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도전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2)
진선미의 집무실.
비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이번 정기인사에서 CTO로 승진한다고 합니다.”
“CTO 직책은 없었잖아요.”
“이번 이사진 회의에서 신설했습니다. 그리고 진 회장님이 승진을 결정하셨고요. 인사팀에서 관련 계약을 검토 중이라 합니다.”
“결국, 진 회장 라인을 타기로 했다?”
“지난번 회의 때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마침 외주비용 절감 프로젝트도 마무리되고 있으니.”
진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생머리가 찰랑거리며 샴푸향을 풍겼다.
비서의 볼이 살짝 붉어졌으나 이내 사라졌다.
“알겠어요. 어차피 그 일이 마무리되면 아이온과의 계약서도 정식으로 작성해야 하니. 만날 이유가 충분하니.”
“지금 바로 호출할까요?”
“네.”
잠시 뒤.
강철이 진선미의 집무실로 올라왔다. 진선미가 환하게 웃으며 강철을 맞이했다. 강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진선미의 보조개가 살짝 파이며 싱그러운 미소를 흘렸다.
“비용 절감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되는 것 같고 이 이사 축하할 일도 있고. 겸사겸사. 바쁜데 괜히 부른 건 아니죠?”
강철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먼저 축하해요. CTO로 승진한 거. 회장님께서 이 이사 때문에 새로운 직책까지 만들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더라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선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강철을 보았다.
“진 회장님과 꽤 가까워졌겠어요.”
강철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평소와 다름없습니다.”
순간.
진선미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철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다니…….’
그런 생각에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진선미도 그런 강철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가 봐요?”
강철은 아예 웃어버렸다.
“하하, 네. 승진하고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되어 가고 있으니 좋을 수밖에요.”
진선미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었다.
“다른 이야기는 없었나요?”
다른 이야기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강철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진용민은 분명히 이 일에 대해 극비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몇 가지 일 이야기를 했습니다.”
몇 가지 일 이야기.
그 어감이 묘했다. 진선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데…….’
반응을 보아하니 쉽게 말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요? 이 이사 능력이면 회장님께서 간단한 일을 시키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
“네. 뭐.”
그 말을 끝으로 강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진선미가 그런 강철을 보며 말했다.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네.”
“추천시스템 발표 당시 명예회장님께 했던 말. 아직 변함없습니까?”
강철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변함없습니다.”
“흠…….”
이내 진선미가 강철 쪽으로 깊숙이 몸을 기울였다. 진한 향수 향이 확 밀려들었다.
그렇다고 불쾌감이 드는 건 아니었다. 기분을 좋게 하는 은은한 향이 코를 간지럽혔으니까.
“그러면 그 생각을 변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무님께서 보유한, 대산 그룹 지분을 전부 제게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당장 이 자리에서 쫓겨나리라.
이런 질문에는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면 안 된다.
강철은 빠르게 답했다.
“지금처럼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 빠른 반응에 진선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감한 질문이었을 텐데 반응이 아주 빠르군요. 마치 준비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러곤 지긋이 강철을 보았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여우긴 여우야.’
확실히 기술적 능력만 가진 건 아니었다.
자신과의 대화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은 걸 보면 임기응변이나 정치력도 뛰어나 보였고, 바깥에서 운영하는 회사들의 성장을 보면 미래에 대한 안목도 상당했다.
진선미가 그런 강철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럼 아직 결정한 건 아니라는 뜻이죠?”
이번에도 강철은 준비된 대답을 내놨다.
“그저 회사를 위해 일할 뿐입니다.”
이내 진선미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사실 이걸 보여주려고 만나자고 했어요.”
계약서.
㈜아이온 데이터 분석 용역 체결.
아이온에서 출시한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사용하겠다는 계약서였다.
“자세한 내용은 오 비서와 상의하면 될 거예요. 최대한 이 이사 쪽 조건에 맞추라고 했으니까. 무리한 요구 조건 아니면 통과될 겁니다.”
계약서를 받아든 강철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감사합니다.”
생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 * *
33.4%.
최종적으로 절감된 비용이었다. 30%를 3%나 초과하는 성과를 낸 것이다. 대산 그룹은 한 해 매출이 수십조에 이르는 기업이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비용만 해도 조 단위.
비용을 1% 절약하면 백억 단위의 돈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3%를 초과 달성했으니 직원들의 강철에 대한 신뢰도는 하늘을 찔렀다.
그럴수록 황희석의 표정은 굳어져만 갔다.
“그 정도야?”
최규범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실력이 정말 엄청납니다. NCS에서 특히 난이도가 높은 클라우드포메이션이라는 기능도 척척 사용하더라고요.”
황희석이 퉁명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나 어려운데?”
“NCS의 에반젤리스트들도 그 난이도가 너무 높아 커스터마이징에 대해 힘들어할 정도입니다.”
“NCS의 전문가들보다 낫다.”
최규범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허…….”
그 말을 들수록 황희석은 불안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강철 이사가 플랫폼 기업으로의 전환도 뚝딱 해낼 것 같았다.
그런 황희석을 보며 최규범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부문장님.”
“어, 말해봐.”
“앞으로 이강철 이사 동태 파악 일은 못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황희석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죄송합니다.”
“야! 너 회사 생활 이걸로 끝낼 거야?”
“그게 아니라 그래도 함께 일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해 보고한다는 게 마치 스파이 같기도 하고 해서…… 그냥 맡은 업무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황희석이 표정이 울긋불긋해졌다.
“너 이 새끼 지금…….”
최규범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인사 점수 주는 게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
현재 온라인 쇼핑 부문장은 황희석이다. 최규범 역시 온라인 쇼핑 소속이었다.
하지만 최규범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
“혹시나 이강철이 이 자리 차지할 거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더 상대했다가는 험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황희석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봐.”
최규범이 조용히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 황희석의 표정은 싸늘하기만 했다.
* * *
비슷한 시각.
강철은 반차를 쓰고, 청담 사무실에 있었다.
매월.
월 결산을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보고하는 첫 주자는 김봉수였다.
“시티 라이더 반응이 뜨겁습니다. 마케팅비를 맘껏 쓰라 하셔서 50억을 퍼부었더니 단숨에 앱스토어 10위권에 안착했고, 어제부로 일 매출 1억을 넘었습니다.”
강철이 살짝 놀란 기색으로 김봉수를 보았다.
‘시티 라이더 인기가 그 정도였나…….’
옛날에도 꽤 인기가 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앱스토어 10위까지 가지는 못했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게 주효했습니다. 화려한 그래픽 덕분에 게임 할 맛이 난다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이런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앱스토어 1등을 할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일 매출도 5억까지도 가능할 거라 봅니다. 1억까지 되는데 겨우 2주밖에 걸리지 않았으니까요.”
아주 가파른 성장세였다. 하긴 게임 조작 방식은 같지만, 디자인에서부터 마케팅 비용까지 전부 다르니 일견 이해되는 면이 있긴 했다.
“그럼 슬슬 라이즈 킹덤 준비를 해야겠군요.”
“네. 그런데 중국 진출을 하려면 판호(라이센스) 발급을 받아야 하는데 그건 어찌하시려고…….”
“그건 텐센트 측과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니 크게 무리는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 뒤로 아이체크를 담당하고 있는 송고은이 들어왔다.
송고은은 숫자를 가지고 설명했다.
다운로드 500만.
MAU(Monthly Activity User) 40%.
일반적인 앱의 경우 MAU는 10%가 채 되지 못한다. 좀 괜찮은 앱의 경우 MAU가 20%를 넘으니 40%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긍정적인 신호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월 가입자 증가율 10%.
매월 10%의 가입자 증가율을 보였다. 그런 수치가 나올 수 있는 이유를 송고은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알고리즘.
강철이 건네준 알고리즘.
이후 송고은은 그걸 계속 업데이트시키는 중이었다. 간혹 막힐 때면 강철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그렇게 앱의 성능이 점점 좋아지자 자동으로 사용자가 늘어났다.
보고를 마친 송고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미국 쪽에서 투자 제의가 왔습니다.”
“미국이요?”
“네. 테라펀드라고 세계적으로 꽤 유명한 곳입니다. 시간이 된다면 대표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알겠습니다. 일정 한번 잡아보죠.”
“네.”
그걸로 송고은의 보고가 마무리되었다.
이후.
딜리버리브라더스.
나인소프트.
각 계열사 사장이 차례로 강철에게 보고했다. 신선식품 배송과 배달 서비스 역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건 내년이었다.
변형 인플루엔자.
그게 중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강타한다. 다행히 기존 출시된 약 중 치료 효과가 나타나는 게 있어 3개월 만에 종식되지만, 그 여파는 한동안 사람들이 외출을 삼가게 하고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게 했다.
당연히 오프라인에 매장을 가지고 있는 대산 그룹 주가는 쉴 새 없이 폭락했다.
‘그전에 자금을 마련해 놓고, 그 자금으로 치료제가 발견되는 회사 주식을 사놓고 기다린다. 그리고 그때 대산 그룹 주식을 매수하면.’
빠르게 대산 그룹 지분을 늘릴 수 있었다. 강철이 기다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12월 초.
대산 그룹 정기인사가 있는 시즌이었다. 실적을 내지 못한 임직원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승진을 약속받은 직원은 잔뜩 설레는 날이기도 했다.
천준호가 잔뜩 기대감에 가득 차 마우스를 클릭했다.
달칵.
하지만 화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11231231. 보안 프로그램 설치 공지 조회수 : 1012.
11231230. 야근 수당 신청 방법 변경. 조회수 : 1911.
…….
“뜰 때가 됐는데.”
옆에 있던 윤찬민이 물었다.
“승진이요?”
“그래.”
“주임님 원래 내후년이잖아요.”
“성과 냈으니까.”
“에이, 아무리 그래도 1년이나 앞당겨 줄까.”
“혹시 또 모르지. 이강철 이사님처럼.”
“풉, 네?”
“……비웃냐?”
“그게 아니라. 비유가 좀 그렇잖아요. 이 이사님 능력이야. 넘사벽이잖아요.”
천준호가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쩝…… 그렇긴 하지.”
그러다 다시 마우스를 클릭해 보았다.
달칵.
그러자 화면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11231232. 정기 임원 인사. 조회 수 : 1.
임원 인사 공지가 먼저 올라온 것이다.
“임원 인사 올라왔네요.”
“올해는 누가 옷 벗을지 한번 볼까…….”
그냥 호기심에 한번 클릭해 보았다. 그리고 천준호는 꿀꺽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CTO 승진]
이강철 CTO
-추천시스템, 외주비용 절감, 사내 해킹 등 사내 IT 분야 전문가로서 그룹의 경쟁력 강화 기여.
추신 : CTO는 신설된 직책으로 대산 그룹 IT 부문을 총괄한다.
놀란 천준호가 중얼거렸다.
“이분은…… 1년에 승진을 몇 번 하는 거냐.”
옆에 있던 윤찬민도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