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싹이 터서 꽃이 피다(2)
강철의 집.
이희진과 엄마 최용희가 바닥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뭐야, 엄마는 뭐 들은 거 있어?”
“아니. 무조건 빨리 집에 오라던데.”
갑자기 벌어진 일에 최용희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희진의 표정도 그리 밝진 않았다.
“뭐지. 사람 불안하게 무슨 말을 하려고.”
“혹시…….”
“혹시 뭐?”
“이놈 자식. 회사 그만둔다는 거 아냐?”
“벌써? 오빠 회사 잘 다니고 있었잖아.”
“요즘 매일 같이 야근하고, 집에 와서도 쉬지 못하고 일하고 또 일하고. 주말에도 또 일하다가.”
“제풀에 지쳤다?”
최용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하긴 너무 고생하는 것 같긴 하더라. 그런데…… 오빠 그만두면 어쩌지? 아직 집에 빚도 남아 있는데…… 내년이면 빚 갚고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1억에 30.
현재 강철이 사는 집이었다.
오래된 다가구 주택이라 조금만 신경을 안 써도 집에서는 곰팡이가 폈고, 방음이 되지 않아 밤마다 고성방가하는 주민들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최용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네 오빠 건강 해치면서까지 계속 다니라고 할 순 없잖아.”
이희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그거야 그렇지만…… 오빠가 조금만 고생하면…….”
“그만. 강철이도 아르바이트하면서 학비 대고, 학자금 대출받아서 알아서 갚고, 고생할 만큼 했다. 고생하려면 엄마가 해야지.”
그 말에 이희진의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이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왜 더 고생해. 지금도 엄청 힘들잖아! 밤마다 아파서 끙끙대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하지만 최용희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이년아 엄마 괜찮아. 그리고 내 새끼들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아, 엄마! 그러지 말라고 엄마 더 일하다간 진짜 큰일 나.”
결국, 이희진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빠가 조금만 고생하면 될 텐데. 남들은 다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에 들어가서 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나오려는 걸까.
원망하는 마음이 피어났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강철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넌 또 왜 울고.”
그 모습을 본 이희진이 빽 소리쳤다.
“오빠가 일해. 엄마 말고 오빠가 일하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일하고 있잖아.”
“엄마 관절 아파서 매일 파스 붙이는 거 몰라? 돈 아낀다고 병원도 안 가는 거 모르냐고. 그런데 그거 조금 힘들다고 회사를 때려치워? 아니 못 때려치워 사표 낼 거면 집에서도 나가!”
그 말에 강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때려치우긴 누가 때려치워. 너 뭐 잘못 먹었냐.”
“오빠 회사 그만둔다고 모이라고 한 거 아니었어?”
그 한마디에 강철은 작금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스르륵 입꼬리를 올린 강철이 동생을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회사를 때려치울 거로 생각하고 모이라고 했다는 거로 오해했다는 말이지. 그리고 나한테 소리를 지른 거고.”
이희진이 벌떡 일어나 기린처럼 목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당당하게 답했다.
“그, 그렇다 왜!”
“듣자 듣자 하니 어이가 없네. 오빠를 그 정도로밖에 생각 안 했다는 말이지. 따라 나와봐.”
“……뭐?”
“엄마도 잠깐 나와봐. 같이 갈 데가 있으니까.”
“강철아. 갑자기 어딜 가자고…….”
“글쎄 나와보면 알아. 자, 다들 이리로 오세요.”
그리고 밖으로 나온 이희진과 최용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사와 함께 벤츠가 한 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다 뭐니.”
“오빠? 갑자기 무슨 일이야.”
강철이 팔을 쑥 내밀며 최용희에게 말했다.
“사모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기 뒷좌석으로 타시지요.”
그리고 동생 이희진을 보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넌 버스 타고 와. 목적지는 제일 호텔. 거기로 와서 전화해.”
그러고는 정말 문을 닫곤 차에 시동을 걸었다. 당황한 이희진이 급히 검은색으로 선팅된 차 문을 두드렸다.
“오빠, 오, 오빠!”
지이잉.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강철이 개구쟁이처럼 말했다.
“나처럼 책임감 없는 오빠는 왜 자꾸 찾는데?”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런데 이게 진짜 무슨 일이야. 어?”
“할 말 없으면 문 닫는다.”
다시 지이잉.
창문이 닫혔다.
“아, 알았어. 미, 미안! 내가 잘못했어. 사과한다고.”
다시 창문이 열리고 강철이 물었다.
“소원권 30장. 라면 끓이라면 끓이고, 청소하라면 하고 오키?”
이희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차 문이 열렸다.
이희진까지 타고 나서야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여전히 어리둥절한 최용희가 물었다.
“강철아.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니?”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난 거지. 이제 먹고살 걱정은 하지 마. 당장 내일부터 식당도 나가지 말고.”
“뭐, 뭐라고?”
강철이 백미러로 이희진을 보며 말했다.
“너도 내일부터 알바 그만두고 공부에 전념해. 나머지는 오빠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으, 응?”
“두 모녀 제가 제대로 책임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오빠, 로또라도 된 거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가 되게 말을 해봐.”
강철이 간략하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이 회사에 다니며 스타트업을 하나 발굴했고, 그게 대박 나서 큰돈을 벌었다.
그 말이 끝나고.
이번에는 최용희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자신이 돈을 벌어봐서 안다. 큰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고된 일인지.
그간 자식이 했을 고생에 최용희의 가슴이 미어졌다. 못난 어미 밑에서 고생만 시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그랬구나. 정말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강철이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걱정하지 마시고, 앞으로 즐겁게 살 생각만 하세요.”
그사이에도 차는 도심을 가로질러 제일 호텔로 빠르게 움직였다.
* * *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강철은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누웠다.
“으으, 배부르다.”
호텔에서 든든히 뷔페를 먹었더니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
그저 위만 부른 건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주식의 절반을 넘기고, 60억을 받았다.
이것저것 세금을 떼고도 수십억이 통장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근처에 새 아파트 하나 사고, 꼬마 빌딩을 사고도 돈이 남겠어. 더구나 아직 60억이 더 들어와야 하니까. 그 정도면 평생 놀고먹어도 돈이 남겠는데.”
전생에서는 만져본 적도 없는 돈이 통장에 들어오자, 절로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강철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이희진이 들어왔다.
“오빵~”
강철이 팍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이게 어디서 코맹맹이 소리야.”
“히히, 오빠 그런데 나 정말 아르바이트 그만둬도 돼? 오빠가 나 학비 줄 거야?”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앞으로 용돈도 줄게. 매달 50이면 되지?”
그러자 이희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50이나 준다고? 진짜?”
“너무 많나. 그럼 30으로 줄이든가.”
그러자 이희진이 급히 강철의 어깨를 마사지했다.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무 좋다는 거지.”
“이제부터 공부만 신경 써. 오빠가 서포트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방학 때는 어학연수도 다니고, 친구들이랑 유럽 배낭여행도 좀 다녀오고.”
이희진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저, 정말?”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 이참에 엄마랑 다 같이 가족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아버지 돌아가신 이후에 한 번도 못 갔잖아.”
“그럼 당연히 좋은데 오빠 회사는? 그렇게 막 쉬어도 돼?”
“아, 맞다 회사…….”
“회사도 그만둘 정도로 큰돈이 생긴 거야?”
“그건 차차 말해줄 테니까. 너무 깊게 파고들진 말고. 볼일 끝났으면 나가봐. 오빠 생각할 게 좀 있으니까.”
“과일 좀 깎아줄까?”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과.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로. 저번에 보니까. 너 사과를 너무 크게 자르더라.”
“이게…….”
소리를 지르려던 이희진이 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호호, 진짜 오빠밖에 없다. 빨리 깎아 올게.”
이희진이 나가고, 강철이 책상에 앉아 종이에 두 가지 선택지를 써보았다.
1. 회사를 계속 다닌다.
2. 바로 그만둔다.
두 개의 선택지를 놓고 장단점을 나열해 보았다.
‘1의 장점은…….’
고민하고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럼 단점은.’
이번에는 단점을 고민해 보았다. 이번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때 되면 월급 주고, 이번 프로젝트만 잘 마무리하면 올해 과장을 시켜준다고 했고, 회사 생활에도 딱히 불만도 없고…….’
과거와 달리 회사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부 알고 있으니 회사 일이 편하기만 했다.
핵심인재에 편입된 이후로는 뭐랄까. 회사가 아니라 그냥 놀러 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만 내 사업을 못 한다는 게 문제인데…… 하긴 그것도 아이온을 통해 해결하고 있긴 하잖아. 아이온…… 아이온이라…….’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강철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하긴 이제 아이온 밑에 김봉수 사장이 올 테니, 아이체크도 아이온 밑으로 편입시키고 또 다른 스타트업들도 아이온 밑으로 편입시키면…….’
아이온이 지주 회사가 되어 그 밑에 계열사를 거느린 거대 기업 집단이 될 수도 있었다. 과거 시대를 풍미했던 ‘그린 모바일’처럼.
그린 모바일.
140여 개의 스타트업을 흡수합병하며 빠르게 외형 성장을 하지만, 수익 사업이 없어 결국 자멸하게 되는 회사였다.
‘난 어차피 수익이 확실한 알짜 스타트업만 흡수합병할 테니까. 실패할 일은 없겠지.’
생각하다 보니 더는 회사에 다닐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차라리 회사를 나와 내 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전생의 트라우마가 강철을 붙잡았지만 120억이라는 든든한 잔고는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 * *
회의실.
김정민이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하진기의 표정도 그에 못지않았다.
“진짜 면접 보러 간 건 아니겠죠?”
“본인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렇겠지.”
“강철이 없으면 이 프로젝트 마무리 안 됐는데…….”
“그런 일 없을 거야. 핵심인재 선정까지 됐는데 갑자기 회사 그만두진 않겠지.”
“그럼 왜 휴가를 냈지. 로또를 맞았나……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휴가라니.”
“뭐, 오늘 와보면 알겠지.”
그때.
똑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강철입니다.”
“어, 왔어.”
“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진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건 김정민도 마찬가지였다.
“……너 설마.”
“……뭐, 뭔데.”
둘은 동시에 강철이 하려는 말을 직감했다.
“이직은 아닙니다.”
“휴우…….”
“휴우.”
다행히 자신들의 예측이 틀렸다. 이번에는 둘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퇴사를 하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뭐!?”
“가, 강철아.”
“물론 이번 프로젝트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이거 잘 마무리되면 나가려고요.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
“…….”
결국, 둘은 할 말을 잃고 강철을 바라보았다.
* * *
강철은 그간의 상황을 대략 설명했다.
-주식에 투자를 좀 했다.
-그게 초대박이 났다.
-그걸 기반으로 내 사업을 해볼 생각이다.
사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야기가 너무 교묘했기 때문인지 둘은 의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하진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보니 거의 마음을 정한 것 같은데.”
“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어. 다만 너무 빨리 와서 아쉬울 뿐이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마음 뜬 사람 붙잡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는 법이야. 대리, 아, 아니, 과장으로 승진된다 해도 힘들겠지?”
과장.
직급은 두 단계나 올라가고, 월급도 현재보다 배는 늘어날 것이다.
더 큰 딜을 성사시킨 후여서일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네. 뭐.”
김정민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사장하겠다는 놈인데 대산 과장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부장시켜 준다고 해도 안 하겠어요. 최소 임원 자리 정도 턱 던져주면 모를까.”
임원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자리였다. 그리고 불가능한 자리이기도 했다.
어느 누가 입사한 지 1년도 안 되는 신입에 임원 자리를 준단 말인가. 특히나 대산 같은 대기업에서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임원이면 뭐. 한번 고민해 보겠지만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강철이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하진기가 묵묵히 강철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까지는 해준다고 말해주니까. 안심은 되는구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해주면 좋겠는데.”
“네.”
“절대 다른 팀원들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한다. 괜히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팀 분위기를 해칠 수도 있고.”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
“휴우…… 아쉽지만 할 수 없지. 위에는 내가 말해놓으마.”
“네.”
그걸로 퇴사 면담은 마무리되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일 주.
이 주.
삼 주.
사 주.
그사이에 강철은 틈틈이 퇴사 후를 준비했다.
투자 회사 리스트를 정리하고, 김봉수에게 게임 기획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아이온’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여러 고민을 해보았다.
1. 게임개발 전문회사.
2. 투자 전문회사.
3. 데이터 분석 서비스 제공 회사.
4. AI 개발 회사.
1번은 김봉수를 주축으로 진행하면 된다. 굳이 자신이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2번은 한계가 명확했다. 기업이란 영속적이어야 하는데 자신의 미래 지식으로 투자할 대상은 몇 개 기업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3번.
3번은 조금 흥미가 생겼다. 현재 회사에서 하는 일이기도 했고, 클라우데라나 호튼웍스 같은 성공 모델도 이미 존재하니까.
4번은 아직 자신의 실력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일단 3번을 거치고 가야 하는 길이었다.
일단 3번으로 하자.
그 정도로 계획을 세우고 나자 어느새 발표일이 되었다.
강철은 팀원들과 함께 대산 그룹 본사를 찾았다.
발표장소는 대강당.
2, 300여 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장소가 이곳인 이유가 있었다.
-임직원 여러분들을 추천시스템 발표회에 초대합니다.
-관심 있는 직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이번 발표가 소수 임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임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발표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앞으로 회사가 어디에 역량을 쏟을지 보여주는 조치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많은 직원이 참가해 강당을 메웠다.
강당 뒤편.
한쪽에 마련된 관계자실에서 김정민이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강철을 보았다.
“사람 진짜 많이 왔어. 잘할 수 있지?”
“네.”
“내가 알아보니까. 네 말대로 저쪽도 목표 달성에는 실패한 것 같더라. 대충 사정을 들어보면 그래.”
“아마 그럴 겁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세부적인 수치까지는 확인을 못 했어. 거기 새로운 팀장이랑 윗사람 몇 명밖에 모르는 모양이야.”
강철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큰 의미가 있진 않을 겁니다.”
“그래, 그러면 다행인데…… 만약 여기서 밀리게 되면 진짜 팀을 해체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강철의 뒤편으로 주르륵 앉아 있던 다른 팀원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자 천준호가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뭐, 최선을 다하고도 그 정도밖에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어쨌든 우리는 최선을 다했잖아.”
유혜인이 입술을 잘근 씹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회사는 최선이 아니라 최고의 결과를 내야 하는 곳이에요. 천 주임도 잘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요.”
“아, 물론 전 최고의 결과를 냈습니다. 유 대리님이 낸 알고리즘을 코드로 완벽하게 구현했으니까요. 그러니까 결과가 나쁘면 제 탓이 아니라는 거죠.”
“뭐에요?”
“그렇잖아요. 위에서 만들어준 알고리즘을 구현한 것뿐이니까. 성과물의 가장 큰 책임은요 대리님이 지시는 거잖아요.”
“천 주임이 일을 제대로 했다고요? 지난번 알려준 데이터 파이프라인에 문제가 있어서 한동안 가비지 데이터로 테스트했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래서 알고리즘 개발이 늦어진 거잖아요.”
이번에는 천준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문제는 자신의 실수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는 강철이 절레 고개를 저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거렸다. 왜 천준호가 동료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았는지 매일 새롭게 알 수 있었다.
강철이 천준호를 보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천 주임님 코드 최적화에 문제가 있어서 시스템 성능 떨어뜨리신 것 기억나시죠?”
“야, 그거야…….”
이내 시선을 돌려 유혜인을 보았다.
“유 대리님도 알고리즘에 잘못된 수식을 적어 개발팀에 혼란을 일으킨 건도 있고요.”
“이, 이 주임. 그건…….”
“그러니까 두 분 쌤쌤입니다. 이제 발표예요. 그만 싸우시라는 말입니다.”
유혜인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휙 돌려 버렸고, 천준호는 애꿎은 음료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때.
벌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인사나 하려고 왔는데 이거 내가 때를 잘못 찾았나 봐.”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현진 팀장이었다. 그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김 과장이 고생 많겠어. 저런 친구들 데리고 일 꾸려 나가려면.”
“하하, 아닙니다. 다들 잘해줘서.”
쭉 팀원들을 훑은 정현진의 시선이 강철에게서 멈췄다.
“자네군. 이번 프로젝트의 주축 신입이라는 사람이.”
“네. 이강철입니다.”
“하하, 이력서를 봤더니 스펙이 뭐…… 앞으로 노력을 많이 해야겠더군.”
강철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다 성공하면 여기 실패한 사람이 없을 거야.”
그때.
어디선가 피식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그나마 열심히라도 안 하는 누군가가 할 말은 아닌데…… 개발의 ‘개’ 자도 몰라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정현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천준호와 시선을 마주하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너도 여기 있었구나. 여전히 말하는 태도가 영…….”
“보아하니 팀장님은 이번에도 정치력만 올리셨나 봅니다.”
정현진의 볼살이 푸들거리며 떨렸다.
“내 분명 경고했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전에 나가드릴 테니.”
거친 콧김을 뿜어내던 정현진이 휙 몸을 돌리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천준호를 향했고,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전 팀장님인데 보다시피 사이가 안 좋아. 별다른 능력도 없는데 잔소리만 오지게 하더라고.”
김정민이 뻘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잔소리한 적 없다.”
“하하, 물론입니다. 그래서 제가 과장님을 참 좋아해요. 누구랑 달리.”
유혜인이 눈을 흘기며 막 입을 떼려 할 때 강철이 ‘짝’ 손뼉을 치며 나섰다.
“자, 마지막으로 마무리합시다. 이제 곧 나가야 해요.”
* * *
자리에 앉아 있던 진선미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옆으로 검은색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진용민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진용민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회사 중점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봐야지.”
“네.”
“어때?”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어차피 결과가 중요한 건 알고 있으리라 믿어.”
“네.”
진용민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황희석 상무에게 물었다.
“자네가 준비시킨 팀은?”
“결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진용민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래. 아주 좋아.”
잠시 후.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끝나고, 먼저 황희석이 준비시킨 팀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십니까. 발표자 최수철입니다. 지금부터 대산 추천시스템 PoC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PPT가 넘어가며 설명이 이어졌다.
“저희가 사용한 건 CF 모델링입니다. 해당 알고리즘은 추천시스템에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모델로 해당 알고리즘이 작동하는 방식은…….”
상세한 수식 이야기가 나올 때는 고개를 꾸벅이며 조는 직원들도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해당 시스템의 성능 도표가 화면에 나타났다.
-구매율 : 9%.
-매출 예측 오차 : 18%.
물론 해당 시스템을 대산 닷컴이나 백화점에 적용하여 만들어낸 결과는 아니었다. 과거 구매 기록으로 만들어 낸 결과였다.
실제 시스템에 적용하면 더 낮아질 거라는 걸 알기에 진용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기대했던 것 이하였기 때문이었다.
옆에 있던 황희석이 황급히 입을 놀렸다.
“중요한 건 추세입니다. 개발하면 할수록 절대적인 수치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겨우 2달간 개발한 것 치고는 엄청난 결과입니다.”
옆에 있던 진선미가 입꼬리를 올리며 진용민의 말을 가로챘다.
“그건 다음 발표 내용을 보면 알게 되겠죠.”
황희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내.
최수철이 단상에서 내려가고, 강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안녕하십니까. 대산 D&S 이강철 주임입니다. 대산 추천시스템 PoC 결과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발표 내용은 조금 전 최수철과 비슷했지만, 그 순서가 조금 달랐다. 첫 장에 발표 결과가 나와 있었다.
-구매율 : 15%.
-매출 예측 오차 : 15%.
두 가지 수치 모두 앞 팀을 앞서고 있었다.
그 수치에 황희석의 두 눈이 벌떡 떠졌고, 진용민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강철을 바라보았다.
강철이 들고 있던 리모컨을 눌렀다. 그러자 화면이 넘어가며 그래프가 하나 나타났다.
“보시면 최초 9%에서 시작해 조금씩이지만 성능이 개선되고 있는 게 보일 겁니다. 이 추세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앞으로 1년 이내 구매율 30%, 오차율 5% 이내까지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
그러자 또 화면이 넘어갔다.
“그럼 어떻게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철의 태도에는 거침이 없었다. 바로 앞에 회사의 회장과 임원진들이 앉아 있고 200명이 넘는 임직원이 있음에도 목소리 하나 떨리지 않았다.
“먼저 CF 알고리즘입니다. 상세한 수식은 지루하실 테니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를테면 혈액형이 A형인 사람이 산 물건은 다른 A형도 산다. 이런 겁니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 제품을 구매한 이력을 통해 비슷한 성향의 고객이 사고 싶은 물건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강철이 차분하지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발표를 이어나갔다.
방금 전과는 집중도가 달랐다. 그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 진용민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 *
발표를 듣고 있던 진용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CF 모델링이 뭔지 이해가 좀 되는군. 앞에 친구는 너무 기술자 마인드야.”
황희석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하하, 오성전자에서 기술만 갈고 닦은 친구라.”
“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는 거니까.”
“맞습니다. 사실 기술력으로만 따지면 최 팀장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오성전자에서 어떤 일을…….”
황 상무는 말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어차피 대산에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끝이야. 그런데 벌써 끝날 것 같은 조짐이 보이는군. 오늘 발표만 봐도 그렇지 않나?”
의미심장한 말에 황 상무가 마른침을 삼켰다. 최수철을 섭외해 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진용민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진선미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어? 저 친구 이 프로젝트 끝나면 퇴사하겠다고 했다는군.”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시선을 바로 한 진용민이 강철을 보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고민하던 진용민이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비서가 다가왔다.
“네.”
“끝나고 저 친구 회장실로 올라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사이에도 발표는 계속되었다.
* * *
발표가 끝나고.
임직원들이 썰물처럼 강당을 빠져나간 자리는 고요해야 하건만 그렇지 못했다.
정현진이 붉게 물든 얼굴로 말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최수철은 조용히 오늘 강철이 발표한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정현진이 그런 최수철을 보며 말했다.
“최 팀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수철이 안경 너머 눈을 반짝였다.
“물론 데이터의 종류가 다르니 결과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백화점에서 제공한 데이터를 이용했고, 저분들은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제공한 데이터를 사용했으니까요. 조건이 다르니 출력값이 다를 수도 있죠. 하지만.”
최수철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기 발표하신 자료에 의하면 백화점 데이터로 테스트를 한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진 것 같진 않군요.”
그 말에 정현진이 잔뜩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달라지지 않다니. 우리가 프리미엄 아울렛 데이터를 이용하면 분명 더 좋은 성과가…….”
최수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팀을 합치는 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성과가 더 좋을 것 같은데.”
최수철의 제안에 당황한 건 강철이었다.
“팀을 합치자고요?”
“네. 지금처럼 팀 대결을 시키는 오성전자의 방식이 언제나 효과적인 건 아닙니다. 그쪽도 5명. 여기도 5명. 제 생각에는 팀을 합치는 게 더 시너지를 낼 것 같습니다.”
강철이 고개를 돌려 하진기를 보았다.
“그건 제가 결정할 사항이 아닌데…….”
그러자 하진기가 앞으로 나섰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윗분들 동의도 필요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결정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럼 전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겠군요. 가서 성능을 높일 방법을 연구해야 해서.”
몸을 돌리던 최수철이 다시 강철에게 다가왔다.
“아, 참. 그리고 듣자 하니 에이글에서 리터너라는 아이디로 활동하신다고요?”
“하하, 네. 맞습니다.”
최수철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며 감탄사를 토했다.
“역시 진짜였군요. 리터너를 여기서 보게 된다니. 진짜 반갑습니다. 꼭 한번 만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제가 보낸 메일 보셨습니까?”
강철이 괜히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하하, 아니요. 요즘 메일 볼 시간이 없어서 확인은 못 했습니다.”
“이해합니다. 에이글에서 워낙 문제를 많이 푸셨으니. 요즘 게시판 보면 활동이 뜸하다는 글이 올라오던데. 그게 회사 일에 집중하시느라 그런 거였군요.”
“네. 뭐.”
정확히는 퇴근 후 텐센트와의 협상을 마무리 짓는 데 총력을 다했다.
알고리즘에 관해 설명해 주고, 돈을 받고, 받은 돈을 어떤 회사에 투자할지 계획을 세웠다. 그럴 뿐만 아니라 텐센트와의 일이 마무리되면 김봉수에게 어떤 게임 개발을 지시할지도 계획을 세워야 했다.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최수철이 강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리터너 님과 함께라면 대산 추천 시스템이 생각보다 큰 성과를 거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강철이 그 손을 맞잡았다. 옆에 있던 정현진의 표정이 한없이 구겨졌다.
그때.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양복을 잘 차려입은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철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바로 강철에게 다가왔다.
“……비서실장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회장님께서 보자고 하셔서요.”
“아, 알겠습니다.”
강철이 어리둥절해 하며 따라갔고, 다른 사람들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철을 보았다.
* * *
진용민.
전생에서는 한 번도 단둘이 대화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벌써 두 번째 만남이었다.
확실히 두 번째 만남이어서일까. 처음보다 긴장감이 떨어졌다.
강철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물었다.
“찾으셨다고요.”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지금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에 찻잔을 들어 올리던 진용민이 멈칫했다. 그러다 다시 손을 움직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발표 잘 봤네.”
“감사합니다. 팀원들과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오성전자에서 넘어온 최수철보다 뛰어난 성과를 거뒀어.”
“하하, 네.”
“그런 사람이 갑자기 퇴사하겠다고 했다지?”
일반 임직원이라면 회장이 퇴사까지 일일이 물어보진 않는다.
최소한 임원 정도는 돼야 회장과 면접을 할까 말까였다. 그런데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
강철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네. 이번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떠나려고 했습니다. 따로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서 알아봤네. 혹시나 우리 회사에 불편한 게 있는 건 아닌가. 다른 회사에서 더 좋은 조건을 내건 건 아닐까.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오해는 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주려 알아본 거니까. 더구나 자네는 우리 회사 핵심인재 아닌가.”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진용민이 말을 이었다.
“알아보니 ‘아이온’이라는 회사를 통해 ‘퍼그’에 투자를 했더군. 그게 최근 텐센트에 600억에 팔렸고.”
차를 마시던 강철이 멈칫거렸다.
“어떻게 그걸 다…….”
“사람이 하는 일이야. 모를 것도 없지.”
짧은 대답으로 마무리한 진용민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최근 아이체크에도 투자를 진행했더군. 앱을 통해 음식물의 칼로리를 계산해 주는 서비스.”
“네. 조사를 많이 하셨군요.”
“핵심인재 P급. 거기에 A급으로 거론되는 만큼 자네는 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재야. 그런 의미로 알아주게.”
“회사 일을 소홀히 하진 않았습니다.”
진용민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물론이지. 결과로 보여주지 않았나. 자네를 여기로 부른 건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반대라 하심은…….”
“먼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회사에 다니면서도 투자를 진행했고, 소위 말하는 대박을 만들어냈어.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어떤가? 힌트를 줄 수 있겠나?”
“평소 게임 산업이나 스타트업 생태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좋은 기업을 알게 되었고, 투자를 진행할 수 있었고요.”
“정론이구만.”
“하하, 네. 바른길로 열심히 간다면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진용민이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거기에 하나가 더 필요해.”
“…….”
“미래를 보는 안목. 자네에겐 그게 있는 것 같아. 지난번 신입사원 간담회에서도 느꼈던 것이지.”
“감사합니다.”
진용민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 안목은 일반 직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 비전을 제시하고 이끌어 가야 회사가 더 발전할 수 있고.”
잠시 차를 마신 진용민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안목이 우리 대산에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상상을 해봤어.”
“그런데 전 퇴사를 한다고…….”
“과장이나 부장은 싫다고 했다지?”
“네.”
진용민이 쇼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두 손에 깍지를 꼈다.
“그럼 이사는 어떤가?”
“……이사라 하심은.”
“그래. 임원을 말하는 거야.”
임원이라는 말에 강철도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파격적인 제안이기 때문이었다.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계열사가 아닌 본사 임원으로 대우해 주겠네. 지금까지 신입사원이 임원이 된 예는 없어. 더구나 겨우 27살이 대기업 임원이 된다? 자네 들어본 적 있나?”
대산 그룹.
그룹사 전체 매출만 30조를 넘으며 근무하는 직원을 비롯해 협력사 직원까지 포함한다면 십만 명은 족히 넘어간다. 본사 임원은 그 둘 중에서도 극히 소수만 갈 수 있는 자리였다.
“……없습니다.”
“그렇지. 나로서도 큰 모험을 하는 거네. 만약 자네가 추천 시스템에서만 능력을 보였다면 이런 제안은 하지 않았을 거야. 임원은 개발만 하는 자리는 아니니까. 하지만 미래를 보고 투자를 단행한 걸 보고 결심이 섰네. 회사를 이끌어갈 수도 있겠다고.”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는 했지만, 확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망설이는 강철을 보며 진용민이 물었다.
“내 제안이 별로인가?”
“좋습니다. 좋은 제안이긴 한데……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습니다. 인생이 달린 문제라.”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임원은 1년마다 재계약하는 임시직원이야. 1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자네가 퇴사 사유로 말한 사업은 그 후에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물론 회사에 다니며 해도 되네. 지금처럼 성과만 낸다면 일절 관여하지 않겠네.”
거듭된 제안에 강철은 생각했다.
‘임원이라…….’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더구나 회사를 만들어 경영하는데 필요한 요소는 기술만이 아니다.
대산 그룹 임원은 그걸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대산은 퇴직한 임원에 대한 대우를 섭섭지 않게 하고 있지.”
그 말에 강철의 머릿속으로 한 회사가 스쳐 지나갔다.
YK 정보통신.
대산에서 사용하는 POS 프로그램을 공급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사장이 전직 대산 그룹 전무였다.
그 말은 자신의 사업체에서 만든 서비스를 대산에서 사용해 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자 임원 자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만, 한가지 확답을 받아야 할 게 있었다.
“정말 성과만 내면 제가 바깥에서 사업을 해도 일절 관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하, 물론이야. 자네에게 그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니까. 퇴근 후에 뭘 하던 자유네. 다만 근무시간에는 회사에 집중해 줘야 해.”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괜찮은 경험이 될 거야. 퇴사 후 사업을 할 때도 자네 경력 사항에 대산 그룹 임원이 적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
강철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골드만삭스나, 맥킨지 출신의 사업가는 허황된 말을 해도 투자자들이 믿어주었고, 평범한 경력에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안을 가져온 창업자는 투자자들에게 배척당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다.
이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만들고 나면 테스트 베드가 필요하다.
해당 서비스가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 실제 적용했을 때 매출에 영향을 미칠 만큼의 파급력이 있는지?
이만큼 적당한 테스트 베드가 없었다. 여기에서 그걸 테스트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자 임원의 매력도가 조금 더 올라갔다.
“솔직히 좋은 조건이긴 하군요.”
“그럼 수락하는 건가?”
“연봉과 인센티브도 맞다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진용민도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잘 생각했네. 섭섭지 않게 제공될 거야.”
“네.”
둘은 그 자리에서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