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규모를 키우자
4시간.
NCS에서 발생한 DNS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동안 빅트리나 유우니 상점은 정상 운영되었고, 쿠키처럼 멀티 리전 구성을 해놓지 않은 서비스들은 멈춰 버렸다.
덕분에 빅트리는 상대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박말순 : 역시 대기업은 다르네. 쿠키는 계속 뻗어 있는데 빅트리는 운영. 이게 전통의 강자인가.
-김수영 : 이제부터 빅트리로 옮겼습니다. 대산 마트와 포인트 연동도 되고 편하네요.
-최숙희 : 오늘도 빅트리 총알배송 이용했네요. 이제 사이트도 잘 작동하고 포인트도 팍팍 주시고 너무 좋아요~!!
호의적인 댓글들이 계속 올라왔다. 진선미는 그걸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강철이 하면 다르다. 사내에 왜 그런 말이 퍼지고 있는지 알겠네요. 다른 사이트들이 전부 먹통이 됐는데 똑같이 NCS를 이용 중인 빅트리는 멀쩡하다니.”
진선미의 비서인 오규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대단하긴 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멀티 리전 구성을 통해서 이번 NCS 먹통 사태를 피했다고 합니다. 그걸 구성한 국내 서비스는 빅트리가 유일하고요.”
“유일하다…….”
“네. 그래서 빅트리 개발자들에게 관련 내용 공유를 부탁하는 전화가 쇄도하는 중이라 합니다.”
진선미의 입가에 진한 보조개가 생겼다. 양파 같은 사람이었다.
과연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끝없이 호기심이 피어났다.
달칵.
진선미가 마우스를 클릭하자 앱스토어 내 빅트리 앱 관련 댓글들이 리프레시 되었다. 역시나 호의적인 댓글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비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회장님께서 그에게 온라인 부문장까지 넘기신 것으로 보입니다. 인사팀에서 곧 발표가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진선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온라인 부문장은…… 사내 핵심 직책이잖아요.”
“뿐만 아니라 전결로 처리할 수 있는 자금, 인사까지 상당 권한을 상향 조정하신 모양입니다.”
“한마디로 크게 힘을 실어주고 있군요.”
비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덕분에 백화점, 마트 매출의 역성장이 가속화되었습니다. 면세점은 아예 문을 닫아야 할 판이고요. 그룹사 전체가…….”
“영업 적자 상태죠.”
“네. 그런데 유일하게 성장한 부분이 온라인 부문입니다. 앞으로 부문장을 차지하는 자가 사내 핵심 권력이 되는 상황에 이강철 CTO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건 그에게 개발만이 아니라 기획, 마케팅, 관리까지 전반적으로 맡겨보실 생각으로 보입니다.”
진선미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아마 자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유우니 상점, 딜리버리브라더스의 폭발적인 성장을 보면 저라도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건 과외로 벌어진 일인데…… 이강철 이사가 대산 그룹 지분 5%를 취득하고 공시까지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사모 펀드 세 곳에서 각 8%씩 지분을 취득했고요.”
진선미가 턱을 괴며 물었다.
“이강철 CTO야 그렇다 치고, 사모 펀드요?”
“네. 리턴, 라이트닝, 블랙데이 이렇게 세 개 펀드에서 각각 8%씩 일반 투자 목적으로 지분 공시를 했습니다.”
“총 24%네요.”
“맞습니다. 기존에도 외국인 투자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5% 이상을 투자한 회사는 없었는데…… 뭔가 특이하긴 합니다. 그래서 전략실에서도 주의 깊게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흠…….”
“자칫 과거 다른 기업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갑자기 경영권 참여로 투자 목적으로 바꾸고, 주주총회에 특별 건의 같은 것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24%면 지분이 부족하잖아요.”
“소액주주에게서 위임장을 받거나, 같은 외국계 자본들과 연합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진선미가 희고 가느다란 목을 살짝 까딱거렸다.
“알았어요. 기억하고 있죠.”
“네.”
“그래도 지금은…… 이강철 CTO의 행보에 더 신경을 써주세요. 그가 대산 그룹의 차기 성장을 책임질 것 같습니다.”
비서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하루 휴가를 내고, 청담 사무실에 있었다. 천준호가 소개해 준 사람들과 면접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개성 하나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네…….’
천준호가 소개해 준 인원은 총 3명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첫 번째 손흥석이었다.
“준호 말로는 타자 좀 치신다면서요?”
타자.
강철은 맥락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프로그래밍 말입니까?”
“네. 준호가 좀 하긴 하지만 저에 비해 평범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또 그 친구가 칭찬은 잘 하지 않는 성격이라. 얼마나 하시는지 좀 궁금하긴 하군요.”
“만약 제가 흥석 씨보다 잘하는 게 입증되면 회사에 입사하는 겁니까?”
손홍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전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일하고 싶으니까요. 지금 회사에도 이제 더는 저보다 실력 있는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떠나려는 거고요.”
손흥석.
그가 다니고 있는 곳은 망고 톡.
국내에서 가장 큰 메신저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그곳에서도 자신보다 잘하는 사람이 없다는 건 확실히 실력이 있다는 뜻이리라.
“알겠습니다.”
이내 손흥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에 질문을 하나 슥슥 적어나갔다.
그가 칠판에 적은 건 대표적인 압축 알고리즘 중의 하나인 허프만 알고리즘이었다.
“최근 인터넷 트래픽이 늘어나면서 어떻게 하면 같은 양의 데이터를 더 많이 압축해서 보낼까 고민하다 생각해 본 겁니다. 이 허프만 알고리즘을 좀 변형하니 그럴듯한 알고리즘이 하나 탄생할 것 같아서요.”
이건 손흥석이 실력을 측정하는 방법이었다.
실제 자신이 고민하는 문제를 던져주고, 어떻게 해결할지 보는 것.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높은지 낮은지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자신이 못 푼 문제를 푼다는 건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뜻이니까.
강철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다. 거기가 끝입니까?”
“몇 가지 방안을 생각하긴 했습니다.”
그러면서 쓱쓱 수식을 적어나갔다.
‘뭐야 저건. 이미 알고리듬에서 본 것들이잖아…….’
완전히 모르는 분야의 문제를 냈다면 상당히 난감할 수도 있었다. 해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테니까.
하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손흥석이 적은 고민의 흔적들은 이미 알고리듬에서 겪은 과정들이었다.
강철은 손흥석이 다음 내용을 적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하신 게 혹시 파일을 이진수로 바꾼 후 겹치는 0과 1을 별도로 저장하고, 그 위치를 따로 저장하는 방법입니까?”
그 말에 손흥석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직 수식을 전부 적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도 고민했던 부분이라서요. 그리고 해결책도 이미 만들었습니다.”
그 말에 손흥석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네?”
강철이 손흥석이 적은 수식에서 한 부분을 추가했다.
“여기 이 부분을 이렇게 수정하시면 흥석 씨가 고민하는 성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걸 다 알려드리면 우리 회사 기밀을 알려드리는 것이니까요.”
손흥석이 떨리는 눈동자로 강철이 적은 수식을 살폈다. 어지럽게 쓰인 수식이 눈을 통해 뇌로 들어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해결된다…….’
이렇게 하면 분명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러자.
손흥석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강철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그 뒤로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손흥석.
도시우.
송지안.
천준호의 소개로 새롭게 뽑은 이들이었다. 강철이 이들에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나인소프트와 딜리버리브라더스의 성능향상이었다.
위치 정보를 정확하게 측정하도록 해서 라이더들에게 정확한 길을 안내했고, 유우니 상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빠른 결제를 제공했다. UI나 UX도 더욱더 편하도록 개선했고, 추천시스템은 더 정교해졌다.
그건 더욱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는 유인이 되었고, 전염병 사태와 맞물리며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갔다.
* * *
비슷한 시각 미국 뉴욕.
마이클이 월스트리트의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에서 고기를 썰고 있었다.
“힘을 합치자.”
그 말에 상대가 냅킨으로 입술을 스윽 닦았다.
“우리한테 이득은?”
“순이익의 80%를 배당으로 지급할 거야.”
상대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사업이 잘됐을 때 이야기고, 위임장을 써줬을 때의 이익 말이야.”
“안 써주고 가만히 있으면? 너도 알잖아.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
“대산의 오프라인 사업은 계속 역성장 중이지. 거기에 새롭게 런칭한 빅트리의 사용자들 반응은? 그것만 보면 온라인 사업자 10위를 못 벗어날 것 같던데?”
“너희가 하면 잘할 수 있다.”
“물론.”
상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떻게? 너희 보스가 어떻게 대산 그룹을 발전시킬 건데.”
“너도 알잖아. 이 바닥 좁은 거. 그걸 전부 알려주면 안 되지.”
상대가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냅킨을 내려놓았다.
“그럼 뭘 믿고 위임장을 쓰란 말이야.”
“배당금.”
“…….”
“현재 경영진이 이사회를 잡고 있는 한 앞으로 배당금이 올라갈 여지는 없어. 너도 알잖아. 한국 재벌들이 주주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기 회사 피를 빨아먹는 해충.”
“맞아. 하지만 우리가 이사회를 장악하게 되면 최소한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주가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주주친화 정책을 펼칠 테니까. 그 첫 번째가 배당성향을 최대한 높이는 거고.”
“……하긴 사내 유보금이 많이 쌓여 있긴 해.”
“그래서 ROE는 계속 떨어지고만 있지. 딱히 투자하는 곳도 없으면서 자기자본만 늘리고 있으니까. 돈이 많은데 투자를 안 한다?”
“경영진의 무능.”
“그래. 이 정도면 미국에서 당장 소송감이었어.”
“하지만 거긴 한국이야. 너도 알다시피 엘리엇 펀드도 두손 두발 다 들고 나온 곳이라고.”
그 말에 마이클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달라.”
“……뭐?”
“엘리엇이 가졌던 지분은 불과 10%도 안 되지. 하지만 우리 펀드가 가진 지분만 해도…… 상당해.”
상대도 최근 대산 그룹 지분을 매입한 사모 펀드가 어딘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설마…… 리턴 펀드?”
마이클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라이트닝 펀드?”
마이클이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이내 상대의 입에서 마지막 남은 펀드의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마이클은 계속 부정하기만 했다.
그에 상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도대체 뭐야.”
“그 세 개다.”
“……뭐?”
마이클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건 그것만이 아니야.”
운용 규모만 5조 원이 넘어가는 칼스 펀드 직원인 상대도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는 숫자였다.
* * *
밤 11시.
강철이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모니터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와 현재까지 인수 한, 대산 그룹 지분이 쓰여 있었다.
-이강철 5%.
-사모 펀드 3사. 24%.
-우호지분 7%.
마이클 덕분에 미국에서 우호지분이 7%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확보된 지분은.
총 36%.
오너 일가가 가진 지분을 넘어선 것이다. 그걸 본 강철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진짜 대산 그룹을 인수할 수도 있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강철이 무의식적으로 엔터키를 눌렀다.
탁.
탁.
그럴 때마다 36%라 쓰인 숫자가 위로 올라갔다.
“오너 일가가 가진 지분이 30%. 거기에 각 계열사가 가진 대산 그룹 지분이 10%. 국민연금이 5%. 자사주 6%. 나머지는 소액 주주들인데…….”
국민연금은 아마 대산의 편일 것이다. 그건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소액주주 위임장.
지분교환.
1번은 자신의 이름을 외부로 알리는 게 최선이다. 그래야 대중들이 자신이 대산을 이끄는 게 이득이라 생각할 테니까.
엘리엇 펀드도 여론전에서 승리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2번은…….
“지분교환을 할 시기가 된 것인가.”
진용민이 했던 제안이 하나 있었다.
대산 그룹과 딜리버리브라더스, 그리고 나인소프트의 지분과 맞교환을 하자. 그걸로 자사주 6%를 전부 얻어낼 수 있다면 자신의 우호 지분은 42%로 올라간다.
“우리 쪽 지분은 최대한 적게, 상대 지분은 최대한 많게 해야 해.”
그걸 위해 직원을 새로 뽑고, 서비스들을 리뉴얼 했다. 그 효과는 다행히 이용자 수 증가로 나타나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다.”
화면에는 지금까지 강철이 인수 한 회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철은 키보드를 두드려 거기에 한 줄을 추가했다.
-㈜대산.
곧 자신의 회사가 될 이름을.
그런 생각으로 앞으로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중.
드르륵거리며 강철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신시아 밸라.]
알고리듬의 핵심 개발자였다.
“네. 신시아.”
-아직 잔 거 아니죠?
“깨어 있습니다.”
-서치에서 연락이 왔어요.
“……서치요?”
-우리 알고리즘에 관심이 있다고 하네요. 자사 ‘아이비디오’에 적용하고 싶다면서.
“좋은 소식이군요.”
-그래서 미팅을 하자는데 시간 돼요?
“화상 통화도 괜찮나요?”
-물론이에요. 변형 인풀루엔자 덕분에 오프라인 회의는 그들도 꺼릴 테니까.
“그럼 시간을 알려주면 준비할게요.”
-걔들은 최대한 빨리했으면 하는데…… 혹시 지금도 괜찮아요?
강철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그럼 서치 Meet 실행시키세요. 제가 비밀번호 보내드릴 테니까.
“네.”
* * *
비슷한 시각 미국 서치 본사.
그곳에서 아이비디오를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로버트 라이시가 브라우저를 켜며 중얼거렸다.
“거짓말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된단 말이야.”
“뭐가?”
“화질 손상 없이 20%나 압축이 됐어. 그 정도면 차기 서버 증설 계획을 백지화해도 될 정도의 수치란 말이지. 그런 걸 어떻게…….”
“이미 샘플 프로그램을 통해 확인했잖아. 작동은 정상적으로 되는걸.”
“결과물을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지.”
“하하, 또 그놈의 의심병이 도졌구나. 곧 회의니까. 회의해 보면 알겠지.”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이 분할되며 회의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고 있었다.
로버트가 앞에 놓여 있던 마이크에 입을 댔다.
-아아, 들리십니까?
그러자 분할된 화면에서 오케이 표시가 나타났다.
-저는 아이비디오 담당자 로버트 라이시입니다. 먼저 각자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알고리듬 신시아 밸라예요.
-알고리듬 에드워드 브룩입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강철이 인사를 전했다.
-알고리듬 이강철입니다.
의외의 인물에 로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양인?’
얼핏 보기에 중국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로버트가 강철에게 말했다.
-신시아 님이 말씀하신 알고리듬 대표가…….
-네 접니다.
처음에는 동양인이 대표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더구나 라이트 알고리즘의 핵심 개발자라는 말도.
-신시아 님이 이강철 님에게 설명을 듣는 게 가장 좋을 거라 하시더군요. 에드워드 님은 설명이 조금 난해하고, 신시아 님은 100%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셔서요.
-아…… 그랬군요.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이내 강철의 얼굴이 사라지고 메모장이 하나 나타났다.
* * *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로버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가 하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로버트가 마이크에서 입을 떼고 옆자리 동료에게 물었다.
“저게 말이 되는 거야? 허프만 알고리즘은 최적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잖아.”
“파일을 0과1로 분해하고, 그 0과1의 연속된 개수와 위치를 별도로 저장해 인코딩/디코딩을 진행한다…….”
“개념적으로 허프만도 비슷한 원리를 따르고 있긴 하지만 개념만 비슷할 뿐이지 실제 구현상에서는 완전히 다르잖아.”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만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개념적으로는 가능할 수 있지만, 실제 구현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말하는 건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과 같았다.
1. 냉장고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넣는다.
3. 냉장고 문을 닫는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구현은 불가능했다. 로버트가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물었다.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합니다. 그러면 이걸 그쪽에서 구현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작동 여부는 샘플 앱을 통해 이미 검증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는 말이었다. 만약 검증되지 않았다면 회의는 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럼 설명해 줄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란 말씀입니까?
-네.
로버트가 이런 회의를 한 이유는 하나였다.
투자.
만약 저 알고리즘이 정말 괜찮은 것이라면 ‘알고리듬’ 인수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정보로는 인수를 결정하기 힘들었다.
그때.
상대편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혹시 설명이 더 필요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알고리즘이 괜찮다면 투자나 인수를 제안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셨군요. 아쉽지만 아직은 돈이 부족한 상황이 아니라서 제안을 하셔도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당장 디즈니 플러스, AT&T TV 등등 여러 군데에서 알고리듬 플랫폼 사용 계약을 맺어서요. 돈 걱정은 없는 상태입니다.
그 말에 로버트가 마른침을 삼켰다.
디즈니 플러스.
AT&T TV.
아직 넷플릭스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OTT(미디어 콘텐츠 서비스) 서비스였다.
이내 강철이 마이크에 대고 말을 이었다.
-우리 알고리즘 성능이 부족하다면 이들이 돈을 내면서 알고리듬 플랫폼을 사용하진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로버트도 더는 성능상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아직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일단 알겠습니다. 플랫폼 이용은 내부 회의를 한 번 더 거쳐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걸로 회의 마무리하겠습니다.
-네.
그 말을 끝으로 강철이 브라우저를 껐다.
벌써 한국은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강철의 얼굴에서는 피곤함을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자신이 보유한 회사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다음 날.
출근한 강철은 사내 게시판에 뜬 인사 공지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시 임원 인사 발표.
-이강철 CTO -> CTO, 온라인 사업 부문장 겸직.
-황희석 상무.
-온라인 사업 부문장 -> 대산 패션 기획실장.
‘결국, 발표가 났구나.’
진용민이 말한 대로 발표가 났다. 아마 황희석의 속에서 천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다…… 자업자득이지.’
그런 강철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리고 있었다.
정현진 : 축하드립니다. 온라인 사업 부문도 잘 이끌어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심기준 : 축하드립니다. CTO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규범 : 축하드립니다!!
…….
하진기 : 축하드립니다. 계속 올라가시는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과거의 인연에서부터 최근의 인연까지.
강철의 승진 소식에 끊임없이 연락해 온 것이다.
그런 강철과 반대로.
황희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갈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회사에 해준 게 얼만데 이런 식으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꽉 깨문 입술에서 살짝 피가 비칠 정도였다.
뒤늦게 인사 관련 사실을 알게 된 비서가 상무실로 들어왔다.
“상무님…….”
비서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는 황희석의 사람이다. 황희석이 좌천당하면 비서 역시 좌천당하는 것이다.
“걱정 마. 내가 여기 아니면 갈 곳 없는 것도 아니고. 패션에서 성과를 내면 다시 본사로 돌아올 수도 있어.”
황희석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서의 생각은 달랐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강철이 사내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서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런 그들에게 인사팀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인사팀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무님. 자리 정리는 언제쯤…….”
“불난 집에 부채질하냐?”
“죄, 죄송합니다.”
“나가.”
“아, 알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인사팀 직원이 물러났다. 황희석은 새삼 자신이 어떤 위치가 됐는지 실감이 났다.
‘예전에는 감히 눈도 못 마주치던 것들이…….’
자신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다.
물론 인사팀 직원은 최대한 예우를 갖췄다. 하지만 황희석의 피해의식이 섞여 그렇게 생각한 것뿐이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비난의 화살이 한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는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패션에서 성과를 내고 다시 돌아온다.’
사내 정치질만으로 온라인 사업 부문장까지 올라간 건 아니었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결코 등기이사가 되지 못했으리라.
고민하던 황희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아직 이 회사에는 자신의 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차학윤 대표 이사.
함께 등기이사까지 올라간 호형호제하는 인물이었다.
그도 이강철의 급속한 성장이 달갑지만은 않으리라.
* * *
그런 황희석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너무 빠른 것 같긴 해.”
차학윤 역시 이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아직 매출로 찍힌 성과에 비해 승진이 너무 빠릅니다. 마치 최근 유행하는 PDR(rice to dream ratio) 주식처럼 꿈과 비전에 너무 큰 무게 중심을 두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매출이 얼만데 이런 식으로…… 너무 아쉽습니다.”
차학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얼마나 성과를 냈는지 잘 알지.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일단 패션 가서 열심히 하고 있어.”
살짝 고개를 숙인 황희석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차학윤은 회사의 2인자다. 그리고 명예회장의 복심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움직인다면 분명 변화가 생길 것이다.
* * *
진용민의 집무실.
그가 서류 하나를 앞에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건너편에 앉아 있는 전략기획실장 이철휘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대산 지분교환 건
보고서는 얼마 전 강철이 보낸 지분교환 관련 상세 조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걸 본 진용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객관적인 자료만 봐서는 타당한 의견이다. 그게 기획실의 판단인가?”
진용민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최근 퍼진 전염병 때문에 마트나 백화점이 역성장하고 있습니다. 빅트리도 아직은 기대 이하고요. 반면에 이강철 부문장이 소유한 기업들의 성장성은 가파릅니다. 시장에서 각 회사에 부여하는 멀티플 차이만 2배가 나니까요.”
멀티플.
일종의 기대치로 딜리버리브라더스나 유우니 상점이 20배를 받지만 대산은 10배도 되지 않았다. 배수가 낮을수록 성장성이 없는 산업이라는 뜻이었다.
대산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강철의 회사보다 낮다는 뜻이기도 했다.
“흠…….”
“당장 현재 가치만 따진다면 약간 과한 면이 있긴 합니다. 대산 그룹 지분 6%가 현재 주가 기준으로 800억가량인데 사실 신생 스타트업의 기업 가치는 귀에 걸면 귀고리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면이 있으니까요.”
진용민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서류를 뒤적거렸다.
-딜리버리브라더스 기업가치 : 5,000억.
-나인소프트 기업가치 : 5,000억.
기업 평가를 진행한 곳은 국내 유수의 회계, 법무 법인이었다.
런데도 두 회사를 합쳐 1조 원의 가치가 나왔다. 이걸로만 본다면 오히려 대산 그룹의 지분을 더 넘겨줘야 한다.
이철휘가 재빨리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평가에서 딱히 문제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이 두 곳은 다른 스타트업들과 달리 실제 이익이 발생하고 있어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용민은 좀 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대산이 어쩌다 이런 취급을 받게 됐을까. 스타트업과 비슷한 평가라…….”
“…….”
이철휘가 조용히 하고 있자, 진용민이 다시 물었다.
“자네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말해봐.”
이철휘는 평소 생각하던 바를 꺼내 들었다.
“제 생각에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봅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유통의 본질은 좋은 물건을 더 빠르고, 값싸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초창기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마트가 그 역할을 담당했고, 이제는 온라인 쇼핑이 그걸 해내고 있습니다.”
“마트는 그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네.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라는 본질은 잃어버린 채 체험 공간, 놀이 공간, 가족들의 나들이 공간으로 곁가지를 치고 있으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철휘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미국의 월마트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온라인 사업 부문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그래서 온라인으로 주문, 각 매장에서 픽업해 가는 서비스로 나일의 공세를 막아냈고요.”
진용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한국 실정에 맞지 않아 폐기된 기획안이지 않은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와 비슷하게 대산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더 좋은 물건을 더 싸게. 그러기 위해서는 온라인 필수조건이고요.”
“그래서 대산 닷컴 리뉴얼을 진행했고, 대산 3.0 프로젝트도 하고 있는데…….”
“조금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미 대산을 향하던 트래픽이 쿠키나, 유우니 상점 같은 온라인 플랫폼으로 넘어가 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대기업의 장점은 강력한 자본력입니다.”
“늦었지만 늦지 않았다. 뭐 그런 말인가?”
“제대로만 한다면 늦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쿠키는 물주인 손정수 회장이 타격을 입어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고, 2위 사업자인 디커버리는 오픈 마켓 중심이니까요. 나머지 사업자들이야 다 고만고만하니 제대로만 한다면…… 금세 제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용민이 소파 손잡이를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진용민을 보며 이철휘가 말을 이었다.
“다시 본 의제로 돌아와서 개인적으로 이번 제안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강철 부문장이 지금껏 해온 일들을 보면 분명 대산의 발전에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회사와 지분교환을 통해 그와 대산의 결속력을 한층 더 강화한다면 그가 대산을 떠날 확률은 더 낮아지고 종국적으로 회사에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올 겁니다.”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는 뜻이군.”
“회사에 다니면서도 회사를 만들어낸 사람이니까요. 사실 이제는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왜 계속 대산을 다니지? 그냥 자기 사업해도 되지 않나?”
진용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왜?
왜 아직 대산을 다니고 있을 것일까. 여기서 CTO나 부문장을 하는 것 보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게 더 좋아 보이는데…….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막연히 ‘책임감’이나 자신과의 관계 때문이라 추측할 뿐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재벌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아마 내년 재계약 때는 먼저 회사를 나가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 때문에 강철을 빠르게 승진시켜 준 면도 있었다.
생각을 마친 진용민이 입을 열었다.
“알았네. 조금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지.”
“알겠습니다.”
이내 이철휘가 집무실을 빠져나갔고,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온라인 부문장.
그 자리는 대산 그룹의 3대 핵심 부서였다. 그만큼 알아야 할 일이 많았다.
“마케팅팀 업무보고 드리겠습니다. 현재 빅트리 마케팅의 핵심은 ‘바로 배송’입니다. 쿠키의 당일 배송을 이길 수 있는 대산의 서비스로 시간대를 정해 상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 마케팅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대산 마케팅팀장 차지철의 보고에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온라인 부문장이라니…….’
분명 자신과 함께 입사했던 입사 동기였다. 신입사원 OT에서는 같은 조로 활동했기에 더더욱 이강철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오판이었다.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박인영은 두 눈을 쓱쓱 비볐다. 하지만 자신이 보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역시 능력이 엄청났었어.’
최근에는 진선미와 염문설까지 퍼지고 있었다. 왜 자신을 거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상으로 보고 마칩니다.”
차지철의 말에 박인영이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이곳은 공식적으로 새로운 온라인 부문장에게 업무보고를 하는 곳이었다.
함부로 딴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다 들은 거죠?”
“네. 꼭 알아야 할 사항은 끝입니다.”
“휴우…… 생각보다 알아야 할 게 많네요. CTO는 새로운 자리라 그저 제 마음대로 하면 되는 거였지만 온라인 부문은 기존에 추진하던 일들이 있으니…….”
그 말에 각 팀의 팀장들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하, 저희가 최대한 보좌하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맞습니다. 부문장님께서는 큰 방향성만 제시해 주시면 됩니다. 아마 잘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과거에는 만나기도 힘든 회사의 실무자들이 너도나도 칭찬 세례를 늘어놓았다. CTO가 되었을 때도 겪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제 회사의 실권자가 됐다는 뜻인가…….’
사실 CTO는 직급만 높았지 실질적인 권한은 크게 없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예산도, 인력도 기존의 인프라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온라인 부문장은 다르다.
인사.
자금.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동시에 휘두를 수 있는 자리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강철은 그걸로 회의를 마무리했다. 그런 그의 눈이 잠시 박인영을 향했다.
지금까지 마주칠 일이 없었건만, 업무보고에서 갑작스레 마주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제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성과와 능력에 따라 객관적으로 평가할 준비가 된 것이다.
박인영을 스친 시선이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럼 회의 마무리합시다.”
강철의 말에 회사의 주요 실무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질적인 리더가 된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고.
몇 가지 업무를 더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강철이 해야 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비서의 말에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동만 명예회장.
온라인 부문장이 되면서 그와 저녁 약속이 잡힌 탓이었다.
“약속 장소는 진 명예회장님의 집으로 잡혔습니다. 치료제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변형 인플루엔자가 어떤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며.”
“네.”
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로 지하주차장을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운전기사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강철은 바로 올라탔고, 차는 빠르게 진동만의 집이 있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 * *
한남동 진동만의 집.
그곳의 깊숙한 곳에 진동만의 서재가 있었다. 그 서재에 진용민과 진선미가 앉아 있었다.
“겨우 1년 만에 온라인 부문장이라니. 너무 빠른 것 아니냐?”
“예기치 못한 전염병 때문에 마트, 백화점이 역성장 중입니다. 성장할 사업은 온라인밖에 없는데 그걸 잘 관리 할 사람이라 판단했습니다.”
“그래도 황 상무가 지금까지 회사에 해온 게 얼만데.”
진용민이 한층 더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장에서 전사자를 계속 끌고 가다간 부대가 전멸합니다. 지금 경영환경은 전시상황이나 다름없습니다.”
“흠…….”
고심하던 진동만이 진선미를 보며 말했다.
“네 생각은?”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대산 내에서의 실적만이 아니라 밖에서 하는 사람들을 보면 충분히 역량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온이라는 회사가 이강철 그 녀석 것이라고?”
“네.”
그 대답에 진동만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놈 그거. 알면 알수록 물건이야. 어떻게 회사에 다니면서 회사를 차릴 생각을 했지.”
그 대답은 진용민이 했다.
“그보다 신기한 건 손을 대는 것마다 성공한다는 겁니다. 배달업체, 온라인 쇼핑몰, 헬스 서비스, 게임까지. 마치 미다스의 손처럼 그가 손댄 건 전부 성공했습니다.”
“그건 나도 들었다. 더구나 임원이 되면서 회사 지분도 5% 매입했다지?”
진용민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쪽 회사와 지분교환 건이 성사되면 11%입니다.”
“그러면 대산 일가라 해도 무색하겠구나.”
그러면서 슬쩍 진선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 능력 있는 놈이 우리 대산의 사위로 들어와서 하는데…….”
진선미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마음이 조금 있었다. 그랬기에 한발 다가가 보기도 했지만 대차게 거절당했다.
아직 포기한 건 아니지만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싶진 않았다. 그랬기에 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이 차가 몇인지 아세요?”
“요즘 그 정도는 흠도 아니라고 하더라.”
“그거야 남자가 더 많을 때 이야기고요.”
마침 비서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이강철 CTO 도착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진동만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슬그머니 말을 흘렸다.
“누구든 대산에 도움이 될 만한 놈을 데려와. 그러면 너도 대산 일가가 될 자격이 있다.”
그 말에 진용민의 눈빛이 일변했다. 반대로 진선미의 표정은 밝아졌다.
자격이 있다.
즉 진동만 명예회장이 가진 지분을 나눠준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 * *
차학윤의 집무실.
그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렸다.
“걱정하지 말게. 명예회장님께 말해 놓았어. 오늘 만난다고 하셨으니 무슨 말씀이 있겠지.”
황희석이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혹시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몇 가지 말씀이 있긴 했지.”
하지만 황희석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었다.
-황 상무 요즘 어떤가?
-제 몫은 합니다.
-그걸로는 안 되는 거 잘 알지 않나.
-그럼…….
-추후 현상 유지는 맡길 순 있어도 신사업을 맡기긴 힘들어. 패션에서 또 다른 능력을 보여준다면 몰라도.
그 말에 차학윤도 차마 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신이 보기에도 황희석의 능력에 대한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황희석이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차학윤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생각 말게.”
“알겠습니다.”
“패션에서 잘하면 회장님께서도 다시 찾으실 거야. 물론 이강철의 능력이 생각보다 많이 부풀려 있어도 그럴 테고.”
“사실 이강철 그 녀석의 능력이 부풀려진 면이 있습니다. 매출액만 보면 지금까지 이강철이 일으킨 게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차학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희석의 말대로 지금까지 이강철이 만들어낸 매출은 얼마 되지 않는다.
추천시스템 : 적용 중.
대산 3.0 : 개발 중.
메인 프로젝트는 전부 개발 중이었고, 그전에 했던 일들은 대산 그룹에 갑작스럽게 생긴 전산 문제를 해결한 게 다였다. 그것만 가지고 그룹의 핵심 사업인 온라인 부문을 맡긴다는 것이 못 미더웠다.
“오늘 만나보신다고 했으니까. 끝나고 나면 말씀이 있을 거야. 회장님은 그런 분이니.”
고개를 끄덕인 황희석이 초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이강철이 명예회장님의 마음마저 사로잡는다면 더는 방법이 없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이 진동만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강철이 진동만이 내민 손을 맞잡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네.”
“다시 한번 보자고 했는데 그사이 또 승진했어.”
강철은 이번에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회사에 누가 되지 않도록 잘해보겠습니다.”
“하하, 그래. 자네라면 잘해낼 거로 생각해. 하지만…… 그게 또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프로그램 개발만 했다면 이건 사업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를 짜야 하니까.”
저 말 속에는 또 하나의 함의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사업을 어떻게 진행할 것이냐?
-당장 진행할 프로젝트가 있는가?
그런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강철은 그걸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래서 농촌 맛집이란 걸 해볼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온라인 부문장을 맡자마자 생각한 아이템입니다. 아마 명예회장님도 백원강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 프랜차이즈 하는 친구?”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옆에 있던 진용민과 진선미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이건 이들도 처음 듣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맞습니다. 최근 백원강 님이 모 방송사와 함께 농촌 맛집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합니다. 농촌에 있는 맛집을 찾아가 보고, 또 해당 지역의 특산물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그런 프로그램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에 구원투수로 등판할 생각입니다.”
점점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강철을 제외한 전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원투수?”
“이를테면 현재 강원도 감자가 풍년이라 냉장창고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대형 마트에서 비싼 값에 구매하고 있죠.”
“흠…….”
“그걸 전량 매입해 기업의 이미지를 끌어올리고, 해당 상품을 미끼로 다른 제품들을 판매하는 겁니다.”
“최근 백원강 대표가 대중들에게 주는 친근함이면 분명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부분이 있겠어.”
강철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는 아이템이었다.
‘미래에도 진용민이 출연해 대성공을 거둔다. 내가 해도 분명 성공할 거야.’
원래라면 진용민이 이 방송에 출연해야 한다.
하지만 강철은 자신이 직접 구원투수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 대산 그룹의 온라인 사업부문장이라는 이름을 알릴 것이다.
그래야 미래 경영권 분쟁이 생긴다 해도 여론이 자신의 편을 들어줄 테니까.
“이미지와 매출을 동시에 올릴 수 있을 겁니다.”
진동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담소가 오갔다. 그때마다 강철은 진동만을 흡족하게 만들었다.
그건 그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으하하하, 그래? 그런 적이 있었군.”
“역시 자네라면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흠…… 알았네. 고려해 보지.”
강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했다. 그가 얼마나 강철을 존중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강철은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백 년 묵은 능구렁이.
재계에 알려진 명예회장의 별명이었다. 그 별명을 강철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진동만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최근 우리 회사 지분을 5%나 인수했다고?”
“네. 대산의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니까요.”
“거기에 서로 지분 교환을 통해 6% 지분을 자네 회사 쪽으로 가져오려 한다고 들었네만…….”
“맞습니다.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렇군. 시너지 효과. 참 좋지. 나도 좋아하는 단어야. 그런데 말이야.”
강철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진동만을 보았다. 진동만이 슬쩍 진선미 쪽으로 시선을 던지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분을 11%나 가질 수 있는 건, 대산 일가가 된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일이란 말이지.”
“아…….”
“그리고 일가가 되면 시너지 효과도 더 크게 날 테고 말이야.”
일가가 돼라.
강철은 그 말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슬쩍 진선미를 보니 그녀의 귀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은은한 화장 속에 감춰진 표정에서는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강철의 시선은 차마 그 밑으로 향하진 못했다. 한껏 꾸민 드레스 복장이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바로 반대했지만, 이 자리에서 그랬다간 진동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
강철은 최대한 정제된 언어로 말했다.
“절 높이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진동만의 강철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 그래. 자네라면 난 언제나 환영이야.”
그 말에 진선미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 * *
자리가 마무리되고 얼마 후.
차에 타려는 강철을 진선미가 붙잡았다.
“혹시나 오해할까 하는 말인데 제가 부탁한 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진 전무님이 그런 걸 부탁할 성격은 아니니까요.”
“저보다 제 성격을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때로는 타인이 자신을 더 잘 아는 법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강철이 차에 타려 했다. 그런 강철을 진선미가 한 번 더 붙잡았다.
“아까 그 말 진심이에요?”
운전기사가 있었지만, 진선미는 거침이 없었다. 기사는 철저한 검증을 거쳐 선발되기 때문이었다.
“반반입니다.”
“그럼 그때보다 가능성이 생긴 거군요.”
“진 회장님 앞이니까요.”
“그럼 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강철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때와 대답이 같았을 겁니다.”
까득.
진선미가 이를 ‘앙’ 물었다.
자신이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CTO. 온라인 부문장.
그런 직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아이온.
강철이 소유한 회사 때문만도 아니었다. 강철과 그녀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만나면 만날수록…….’
12살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진선미가 살짝 고개를 털었다. 더 이상의 추태는 사양이었다.
“알겠어요.”
짧게 대답한 진선미가 몸을 휙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차에 탄 강철이 멍하니 차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우…… 쉽지 않군.’
대산을 먹겠다.
그런 본심을 숨긴 채 대화를 하려니 아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진동만은 노회할 대로 노회한 능구렁이 같은 인물이다. 자칫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자신의 야심을 알아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아마 그걸 알아내기 위해 장장 2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야.’
자신이 생각하기에 명예회장의 시험은 통과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분 교환도 아마 급물살을 탈것이다. 이제 6%의 지분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때.
강철의 핸드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혹시나 진씨 일가 사람일까. 재빨리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마이클 : 3% 추가 확보했습니다.
강철이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이클의 활약 덕분에 미국 자본의 12%를 확보했다. 그렇다면 총 47%의 지분이나 확보된 것이다.
경영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 * *
미국 서치 본사.
로버트 라이시가 모니터 앞에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다.
“20%에서 40% 사이라니…….”
지금까지 알고리듬 도입 검토를 해본 결과는 놀라웠다.
-압축률 20~40%.
이 정도 수치면 내년 서버 증설 계획에서 50%는 하지 않아도 트래픽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서버 증설에 100달러가 든다면 이 소프트웨어 도입에는 불과 30달러밖에 들지 않는다. 로버트의 말대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로버트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다.
“이건 무조건 인수해야 해.”
자신이 보기에 이 알고리즘은 ‘빅 테이블’ 그 이상의 파급효과를 가져올 만한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서치에서도 관련 내용을 개발할 수 있겠지만 언제?
AI, 머신러닝, 자율주행 등등.
이것 말고 서치가 집중해야 할 분야는 너무나도 많았다. 옆에 있던 동료가 그런 로버트에게 물었다.
“어때? 결론 내렸어?”
로버트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이건 인수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런데 가격이 문제야.”
“하하, 항상 그게 문제지. 네 생각에는 얼마쯤일 것 같은데?”
“인공지능랩도 4억 달러에 인수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싸야지.”
그러자 동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AT&T, 디즈니 플러스에서 매출이 일어나고 있는 스타트업이야.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까?”
“흠…… 그럼 한 10억 달러?”
“후후, 내 생각에는 그거보다 더 써야 할 것 같은데, 우리도 도입 검토를 할 정도잖아. 그러면 마이크로소프트나 애플에서도 관련 내용을 보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인수제안서가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듣자 로버트의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하긴 그렇겠지?”
“내가 볼 때는 최소한 우리가 5년간 서버 증설에 투입하기로 한 비용 정도는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40억 달러라…….”
이건 자신이 결정 내릴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로버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상사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