었다.
-협력하자.
-내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면 배당금을 늘리고, 자사주를 적극적으로 매입하겠다.
-회사 미래 비전도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들과 자신이 가진 지분을 합치고 거기에 이강철까지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진용민을 밀어내고, 자신이 회사를 차지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상황이 아주 더럽게 됐어. 그러니 다들 조심 또 조심해. 괜히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려서 부정적인 이미지 심으면 자칫 소액 주주들이 반대편에 붙을 수도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네. 아버지.”
회의는 그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진동만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불길해……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게 무엇인지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 * *
수한 대학교.
이희진이 다니고 있는 학교로 중위권 수준의 대학이었다.
수업을 마친 이희진이 학교 교정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다.
“아우, 졸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졸린지 몰라.”
“얘는 말은 바로 해야지. 넌 맨날 자잖아.”
이희진이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며 말했다.
“매, 맨날이라니. 가, 가끔 자지.”
“그래도 성적 잘 나오는 거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후훗. 이 몸은 혼자 집에서 공부해야 잘 되는 타입이란 말씀.”
“오오, 그러셔?”
친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이희진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호호, 당연하지.”
그런 이희진의 앞을 갑자기 한 남자가 가로막았다.
“저기 혹시…… 오빠가 이강철 씨 인가요?”
이희진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요.”
“아, 저는 신선 일보 김윤수 기자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이강철 씨가 미국에서…….”
김윤수는 그 사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건장한 검은색 양복 차림의 남자들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뭐, 뭡니까.”
“누, 누구세요?”
이희진의 앞을 막은 양복 남자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은 이희진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야.’
기자가 찾아오고, 그 앞을 보디가드 같은 사람들이 막았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희진은 상상도 못 한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알 수 있었다.
-오빠야. 일단 집으로 와.
“으, 응?”
-거기 사람들이랑 차 타고 오면 돼. 자세한 설명은 집에서.
“아, 알았어.”
다시 전화를 돌려주자 보디가드들이 이희진을 에워싸고, 교정을 이동했다. 가까운 주차장에는 검은색 세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있던 친구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런 이희진을 바라보았다.
* * *
잠시 뒤 강철의 집.
그곳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오, 오, 오…… 빠. 그러니까 여기 신문에 난 사람이 오빠란 말이야?”
이희진이 떨리는 눈동자로 강철을 보았다. 그건 최용희도 마찬가지였다.
-알고리듬, 60억 달러 매각.
-알고리듬 최대 주주 이강철. 최소 30억 달러 이상 수익 예상.
-서치도 감탄한 기술력. 이강철 그는 누구인가.
이런 뉴스가 있는지도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여기 이강철이 자신의 오빠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희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이거 뉴스 진짜야?”
강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헐…….”
“가, 강철아…….”
둘 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희진이 강철을 보며 물었다.
“뉴스에 나온 숫자가 30억 달러니까 이게 한국 돈으로 일, 십, 백, 천…… 3조3천억이잖아.”
최용희가 이희진을 바라보았다.
“뭐, 뭐…… 얼마라고?”
“사, 삼조라고.”
이내 둘이 고개를 휙 돌려 강철을 보았다. 강철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며 답했다.
“비슷해. 그쯤 되는 것 같네.”
“…….”
사람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넋이 나가는 법이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3조.
그 액수는 둘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사실은 4조가 넘는 금액이지만 굳이 정정해 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강철이 넋이 나간 최용희를 보며 물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돈 좀 생겼으니까. 사도 돼.”
“희진이 너도. 공부에 필요한 거면 사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그러자 이희진이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럼 나 노트북. 요즘 뭐 하려면 노트북이 필수야.”
“알았어. 그리고 엄마는 뭐 필요한 거 없어?”
하지만 최용희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강철이 그런 최용희를 보며 말했다.
“생각나면 천천히 말해줘. 그리고 엄마 앞으로 건물 하나 올려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놀란 최용희가 되물었다.
“으, 응? 거, 건물?”
“어. 요즘 삼성동이 핫 하잖아. 그쪽 근처 상업 건물이야. 월세 따박따박 잘 나오고. 관리는 업체 맡겨놨으니까. 엄마는 통장에 돈 잘 들어오는지만 확인하면 돼. 큰 건 아니고 한 7층짜리 빌딩이야.”
최용희의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어느 집 아들이 엄마 선물로 빌딩을 준단 말인가.
최용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없다…….’
이 동네로 이사와 만난 사람들한테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강철이 여전히 넋 나간 최용희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 엄마가 그랬잖아. 돈 없는 게 한이다. 그 한 싹 사라질 테까지 풀어.”
최용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고마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 * *
늦은 밤.
강철이 창가 앞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라이즈 킹덤은 1위에 아이체크도 다운로드 2천만을 달성했다.’
강철의 뒤편.
책상 위에 켜져 있는 모니터에는 지금까지의 성과가 나열되어 있었다.
-라이즈 킹덤 최고매출 1위.
-아이체크 2천만 다운로드.
-알고리듬 60억 달러 매각.
-대산 그룹 지분 확보.
(중략)
불과 2년 안에 이룬 성과치고는 스스로가 뿌듯할 정도였다.
‘나도 이제 진짜 부자가 된 건가…….’
부자.
강철이 생각하는 부자의 정의는 돈이 너무 많아 어디에 얼마가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상태였다.
지금 강철이 그랬다. 운영하는 회사에서 들어오는 배당금. 대산에서 들어오는 월급. 건물들에서 입금되는 월세 등등.
돈이 들어오는 파이프 라인이 너무 많아 자신의 한 달 수입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대산 그룹을 인수하면 2차 계획은 마무리다.’
강철인 세운 계획은 총 5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 자본 확충
2단계 대산 그룹 인수.
3단계 아시아 1위 사업자.
4단계 나일과의 경쟁.
5단계 세계 제패.
이 계획 중 곧 2단계가 마무리되기 코앞이었다.
강철은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황금빛 물결이 식도를 화끈하게 달궈 주었다.
“끄으…… 좋다.”
위가 후끈거리며 기분이 좋아졌다. 강철은 그 상태로 미국에서 날아온 서류를 살폈다.
진선미 협력 조건.
-배당 성향 확대 50%.
-자사주 매입 확대. 순이익의 30%.
-등기이사 2인 선임 수용.
여러 조건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이 세 가지였다.
현재 대산 그룹의 등기 이사진은 사외 이사를 포함 총 7명이었다. 그중 2명을 미국 측 말에 따라 선임하겠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까지 적극적으로 해준다면 주가는 가파르게 올라갈 것이다. 중간에 계획이 틀어져 대산 그룹 인수가 실패했을 때의 안전장치였다.
“이제 이사진만 손에 넣으면 된다.”
주식도 과반.
등기이사도 과반.
그렇게 돼야 회사를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제 51%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주주총회에서 ‘주주제안권’을 통해 안건을 올리고 표결에 부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법에 따르면 주총 6주 전 이사회에 올려 표결에 부쳐야 한다. 그 표결에서 채택되지 못한다?
그럼 해당 제안을 바로 폐기된다. 또 다른 절차도 있긴 했지만, 법적으로 지난 한 공방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이사회를 꼭 손에 넣어야 한다.
등기이사.
주식.
이 두 가지를 가져야 진정 회사를 가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철이 힐끔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밤 12시 30분.
미국은 이제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이내 술잔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띠리리.
띠리리.
신호음이 한두 번쯤 갔을 때 반대편에서 바로 연락을 받았다.
-네 대표님.
“진선미 전무에게서 온 제안 말입니다.”
-네.
“수락하겠다고 하고, 상세 계약을 조율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대산 그룹 차원에서 별도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이사 선임은 불가하다고 합니다. 다만 블랙 데이 펀드에는 자사주 매입을 확대할 수 있다고, 라이트닝 펀드에는 배당 성향 상승을 해줄 수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하하, 각각 펀드에 다른 제안을 했다. 그쪽이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군요.”
-그밖에도 마이클이 데려온 다른 미국 자본에도 연락이 왔다고 합니다. 아마 펀드별로 다른 당근을 제시해 연합을 깨겠다는 속셈 같은데…….
“역시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군요.”
-네. 정말 경영권이 위협당할 수도 있으니까요.
“흠…… 그럼 세 개 펀드를 잘 조율하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도 있겠어요.”
-등기이사 선임 말씀입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쪽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강철은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 * *
다음 날.
강철은 회사로 출근하자마자 진용민의 호출을 받았다.
“네. 회장님.”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또 물어서 미안하네만…… 자네 혹시 미국에서 연락받은 거 있나?”
강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용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 지분은 여전히 자네 것이군.”
“네.”
“그리고 그때도 분명히 우리는 같은 편이라 했고.”
“맞습니다.”
진용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럼 위임장을 써주는 것도 가능하나.”
“위임장이라면…… 주주 권리를 넘기겠다는 문서 말입니까?”
“맞아. 그게 우리 편이라는 걸 입증하기에 더 확실할 것 같아서.”
강철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였다. 그랬기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도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위임장이라는 게 별거 아니야. 그저 주주총회에서 자네의 표를 나한테 준다는 표시니까. 어차피 우리는 같은 편이니 상관없지 않나.”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진 전무한테서도 같은 제안을 받았습니다.”
“……뭐?”
“만약 회장님께 제 위임장을 드리면 반대쪽에서 오해할 소지가 있어서요.”
강철이 뜸을 들이자 진용민이 으득 이를 갈았다.
‘이게 정말…….’
진선미가 먼저 선수를 치다니.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진용민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진선미가 설마 미국 쪽에도 손을 내밀었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알았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영 섭섭해. 자네를 지금까지 끌어준 게 나인데 아직도 선미와 나 둘 중 선택하지 않겠다는 뜻이군.”
과거였다면 그저 죄송하다는 말로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위치가 달라졌다. 무조건 고개만 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회장님.”
“그래.”
“회장님이 처음 제게 임원 자리를 제안했을 때 하셨던 말 혹시 기억하십니까?”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회사를 경험해 본다는 생각으로 맡아봐라. 어차피 임시직원이니 언제든 그만…….”
그만둘 수 있다.
진용민은 차마 그 말을 내뱉지 못했다. 지금 상황에서 강철이 그만둔다면 사내에서 진행 중인 굵직굵직한 프로젝트가 전부 스톱되고 만다.
“지금까지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기술적으로나 경영관리 쪽으로나.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회사도 큰 성공을 거뒀고요.”
진용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큰 성공이었다. 언론에 알려진 대로 60억 달러 절반을 지분으로 가지고 있다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으리라.
진용민이 급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이것 하나 알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에 말씀드린 겁니다. 대산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은혜를 감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다니고 있다는 걸.”
진용민이 바짝 말라 버린 입술을 혀로 축였다.
“아, 알았네.”
“그럼 일어나 보겠습니다.”
진용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는 강철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강철은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위치를 넘어섰다는 걸.
* * *
집무실을 빠져나온 강철은 바로 회의에 참석했다.
대산 3.0.
추천시스템.
빅트리.
거기에 물류 자동화시스템 리팩토링 작업까지.
하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게 자신의 회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보유 지분만 38%에 이르는 대주주였다. 오너 일가 더 많아진 것이다.
강철이 회의에 참석한 직원을 보며 물었다.
“대산 3.0 진행 상황은요?”
“백화점 적용을 마쳤습니다. 이제 추천시스템 사용률을 확인해 그걸 높이는 작업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네. 말씀하세요.”
“추천시스템의 성능이 답보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게 플랫폼화된다고 해도 사용할 회사가 얼마나 될지가 걱정입니다.”
강철의 시선이 유혜인을 향했다.
“알고리즘 성능 개선 관련 채용은 아직 안 된 건가요?”
유혜인이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입보다는 경력 위주로. 그중에서도 능력이 있는 사람을 뽑으려니 쉽지 않습니다.”
“흠…….”
“아무래도 이사님께서 한번 나서주시면…….”
“제가요?”
“네. 이를테면 에이글에서 순위권을 한 번 더 올린 후에 그 명성으로 채용공고를 내면 괜찮은 사람들이 꽤 지원해 줄 수도 있습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회의 끝나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른 내용은요?”
“다음으로 플랫폼 전환을 위한 프로토콜 표준화 작업을 해야 하는데…….”
회의는 근 한 시간가량 지속하였다.
추천시스템과 대산 3.0은 연관성이 크기에 한 번에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빅트리와 물류 자동화 시스템은 별도로 회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렇게 회의를 마치고 나자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어버렸다.
오후 1시 30분.
강철은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구내식당을 찾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강철의 눈치를 살폈다.
임원.
그것도 잘나가는 임원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강철은 또 한 사람의 오너 일가와 마주해야 했다.
톡.
진선미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서류를 검지로 가리켰다.
“확인해 보세요.”
“이게…… 뭡니까.”
“미국 측과 협상한 내용이에요.”
“…….”
확실히 일 처리가 빨랐다. 어제 상세 계약 조율을 지시했는데 그걸 하루 만에 마쳤다니…….
급하긴 급했군.
“까다로운 조건이 몇 가지 있었지만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내주는 것도 있어야 하니.”
자리에 앉은 강철이 서류를 살폈다. 상세 계약 내용은 미리 자신이 신주영에게 지시해 둔 것들이 대부분 수용되어 있었다.
그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등기이사 선임이었다. 이미 주식은 과반수 가지고 있다. 이제 이사진만 장악하면 끝나는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진선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등기이사 2명을 미국 측에서 선임하기로 했어요. 현재 등기이사가 총 7명. 그중의 제 편에 있는 분이 두 분. 오빠 측이 3명, 그리고 아버지 편이 2명인데 저희 이사진이 황희석 이사 해임안을 낼 거예요. 그리고 그 자리에 미국 측 대리인을 선임할 거고요. 다른 한 명은 제 쪽에 서 있는 사외이사 한 분이 사임할 겁니다.”
말을 하던 진선미가 은근한 눈빛으로 강철을 보았다.
“그러면 저희 쪽 이사진이 3명이라 과반에서 한 명 모자란 상태예요. 한 명이 더 있어야 대표이사를 비롯한 현 회장 해임을 건의할 수 있는데…….”
뜸을 들이던 진선미가 물었다.
“혹시 생각 있어요? 당신이라면 아버지나 오빠 둘 다 허락할 것 같은데.”
물론이다. 강철은 비집고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감추며 말했다.
“일단…… 생각해 보겠습니다.”
“호호, 그럴 줄 알았어요. 검토해 보고 이번 주 안으로 결론 내려주세요. 그래야 다음 임시이사회에 안건을 올릴 수 있으니까.”
진선미가 그 말을 끝으로 강철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강철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새겨져 있었다.
* * *
진동만의 서재.
그곳에 이철휘를 비롯해 진씨 남매가 다시 모였다. 진동만이 잔뜩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냐.”
진선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답했다.
“뭐가요.”
“황희석 이사 해임안.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놈들이 왜 우리 회사에 들어오느냐 이 말이야!”
진동만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만큼 이번 일이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진선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밥그릇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아버지가 항상 강조하셨던 말씀이잖아요.”
“……뭐?”
“그래서 제 밥그릇은 제가 챙기려고요.”
“너 이 자식,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진동만의 이마에서 힘줄이 돋아났다.
“이대로 있다가는 곧 제가 회사에서 쫓겨날 판이었어요. 회장이라는 타이틀을 단 오빠 밑에서요.”
진동만이 입을 꾹 닫았다. 그러자 진용민이 싸늘한 표정으로 진선미를 보았다.
“그게 불만이었으면 말로 했어도 되잖아.”
“말로 했지. 회장과 전무.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내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게 해달라.”
진선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진동만이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진선미를 노려보았다.
“…….”
이번에도 입을 연 건 진용민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다른 사람 손에 넘기겠다는 거냐?”
“말은 바로 해야지. 정확히는 내 손으로 넘어오는 거야. 오빠가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면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갈 테니까. 옛정을 생각해서 본사 전무 자리나, 계열사 한두 개 정도는 줄 수도 있어.”
그사이 진동만은 유심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진심이다.’
누구보다 딸을 잘 안다고 판단했지만 그런 생각은 오판이었다.
진용민의 목소리도 점점 올라갔다.
“사모 펀드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몰라? 자신들에게 이익이 안 되면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는 놈들이야.”
“반대로 이익을 주면 계속 같은 편에 있을 수 있지.”
진용민은 방법을 달리했다.
“만약 이강철 이사가 돌아선다면?”
“…….”
“그가 언제까지 네 편이 되어줄 것 같아? 우리 쪽에서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언제든지 돌아설걸.”
“이제 아무리 그래 봐야 소용없어 주사위는 던져졌고, 주주총회에서 표결로 간다면 내가 이길 테니까. 그렇게 이사진을 장악하고 나면 바로 대표이사 해임안을 올릴 거야.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진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진용민을 노려보았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진용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렇게 두도록 가만 놔둘 것 같아?”
“56%. 우리가 확보한 지분이야. 이길 수 있겠어?”
진용민이 거칠게 콧바람을 쏟아냈다. 이기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용민을 향해 진선미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냥 조용히 끝내자. 언론에 이런 모습 알려져서 서로 좋을 거 없잖아.”
조용히 지켜보던 진동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가 미국에 손을 내밀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너 혼자 가진 지분보다 나나 용민이가 가진 지분을 합치면 더 많다. 국민연금도 우리 손을 들어줄 테고. 그럼 너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거야.”
진선미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로 내놓을 수 있었다.
“자기 것을 뺏기거나 나누는 걸 극도로 싫어하시는 아버지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성향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게 오빠고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랬기에 진동만은 거친 숨을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진동만을 보며 진선미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정리하고 싶으면 다음 주까지 연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회사에서 자리를 비켜줘야 할 테니까요.”
진용민이 죽일듯한 눈빛으로 떠나는 진선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진동만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너도 결국 내 딸이구나…….’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선미가 자리를 뜨고.
진용민이 으드득 이를 갈았다.
“이강철, 이 새끼가 결국…….”
“네게 위임장을 주지 않을 때부터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어. 뭘 새삼스럽게.”
진동만의 말투는 여유롭기만 했다. 진용민은 그런 진동만의 여유가 서운했다.
“아버지!”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냉정하게 현실을 마주해야 해.”
“…….”
“중요한 건 이강철, 블랙데이, 리턴, 라이트링 그들 중 한쪽이라도 마음을 돌리면 이번 일은 실패한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 쪽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잖아요.”
“연락이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저 녀석이 등기이사 자리 2개를 제안했으면 우리는 3개를 제안하고,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도 높여서 주가를 끌어올린 후 주식을 팔고 엑시트 하게 만들어주고.”
“그럼 저는 이강철 그놈을 한 번 더 만나보겠습니다.”
“그래. 만나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봐. 괜히 화를 내서 일 그르치지 말고.”
진용민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이 실장은 미국 애들이랑 자리 한번 마련해 봐. 내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서재의 분위기는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추천 알고리즘 성능 개선을 위한 사람을 뽑는 일이었다. 그 일을 위해 에이글에 접속해 순위를 올리고 있었다.
뿌드득.
뿌득.
손가락의 힘을 풀고, 강철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메뉴의 이름은 ‘Question.’.
에이글에서 점수를 올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이었다. 문제를 푸는 건 한 번에 많은 점수를 올릴 수 있고, 순위권에 들면 덤으로 돈도 받을 수 있다.
Question은 좀 다른 방식이었다. 사용자들이 올린 여러 질문에 답하고 채택되는 방식이다. 보상으로 주어진 점수로 순위를 올릴 수 있었다.
“일단 가볍게 Question에 올라와 있는 질문들부터 풀어보자.”
그게 점수를 올리는 데 시간 대비 효율이 높았다.
-What is the most commonly used tool in regression analysis?
-What algorithm do you use to build a recommendation system?
…….
여러 질문이 올라와 있었다.
강철은 그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을 올렸다.
쉬운 질문.
어려운 질문.
난이도를 가리지 않았다. 그간 대산에서 추천시스템을 구축했던 경험이 녹아들자 한 질문에 답하는데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의 한 시간 만에 60개가 넘는 질문에 답을 올렸다.
강철은 한 시간을 더 투자해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총답변 145개.
이 답변들이 전부 채택된다면 현재 20위까지 내려와 있는 순위가 단숨에 10위로 점프하리라.
대략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한 강철이 이번에는 문제 메뉴를 선택했다.
-Search Landmark Recognition.
-Prediction for Autonomous Vehicles.
…….
그사이 여러 문제가 올라와 있었다.
강철은 문제에 무섭게 집중해 나갔다. 최근 대산 인수에 신경을 쓰느라 관련 내용을 접할 시간이 적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손을 놓은 건 아니었다.
대산 추천시스템.
대산 3.0.
이 두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관련 논문을 수도 없이 훑어보았다.
그 실력이 발휘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한 문제를 푸는 데 일주일 이상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향상된 실력은 빠른 속도로 문제를 풀어나가게 했다.
“이 속도로 풀면 2, 3일이면 한 문제 풀겠는데.”
강철의 생각대로 한 문제를 푸는데 2일이면 충분했다. 좀 어려운 문제는 3일이 걸렸다.
강철은 그런 식으로 빠르게 문제를 풀어나갔다.
문제를 푸는 순간.
강철이 올린 답변들이 하나씩 채택되면서 점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20위.
19위.
18위.
그에 따라 순위도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서울 시내 모처.
회원증이 없다면 들어오지도 못하는 곳에 강철과 진용민이 마주한 채 앉아 있었다.
“회사는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여기로 불렀네. 어떤가?”
“저도 좋습니다. 마침 술 한잔하고 싶기도 했고요.”
“하하, 그래.”
이내 젊고 예쁜 여자가 들어와 술과 안주를 준비했다. 그 미모가 연예인 못지않았다.
강철을 향해 눈을 찡긋한 여자가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내 진용민이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렇게 같이 술을 먹는 건 처음이지?”
“네.”
“내가 참 소홀했어. 임원까지 올라온 사람인데 회식 자리 한 번 안 하고.”
“아닙니다. 일이 바빴으니까요.”
“자, 한잔 받지.”
고개를 끄덕인 강철이 잔을 받았다. 이내 술병을 건네받은 강철이 진용민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첫 잔은 원샷이야.”
“네.”
둘은 잔을 부딪치고 바로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카아.”
재벌이 따라주는 술이라고 해서 더 달거나, 맛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앞에 앉아 있는 진용민이 새삼 작게 보였다.
‘하긴 이제는 나보다도 돈이 없는 사람이니.’
한국 부호 순위를 보면 진용민은 1조3천억을 가지고 있다. 자신보다 돈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이렇게 술자리를 가지자고 한 건 요즘 회사가 이래저래 시끄러워서 말이야.”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용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잘 알고 있을 테니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지. 혹시 내가 자네에게 섭섭하게 한 게 있나?”
강철이 또 한 번 스트레이트 잔을 단숨에 삼킨 후 술병을 들었다.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그래.”
꼴꼴꼴.
황금빛 물결이 잔에 담기자마자 진용민도 단숨에 삼켰다. 그걸 본 강철이 말했다.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진용민이 다시 술을 따랐다. 그걸 받아든 강철이 또 원샷 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제가 받을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이번에는 진선미 전무의 제안이 더 마음에 들었을 뿐입니다.”
강철이 다시 병을 들어 술을 따라 주었다. 그걸 받아든 진용민도 원샷 했다. 40도에 육박하는 위스키였다.
진용민의 얼굴이 단숨에 달아올랐다. 그건 강철도 크게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어떤 조건을 제시했나? 내가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지.”
“회장님.”
“그래, 왜.”
“아쉽지만 이미 결정된 사안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강철은 이번에도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는 좋은 사람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탁.
잔을 내려놓은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끝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내 강철이 문을 열고 나가자, 진용민이 들고 있던 잔을 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쨍그랑.
잔이 깨지며 파열음을 냈다. 술기운에 분노가 더해져 진용민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이철휘는 애가 타 미칠 지경이었다.
주주총회까지 앞으로 D-10일.
그전에 주요 펀드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그들이 도통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 자식들이 진짜…….”
다른 자잘한 주주들에게도 끊임없이 전화를 돌렸다. 그때마다 들려온 대답은 간단했다.
-리턴 펀드에 연락하세요. 그쪽에 일괄 위임했습니다.
-블렉데이 펀드에 연락하세요. 우리는 권한이 없습니다.
미국쪽에서 1%, 2%의 지분을 가진 곳들에서 들려온 대답이었다. 결국, 이 세 개 펀드가 핵심인데…….
“연락 안 받아요?”
“그래. 진짜 미치겠다.”
“그 자식들 단단히 결심했나 본데요.”
“이러다 회사가 정말 진 전무님께 넘어가는 게 아닌지 몰라.”
그러자 부하직원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랑은 상관없잖아요.”
이철휘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그렇잖아요. 윗사람이 누가 되든 사실 아랫사람이야 변하는 게 없으니까요.”
“…….”
부하직원이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오히려 이 변화를 반기는 직원들도 있어요.”
“뭐?”
“이강철 이사님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면서요. 결국, 일이 잘 풀리면 이 이사님이 회사의 실권을 잡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이강철 이사님이 사내에서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잘 아시죠?”
“거의…… 신적인 존재지.”
“그러니까요. 지금 회사에서 추진하는 핵심 프로젝트를 전부 맡고 계시잖아요. 그래서 회장님도 아무 말 못 하시는 거고.”
그렇긴 했다. 이미 회사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졌다.
-이강철 이사가 진선미 전무와 손을 잡았다.
그럼에도 진용민 회장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건 이강철을 자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분만 11%.
가진 바 능력은 그 이상.
이제 그가 없으면 대산 그룹은 망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솔솔 흘러나오는 지경이었다.
이철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상황을 반긴다. 진선미 전무와 손을 잡고, 이강철 이사가 회사를 장악하면 회사가 더 커질 수도 있으니까.”
부하직원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지금 일반 임직원들의 심정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철휘의 머릿속으로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소액주주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번 사태는 겉으로 보이기에 오너 일가의 다툼이다.
진선미 VS 진용민.
미국 자본의 한국 기업 침탈이 아니다.
‘진짜 진선미 전무가 이길 수도 있겠어…….’
그런 생각이 이철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제 일은 일이다. 이철휘는 대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연락을 받지 않았다.
* * *
미국 에이글 본사.
론 브라운은 오랜만에 나타난 리터너 라는 아이디의 활동이 반가웠다.
“리터너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나 본데.”
“그래?”
그러자 동료도 관심을 표했다.
에이글.
데이터 분석 커뮤니티를 표방하는 그곳에는 실력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이트에도 이득이기 때문이었다.
“오자마자 질문 게시판에 답변을 엄청나게 달았어. 그게 대부분이 채택됐고.”
“오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는 건가.”
“뿐만 아니라 올라와 있는 문제도 거의 다 풀어놨더라. 속도가 어마어마해. 마치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수련한 것처럼.”
“활동을 멈춘 지 1년도 되지 않았나. 그사이 실력이 더 늘었다는 건가…….”
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1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이런 실력을 갖추고 돌아왔지.”
“흠…….”
“궁금하다. 어떤 사람인지 너무 궁금해.”
“그럼 이번 행사에 부르면 되잖아.”
“에이글 데이터 분석 대회?”
“그래 거기.”
“흠…… 이 정도 실력이면 참가자가 아니라 심사위원으로 초청해야 할 것 같은데.”
동료가 픽 웃음을 흘렸다.
“심사위원으로 하면 되지. 비행기 표랑 숙식 다 대주면 오지 않을까. 그 사람도 해외 여행하는 겸 나쁘진 않을 거 아냐.”
론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생각해 보니 상대방도 그리 나쁜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그렇긴 하네.”
“아직 순위가 10위권이니까. 한 3위권까지 올라가면 보내봐. 그러면 정말 실력이 있다는 뜻이니까.”
“오케이.”
론이 대답을 하고.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 때마다 ‘리터너’라는 아이디의 순위는 빠르게 올라갔다.
10위에서 9위로.
9위에서 8위로.
왜냐하면, 리터너가 푼 문제들의 해답 제출 기간이 끝나면서 결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이었다.
1위.
1위.
1위.
리터너가 푼 문제에서 차지한 순위였다.
과거 3위나 2위, 4위를 차지했다면 이제는 푸는 것 족족 1위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를 확인할 때마다 론이 경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주주총회 D-5일.
진동만도 서서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연락이 없어?”
이철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아예 저희 연락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으득.
진동만이 이를 갈았다. 그가 진용민을 보며 말했다.
“이강철은?”
“제안을 받지 않겠답니다.”
진동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앞으로 5일 후.
주주총회가 열린다. 이때 안건이 올라가고 등기 이사진이 교체된다면 진선미가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고…….
대표이사 해임, 회장 해임 등등 회사의 주요 결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미는 뭐라고 하는데?”
“핵심 계열사와 함께 회장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걸 주면 네 쪽으로 돌아오겠다.”
“네.”
“흠…….”
진동만이 갈등에 휩싸였다.
이제 소통할 수 있는 건 진선미밖에 없었다.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용히 일을 끝낼 것인가, 그게 아니면 일을 크게 벌일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이철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론사에서 냄새를 받은 모양입니다. 주요 언론사에는 말을 해두었지만 몇몇 독립 언론사에 사내 상황이 빠져나갔습니다. 곧…… 뉴스에 나올 것 같습니다.”
진동만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도대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진동만의 시선이 진용민을 향했다.
“네 생각은?”
이를 악문 진용민이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제 생각은…….”
결국, 둘 중 하나였다.
1. 회장 자리를 포기하고, 계열사를 받는다.
2. 끝까지 간다.
둘의 장, 단점도 명확했다.
1번을 선택하면 협상을 통해 계열사 몇 개를 가질 수 있다.
2번을 선택하면 다른 소액주주들처럼 그저 아무런 권력 없이 돈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2번은 절대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1번을 선택하고 싶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젠장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거야.’
1, 2번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아…….
진용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동만이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주주총회까지 이제 5일밖에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으면 선택할 수밖에 없다.”
“…….”
“너도 알겠지만, 저들의 주식이 50%를 넘었어.”
진용민이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진용민도 방법이 없었다. 2번은 죽어도 싫었다.
그러면…… 1번을 선택하는 수밖에.
* * *
주주총회 D-1.
진용민은 결국 진선미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제 생각을 전달했고, 상세 내용을 협의했다.
진선미도 끝까지 가족을 배신하고 싶진 않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버지, 오빠이기 때문이었다.
진선미는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미국 측에게 전달했다. 그 이후에 진선미는 강철을 따로 찾았다.
“화해했어요.”
그 말을 ‘툭’ 던진 진선미가 상세한 내용을 설명했다.
“오빠가 계열사 몇 개를 가져가고, 제가 대산 그룹의 핵심인 마트, 백화점, 온라인 쇼핑을 비롯한 프리미엄아울렛까지 가져가게 될 겁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구 맘대로?’
이들은 모른다. 진선미가 도와주지 않아도 자신의 지분이 51%라는 것을. 그리고 이런 사실이 주주총회 전까지만 알려지지 않으면 된다.
미국 2명, 자신까지 합치면 총 3명이다. 한 명은 미리 포섭해 두었다. 주주총회에서 의결만 되면 총 4명의 이사진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과반수.
그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이제 오너 일가가 소액주주가 될 차례였다.
하지만 아직은 본색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당장 이사회를 소집할 수는 없고, 주주총회 당일 다른 안건이 추가될 거예요. 기존 안건은 폐기되고, 거기에 손들어주시면 됩니다. 미국 측에도 연락해 두었습니다.”
강철은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진선미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 이사의 지위는 그대로 보장될 겁니다. 오빠와도 이야기가 잘 됐고, 제가 회장이 된다면 여기까지 절 도와준 이 이사를 이대로 둘 순 없으니까요. 이번 인사에서 전무로 승진될 테고, 온라인 부문장의 지위도 그대로 유지될 거예요. 누가 꾸중해도 이 이사님은 우리 회사의 중추니까요.”
강철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고, 진선미는 설명을 해나갔다. 하지만 크게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주주총회 열리는 내일.
내일이 되면 모든 게 바뀌게 될 테니까.
* * *
다음 날.
대산 그룹이 보유한 호텔 컨퍼런스 홀에서 주주총회가 열렸다. 호텔 주차장에는 검은색 세단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미국 측 대리인인 마이클이 나타났다.
오너 일가.
다음으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리인이었다.
진선미가 직접 나가서 마이클을 맞이했다.
“마이클 오셨군요.”
“하하, 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기존에 말씀드린 안건에서 조금 변경이 생겼습니다. 긴급 안건이 올라갈 테고, 기존 안건은 폐기하는 거로요. 거기에 손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마이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미소로 진선미를 볼 뿐이었다.
진선미가 그런 마이클을 보며 물었다.
“마이클?”
“하하, 변경됐다는 말씀이시죠. 일단 그 안건을 한번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네? 이건 기존 통화내용과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다니요. 어차피 우리 계약서를 보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 협력한다고 되어 있지. 진 전무님께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무슨…….”
“저흰 진 전무님의 부하직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거야 물론입니다. 동등한 위치라고 생각합니다.”
마이클이 검지를 흔들었다.
“하하, 아니죠. 제가 모아온 지분이 40%. 현재 대산 그룹의 최대 주주입니다. 회사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진선미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걸 명심하도록 하세요.”
마이클이 그 말을 남긴 채 주주총회장으로 들어갔다. 그 양옆을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호위했다.
그 틈은 진선미도 비집고 들어가지 못할 만큼 촘촘했다.
‘설마…….’
호랑이를 들인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to be continued
회귀자의 성공 라이프
4
SOKIN 현대 판타지 장편소설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