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신규점포 오픈
하진기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공채 교육에서 받은 내용을 가지고 성향을 파악하다니. 너 회사 생활 잘하겠다.”
김정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벌써 몇 건이야. 보안 점검에 이번 화면까지. 오자마자 어마어마한데?”
하지만 조용훈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박철수의 표정도 어두웠다.
“감사합니다.”
하진기가 강철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수고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고.”
“네.”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하진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강철을 보는 김정민의 표정도 한없이 밝았다.
오직 두 명만 제외하고.
* * *
강철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엄마, 아들 왔어.”
“아이고, 우리 아들. 얼굴 잊어버리겠다. 이놈의 회사가 아주 우리 아들을 잡네! 잡아. 뭔 일을 그렇게 많이 시킨대.”
매일 야근을 한다고 자정이 다 되어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출근을 아침 7시가 조금 넘어서 했다. 집에서는 거의 잠만 잔 것이다.
“아들이 다 능력이 좋은 탓이지.”
“그렇기야 하지만.”
이내 방문이 열리고 동생 이희진이 나왔다.
“오빠 이제 와?”
“오늘 웬일이냐. 이 시간에 집에 있고.”
강철을 본 이희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대기업도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 오빠. 입사하자마자 한 달간 매일 자정에 퇴근한 거 알아?”
“높이 올라가려면 열심히 해야지.”
“얼마나 높이 가려고.”
“넌 몰라도 돼.”
최용희가 그런 강철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남자는 자고로 바빠야지. 얼른 씻고 나와라. 밥 차려놓으마.”
오랜만에 가족과 단란한 식사를 마친 강철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주식 계좌를 확인했다.
크로믹스 : 315.12$.
강철이 산 가격대가 210$였다. 벌써 50%가 넘게 오른 것이다. 대기업 사원의 이점을 살려 신용대출도 풀로 받아 전부 주식에 넣어놨다.
그렇게 넣은 금액이 1억2천.
벌써 주식 평가금액이 1억8천이 되었다.
“나중에 이걸 팔고 빅트리가 분할 될 때 관련 주식을 계속 매입한다.”
당시 자사주를 매입한 직원들이 떼돈을 번 경우가 간간이 있었다. 죽기 직전 만났던 윤찬민도 그런 케이스였다.
모니터를 보던 강철이 잔뜩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번호라도 몇 개 외워두고 있는 건데. 이거라도 알고 있어서 다행인가.”
로또.
주식.
등등 이런 것들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사무실에서 오로지 기술 개발에만 열중했다.
덕분에 엔지니어 역량은 가파르게 상승했지만, 세상사에는 아둔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강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트리플 앨범이 이때쯤 나오지 않았나.”
다른 걸 모르지만 걸그룹에 대해서는 꽤 자세히 알고 있었다. 고통받는 마음을 그들의 노래를 들으면 위로받았기 때문이었다.
“트리플은 한국, 일본에서 그야말로 초대박이 나고 이들이 IJ 엔터 소속이니까…….”
강철은 바로 IJ 엔터테인먼트 주가를 확인해 보았다. 사실 싼지 비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다만 지난 1년간 주가의 변화가 거의 없이 횡보하고 있었다.
“IJ 엔터주도 당연히 날아가겠지.”
자신의 기억으로 크로믹스는 1,000달러까지가 한계였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이 오른다 해도 앞으로 2배였다.
“전부 넣는 건 좀 그렇고, 절반 정도만 넣자.”
강철은 그렇게 주식 계좌에 관한 생각을 마쳤다.
주식 계좌 정리를 마친 강철은 브라우저에 aggle.com이라고 쳐보았다.
“이게 이때부터 있었구나.”
일명 에이글 닷컴.
전 세계 데이터 분석가들의 성지였다. 강철도 종종 이곳에서 정보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여기에 올라온 문제를 풀어보기도 했었다.
“문제가 꽤 많이 올라와 있네.”
에이글이 핫한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이 상금을 내걸고 데이터와 문제를 낸다는 것에 있었다.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는 식이었다.
한 문제에 100만 달러의 상금이 내걸린 적도 있을 만큼 인정받는 플랫폼이었다.
“오랜만에 이거나 한번 풀어볼까.”
강철의 시선이 M1 Forecasting라는 문제에 멈췄다. 미국 최대 마트 체인인 윌마트에서 낸 것으로 총상금이 10만 달러였다.
어차피 데이터 분석 관련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공부도 되고, 1등을 하게 되면 상금도 받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강철은 그런 생각으로 문제를 읽어나갔다. 그런데 조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뭐지. 내 영어 실력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토익점수 750점.
과거에도 영어로 된 기술 문서를 보면 대충 해석할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랄까. 보자마자 바로 해석되는 수준이었다.
“대한민국 공교육이 드디어 폭발한 건가.”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문제에 집중해 나갔다.
신기한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데이터 분석에 사용되는 수학 공식을 이해하는 데 몇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수식을 찾아보고 설명을 집중해서 보면 어느샌가 스르륵 이해돼버리는 것이다.
“내 머리가 이렇게 좋았나…….”
물론 어려운 내용은 몇 번을 다시 보고 의미를 곱씹어야 했지만, 확실히 과거보다는 빠르게 이해되었다.
그러자 문제를 푸는 행위가 재미있었고, 밤늦은 시간까지 자지 않고 집중할 수 있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미국 실리콘 밸리에 있는 에이글의 관리자 론 브라운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팀이 아니라 혼자서 순위권에 올라왔네.”
그가 보고 있는 문제는 M1 Forecasting.
미국 최대 마트 체인인 윌마트에서 낸 문제였다. 현재까지 순위권에 이름을 올린 것은 전부 팀 단위였다.
그런데 그 문제를 홀로 푼 참가자가 나타난 것이다.
함께 있던 동료가 고개를 돌렸다.
“혼자서?”
“그래 혼자서. 그것도 4위야.”
“그러면 상금 수령권이네.”
론 브라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디가 returner? 거기에 한국 가입자네.”
“오! 코리아. 불고기 좋지.”
“지금까지 한국 이용자가 상금 순위권에 든 적이 있었나?”
그러자 동료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었던 것 같은데…….”
흥미가 생긴 론은 해당 사용자의 답안을 살펴보았다. 답안지는 2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간단한 레포트.
답안 CSV 파일.
론은 레포트 먼저 살펴보았다. 레포트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1. 소개.
2. 데이터 전처리.
3. 결과물.
론은 바로 3번 항목을 클릭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음식 카테고리내 FD_1의 매출이 발생할 때 FD_2의 매출이 함께 발생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음식 FD_5, FD_29, FD_87과 취미 HB_1의 상관관계가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
-그러므로 이러한 상품들을 함께 엮는다면 매출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다.
끝까지 읽은 론이 자신들만 가지고 있는 FD_1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FD_1은 맥주였고, FD_2는 소시지였다. 그리고 HB_1은 낚시였고, FD_5, FD_29는 캠핑을 하러 가서 먹는 음식 종류들이었다. 옆에서 보던 동료가 말했다.
“꽤 하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순위권에 들었겠지.”
“그거야 나도 알지.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상품 간 관계가 맞는 건 100% 같은데 틀린 건 또 100% 다르다는 뜻이었어.”
“흠…….”
“FD_1이랑 FD_2를 매칭시키면 10점, FD_12를 매칭시키면 9점, FD_4이랑 매칭시키면 8점 이렇게 점수가 달라지잖아. 그런데 이 친구는 대부분이 10점 아니면 1점이잖아. 이렇게 극단적으로 점수가 나올 수 있나?”
“그 말은 운으로 맞았거나 조금만 수정하면 100점을 맞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거야 차차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수정 제출했는데 기존 10점들의 점수가 낮아지면 ‘운’, 지금 1점짜리가 10점으로 변한다면 실력 아니겠어.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순위가 금세 역전되겠어. 하나 수정할 때마다 9점이 플러스 되는 격이니.”
그 말에 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해당 사용자를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새로운 답안이 올라온다면 꼭 확인해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 * *
대산 D&S 본사 회의실.
거기에 각 팀의 팀장들이 다시 모였다. 하진기가 가장 친한 백화점 담당 팀장에게 물었다.
“뭐야. 또 무슨 일인데? 보안은 마트에서 하기로 했잖아?”
“본사에 있는 친구 말로는 회장님의 특별지시가 있다고 하네.”
“특별지시?”
“너도 알다시피 이제 대세는 온라인 쇼핑이잖아.”
온라인 쇼핑.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진기는 단박에 알아들었다.
“하긴 대산 닷컴이 죽 쑤고 있긴 하지.”
“본사에서 야심 차게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지만. M/S(시장 점유율)가 5%였나. 죽 쓴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망했지.”
“올해 신년사에서도 ‘나일’처럼 되자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되나.”
나일.
전 세계 최고, 최강의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그리고 대산 그룹이 바라보는 미래이기도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대산 D&S 사장이 들어왔다.
털썩.
의자에 앉은 사장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회장님 특별지시가 떨어졌다.”
다들 조용히 기다리고 있자. 사장이 말을 이었다.
“온라인 쇼핑몰을 완전히 리뉴얼 해야 하는데 개발 쪽 지원 인력이 필요한 모양이야…….”
사장이 슥 팀장들을 훑었다. 다들 알 수 있었다.
‘기회다.’
‘잡아야 해.’
‘잘하면 초고속 승진이다.’
분명 회장님의 특별지시라고 했다. 이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한다면 팀장을 넘어 대기업의 별이라 부르는 임원을 다는 건 일도 아니니라.
팀장들의 눈빛에는 한번 해보겠다는 강한 열망이 담겼다. 사장이 가장 먼저 마트 팀장을 보며 말했다.
“넌 안 그래도 바쁜데 보안 때문에 안되고.”
이내 백화점 팀장을 보았다.
“너도 백화점 매출은 괜찮으니 안되고…….”
그리고 하진기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하 팀장 시간 어때?”
하진기는 이건 기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괜찮습니다.”
“이번에 터진 보안 건도 하 팀장이 관리하는 쪽만 잠잠하지?”
“네.”
“온라인 쇼핑몰이니 보안도 중요할 테고…… 그런데 혹시 데이터 분석이라는 것도 할 줄 아나?”
하진기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직 실제로 구현해 보거나 실무에서 접해본 적이 없었다.
“이번에 리뉴얼되는 온라인 쇼핑몰에 ‘나일’에 버금가는 추천 시스템을 넣으라는 게 회장님 특별지시야. 그것만 할 수 있다면 자네가 한번 해봐.”
하진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사장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쫄 건 없어. 회장님도 나일이랑 똑같이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고 계시니까. 어느 정도 성과만 내면 돼. 어때 해볼래?”
하진기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몇몇 팀장들은 우려의 시선으로 몇몇 팀장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하진기를 바라보았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하진기가 바로 김정민을 호출했다.
“김 과장 기회 왔는데 한번 잡아볼 거야?”
그 말에 김정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회장님 지시로 대산 닷컴 전면 리뉴얼이 시작될 거야.”
김정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설마 팀장님이 거기에…….”
“그래 내가 거기 TF팀의 개발 쪽을 맡기로 했다. 일이 궤도에 오르면 네가 여기 임시 팀장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부장급 직원이 올 거야. 남을래 해볼래?”
김정민의 머리가 빠르게 휘몰아쳤다.
이건 독이 든 성배다. 위험하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초고속 승진이 보장된 프로젝트였다. 김정민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기로 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추천 시스템 구축이야.”
“추천 시스템이요?”
“회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회사가 어디지?”
“그거야 ‘나일’ 아닙니까. 이번 신년에서도 그 회사 소개하면서 우리도 그런 세계적인 회사가 되자고 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나일이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추천이라고 알려졌지. 상품 매출의 30%가 추천에서 발생하니까. 물론 그 밖에도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은 추천부터 해볼 생각이신가 봐.”
김정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면 데이터 분석 가능자가 필요하단 말인데…….”
“우리가 직접 할 것 있나. 그거야 실력 좋은 사람을 뽑으면 되잖아. 어차피 우리야 그 사람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알아볼 정도면 돼. 일이라는 게 기술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 정도면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정민은 바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해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먼저 데이터 분석 가능자를 뽑아야 하는데 혹시 아는 사람 있어?”
김정민은 바로 노트북에서 에이글에 접속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관련 분야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에이글이라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데이터 분석 사이트인데 며칠 전에 한국 사람이 윌마트에서 낸 문제에서 순위권을 기록했더라고요.”
하진기가 고개를 기울이며 관심을 표했다. 김정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실력이 입증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여기 순위권 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요. 실제로 여기서 스카웃 돼서 일하는 사람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연락 한번 해볼까요?”
하진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윌마트면 우리랑 포지션도 비슷하고, 그 정도 실력이면 능력 있다는 말이니까. 한번 연락해 봐.”
김정민이 retuner의 아이디를 클릭해 쪽지를 한국통신 써나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산 D&S에 근무하는 김정민 과장입니다.
그 첫 마디로 시작해.
-귀하와 만나 뵙고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니 시간 되신다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말로 마무리되었다.
* * *
조용훈이 죽을상을 한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 조용훈에게 협력사 직원이 다가왔다.
“주임님이 주신 화면 테스트 스크립트 있잖아요. 이거 안 되는데요.”
“안 돼요?”
“네. 이 주임님이 준 건 잘되던데…….”
그 한마디가 조용훈의 꼭지를 돌게 했다. 조용훈이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네? 아 그게 아니라.”
“저도 강 과장님이 하신 결과물보다 저기 박 대리가 한 게 더 보기 편해요. 아시겠어요?”
강 과장은 협력사.
더구나 먼저 말실수를 한 것도 자신이었다.
결국, 30대 후반의 강 과장이 20대의 조용훈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나서야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조용훈이 거칠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시X, 보자 보자 하니까. 협력사 새끼들까지 날 무시하네.’
그러면서 강철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다 저 새끼 때문이야.’
크게 심호흡을 하며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럴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흥분하면 지는 것이다.
‘이 스크립트는 또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간단하게 되는 줄 알았건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다시 강철에게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고 보자. 어차피 내일이면 신규 점포 오픈이다.’
신규 점포 오픈.
그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POS 설치. POS 프로그램 업데이트. 일 매출 정상 집계 확인, 기타 전산 장비 확인 등등 해야 할 일이 수두룩했다. 그 일을 경험해 보지 않은 신입이라면 당연히 어리바리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가서 눈물을 쏙 빼주마.’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 조용훈이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런 조용훈을 김정민이 불렀다.
“조 주임 잠깐 와봐.”
“네.”
“내일이지?”
내일은 부산에 신규 점포 오픈 준비를 나가는 날이었다.
“네.”
“비록 신입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강철이 빠릿빠릿하게 일 처리하니까. 둘이서 최대한 준비해 놔. 안 될 것 같으면 SOS 요청하고, 나나 박 대리도 오픈 당일에는 내려갈 테니까.”
“네.”
“강철이한테 준비사항은 알려줬어?”
“안 그래도 오늘 설명해 줄 참이었습니다.”
“그래. 어차피 뭐 POS 설치하고 결제되고, 그 금액이 제대로 올라오면 끝이니까. 크게 어려운 건 없겠지.”
“그럴 겁니다. 그리고 과장님 말씀대로 이 주임이야 빠릿빠릿 잘하니까요.”
김정민이 이번에는 강철을 호출했다.
“강철아.”
“네.”
자리에서 일어난 강철이 김정민에게 걸어갔다.
“지난번에 말했지. 부산 점포 오픈 지원 가야 한다고.”
과거에도 했던 일이었다.
강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여기 조 주임 도와서 잘 마무리해 봐.”
“네.”
그때.
강철은 조용훈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그려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걸 보자 강철은 직감했다.
‘딴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과거에도 조용훈은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철은 먼저 입을 열었다.
“점포 개점 시에는 가장 중요한 게 POS기 작동이라 하던데 제가 한번 테스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크로스 체크 하면 완성도도 더 올라갈 테니까.”
조용훈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괜히 시간 낭비하는 겁니다. 제가 완벽하게 세팅해 놨으니까요.”
“하하, 조 주임 자신 있는 건 좋은데 혹시 또 알아. 신입이 테스트하다가 찾아낼지. 운영하다가 문제 생기면 큰일이니까. 한번 맡겨보지.”
“네. 그럼 그것부터 맡겨보겠습니다.”
“그래. 둘이 합심해서 잘해봐.”
대화를 마친 강철은 김정민이 있는 자리에서 테스트 POS기가 설치된 회의실로 이동했다. 강철을 보는 조용훈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걸 텐데. 부산 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설명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럴수록 설명할 시간이 줄어들어요. 제가 좀 바빠서.”
강철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 1시간 정도만 해보겠습니다.”
“뭐, 맘대로 해요. 테스트해 주면 나도 좋으니까.”
그러곤 엑셀 표 한 장과 테스트용 카드 내밀었다.
“이걸로 하면 돼요. 테스트하는 방법은 엑셀에 나와 있으니까. 그것 보고 따라 해보고.”
그 말을 끝으로 조용훈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바로 돌아와야 했다. 강철이 POS기를 조작하자마자 크게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거 뻗었잖아.”
바깥에서 일하던 김정민이 그 소리를 듣고 회의실로 올 만큼 소리가 컸다.
“뭔데 무슨 일인데.”
강철이 멈춰 버린 POS기를 가리켰다.
“제가 은련 카드(중국은련유한공사 발행카드)에 은련 카드 포인트, 그리고 국내 현금, 프리미엄 아울렛 전용 포인트로 결제를 하려고 하니까. POS기가 뻗어버리더라고요.”
김정민의 시선이 획 돌았다.
“조 주임. 완벽하게 했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게.”
“하여간 잘 좀 하자. 잘 좀.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거친 콧김을 내뿜은 조용훈이 터벅터벅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 과장님! 여기 좀 들어와 보세요.”
한기훈 과장.
POS기에 들어가는 결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협력업체 직원에게 조용훈의 분노가 쏟아졌다.
* * *
조용훈을 물 먹인 강철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빅트리 닷컴 TF팀이 만들어진 게 보안사고 터지고 난 뒤였으니까. 지금쯤이면 만들어질 때가 됐는데…….’
과거에는 빅트리 닷컴에 바로 합류하지 못했다.
신입 티를 벗고,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성과를 낸 후 우수사원 표창을 받고 나서야 빅트리 닷컴 사업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때 무용담처럼 들었던 TF팀 결성 시기가 이쯤이었다.
‘이 정도 성과로는 안 뽑아줄 가능성이 커.’
TF팀인 만큼 소수의 인원으로 시작한다. 그만큼 실력 있는 사람들로만 구성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오래 있을수록 할당받을 수 있는 빅트리의 주식 수가 많았다.
‘그렇다면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인데…….’
강철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이런 사소한 문제점 말고 시스템에 치명적일 수 있는 그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덕분에 부산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그런 문제가 있었다.
강철은 바로 자리로 돌아가 해당 문제를 확인해 보았다.
‘역시.’
그리고 그 문제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문제가 터지는 시점은 부산 신규 매장 오픈 일.
강철은 그때를 기다리며 관련 문제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집중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로 해결할 수 있도록.
* * *
부산.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강철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헉…… 헉헉…….”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에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버렸다. 그런 강철을 보며 협력사 직원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하하, 네 뭐. 할 만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인원은 부족하고, 시간은 촉박하니 저도 한 팔 거들어야죠.”
“…….”
“전 오른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강철은 10㎏이 넘어가는 POS(Point Of Sale) 장치를 들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대산에서 나왔습니다. POS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아, 네.”
원래는 협력업체에서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조용훈은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강철에게도 일을 시킨 것이다.
이곳에서 강철이 하는 일은 조용훈 보조였기에 딱히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휴우…….”
강철은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리고 기기를 들어 정해진 탁자 위에 올렸다.
“끄응차.”
신음이 절로 나왔다.
‘운동을 하든가 해야지. 겨우 15㎏을 드는데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그렇게 탁자 위에 POS기를 올리고, 전원선과 랜선까지 연결한 후에 가지고 있는 테스트 카드로 결제까지 해보면 설치가 끝난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한 강철의 눈에 예쁜 카디건 하나가 보였다.
‘엄마 사다 주면 좋아하겠는데.’
마침 엄마가 좋아하는 꽃무늬이기도 했다.
강철은 홀린 듯 다가가 옷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4, 40만 원이라니.’
잠시 여기가 어딘지 잊어버렸다.
프리미엄 아울렛.
바로 명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명품은 할인한다고 해도 비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때.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대산에서 나왔습니다.”
고개를 든 강철은 바로 다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유혜인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일도 직접 하세요?”
“네.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저라도 거들어야죠.”
유혜인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시간이 없다고 해도…….”
“하하, 전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땀 흘리니까. 좋은데요.”
이내 유혜인의 강철이 들고 있던 옷을 향했다.
“그 옷은…… 여자친구?”
“아닙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머니 옷 한 벌은 사야 할 것 같아서.”
“아…….”
“그런데 좀 비싸긴 비싸네요.”
“명품은 명품이니까요.”
한 가게에서 너무 지체했다. 강철은 꾸벅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전 이만 일을 해야 해서.”
“잠시만요.”
유혜인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강철을 막아섰다.
“이거 가져가세요.”
유혜인이 내민 건 카드 한 장이었다. 앞에는 유혜인의 이름과 멤버쉽 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이건…….”
“임직원 할인 카드에요. 대산 그룹 내에서도 프리미엄 아울렛 소속 직원들에게만 발급되는.”
“아…….”
“어차피 전 살 게 없어서요. 쓰고 서울에서 주세요. 10% 할인되니까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이걸로 그때 빚은 퉁 치는 겁니다.”
“하하, 네.”
강철이 밝은 표정으로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 뒷모습을 유혜인이 빤히 쳐다보았다.
* * *
점심 식사를 마친 강철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들고 그늘진 곳에 앉아 있었다.
아침부터 15㎏이나 되는 장치를 들고 움직였으나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이게 젊음의 힘인가…….”
그런 생각으로 앉아 있는 강철에게 조용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정말요?”
“그렇다니까요. 그때 진짜 등 뒤에서 식은땀이 쭉 흐르더라니까요. 그만큼 신규매장 오픈이 어려워요.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그렇구나.”
“물론 저는 지원팀이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런 일도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호호, 당연하죠. 선배님.”
남자 목소리는 조용훈이었다.
그리고 호호.
저 웃음소리 역시 많이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이내 건물 모퉁이를 지나 오피스룩 차림에 대산 사원증을 목에건 한 무리의 인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훈이 강철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어, 이 주임. 여기 있었군요.”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훈에게 다가갔다.
“아, 네.”
“여기 올해 신입사원분들이신데 신규매장 오픈 견학 오셨대. 그래서 잠시 안내해 드리는 중입니다.”
“아…….”
“이 주임이랑 동기들이죠?”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기억이 정확했다. 호호 목소리는 박인영이었다. 그리고 신입사원 교육 당시부터 친해진 윤찬민도 있었다.
“찬민이 넌 마트팀이잖아.”
“다른 쪽 어떻게 하는지 견학 한번 다녀오라고 해서. 며칠 있게 됐어.”
“오오. 잘됐네. 오랜만에―”
조용훈이 그런 강철의 말을 끊었다.
“POS 설치는 끝난 겁니까?”
“네. 설치 끝났습니다. 돌아다니면서 테스트도 마쳤고요. 이제 내일 가오픈만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가오픈.
이틀 정도의 가오픈을 한 후에 정식으로 오픈한다. 오픈 당일에는 부산 시장을 비롯해 대산 그룹의 회장님까지 총출동하는 큰 행사였다.
“각 매장에서 결제한 내역이 영업 정보 시스템에 들어오는 건 확인했어요?”
“그건 아직 확인 못 했습니다.”
“그럼 그것부터 확인하세요.”
강철은 굳이 맞서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윤찬민을 보며 말했다.
“찬민아, 나중에 또 연락하자.”
윤찬민.
그에게는 빚이 있다. 어려울 때 자신에게 ‘위로’를 해준 그 빚이 있었다.
“그래.”
강철은 바로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무실로 돌아온 강철은 영업정보 시스템에 접속해 보았다. 전체 매장에서 정상적으로 테스트 데이터가 들어와 있었다.
“문제는 내일모레인데…….”
내일이 가오픈.
내일모레가 정식 오픈이었다.
정식 오픈 당일 엄청난 숫자의 손님이 몰리면서 하루 매출만 수십억에 달하게 된다. 특히나 몇몇 매장은 손님이 너무 많아 긴 줄까지 서게 된다.
바로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너무 많은 손님이 몰리는 바람에 중앙 서버로 데이터를 보내는 프로세스가 좀비화되고, 메모리를 지속해서 잡아먹게 되면서 POS 자체를 다운시켜 버린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매장을 회장님이 시찰하게 되면서.”
강철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당시 결제에 실패하고, 위에서 아래로 엄청난 내리 갈굼이 있었다. 다행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화는 피해갔었다.
“문제는 확인했고, 해결할 수 있는 코드도 몇 번을 다시 짜보았고.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강철은 의자에 앉아 팔짱을 낀 채 화면을 노려보았다.
그런 강철의 등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있으면 뭐가 나옵니까?”
조용훈이었다.
과거에도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이제는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아까 확인하라고 한 건 확인했어요?”
“네. 각 매장에서 결제금액 정상적으로 올라오는 거 확인했습니다.”
“그럼 뭐 하고 있어요. 어서 나가서 POS기 문제가 될 것이 없는지 한 번이라도 더 확인하지 않고.”
“네.”
꾸벅 고개를 숙인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진용민.
대산 그룹 회장으로 탁월한 경영 감각을 발휘해 대산을 국내 1위 유통회사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탄탄한 체격에 각이 진 얼굴은 남성미를 물씬 풍겼다.
그가 비서를 보며 물었다.
“오픈 행사 준비는?”
“준비 끝났습니다. 14시 매장 도착. 내빈분들과 담소를 나누신 후 14시 30분부터 행사가 시작됩니다. 15시 10분부터 매장을 둘러보시고, 15시 30분. 루이비통 매장에서 물건을 하나 구매해 보시면 최종 행사 종료입니다.”
“그건 그렇게 처리하면 될 테고…… 보안사고 후속 조치는 완료되었나?”
진용민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요즘 같은 시대에 보안사고는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분위기를 알아챈 비서가 빠르게 말했다.
“네. 한국인터넷진흥원과 협력하여 사건 종결지었습니다. 최종적으로 회사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충분히 취한 것으로 나와 별다른 제재는 없을 전망입니다. 특히나 대산 D&S에서 만들어둔 패치 파일이 주효하게 작용했습니다.”
“패치 파일?”
“네. 대산 D&S의 프리미엄 아울렛 팀에서 미리 자체 보안 점검을 시행하면서 저희 쪽에 침투한 악성 코드에 대한 대비책을 만들어두었습니다. 그걸 회사 게시판에도 미리 올려두었고요. 그런 노력이 정상참작 되었습니다.”
“미리 만들어두었다……. 인상적이군. 누군가?”
“이강철 주임입니다.”
“주임?”
“네. 입사한 지 한 달 정도 된 신입사원입니다.”
“인상적이군…… 인상적이야. 우리 신입사원 간담회가 언제지?”
비서가 급히 일정표를 확인했다.
“차주에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입사 점수순이지?”
“네. 이 친구는 순위권 밖에 있습니다.”
“그 친구도 추가시키지.”
“알겠습니다.”
시간을 확인한 비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출발할 시간입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진용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에 다다른 키와 부리부리한 눈매에서 압도적인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 * *
개점일.
강철은 전산 지원팀에 배정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거기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하진기를 비롯해 김정민, 박철수까지 총출동했다.
김정민이 물었다.
“문제없지?”
그러자 조용훈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네. 벌써 매출도 지난번 오픈했던 파주 아울렛을 뛰어넘었습니다.”
“오늘 회장님도 오신다니까. 절대 실수 있어서는 안 돼. 특히 루이뷔통 매장 확인했어?”
“네. 조금 전에도 확인하고 왔습니다.”
“거기에서 회장님이 직접 결제까지 해보신다니까. 절대 문제 있어서는 안 된다.”
“알겠습니다.”
하진기가 강철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신입은 별일 없었고?”
“네.”
“일은 어때?”
“점포 여는 데 이렇게 많은 사람과 일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하하, 맞아. 쉽지 않은 일이지. POS 나르고, 설치하고. 나 때는 백화점 하나 오픈할 때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까.”
“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그래, 그런 자세로 열심히만 해. 내가 끌어줄 테니까.”
그 모습을 조용훈이 마땅찮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팀장님께 아양 떠는 모습이 아주 가관이야.’
하진기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고.”
“네.”
하진기가 옆에 있던 김정민의 어깨를 툭 쳤다.
“넌 나랑 좀 나가자. 만날 사람도 있고.”
“네.”
김정민이 나가자, 박철수도 어디론가 쓱 사라졌다.
회의실에는 조용훈과 강철만이 남았다. 강철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루이비통 매장에 접속해 로그를 확인해 보았다.
-Payment fail. process restart.
-Payment fail. process restart.
자신이 과거 보았던 그 로그가 간간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 강철을 조용훈이 삐딱한 자세로 쳐다보았다.
“영업 정보 데이터는 잘 확인하고 있어요?”
“네. 실시간으로 체크 중입니다.”
“이상 있으면 바로 말해주세요.”
“네.”
이내 조용훈이 비아냥거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누군 좋겠네. 벌써 줄타기를 잘해서 인정을 받고 있으니.”
강철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그저 조용히 곧 있을 문제에 집중했다.
그때.
사무실에 설치해 둔 전화기의 벨이 울렸다.
띠리리.
띠리리.
전화를 받은 조용훈이 심각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네.”
“POS 프로그램이 멈춘다고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조용훈이 조용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러고는 황급히 지원을 나와 있던 POS 프로그램 개발사인 YK 정보통신에 연락을 취했다.
부산 기장에 있는 프리미엄 아울렛.
그중 루이비통 매장의 점주인 조현진은 정신없이 밀려드는 손님들 때문에 점심도 거른 채 일에 매진했다.
“카드 받았습니다.”
“이백삼십 이만 원 결제하겠습니다.”
이내 카드를 꼽고 결제 버튼을 눌렀지만, 이번에도 POS가 멈춘 채 작동하질 않았다.
속에서 열불이 솟아올랐지만, 손님 앞이라 최대한 웃음을 유지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조현진은 익숙하게 POS기를 재부팅했다.
불과 2시간 전까지만 해도 잘 작동하던 것이 점심 이후부터 종종 다운되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재부팅을 하고 나면 정상 작동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카드 여기 있습니다.”
결제를 마친 조현진에게 조용훈이 다가갔다.
“대산에서 나왔는데요. POS기 한번 봐도 될까요?”
“아, 네.”
조용훈이 YK 정보통신 한기훈을 보며 말했다.
“과장님 빨리 확인해 보세요. 2시에 오픈 행사 끝나고 회장님 여기로 오십니다. 그런데 결제가 안 된다?”
그 말에 한기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둘 다 날아가는 수가 있어요. 물론 저보다 과장님이 날아갈 확률이 높겠지만.”
조용훈이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한기훈의 귀에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한기훈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빨리…… 해결하겠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 * *
김정민과 대화를 나누던 하진기가 급히 회의실로 돌아왔다.
“결제가 안 될 수도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용훈이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이게 다른 POS기는 문제가 없는데 루이뷔통 매장에서만 POS 프로그램이 멈추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게…… YK 정보통신 말로는 POS 프로그램이 메모리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메모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결제가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잔뜩 긴장한 조용훈은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하진기의 화를 돋웠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똑바로 대답 안 해!”
“죄, 죄송합니다.”
“하아…… 그래서 조치는?”
“지금 한 과장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이제 곧 쇼 끝나고 회장님 매장 도는 거 몰라?”
조용훈이 주춤거리며 답했다.
“그때까지는 무조건 해결하겠다고…….”
하진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래서 작업은 어디서 하고 있는데?”
“옆 회의실에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하진기가 까득 이를 악물었다. 그런 하진기를 향해 조용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결제가 됐다가 안 됐다가 하는 거라 회장님이 결제할 때는 될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하진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용훈을 보았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러고는 조용훈을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는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
그때까지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강철이 나섰다.
“팀장님.”
아끼는 신입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상냥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왜.”
“결제 안 되는 문제 말입니다.”
“어.”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뭐?”
“그냥 호기심에 POS 프로그램도 살펴봤는데…… 이게 보니까. POS 프로그램이랑 결제된 데이터를 중앙서버로 전송해 주는 프로세스가 합쳐져 있더라고요.”
하진기가 강철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제가 로그를 통해 살펴본 바로는 중앙서버로 데이터를 보내는 쪽에서 문제서 생기고 있었습니다. 결제 데이터의 양이 많아지다 보니 중앙서버로 보내는 데이터의 양이 많아졌고, 프로그램이 느려지다가 멈춘다고 해야 할까.”
“……그거 진짜야?”
“네. 고치기도 쉽습니다. 중앙서버로 보내는 쪽만 주석 처리하면 메모리 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 결제 실패는 안 할 테고요. 회장님 결제 이후에 해당 부분 다시 처리해서 재배포하면 됩니다. 어차피 영업정보시스템에 데이터 올라오는 것보다, 회장님 결제가 정상적으로 처리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말해 뭐해.”
하진기가 조용훈을 보며 말했다.
“한 과장 불러와. 아니면 그 밑에 있는 애라도. 당장!”
“네, 넵!”
조용훈이 재빨리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 * *
프리미엄 아울렛 중앙 행사장.
내, 외 귀빈들이 자리에 앉아 프로그래밍에 따라 움직이는 한 편의 분수 쇼를 구경했다. 그중에는 진용민 회장도 앉아 있었다.
그에게 부산시장이 말을 걸었다.
“장관이군요.”
“하하,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산에 이런 명소를 만들어주셔서.”
“아닙니다. 시 차원에서 행정 절차를 빨리 밟아주어서 쉬이 일 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 대산 그룹이 들어온다고 해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라 했습니다. 이렇게 쇼핑몰이 하나 지어지면 경제 유발 효과가 엄청나니까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마친 둘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분수쇼가 막바지 물을 뿜어내곤 마무리되었다. 그러자마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것으로 프리미엄 아울렛 개점 행사를 마칩니다. 내, 외빈 여러분께서는 자유롭게 매장을 둘러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자 진용민 옆에서 대기하던 비서가 나섰다.
“회장님 이쪽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인 진용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부산시장을 비롯해 부산에 지역구를 둔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용민 곁으로 다가갔다.
이내 진용민은 루이뷔통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김정민이 전화기를 든 채 긴장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네. 지금 이동하십니다.”
-이제 재배포한다는데. 어떻게 시간 끌 수는 없겠지?
“팀장님. 회장님이십니다.”
-나도 알아. 아니까 하는 말이지.
“휠라 매장 지나칩니다. 루이뷔통까지 5분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한 과장님 얼마나 남았습니까?
-곧 됩니다.
전화기 너머로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정민의 등 뒤에서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회장님이 직접 결제를 했는데 POS가 먹통이 된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휠라 지나쳤습니다. 루이뷔통 매장 앞입니다.”
-하아. 거의 다 됐어. 이제 재시작하는 중이야.
“지금 매장문 열었습니다. 손님인 척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조금…… 조금만 더.
“가방 하나 집으셨습니다.”
-거의 다, 다 됐어.
“팀장님. 제발."
-나도 알아 인마!
계산대 앞에 선 진용민이 말했다.
“이거 계산 부탁드립니다.”
“네. 고객님.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점장이 익숙하게 카드를 받아 진용민이 내민 가방을 결제했다.
이내.
드륵.
드르륵.
영수증 뽑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카드 영수증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진용민이 매장을 빠져나갔다.
그 뒤에 있던 김정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문에 등을 기댔다.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 * *
하진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결제 완료.”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깊은숨을 들이쉬는 목소리가 들렸다. 특히나 YK 정보통신 한기훈 과장의 경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입을 벌리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진기가 모니터를 보고 있는 강철에게 다가갔다.
“됐다. 결제됐어.”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다 네 덕분이다. 자칫 우리 전부 다 호출당할 뻔했어. 회장님이 결제하는데 결제가 안 된다?”
하진기가 살짝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하하, 저도요.”
“한 과장님은 다시 확인해서 오늘 안으로 고쳐놓으세요.”
“네.”
“그리고 조 주임.”
“네.”
“어떻게 된 거야? 네가 테스트 다 한 거 아니었어?”
조용훈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진기가 강철을 한 번, 조용훈을 한 번 보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비교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자. 어?”
조용훈의 목소리가 바닥을 기어갔다.
“……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강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POS 프로그램 제가 한번 수정해 봐도 될까요?”
하진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가?”
“네. 아까 대충 봤는데 빨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게 늦어져서 임원분들이 매장 매출을 못 보게 되면 욕먹는 건 우리니까요.”
하진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갔다.
“진짜 할 수 있겠어?”
“네. 대략적인 그림은 그려놓은 상태입니다.”
“그럼 한번 해봐.”
고개를 끄덕인 강철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혹시나 하진기가 옆에서 자신을 보진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미리 연습해 두었다.
그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하진기가 팔짱을 낀 채 강철이 코딩하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인터넷 검색을 한 번도 안 해?’
자신도 소싯적에 코딩 좀 했었다. 하지만 저렇게 빨리 작업하진 못했다.
타닥.
타다다닥.
타다다다닥.
강철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모니터로 코드가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있던 한기훈 과장이나 조용훈도 입을 떡 벌린 채 강철을 바라보았다.
강철은 그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작업은 그리 어려울 게 없습니다. 카운트하는 부분을 바꿔주면 되니까요. 하지만 오늘 같은 일을 예방하기 위해 프로세스를 분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프로세스가 죽어도 결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한기훈이 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건 저희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네. 보니까 모듈화는 시켜두셨더라고요.”
“맞습니다. 그걸 때서 다른 프로세스로 만들려고 했는데 최근 시간이 부족해서…….”
찌릿 느껴지는 시선에 한기훈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진기가 한심한 눈빛으로 한기훈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핑계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일이 더 커졌다면.”
한기훈이 마른침을 삼켰다.
강철이 말하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으리라.
“프로세스 분리까지 끝냈습니다.”
걸린 시간은 정확하게 30분.
미리 준비해 두었기 가능한 일이었다. 하진기가 그걸 보곤 기가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우리 신입이 30분 만에 한 걸 과장님은 미룬 거군요?”
한기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진기의 시선이 다시 조용훈을 향했다.
“그리고 조 주임이 이거 담당했지?”
조용훈의 눈가가 호랑이를 만난 사람처럼 떨리고 있었다.
* * *
하진기는 수고했다며 강철을 밖으로 내몰았다. 강철이 나가자마자 회의실에서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진기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산 D&S.
나름 대기업에서 팀장까지 올라간다는 건 호락호락한 성격으로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일에 대한 열정, 능력, 사람을 다루는 기술, 정치 등등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했다. 하진기 역시 그런 요소를 갖춘 인물이었고, 다른 사람과의 대거리를 피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했다.
“명복을 빕니다…….”
강철은 조용훈의 명복을 빌어주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강철은 어머니 선물을 살 생각으로 바로 루이뷔통 매장을 향했다.
생각해 보니 가디건보다는 명품 빽이 좋을 것 같았다.
박인영에게는 몇 개나 선물했지만,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 생각을 하자 마음이 아려왔다.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야지.”
다시 한번 다짐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강철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
박인영이 그곳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강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박인영도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했다.
한창 가방을 고르고 있는 강철에게 박인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여자친구 선물 사시나 봐요.”
강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어머니 선물 하나 사려고요.”
생각보다 담담하게 대할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나 보니 미움도, 그간의 정도 전부 사라진 덕분이었다. 과거였다면 아마 먼저 말을 걸어준 것만으로도 설렜을 것이다.
“아~”
강철은 보고 있던 가방을 하나 찍었다.
-락미 토트.
세일해서 350만 원을 호가하는 제품이었다.
“이걸로 보여주시겠어요?”
그 말에 점원이 다가와 가방을 집어 강철에게 내밀었다.
“20대부터 50대까지 꾸준히 이용하시는 상품입니다. 세련된 네이비색에 매년 일정 수량만 생산하는 제품이라 저희 매장에도 이것 하나 남아 있어요.”
이미 크로믹스로 수천만 원을 벌었다. 굳이 월급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임직원 할인되죠?”
“네.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인영이 눈빛을 반짝였다.
“아~ 프리미엄 아울렛 팀이라 할인되시나 봐요?”
“그건 아니에요.”
박인영의 시선이 멤버십 카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 어떻게…….”
“누가 빌려줘서.”
“아~”
또 한 번 탄성을 터뜨린 박인영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혹시 이 카드 저도 한 번…….”
마침.
딸랑 소리와 함께 매장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유혜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강철이 유혜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유 대리님.”
“어, 강철 씨.”
계산을 마친 강철이 멤버십 카드를 유혜인 대리에게 내밀었다.
“여기 잘 썼습니다.”
“어머니 선물 사셨구나.”
강철은 스스럼없이 유혜인 대리와 대화를 나누었다.
“네. 덕분에 저렴하게 샀어요.”
그 모습을 박인영이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런데 여긴 누구?”
“입사 동기예요. 백화점 마케팅팀에서 근무하는.”
그러자 유혜인이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프리미엄 아울렛 유혜인 대리에요.”
“백화점 마케팅팀 박인영입니다.”
“거기 차 팀장님 아직 계시나.”
“아, 네. 계세요.”
유혜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여기로 와서 꽤 섭섭해하셨으니.”
“알겠습니다.”
강철이 시선을 돌려 박인영을 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한데 이게 제 것이 아니라서요.”
죄송하다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개인적인 미안함도 있었다.
이혼 당시에는 충격적인 일에 당장은 불같은 화가 끓어올랐지만, 시간이 지나자 10년을 사업한다고 돌아다녔던 것에 대한 미안함이 남았다.
강철이 그런 마음으로 유혜인에게 물었다.
“대리님, 혹시 박인영 주임도 한 번 사용해도 될까요?”
유혜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다행이네요. 대리님이 된다네요.”
마침 점원이 가방을 포장해 강철에게 내밀었다.
“손님, 여기 포장 끝났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강철은 두 여자를 남겨둔 채 매장을 빠져나왔다.
박인영이 민망한 표정으로 유혜인을 보고 있었다.
* * *
가방을 구매한 강철은 입사 동기 중 가장 친해진 윤찬민을 만나기 위해 근처 한 커피숍을 찾았다.
이미 커피숍은 더위 피해 모여든 수많은 고객으로 바글바글했다. 강철은 자리를 잡고 앉아 익숙하게 핸드폰을 켜 뉴스를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있는 건 연예란이었다.
“오. IJ 엔터테인먼트 신인 걸그룹 트리플 출격 준비?”
강철이 보고 싶은 뉴스가 딱 떠 있었다. 강철은 바로 IJ 엔터의 주가를 확인해 보았다.
-IJ 엔터 : 23,100
자신이 매수한 가격이 22,300원이었으니 큰 변동은 없었다.
하지만 트리플이 나오자마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일본에 진출. 그 이후 중국 진출까지 기사로 흘러나온다.
“당시 주가를 보진 않았지만, 최소한 두 배는 오르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하고 뉴스를 꼼꼼히 읽었다. 그 이후로 강철이 접속한 것은 ‘에이글 닷컴’이었다.
“어디 보자. 내 순위가…….”
로그인하고 리더보드를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10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자신이 최초 올렸을 때는 4위였는데 그간 일이 바빠 수정본을 못 올렸더니 6단계가 밀려난 것이다.
“많이 밀려났네.”
씁쓸한 마음으로 화면을 보는데 오른쪽 상단 쪽지함에 +10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쪽지가 이렇게 많이 왔어.”
그걸 클릭하자마자 강철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한국 대표 인터넷 쇼핑몰 쿠키입니다.
-반갑습니다. LD 그룹 빅데이터 분석팀의 오정환입니다.
쿠키라면 현재 온라인 쇼핑에서 2위를 하는 업체였다. 그리고 LD 그룹은 대산의 경쟁사이기도 했다.
그 쪽지를 클릭해 보니 하나같이 스카웃 제의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강철의 몸을 굳게 만든 쪽지가 하나 더 있었다.
-대산 D&D 프리미엄 아울렛팀 김정민 과장입니다.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순간 강철의 등 뒤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왁!”
깜짝 놀란 강철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로 자빠졌다. 장난을 친 윤찬민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 뭐 하냐 너.”
하지만 강철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핸드폰을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