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전면에 나서다
만남이 끝난 후 진동만의 서재.
그곳에 그의 자식들이 다시 모였다. 진동만이 진용민을 보며 말했다.
“현재 그 녀석이 가진 게 5%, 지분교환을 통해 6%를 넘긴다.”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리고 최근 사모 펀드가 우리 회사 지분을 24% 인수했다.”
“네.”
진동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분교환 자체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강철 그 녀석도 능력이 있어 보이고, 분명 대산에는 큰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진동만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상황이 너무 공교로워.”
“근래 생기는 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진동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선미가 나섰다.
“전 오히려 당연하다 생각해요. 변형 인플루엔자가 나타난 이후 세상이 180도 달라졌어요. 언택트가 세상의 주요 키워드로 떠올랐고, 기존 맹위를 떨치던 산업들이 부도 일보 직전까지 몰리고 있죠.”
“…….”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흠…….”
그 말에는 진용민도 찬성이었다.
“그건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계실 때와는 달리 경영환경이 급변하고 있어요. 걱정하시는 지분 구조 변화도 그런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황이 변하긴 했지.”
“그에 따라 여러 투자자의 생각이 변했을 겁니다. 대산이 망할 거로 생각하는 투자자도 있을 테고, 앞으로 성장할 것으로 생각하는 투자자도 있고요. 그들 사이의 손 바뀜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강철이 능력이 있다면 지분교환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네. 아버지는 옛날부터 인재를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분명 대산을 성장시킬 인재입니다.”
그런데도 진동만은 고개를 갸우뚱할 뿐 쉽사리 수긍하지 못했다. 진동만이 진용민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놈은 자기 사업도 잘 키우고 있는 놈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남의 회사에서 머슴살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우리에게서 가져갈 게 있으니까요.”
“그게 지분이다?”
진용민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첫 번째는 경험, 두 번째는 수익입니다. 아직 27살. 지식이나 안목은 출중할지 몰라도 회사 경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합니다. 대산에서의 생활은 그 경험을 쌓기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입니다. 미래 그 친구의 회사가 대산처럼 커진다면 지금 경험이 분명 도움이 될 테니까요.”
“수익은?”
그 말에 진용민이 살짝 진선미 쪽을 보았다.
“당장 아이온에서 제공하는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마케팅팀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수익을 올리고 있고요. 더구나 타사에 홍보를 할 수 있는 좋은 레퍼런스가 되고 있죠.”
진선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언했다.
“제가 먼저 제안했어요. 그 사람도 이익이 되는 게 있어야 회사에 남아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움은 좀 되고?”
“네. 어차피 아버지가 더 잘 아실 거잖아요.”
마케팅 팀장 차지철.
그는 과거부터 명예회장의 손과 발이었다. 진선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입을 꾹 다문 채 또 한 번 고심하던 진동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그래, 새 시대에는 새로운 방식이 있겠지. 어디 너희들 마음 가는 대로 해보거라.”
진용민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네.”
하지만 진동만의 꺼림칙한 표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저 기우여야 할 텐데…….’
과거였다면 조금의 의심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자신은 더는 회장이 아니었고, 그저 조언이나 하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이제는 잘되길 바라는 수밖에.’
착잡한 눈빛으로 장성한 자식들을 바라보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강철은 바로 책상에 앞에 앉았다. 미국에서 날아온 화상회의 요청 때문이었다.
신시아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서치에서 40억 달러를 제안했어요!
흥분한 그녀의 목소리에 강철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엄청난 숫자군요.”
너무 흥분했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조차 못했다.
-어, 엄청난 정도가 아니라고요. 이건 뭐랄까. 오마이갓! 진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아시겠지만 로커도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40억 달러 인수 제안을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로커 정도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그야 그랬죠.
“하지만 로커는 최종적으로 거부했죠. 왜냐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
강철이 모니터 건너편에 있는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전 우리의 기술이 더 성장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더 성장할 수 있다면. 40억 달러는 적은 금액이에요.”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미래 알고리듬은 업계에 속해 있다면 다 알 정도로 크게 성장한다. 매년 알고리즘을 개선하면서 압축률을 올리기 때문이었다.
AI.
자율주행.
스마트 홈.
스마트 시티.
등등 미래 필요한 모든 기술은 대량의 데이터가 수반된다. 알고리듬은 그 대량 데이터를 줄일 수 있는 기술을 선점했고, 가파른 성장세를 거듭한다. 강철은 그걸 알고 있어서 저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 평균 압축률이 20~40% 사이를 움직이고 있는데 이걸 30~50%까지는 올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된다면 40억 달러가 아니라 60억 달러는 평가받을 수 있을 겁니다.”
60억 달러.
한화로 7조 가까이 되는 돈이었다. 실제 알고리듬이 미래 평가받는 금액이기도 했다.
에드워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 생각에는 어때요? 가능할 것 같아요?
“물론입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미래 강철도 해당 압축 프로그램을 사용해 보았다. 개인 개발자들에게는 무료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압축률에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헤헤, 역시 그럴 것 같아요.
“그럼 상황이 정리된 것 같군요. 다만……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노력에 대한 보상이 필요할 테니 지분 일부를 파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업 가치 40억 달러.
보유지분 1%만 팔아도 4천만 달러다. 신시아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4천만 달라만 해도 호화롭게 살 수 있는 돈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하하, 네. 한 10%까지는 넘겨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서치 쪽이랑 논의해 보세요.”
그 말에 신시아가 더없이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전화를 끊은 강철은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확인했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신자 아이온게임즈 대표.
-제목 : 라이즈 킹덤 개발 진행 상황 보고
-발신자 아이체크 대표
-제목 : 아이체크 이미지 인식 알고리즘 개선 및 알고리듬 압축 라이브러리 적용 건.
-발신자 딜리버리브라더스 대표
-제목 : GPS 정확도 향상 건
…….
그밖에도 읽지 않은 메일이 상당했다. 강철은 집중해서 메일 하나하나를 읽어내려갔다.
메일을 하나 정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한 시간가량이었다. 새벽 한 시가 지나서까지 강철의 방에서 불이 꺼지지 않았다.
* * *
미국 서치 본사.
그곳에서 알고리듬 인수 관련 회의가 열렸다.
“10%까지 줄 수 있다는 건 투자를 4억 달러 정도만 받겠다는 뜻 아닙니까.”
“네.”
“4억 달러라…….”
“자신만만 한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최소한 지금보다 30%는 더 높은 성능을 낼 수 있다고.”
“지금 압축률이 20~40%인데 30%를 향상한다는 말은…….”
“30~50%까지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상사가 감탄사를 토했다.
“허허…….”
현재 수치도 불가능할 거로 생각했던 수치였다. 그보다 더 높은 압축률을 만들어내겠다니…….
“로버트 생각에는 어때요?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알고리듬에 대해 충분히 알아본 결과.
로버트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제 생각에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요?”
“네. 단, 그들이 말한 라이트 알고리즘의 핵심 전제가 실현 가능한 것이라면요.”
“0과 1로 분해 후 해당 0과 1이 얼마나 겹치는지와 그 위치를 저장하는 방식 말인가요?”
“맞습니다. 이론적으로 해당 방법을 사용했을 때 압축률은 50%까지 가능합니다.”
“그 말씀은 알고리듬 사람들이 그 이론을 구현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군요.”
로버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브룩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주니어 프로그래밍 대회 1등, 대학생 해킹 대회 1등. 대학 시절 다수의 논문 발표 등등 이력이 화려하더군요. 신시아 밸리도 그에 못지않았습니다.”
“그 대표라는 사람은 어떻던가요?”
“대부분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게 이강철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도 특이한 경력이 있습니다. 에이글 닷컴에서 순위권까지 올라갔던 전적이 있습니다. 이후 일이 바빠지면서 접속을 거의 안 하다 보니 다시 순위는 떨어졌고요. 그 이외에도 저희 이미지 인식 알고리즘을 이긴 아이체크 서비스의 대표였습니다.”
아이체크.
로버트의 상사도 알고 있는 기업이었다. 자사보다 뛰어난 알고리즘을 탑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인수 검토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체크의 대표라…….”
“확실히 기술력은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 이미지 인식률이 아직도 우리보다 뛰어납니까?”
로버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벤치마크 결과 서치 렌즈가 99.81%, 아이체크가 99.92%입니다.”
0.11% 차이.
누가 보면 아주 착은 차이라 할 수 있지만, 업계에서는 수천억의 가치 차이를 만들어내는 숫자였다.
“확실히 실력이 있긴 하군요.”
“그래서 가능할 것 같다고 본 겁니다. 아마 그쪽도 가능할 거로 생각하기에 10%만 팔겠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보다 성능이 좋아지면 기업 가치도 가파르게 상승할 테니까요.”
“하긴 지금도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의 구애를 받는 마당에 성능이 더 높아지면…….”
할 수 있는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진다.
일단 영상.
기존 중, 저 화질 영상을 전송하는 트래픽으로 최고 화질을 내보낼 수 있다. 그러면 다른 OTT 업체보다 비교우위에 서게 된다.
비단 그건 OTT 업체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스마트폰 제조 업체 입장에서는 같은 양의 저장장치로 더 많은 이미지를 저장할 수 있다.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서치에서는 이걸 인수해 자사의 스마트폰 운영체제에 라이브러리 형태로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애플은 가볍게 제칠 수 있으리라.
로버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가격을 한번 올려보세요.”
“얼마로…….”
“60억 달러부터.”
“……그건 너무 크지 않을까요?”
“그게 우리 스마트폰 OS에 탑재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애플은 가볍게 제칠 수 있지 않을까요? 더구나 OTT 업체를 비롯해 통신사, 정부, 방산 업체 등등 압축이 적용될 곳은 무수히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파이프라인으로 이걸 흘려보내면, 그 정도 금액은 충분히 뽑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60억 달러로 한번 말해보겠습니다.”
60억 달러.
한 화로 7조가 넘는 금액이었다.
강철이 잠든 사이에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 * *
미국 알고리듬 본사.
전화를 받은 신시아가 멍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그녀의 변화에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었다.
“결제 페이지 개발 끝났어요? 거기에 리민스 연동 오늘 내로 끝내야 해요.”
“이제 거의 마무리됐습니다. 곧 올리겠습니다.”
“빨리 부탁해요.”
신시아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금발 머리가 허공에서 움직이며 진한 샴푸 향을 풍겼다.
겨우 정신을 차린 신시아가 에드워드를 향해 다가갔다.
“에드워드.”
하지만 에드워드의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시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에드워드!”
“왜?”
“방금 서치에서 연락이 왔어.”
“우리 제안 수락한대?”
신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다른 제안을 해왔어.”
이번에도 에드워드가 짧게 답했다.
“어떤?”
“기업가치를 60억 달러로 올려준 대.”
그 숫자에도 에드워드는 매우 놀란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60억 달러?”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60억 달러. 단숨에 20억 달러가 올라간 거야.”
“헤헤, 우리 기술이 그렇게 평가받다니 기분은 좋네.”
“이 바보야! 기분이 좋다니. 무려 60억 달러라고! 우리가 이강철 대표에게 속은 거야! 내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니까.”
신시아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였다.
이강철에게 지분을 넘겼을 때 비해 기업가치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올라갔다. 속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생각은 달랐다.
“신시아.”
“왜!”
“만약 이강철 대표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라이트 알고리즘이 완성될 수 있었을까?”
그 한마디에 신시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 사무실 비용도 못 내서 쫓겨났을지 모르지, 그리고 우리는 안 되나 보다 하고 포기했을지도 모르고. 뭐, 나야 집에서라도 계속 개발했겠지만.”
“그거야…….”
“같이 고민할 수 있는 동료들은 없었을 거야. 이강철 대표가 찾아오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고민 했잖아.”
신시아가 반박하지 못한 채 입맛만 다셨다. 에드워드의 말이 전부 맞기 때문이었다.
“쩝…….”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어. 그리고 너도 알잖아. 그가 단순히 돈만 투자한 게 아니라는 걸.”
“그야 그렇지. 그냥 난 너무 아쉬워서…….”
“너무 아쉬워할 거 없어. 어차피 지금 받은 돈으로도 우린 천만장자가 됐잖아. 난 돈 걱정 없이 개발만 할 수 있는 지금도 즐거운걸.”
“치이…….”
“뭐, 어쨌든 서치에서 60억 달러를 제안했다고?”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걸 이 대표님께 말씀드리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아마 팔겠다고 하지 않을까. 대표님도 60억 달러를 생각하고 계셨잖아.”
“그럼 일단 연락부터 해봐. 어차피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고개를 끄덕인 신시아가 이내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끊은 강철이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60억 달러라…….”
단숨에 20억 달러가 올라갔다. 아마 서치에서도 알고리듬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리라.
결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현재 환율로 7조가 넘는 돈이었다.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분이 60% 정도였으니 4조2천억 정도의 돈이 생기는 것이다. 가늠조차 잘 안 되는 돈이었다.
“엄청난 돈이긴 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기업에 투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투자 리스트에 수 개의 투자 기업이 적혀 있었다. 이 돈을 미국의 사모 펀드에 넣는다면 그 리스트에 있는 기업 전부에 투자하고도 남을 것이다.
“어떻게 한다…….”
지금 팔 것인가.
말 것인가.
둘 중 어느 것을 택할지 쉽게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각각의 장단 점은 명확했다.
1. 지금 판다.
-장점 : 당장 큰돈이 생긴다.
-단점 : 캐시카우 하나를 잃게 된다.
2. 안 판다.
-장점 : 꾸준한 현금 흐름이 창출된다.
-단점 : 다른 기업에 투자가 힘들다.
강철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만약 압축률 50%. 그 이상 개발할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게 이득이지만 그 위로 개발이 어렵다면 파는 게 이익이지. 어차피 기업가치는 더 올라가지 못할 테니까.’
압축률 50%.
그건 마의 벽이었다. 에드워드 브룩도 그 벽을 깨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이 함께 고민한다면 그 이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고민이 되는 것이다.
‘흠……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 없다는 게 문제야.’
5년.
10년 후나 그게 만들어진다면 차라리 지금 서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득이다. 왜냐하면, 그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조금 더 고민하던 강철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결론을 내렸다.
“팔자.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다른 기업에 투자하면 돼. 더구나 지금은 변형 인플루엔자 여파로 투자 시장이 급격히 냉각되어 있다. 자금을 수혈받지 못해, 개발을 멈춰야 하는 스타트업이 수두룩하니까. 싼값에 살 수 있을 거야.”
고민하던 강철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 * *
강철이 대산 그룹에서 맡은 프로젝트는 총 3가지였다.
-추천시스템
-대산 3.0.
-빅트리.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각종 회의가 시간별로 약속되어 있었다.
강철은 그 시간을 쪼개 각 프로젝트의 실 개발에 참여했다. 실제 개발상의 어려움을 이해해야 더 나은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다시 쪼개 외부 인사를 만났다.
“반갑습니다. 대표님.”
“하하,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원강.
그가 농촌 맛집 PD와 함께 대산 그룹을 찾은 것이다.
“아닙니다. 프로그램의 취지를 보자마자 한번 협업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요즘은 착한 소비가 대세니 소비자들에게 대산의 이미지를 높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간단한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
강원도 감자.
해남 고구마.
의성 사과.
완도 전복까지.
PD는 농촌 맛집 프로그램에서 순회할 지역을 미리 알려주고, 그 지역에서 아직 팔리지 않은 농, 수산물의 양을 알려주었다. 일개 개인이 소화하기에는 엄청난 양이었으나, 대산 그룹에서 소화하기에는 그리 많다고 할 수 있는 양은 아니었다.
강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농촌 맛집 PD가 대산 그룹을 나서며 의아한 표정으로 백원강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알고 계셨습니까? 저분이 저렇게 젊다는 걸.”
백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업계에서 유명합니다.”
“아…… 그래요?”
“저도 실제로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대산 그룹에서 추진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는 전부 저분이 진행하고 있다 봐도 무방합니다.”
“아직 20대에 불과한데…….”
“듣기로는 개발 실력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회장님께서도 그 점을 높이 사서 승진을 시켜주신 거고요.”
“그래요? 그런데 대기업 임원이 개발 능력만으로 되는 건가요?”
“하하, 물론 그것만으로는 힘들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 대산 그룹 외에도 별도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어요. 유우니 상점, 딜리버리브라더스 거기에 시티라이더랑 아이체크도 저분 거라고 들었습니다. 사업 운영 능력도 있다는 뜻이죠.”
PD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이체크, 시티라이더는 자신도 알고 있는 서비스와 게임이기 때문이었다.
“대기업 임원인데 그런 사업체까지 운영하고 있다고요?”
“하하, 네. 그래서 외부 강연 요청이나,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걸 계속 거절해 왔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송 출연을 결정한 걸 보니.”
“외부 활동을 하시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겠군요.”
“하하, 네. 아마 그런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기업 회장들도 SNS를 하는 시대니까요.”
“흠…….”
“하하, 왜요? 저분과 함께 프로그램을 해보려고 그러십니까?”
PD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아니라 농촌 맛집 끝나면 드라마를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 마침 주인공 캐릭터가 뛰어난 IT 개발자라서요.”
“아…… 드라마.”
“실제 뛰어난 개발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취미, 습관을 지니고 있는지 취재를 해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저분이 제격일 겁니다. 소문으로는 아주 드라마틱한 삶을 살고 계시니까요.”
그 말에 PD가 두 눈을 반짝였다. 마치 먹잇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하이에나를 보는 듯했다.
* * *
미주한인일보.
그 신문사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진창우는 최근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들린 M&A 소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시기에 60억 달러짜리 인수 소식이라니. 더구나 여기 대표가 한국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들으셨습니까?”
진창우의 질문에 편집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국인이라고? 난 금시초문인데.”
“알고리듬 직원들을 취재한 결과 알아낸 건데 이름이…… 이강철? 그 사람이 대표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일대에서 LA까지 찾아봤는데…….”
“그런데?”
“오리무중이에요.”
“오리무중?”
“이강철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그, 그래?”
“편집장님도 알다시피 이 바닥이 좁잖아요. 한인 사회에서 한 다리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고.”
“그런 데도 없다…….”
“즉 사기꾼 냄새가 난다 이겁니다.”
편집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기꾼.
만약 정말 사기꾼이라면 이건 특종이었다. 고민하던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치에서 사기꾼에게 60억 달러나 지급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 말에 진창우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니까 특종감이라는 겁니다. 서치도 속은 희대의 사기꾼. 금액은 60억 달러.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진창우가 생각해 낸 시나리오에 편집장도 혹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된다면 이건 특종 중의 특종이었다.
“사기꾼이라…….”
“만약 서치에서 사기를 당하려는 걸 저희가 막아주면 서치에서도 상당한 보상을 해줄 테고요.”
“자신 있지?”
“하하, 제가 누굽니까.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세퍼드 진입니다. 세퍼드 진.”
편집장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번 파보자. 네 말대로 되면야 이건 특종 중의 특종이니까.”
진창우의 입기에도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그때까지도 둘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강철이라는 인물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 * *
강철의 집.
최용희가 소파에 기댄 채 TV를 보고 있었다.
-이 많은 감자를 사줄 분이 계시다고요?
-하하, 잠시만 기다려 봐.
TV에서 백원강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때 자막으로 나온 문구.
-과연 키다리 아저씨는 누구?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이희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기 나오는 키다리 아저씨가 오빠라는 말이잖아.”
“그렇다니까.”
“말도 안 돼. 이제 방송까지 나온다고?”
“네 오빠가 누구냐. 대산 그룹 임원 아니냐. 임원.”
“그, 그렇긴 하지만…….”
이희진의 주변에 대기업 임원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랬기에 강철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사이 방송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감자 50톤이에요.
-감자 50톤이요?
-하하, 네. 가능할까요?
-아…… 50톤이라.
-마트에서 팔면 금방 팔릴 겁니다. 이게 생긴 게 못난이라 그렇지 맛은 좋아요.
-알겠습니다. 한 번 조율해 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 목소리만 출연했다. 하지만 최용희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네 오빠 목소리 말이야. 너무 멋있지 않니?”
“……응?”
“얼굴도 나오면 세상 처자들이 다 달려들 텐데.”
“으, 으응?”
“아니. 네 오빠도 이제 장가가야 할 나이인데 도통 소식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자, 잠깐만 목소리 멋있다. 에서 이야기가 왜 거기로 가.”
“너희 학교에 괜찮은 친구 없어?”
엄마의 급발진에 이희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빠 아직 28살이야. 아직 젊다고.”
“옛날에는 그때면 다 애 하나씩 있을 나이야.”
“어, 엄마. 지금 21세기야. 30대 중반에 결혼하는 게 보통인 시대라고.”
하지만 최용희는 이희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방송까지 나갔으니 좋은 소식 있겠지. 저 목소리를 듣고 여자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그런 엄마를 이희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거야 엄마 생각이고.”
“아닐걸?”
이희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맞을걸?”
하지만.
이희진의 생각은 틀렸고, 최용희의 생각은 맞았다.
“부문장님 목소리 진짜 멋있지 않아? 어제 본방 시청하다가 반할 뻔했다니까.”
반대편에 있던 여직원이 두 손을 꼭 모으며 중얼거렸다.
“너도 그러니? 나도 목소리 듣고 바로 팬 됐어.”
“아, 부문장님 팀에서 같이 일하고 싶다……. 혹시 알아, 부문장님께 능력을 인정받을지.”
“어머, 너 그러다 진 전무님께 찍히려고?”
“그거 헛소문으로 밝혀진 게 언젠데. 부문장님이 그런 거 아니라고 말씀하셨잖아.”
“얘는 그걸 그대로 믿니? 그냥 빽이 아니라 능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러신 거잖아.”
“그, 그런가.”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가 가랑이 찢어진다. 조심해.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어.”
“히잉…….”
이런 대화를 나누는 직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만큼 사내에서도 농촌 맛집은 화제였다.
그런 화제성이 비단 사내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대산 마트 X 농촌 맛집. 시름에 휩싸인 농촌을 구하다.
-못난이 감자 50톤 통 큰 구매 결정. 대산 마트에서 절찬리 판매 중.
-착한 소비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대산 마케팅팀에서 각 언론사로 보낸 보도자료들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덕분에 강철의 인지도도 가파르게 상승했다.
-대산 그룹.
-이강철.
-온라인 부문장.
-유우니 상점.
-스타트업.
강철과 관련된 단어들이 실검을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다. 강철의 의도대로 세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편치만은 않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최근 언론에 우리 온라인 부문장 이야기밖에 안 들리는 것 같아.”
“확실히 개발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산을 알릴 줄은 몰랐습니다.”
“매출은?”
“지난달보다 10% 늘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동시 판매 중인 감자도 엄청난 기세로 팔리는 중이고요. 추가 매입까지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흠…….”
“더구나 이 부문장이 초고속 승진을 하다 보니 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상당합니다. 덕분에 대산의 이미지도 능력이 있으면 승진되는 젊은 감성의 회사로 각인되고 있고요.”
진용민이 툭 말을 던졌다.
“나보다 인기가 커진 것 같아.”
진용민도 평소에 SNS를 통해 대중들과 소통을 해왔다. 그런 진용민의 노력보다 한 번의 방송 출연이 강철을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게 조금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설마 질투를 느끼는 건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옹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비서가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대중들의 냄비 근성이야 익히 알려져 있으니까요.”
“하긴 그렇긴 하지.”
“농촌 맛집이 끝나면 금세 가라앉을 겁니다. 마케팅팀에서도 이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연구를 하는 모양인데 마찬가지 이유로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지속성 있는 이벤트가 아니라 판단한 것이죠.”
진용민은 옹졸했던 생각을 털어냈다.
“회사 차원에서 밀어줄 수 있는 게 있다면 최대한 지원해 주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분교환 건 말인데.”
드디어 본론이었다. 비서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진용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대로 진행하자고.”
“네. 추진하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비서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회장이 지시했으니 이제 일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 소식은 바로 강철에게 전달되었다. 연락을 받은 강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다.”
강철 5%
지분교환 6%
사모펀드 24%
우호미국자본 12%.
도합 47%.
더구나 알고리듬을 서치에 넘기는 작업이 마무리되면 든든한 총알이 생긴다. 그걸로 대산 그룹 지분을 좀 더 인수한다면 50%는 문제도 아니었다.
강철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마이클에게 지시했다.
“총 3%만 더 매입하세요.”
-50%까지 채우시는 겁니까.
“네.”
-이제 진짜 거의 다 왔군요. 저도 혹시 미국에 남은 지분이 더 있나 찾아보겠습니다.
“하하, 네. 최대한 알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강철의 입가에서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흡족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강철의 핸드폰이 또 한 번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강철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물류 자동화 시스템 에러.
전 사에서 수집되는 로그를 한곳에 모아 에러가 발생하면 알람이 오도록 만들어놨다. 문구만 보면 물류 쪽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건 뭐야 갑자기.”
강철은 화면을 터치해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Null Point Exception
-…….
수십 줄에 걸친 에러는 이것만 봐서는 제대로 확인이 되지 않았다.
강철은 바로 인터폰을 눌렀다.
“물류 팀 연결해 주세요.”
* * *
대산 그룹 본사 10층.
대산 그룹이 야심 차게 추진 중인 자동화 물류센터의 중앙 관제실이 위치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함규범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 추세면 곧 용인도 가득 차겠어.”
최초 계획은 50t이었지만 주변 다른 농가가 가지고 있는 감자들까지 매입하게 되면서 추가로 30t이 늘어났다. 덕분에 물류센터의 가용량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때.
함규범의 앞에 놓여 있는 사무실 전화기가 띠리리 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기 용인 물류센터인데요.
“네.”
-아시겠지만 여기도 곧 찰 것 같아서요. 이제 감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함규범이 살짝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알겠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용인.
이천.
화성.
총 세 곳에 신선식품을 주로 취급하는 자동화 물류센터가 있었다. 그 중 용인이 거의 한계 다다랐다고 연락이 온 것이다.
함규범이 마우스를 움직여 현황을 다시 확인했다.
“6만 개라…….”
용인 물류센터 최대 SKU(Stock Keeping Units : 보관 재고량)는 7만 개다. 하지만 한 번도 7만 개까지 간 적이 없었다. 항상 적정선에서 관리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벌써 6만 개가 차버린 것이다. 그만큼 농촌 맛집의 파급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그사이 모니터 상의 용인 센터 상태가 ‘옐로’에 도달했다.
그린.
블루.
옐로.
레드.
붉은색이 된다면 더는 용인에서 처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부터 납품되는 건 이천으로 보내야겠어.”
하지만 이천도 그리 넉넉한 상태가 아니었다. 총 5만 SKU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 3만 5천 개가 차 있었다. 평소 용인 센터에서 관리하던 양이 이천으로 넘어간 덕분이었다.
“이번에 납품되는 30t이 끝이라고 했으니까. 처리되기야 하겠지…….”
세 물류센터를 최대한 가동한다면 어찌어찌 처리할 수 있었다. 시뮬레이션 결과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함규범의 얼굴에서는 근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처리할 수 있을까가 문제인데…….”
지금까지 물류센터 저장률을 99%까지 끌어올린 적이 없었다. 항상 80%에서 유지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감자 대량 입고 사태로 물건이 99%까지 차는 것으로 예상하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한 시간 뒤.
이번에는 이천 물류센터도 옐로 상태로 변했다.
그리고 또 한 시간 뒤.
화성 물류센터가 옐로 상태로 변했다.
세 물류센터가 전부 임계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함규범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모니터에 나와 있는 각 물류센터 상태가 ‘블랙’으로 변한 것이다.
블랙.
그건 곧 물류센터 시스템이 정지된 것을 뜻한다.
“뭐, 뭐야…….”
당황한 함규범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 * *
평소 대산 마트를 자주 사용하는 지영은은 농촌 맛집을 재밌게 보고, 내일 아침은 감자 요리를 하기로 했다.
“어디 보자…….”
지영은은 빅트리에 접속해 감자 3봉지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식구가 4명이나 되기에 꽤 많은 양을 먹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결제하려고 보니 화면에 재고 없음이 나타나 있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 보았다. 거기에는 분명 재고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뭐야 또 에러 난 거야.”
빅트리 오픈 당일.
엄청난 에러를 뿜어내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기분이 상한 지영은은 바로 맘 카페에 글을 하나 올렸다.
-제목 : 빅트리 저만 이런 건가요?
-내용 : 농촌맛집에 나오는 감자 사려고 접속했는데 결제가 안 되네요. 혹시 저랑 같은 현상 겪으시는 분 있나요?
-희망나무 : 어머! 저도 그래요. 이거 또 에러 난 거 맞죠?
-행운맘 : 에휴, 빅트리 또 그러네요. 도대체 언제쯤 제대로 될는지.
-진우맘 : 저도 감자 사려고 하는데 결제가 안 되나 봐요?
농촌맛집이 인기가 있는 만큼 댓글은 수백 개가 달렸다. 그건 즉 대산 그룹 안티가 수백 명이 생겼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 * *
강철이 급히 본사 건물 10층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물류센터 중앙 관제소 인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부문장님.”
강철은 바로 실무자를 찾아가 물었다.
“뭐예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니터를 보고 있던 함규범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그게…….”
함규범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잔뜩 긴장한 것이다.
강철이 깊은숨을 내쉬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찮습니다. 차분히 답해보세요.”
“사실 지금까지 각 물류센터를 전부 90% 이상 운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요?”
“이번에 농촌맛집이 대히트를 치면서 물류센터로 대량의 감자가 입고되었고, 그게 시스템 부하를 일으켰습니다.”
그 말에 한 가지 사건이 강철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물류대란.’
미래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농촌맛집 때문은 아니었다.
좀 더 이후에 온라인 쇼핑 규모가 커지지만, 물류센터는 그대로일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던 문제였다.
‘농촌맛집이 생각보다 크게 히트하면서 그 일이 앞당겨졌구나.’
강철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함규범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동화 프로세스가 각 지사에서 입력되는 물량을 확인해 물류센터를 배정하고, 해당 물류센터에서는 입고된 물건에 대해서 소비자들의 결제 내역에 따라 자동으로 분류가 진행되는데 현재 문제가 생긴 부분은…….”
그 말을 강철이 끊었다.
“용인, 이천 물류센터 내에서 소비자들의 결제 내역에 맞춰 물품을 분류하는 프로세스일 겁니다.”
“아, 네. 맞습니다. 총 세 군데 물류센터 중에서 두 군데만 발생한다는 게 더 이상해서 해결책을 찾는 데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3개의 물류센터 전부 같은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왜 저 두 곳만 문제가 발생한 건지…….”
함규범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강철이 오기 전까지 계속 고민해 봤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철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버전 문제 때문일 거야.’
세 군데 물류센터는 준공 일자가 다 달랐다. 덕분에 내부 소프트웨어 버전이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가장 최신에 지어진 화성에서만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강철은 그걸 직접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잠시 앉아보세요.”
“아, 알겠습니다.”
강철은 그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해당 물류센터 내부 서버에서 돌아가는 프로세스가 몇 개죠?”
“총 5개입니다.”
“일단…… 그것들 버전부터 확인해 봅시다.”
CTO이자, 부문장의 지시였다. 함규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진선미의 집무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그녀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물류센터에서 문제가 생기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부는 아니고, 용인 이천에서 재고 수량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문제가 생기고 있다 합니다. 화성 물류센터는 정상 운용되고 있고요.”
진선미가 다급히 물었다.
“그러니까 왜요?”
그녀가 다급한 이유는 자동화 물류센터가 진선미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나일처럼 자동화된 물류센터가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나일의 방식은 우리에게 맞지 않아요.
-유럽의 오키도가 대산에 꼭 맞는 물류 자동화 방법입니다.
그녀가 적극적으로 도입을 주장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 문제가 생기면 그녀에게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 것이다.
“농촌맛집 프로그램이 흥행하면서 감자가 대량으로 들어온 모양입니다. 그걸 물류센터에서 처리하다가 문제가 생겼고요.”
“그 말은 물류센터에 물건이 대량으로 입고되면 처리가 안 된다는 말이에요?”
“확인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용인, 이천 물류센터의 SKU가 95% 이상으로 올라가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초조해진 진선미가 ‘까득’ 손톱을 깨물었다. 문제가 커질수록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결은요?”
“현재 이강철 부문장이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중입니다.”
그 말에 진선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부문장?”
자동화 물류센터.
지금껏 이강철이 거기에 관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 나섰다…….
“말이 안 되잖아요. 물류센터 규모가 상당한데 이강철은 그 일에 직접 관여한 사람도 아니고.”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류센터 중앙 관제실에서 직접 코드를 보며 문제점을 찾아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드르륵.
거리며 비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뭐? 문제점을 찾아냈어?”
“다른 버전이 문제라고?”
“일단 알았어.”
그 말을 앞에 앉아 있던 진선미도 똑똑히 들었다.
“문제…… 찾은 겁니까?”
비서는 자신이 들은 말이 잘 믿기지 않아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이강철 부문장이…… 찾았다고 합니다.”
진선미가 멍하니 비서를 바라보았다.
* * *
강철이 함규범에게 지시했다.
“일단 용인, 이천을 문제가 없는 화성 물류센터와 같은 버전으로 배포하세요.”
“그, 그건 안 됩니다.”
“왜요?”
“물류센터별 특성에 맞춰서 커스터 마이징 한 부분이 조금씩 있어서 같은 프로그램 사용이 불가능해요.”
강철이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네?”
“각 센터별로 SKU와 취급 물품이 다를 거로 생각하고, 지어진 물류센터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용인이나 이천이 신선식품 전문이라면 화성은 공산품과 신선식품 비율이 50 대 50입니다. 그래서 들어가 있는 하드웨어나 프로그램이 조금 달라요.”
“하드웨어가 다르다고요? 제가 알기로는 전부 오키도 사 것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 그거야 그런데.”
“그리고 신선식품 전문과 공산품의 차이가 뭡니까? 내부 로직에 차이가 있어요?”
“아…… 그건 유통기한이나 물건 적재 넓이가 달라지는 부분이라…….”
강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지금 그런 것들에 달라 다른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는 말입니까? 그럼 앞으로 유통기한이 극도로 길거나 짧은 식품이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또 크기가 큰 게 들어오면요. 그럼 또다시 개발할 생각입니까?”
결국, 함규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이거 도대체 누가 만든 겁니까?”
“그게…… 진 전무님이 총 책임자를 맡아서 구성된 시스템입니다.”
그 말에 강철이 미간을 긁적거렸다.
‘그래서 총체적 난국이구나.’
당장 오류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되는대로 진행된 개발.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시간이 촉박하고, 개발자들의 능력이 떨어진다면 지금처럼 개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법은 각각을 수정한 후 재배포하는 수밖에 없군요.”
“네. 이걸 통합한다고 해도 그건…… 추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일단 화성 버전과 다른 부분을 확인해서 수정, 배포 진행하세요. 통합은 추후 논의하기로 하고.”
“알겠습니다.”
“Git 주소 좀 알려주세요. 저도 살펴볼 테니.”
고개를 끄덕인 함규범이 급히 사내 메신저로 Git 주소를 건네주었다.
강철이 심각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언젠가 또 문제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었다.
10분.
30분.
한 시간.
두 시간.
물류센터가 최종적으로 다시 원상 복구되는 데 총 2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소비자들은 빅트리에서 구매를 진행하지 못했고, 물류 트럭들도 올 스톱 상태로 대기해야 했다.
대략 발생한 추정 피해액만 수백억이었다.
진용민이 잔뜩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제 해결됐다고?”
“네. 전 물류센터 정상 가동된다고 합니다.”
“하아……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야.”
“이강철 CTO 말로는 ‘총체적 난국’이라 표현했습니다.”
“……뭐?”
“개발이 마구잡이로 진행되어 있어서. 당장 땜질식 처방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문제의 여지가 많아서 물류 자동화 시스템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합니다.”
“그…… 정도야?”
“네.”
“그거 진 전무가 만들었지.”
“맞습니다.”
“그럼 다시 하라고 하면 되겠군.”
“진 전무에게요?”
진용민이 비릿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결자해지해야지.”
“과연 받아들일까요? 그리고 이강철 부문장이 개입할 여지도 있습니다.”
“이번 일도 그가 해결했지?”
“네. 문제가 생기자마자 10층 물류센터 통제실로 이동해서 바로 문제점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그 정도 실력이면 개선안도 바로 만들어내겠지.”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지금 맡은 일이 너무 많잖아. 대산 3.0, 추천시스템 그리고 빅트리까지. 거기에 물류 자동화 시스템이라…… 하나하나가 그룹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이니까.”
비서는 진용민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이참에 나갈 사람은 나가야지. 안 그래?”
비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 * *
하지만.
진선미는 진용민의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총 책임을 맡고 다시 개발한다고 해도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강철을 데리고 다시 회장실을 찾았다. 진선미가 진용민을 노려보며 말했다.
“본인이 할 수 있다면 아무런 문제 없는 거잖아요.”
진용민의 시선이 강철을 향했다.
“정말 할 수 있나?”
강철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합니다.”
“자네가 맡은 일만 3가지야. 하나하나가 그룹의 운명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차대한 일이고. 그런데 그 세 가지를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이번 일도 할 수 있다.”
“네.”
“하하…… 하하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두게. 줄타기도 회사가 존재해야 할 수 있는 거야.”
진용민.
진선미.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다가 회사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충분히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뭐 더 할 말은 없지. 나가봐.”
“네.”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진선미가 뒤따라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진용민이 빤히 바라보았다.
집무실을 나오자마자 강철이 한 번 더 확인했다.
“빅트리 결제 플랫폼은 리민스로 하시는 겁니다.”
리민스.
강철이 매입한 핀테크 업체였다. 현재는 아이온 게임즈, 유우니 상점, 딜리버리브라더스에서 사용 중이었다. 강철이 이번 일을 해결해 주고, 진선미로부터 받기로 한 대가였다.
아이온의 데이터 분석 서비스에 이어 벌써 2번째였다.
‘하나하나 우리 서비스가 대산에 침투하고 있다.’
대산이 아이온에 의존적으로 될수록 M&A도 더 쉬워지리라.
“알았어요.”
“바로 내일 계약서 들고 찾아가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강철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려 했다. 그런 강철을 진선미가 한 번 더 붙잡았다.
“정말…… 아직도 생각 없어요? 저와 손을 잡으면 방금 들어갔었던 그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는데.”
강철은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 없습니다.”
손을 잡지 않아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신주영에게 연락이 왔다.
3% 추가 매입.
덕분에 총 53%의 우호지분을 가지게 됐다. 이제 강철의 회사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역으로 강철이 제안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진선미는 꿈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생각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겠어요.”
그랬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