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성공 라이프
1
프롤로그
퇴사 후 1년 차.
완벽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이건 성공할 수밖에 없다. 오직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회사에 다니며 모아둔 돈 전부를 퍼부었다. 개발자를 채용하고, 나 역시 직접 개발에 나섰다.
퇴사 후 2년 차.
서비스를 런칭하고, 마케팅에도 수천만 원을 쏟아부었다. 왜냐하면, 이건 될 수밖에 없는 사업 아이템이니까.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퇴사 후 3년 차.
결국, 사업을 접었다. 정확히는 피벗팅 했다.
아이템을 바꿔 다시 시작했다. 월급 줄 돈이 없어 개발자들을 전부 내보내고, 나 홀로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하며 매달렸다.
4년 차.
5년 차.
…….
그리고 10년 차가 될 때까지.
내 사업은 성공하지 못했고, 아내에게서 이혼장이 날라왔다.
그래 충분히 이해한다. 너도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1장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가정법원 앞.
두 남녀가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인영아.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보자. 이건 정말 아니잖아.”
여자의 이름은 박인영.
그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은 이강철이었다.
“무슨 생각을 더 해. 이번에는 성공하겠지 했는데 아니잖아. 오빠 또 망했잖아.”
“프리랜서라도 하면서 돈 벌어볼게. 너도 알잖아. 오빠 프로그래밍 실력은 여전한 거.”
“45살 먹은 아저씨를 누가 써줘.”
그 말에 강철이 고함을 질렀다.
“박인영!”
“왜! 왜! 소리 지르는데. 그러기에 누가 사업하라고 했어? 오빠 때문에 내 인생 망가진 건 생각 안 해?”
“처음에는 너도 찬성했잖아. 사업해서 돈 많이 벌면 좋겠다고 기뻐했잖아.”
박인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때는 돈 많이 벌 줄 알았지. 이렇게 폭삭 망할 줄 누가 알았어.”
“너…… 처음부터 나 돈 보고 결혼한 거야?”
그러자 박인영이 고개를 젖히며 깔깔댔다.
“오빠한테 그럴 돈은 있었고?”
강철은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대산 그룹의 대산 D&S라는 자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집안에 돈이 많은 건 아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문 강철에게 박인영이 비수를 날려댔다.
“돈 많은 거 보고 결혼했으면 다른 남자 잡았지. 오빠도 알잖아. 나 회사에서 꽤 인기 많았던 거.”
“…….”
“오빠가 나름대로 실력도 있고, 성실해 보여서. 그냥 고생은 안 시키겠다고 생각했어. 돈 많은 남자 만나봐야. 바람이나 필 테니까. 만나 보니까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취업할 테니까…….”
“말했잖아. 너무 늦었어. 45살 먹은 아저씨를 누가 써줘.”
“박인영…… 너 정말…….”
“그리고 나 만나는 남자 있어.”
강철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뭐?”
“오빠 사업한다고 바깥으로 나돌 때부터 연락하던 친군데 이번에 이혼한다니까 더 적극적으로 나오더라.”
화를 참지 못한 강철이 목청을 높였다.
“박인영!”
“우리가 결혼한 지 12년인가? 그쯤 살아보니까. 그냥 돈 많은 게 최고더라. 내가 미친년이었어. 돈 많은 사람 만나서 바람피우더라도 모른 척하고 나도 돈이나 펑펑 쓰면서 살면 되는데.”
강철의 두 눈에 핏발이 서렸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박인영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난 이제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까. 오빠도 그 좋아하는 사업하면서 살아.”
말을 하던 박인영이 계단 밑 도로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오빠!”
강철이 눈을 돌려 보니 매끈한 외제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내 박인영이 그 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강철은 황망한 표정으로 법원 앞에 도로를 바라보았다.
* * *
지글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가운데 강철과 그의 친구 윤찬민이 술잔을 기울였다. 강철은 또 한 잔 술을 들이켰다.
그런 강철을 윤찬민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너야 실력이 있으니까. 어디든 받아주지 않겠냐.”
“다 늙은 사람을 누가 받아줘.”
“정 갈 데 없으면 말해. 하 전무님께 말씀드려 볼 테니까. 그때 너 되게 좋게 봤었잖아.”
내심 친구의 말이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른다. 하지만 친구에게 짐이 될 수 없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줘서.”
“어차피 계속 개발 일해왔으니까. 실력도 그대로 일 거잖아. 정 안되면 내가 협력사 좀 알아봐 주고.”
윤찬민.
함께 대산 D&S를 다녔던 동료였다. 그리고 지금은 팀장 자리에 있는 친구이기도 했다.
강철이 씁쓸한 표정으로 윤찬민을 보았다.
“빅트리 대박 났더라. 곧 상장도 한다면서?”
빅트리.
대산 그룹의 온라인 쇼핑몰이었다. 윤찬민이 팀장으로 있는 곳이기도 했다.
“뭐, 그냥 조금.”
강철이 질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나도 남아 있을 걸 그랬나.”
“하 전무님을 비롯해서 얼마나 말렸냐. 기어이 나가더니…… 나가면 성공하기라도 하지.”
한숨을 내쉬던 강철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게 말이다.”
윤찬민도 술을 한 잔 또 들이켜며 말했다.
“진짜 생각 있으면 말해봐. 자리 한번 찾아볼 테니까. 허튼 말로 하는 거 아니다.”
강철의 두 눈은 반짝거렸다.
“그래. 고맙다. 신경 써줘서.”
“뭘. 이 정도는 당연하지.”
이내 강철은 소주를 나발로 불었다.
사업은 실패했고, 와이프에게는 이혼당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시X…….”
박인영.
예쁘긴 예쁜 여자였다. 그 미모 때문에 연애 때는 우쭐한 마음도 있었다.
봐라!
이렇게 예쁜 여자와 사귄다.
하지만 옛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얼굴값 한다더니…….’
강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 *
회기역 근처.
강철은 비틀거리며 집을 향했다. 윤찬민은 미리 잡아놓은 숙소로 돌아간 참이었다.
강철의 입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빌어먹을 세상…… 어떻게 이렇게까지 안 되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이디어는 괜찮았고, 자신은 회사에서도 인정받을 만큼 실력도 있었다. 그런데도 사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실제로 피똥을 싸고, 일하다 기절할 정도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몸과 마음은 피폐해졌고, 와이프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강철은 못내 자신의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그때 퇴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나.”
“젠장…… 제엔장!”
강철이 소리를 지르던 그때.
지나가던 건장한 청년 무리와 툭 하고 어깨가 부딪쳤다.
“아이씨 뭐야.”
강철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뭐야 시X. 죄송하면 다야?”
“…….”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X같이 생긴 게 신경 건드리네.”
그러면서 강철의 명치를 툭 쳤다. 강철도 쌓여 있던 분노가 폭발했다.
“뭐 이 새끼야!”
10년간 쌓인 울분이 알코올을 지렛대 삼아 머리끝까지 올라왔다.
“뭐? 이 새끼?”
“그래 이 새끼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술 처먹었으면 곱게 들어가서 잠이나―”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퍼벅.
퍼버벅.
이내 배에서부터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무리를 지어 있던 청년들의 발차기가 강철의 온몸을 강타했다.
새우처럼 몸을 웅크린 강철은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꼈다.
“퉤, 아저씨 술 취했으면 곱게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자세요.”
강철이 기억하는 마지막 목소리였다.
* * *
그건 아주 서슬 퍼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강철의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운명이 비틀렸어.]
[자네가 잘못 적었기 때문이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네. 10년이나 같은 일을 해왔어. 이렇게 실패해서는 안 됐는데.]
대화를 들어보니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칠흑의 공간에 존재감이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대화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다 내 불찰이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건가?]
[원래의 운명대로 돌려놔야지.]
[회귀 말인가? 그러면 자네의 수명이 줄게 돼.]
[그렇다고 바로 잡지 않는다면 천명을 관장하는 사자 노릇을 어떻게 하겠나.]
[흠…….]
[다시 과거로 돌아가 운명을 바로 잡도록 도와줘야지.]
[표정을 보니 어차피 내 말은 듣지 않을 셈이군.]
[하늘조차 스스로의 잘못을 가리기에 급급하다면 누가 하늘을 두려워서 하겠는가. 난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해줄 생각이네.]
[그렇게 무리할 필요가 있겠나.]
[10년간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 정도 보상은 해줘야지.]
그게 강철이 들을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였다.
* * *
강철아.
강철아 이제 일어나야지.
이강철.
희미한 목소리에 강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막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등 쪽에서 따가운 고통이 느껴졌다.
“야 이놈아! 대산 입사 기념으로 백화점에서 옷 사준다면서!”
화들짝 놀란 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이어 날카로운 소리가 강철의 고막을 때렸다.
“해가 중천까지 떴다. 언제까지 잘 거야.”
놀란 강철이 익숙한 실루엣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 엄마…….”
“그래, 내가 네 엄마지 아빠냐. 대산 직원들은 대산 백화점에서 15% 할인된다면서. 엄마도 백화점에서 산 옷 한번 입어보자.”
강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
“뭐야 이놈이. 엄마한테 대산 입사했다고 옷 사러 가자며.”
“아니, 그게 아니라…… 나 대산 퇴사했는데…….”
그러자 이강철의 엄마 최용희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퇴, 퇴, 퇴사? 지금 신입사원 교육받고 와서 퇴사했다고?”
그 말에 강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신입사원 교육?”
“아이고, 이놈아. 대기업 갔다고 그렇게 좋아할 땐 언제고 퇴사라니. 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거냐. 어!”
“자, 잠깐만 신입사원 교육이라니.”
최용희가 바닥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남편 사별하고, 아들놈 하나 있는 거 열심히 키워놨더니 회사 들어가자마자 퇴사를 해. 아이고, 내가 지지리 복도 없지!”
그때 강철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여동생 이희진이 들어와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오빠! 그거 진짜야? 퇴사했다고? 나 빽 사준다고 했잖아. 대산 백화점 가서 빽 사준다고 했잖아!”
모녀의 호통에 강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자신은 분명 양아치들에게 맞아 길바닥에 누워 있어야 한다.
그런데 아픈 곳은 한 군데도 없었고, 자신이 숙식을 해결하는 사무실도 아니었다. 여긴 결혼 전 살던 어머니의 집. 자신의 방이었다.
강철은 바로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이건…….’
휴대전화부터가 최신 모델이 아니라 오성전자에서 나온 옛날 휴대전화였다. 터치를 해보니 오늘 일자가 나타났다.
‘…….’
자신이 알고 있는 일자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어머니의 말대로 오늘은 자신이 대산 그룹, 정확히는 대산 D&S에 입사 한 기념으로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백화점에 가는 날이었다. 백화점에서 옷을 사주는 순간 어머니가 눈물을 터뜨리는 바람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운명을 바로 잡도록 도와줘야지.]
‘그게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희진이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는 강철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내 빽!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 빽은 사주고 그만뒀어야지. 야, 정신 차려. 야!”
강철의 고개가 갈대처럼 흔들렸다. 최용희는 바닥을 두드리며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강철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정말 과거로 돌아왔단 말인가…….’
이런 소란 속에서도 변하는 게 없는 걸 보면 그게 맞았다. 정말 과거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비죽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왔다.
“흐흐, 흐흐흐흐.”
갑작스러운 웃음에 이희진이 손을 놓고 한 발짝 물러났다.
“어, 엄마. 오빠 봐봐. 이상해.”
최용희도 놀란 눈으로 강철을 보았다.
“강철아. 이강철.”
강철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크큭, 크크크큭. 돌아왔다. 진짜 돌아왔어.”
“가…… 강철아?”
이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강철이 만세를 불렀다.
“시X! 돌아왔다! 이번에는 성공하기 전까지 퇴사 안 한다!”
듣고 있던 최용희가 벌떡 일어나 강철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이게 엄마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뭐? 시X? 이강철 정신 안 차릴래!”
뒤통수에서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꿈은 깨어나지 않았다. 현실이라는 뜻이었다.
“가자, 백화점 가자!”
“뭐? 퇴사했다면서 무슨 백화점.”
강철이 크게 고개를 흔들었다.
“나 퇴사 안 했어. 꿈속에서 한 걸 착각했나 봐.”
“그래?”
이희진의 표정도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럼 내 빽 살 수 있는 거야?”
“앞으로 오빠 방 한 달 동안 청소하면.”
“당근이지!”
일어난 강철이 서랍 속에서 대산 그룹 사원증을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입을 쪽 맞추며 말했다.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갔는데 퇴사는 무슨 퇴사. 사골까지 쪽 빨아 먹고 나올 거야.”
강철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자신만만하게 퇴사를 한 이후에 어떤 삶이 펼쳐졌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대산 백화점.
국내 1위 유통 회사인 대산 그룹의 계열 사 중 한 곳이었다.
그곳에 강철 가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화점을 들어서자마자 최용희가 감탄을 터뜨렸다.
“확실히 백화점이 다르긴 하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강철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이날 이후로 엄마랑 백화점 온 적이 없는 것 같네…….’
박인영과는 수도 없이 백화점을 들락날락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월급은 높아졌고, 직원 할인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는 그러지 못했다. 그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강철은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마음껏 골라.”
“이놈아,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최용희의 팔짱을 낀 이희진도 잔뜩 들떠 있었다.
“오빠 나도 골라도 되지? 친구들도 다 빽 하나씩 있단 말이야.”
“너도 좋은 놈으로 하나 골라봐. 오늘 집안의 가장이자 오빠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테니까.”
그러고는 백화점 쇼핑을 시작했다.
하지만 최용희는 몇 군데를 둘러보더니 가격표를 보곤 다시 그 자리를 떠나길 일쑤였다.
몇 가지 마음에 드는 눈치였지만 색이 마음에 안 든다, 내 스타일은 따로 있다는 말로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결국, 10층 할인판매 행사장에서 바람막이를 골랐다.
“할인 상품도 직원 할인된다고 했지?”
강철은 그 옷을 뺏어 다시 자리에 내려두었다. 눈가가 시큰거려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거 말고, 제대로 된 거 사라니까.”
최용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점원을 불렀다.
“이게 뭐가 어때서. 이쁘기만 하고만. 언니 이거 L 사이즈 있어요?”
“어머, 아드님이 옷 사주러 오셨구나.”
“호호, 네. 이번에 취직해서 옷 한 벌 해주겠다고 하지 뭐에요.”
“어머, 좋으시겠다. 어디 취직하셨는데요?”
“대산 그룹이요. 여기 직원들은 백화점 15% 할인해 준다고 해서 왔어요.”
점원이 과장된 표정으로 최용희를 보았다.
“우와~ 아드님 공부 열심히 하셨나 보네.”
“호호호호.”
최용희의 웃음소리가 절로 높였다.
“마침 할인 중인데 진짜 싸게 잘 사시는 거예요. 이거 사시면 그냥 거저 가져가는 거라니까.”
“한번 줘보세요.”
“잠시만요.”
“엄마.”
최용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엄마는 이걸로 됐다. 충분히 만족해.”
최용희의 말에 강철도 더는 권유하지 못했다.
동생도 빽을 하나 샀다. 하지만 명품 빽은 아니었다. 최용희가 호랑이 눈을 뜨고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중저가 브랜드 중 데일리로 맬 수는 가방을 하나 골랐다.
그리고 셋은 꼭대기 층에 있는 식당가를 찾았다. 지하에 있는 푸드코트와는 다르게 가격대가 꽤 나가는 곳이었다.
‘여기군.’
음식점 교토.
과거 강철이 이곳을 찾은 건 어머니가 한 번도 초밥을 먹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달랐다.
“어? 이강철 씨?”
식사하던 박인영과 눈이 마주쳤다. 강철도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다 보네요.”
자신도 딱히 잘한 건 없었다. 사업을 하겠다고 나와 실패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박인영의 행동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쌤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둘 사이에 애가 없어서 그런지 더는 감정도 남아 있지 않구나.’
과거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 떨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행동은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미 서로의 속옷 치수까지 다 아는 사이였다. 전혀 떨리지 않았다.
감정을 훌훌 털어낸 강철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밥 맛있게 드세요.”
과거의 장인, 장모님께도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태연히 스쳐 지나가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이희진이 물었다.
“저 언니 누구야? 왜 이렇게 예뻐?”
“입사 동기. 백화점 마케팅팀이야.”
최용희도 관심을 표했다.
“참해 보이는구나.”
화려한 장미 속에 감춰진 가시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강철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관심 없어. 쟤도 그럴걸?”
“하긴 저렇게 예쁜 언니가 오빠 같은 오징어한테 관심을 줄 리가 없지.”
“이년아. 내 아들이 어디가 어때서.”
“어디가 어떻긴 오징어 중에 상 오징어지.”
강철이 입꼬리를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희진아, 지금 바로 가방 가져가서 환불받을까?”
이희진이 모른 척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헤헤, 오빠 밥 시켜야지. 여긴 뭐가 맛있으려나.”
슬쩍 박인영을 본 강철은 다시 바로 시선을 돌렸다.
* * *
집으로 돌아온 강철은 방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건 현실이다. 절대 꿈 같은 게 아니야.’
백화점에서 쇼핑하고, 정말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 박인영과 만났다. 몇 번을 되새김질해 보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군. 그럼 가장 먼저 뭘 해야 할까.’
로또 번호는 알지 못한다. 회사 생활은 경험하면서 차차 해나가면 된다. 사업은 했다가 다 망했다.
그러면…… 주식?
사업하느라 어떤 주식이 오르고 내리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오로지 일에만 집중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있었다.
‘크로믹스를 사자.’
크로믹스.
유명 전기차 브랜드로 강철이 살던 시대에는 완전 대세가 된 자동차 브랜드였다.
‘그걸 사고 일단 회사 일을 충실히 하는 거야.’
그냥 열심히 했을 때도 우수사원 표창을 받고, 핵심인재로 인정받았다. 앞으로 회사에서 일어날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열심히 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장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퇴사는 진짜 기회가 왔을 때 해도 되니까.’
강철은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이젠 과거가 되어버린 예전처럼 절대 살지 않겠다고.
* * *
아침 7시 30분.
강철은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대산 D&S의 본사는 중구 회현역 근처에 있었지만, 강철의 소속은 프리미엄 아울렛 지원팀이었다. 덕분에 압구정 로데오역 쪽으로 출근해야 했다.
아침 지하철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로데오역에서 내린 강철은 익숙하게 사무실을 찾아갔다. 이미 몇몇 출근한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여긴 그대로구나.’
강철이 입사한 곳은 대산 그룹 계열사 중 한 곳인 대산 D&S였다.
백화점, 마트, 프리미엄 아울렛 같은 다른 계열사의 영업 정보시스템, 물류 시스템, POS 같은 것들을 관리해주는 곳이었다.
강철은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같은 팀 소속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
조용훈 주임.
자신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선배였다.
“신입사원 이강철입니다.”
“아…… 오늘 신입 온다고 하더니.”
“네. 접니다.”
“반가워요. 조용훈 주임이에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훈이 강철을 데리고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대리님, 신입사원 왔어요.”
어두운 기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대리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어, 그래. 자리 안내해 주고. 반가워, 난 박철수 대리야.”
“네 대리님. 이강철입니다.”
“그래.”
박철수 대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용훈이 강철에게 속삭였다.
“박 대리님이 지금 좀 바빠요. 일이 하나 터져서.”
강철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과장님은 안 오셨으니까. 그때까지 자리 세팅하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강철은 조용훈이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십수 년 전 자신이 대산 D&S에서 일을 시작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감회가 새로웠다. 그 앞에는 회사에 나온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잘해보자. 이번에는 엔간하면 퇴사 안 할 테니까.’
회사 생활은 전쟁이지만 바깥은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강철은 이혼으로 지옥의 정점을 찍어보았다.
그러자 일에 대한 열정이 불끈불끈 치솟아 올랐다.
* * *
30분 뒤.
8시 30분이 되자 김정민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김정민 과장이 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표정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박 대리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밴사(카드결제 대행업체)랑 우리 쪽 월말 정산이 틀리다니.”
“지금 확인하고 있습니다. 대략 120만 원 차이가 납니다.”
김정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략 말고 정확하게 말해봐. 만원이라도 차이 나면 안 되는 거 몰라?”
“정확히 121만2천300원입니다.”
“밴사에서는 뭐래?”
“자기들은 아무 문제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POS기 쪽 데이터부터 다시 끌어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아직…….”
“현업 애들이 지금 얼마나 난리 치는 줄 알아?”
박철수가 푹 고개를 숙였다.
강철은 묘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았다.
‘이게 싫어서 퇴사했었지.’
대산 그룹은 유통이 본업인 회사였다. 그랬기에 전산은 본업인 유통을 지원하는 역할이었고, 자연스럽게 그룹 내에서 갑과 을이 만들어졌다.
대산 프리미엄 아울렛 소속 직원들이 ‘갑’.
그들을 지원하는 대산 D&S는 ‘을’.
그리고 대산 D&S의 협력사들은 ‘병’.
비록 ‘병’은 아니었지만, 그룹 내에서 겪는 ‘을’의 설움도 만만치 않았다. 그게 싫어 퇴사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던 박철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빨리 나가서 해결해.”
그 말에 박철수가 비척거리며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김정민이 강철을 보며 말했다.
“첫날부터 안 좋은 모습을 보였네.”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우리가 지금 좀 바쁜 상황이야. 차세대 시스템도 개발해야 하고, 기존 시스템도 운영해야 하고 또 부산에 신규매장 오픈도 준비해야 해서. 그래서 주임급으로 여기 조 주임이 있는데도 한 명 더 요청해서 받은 거야.”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바나 디비는 할 줄 알지?”
“네.”
“용훈아.”
“네.”
“신우 시스템에 말해서 이 친구 개발 세팅하는 법이랑 개발 어떻게 하는 좀 알려주라고 해.”
“네.”
“세팅 다 되면, 화면 개발 한 번 해봐.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내가 뭐 해야 하는지 알려줄 테니까.”
강철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일단 설명을 듣기로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와 같은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까.
* * *
신우 시스템.
대산 D&S의 협력사 중 한 곳으로 신우시스템에서 대산 프리미엄 아울렛의 차세대 영업정보 시스템을 실제 개발하는 곳이었다. 신우 시스템의 신종권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디비 접속정보는 이걸 사용하시면 되고요.”
“화면 개발은 케이소프트에서 나온 케이플랫폼이라는 걸 이용해서 개발하고 있는데 혹시 써보셨어요?”
“네. 입사 전에 조금.”
“아, 그럼 넘어갈게요.”
“네. 그러셔도 됩니다.”
“그리고 코드 설명해 드려야 하는데 여기가 화면 코드고, 실제 업무 로직은 자바로 짜고 있어요. 크게 보면 sales라 적혀 있는 패키지가 영업 쪽이고, account가 회계 쪽이고…….”
강철은 신종권의 말을 막았다.
“네. 일단 제가 먼저 보고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제게 더 시간 안 쏟으셔도 됩니다.”
당황한 신종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래요? 그럼 저야 편하지만.”
이런 설명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신입사원 교육 때 받은 것도 있고요. 학교에서도 관련 프로젝트를 많이 해서요.”
신종권의 입장에서 강철이 나이는 어리지만 ‘갑’사 직원이었다.
신종권이 순순히 물러나고 강철은 바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일단 월말 정산 문제부터 확인해서 해결하자.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인정받을 수 있겠지.’
그때 문이 열리며 검은 흑발을 휘날리며 잔뜩 미간을 찌푸린 여자가 들어왔다.
“김 과장님.”
그 소리에 김정민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아, 유 대리. 왔어.”
유혜인 대리.
강철에게는 ‘갑’인 대산 프리미엄 아울렛 소속 직원이었다.
“월 정산 어떻게 할 거예요. 할 거예요. 말 거예요.”
“그거 지금 박 대리가 확인하고 있으니까…….”
“됐고요. 앞으로 한 시간 안에 해결 못 하면 팀 평가에 반영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팀 평가.
대산 프리미엄 아울렛 직원들이 ‘갑’인 가장 큰 이유였다. 그들의 평가에 따라 대산 D&S에 소속된 강철의 인사 점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100%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영된다는 그 사실이 중요했다. 강철만이 아니라 김정민의 인사 점수도 달라진다. 김정민이 쩔쩔매는 이유였다.
“유 대리. 진짜 바로 된다니까. 박 대리 거의 다 끝났지?”
김정민이 박철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박철수는 그 눈짓을 보지 못했다.
“아직인데……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상황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도 결국 며칠이 지나 문제를 해결했고, 팀에도 영향을 미쳤다.
강철은 재빨리 문제를 확인해 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에러가 그대로 발생하고 있었다.
강철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저기…… 말씀드릴 게 하나 있는데요.”
김정민이 강철의 말을 막았다.
“다음에 말해. 지금 바빠.”
“월 정산 문제 관련해서 제가 뭔갈 찾은 것 같아서요.”
그러자 김정민이 관심을 보였다.
“뭐?”
“시스템 구성도를 살펴보니까. 카드결제 정보를 밴사에서 다시 우리 쪽으로 FTP로 넣어주고 있었습니다. 그걸 다시 오라클 디비에 업로드 시키고 있고.”
“그래서?”
“그때 문제가 생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업로드 시키면서 생성하는 인조키에 문제가 있어요.”
“인조키?”
“지금 보면 인조키를 오라클 시퀀스라는 걸로 만드는데, 그 시퀀스의 한계가 1억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근데 지금 업로드 시켜야 할 건수가 1억을 넘어서서 정산 자료가 누락 된 것 같아요. 일단 그걸 늘려주면 당장 문제는 해결될 것 같습니다.”
김정민의 눈이 박철수를 향했다.
김정민은 개발자가 아니라 관리자였다. 강철의 저런 기술적인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말…… 맞는 거야?”
재빨리 자리에 앉은 박철수가 관련 내용을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는 것 같은데요.”
이내 김정민이 유혜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하하. 보시다시피 방금 문제가 해결된 것 같네. 내가 말 했잖아. 곧 해결된다고.”
유혜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 좀 해주세요. 잘 좀. 저도 팀 평점 건드리기 싫으니까.”
“누구 부탁인데 당연히 잘해줘야지.”
“해결하자마자 연락해 주세요. 아셨죠?”
“알았다니까. 바쁠 텐데 어서 가봐.”
그 말에 유혜인이 몸을 돌렸다. 유혜인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김정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잔뜩 썩어 있었다.
“노트북 들고 회의실로 들어와.”
이번에도 박철수는 몸을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 밑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강철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강철을 쳐다보았다.
김정민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신입사원 교육 때 회사 전반에 대해 배웠습니다.”
“계속해 봐.”
“그때 영업, 회계, 재무, 인사 시스템 같은 것들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했고요.”
“우리 회사에서 그런 것도 가르쳐 주나?”
먼저 조용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요.”
박철수의 반응도 비슷했다.
“저도 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 명 모두 경력 공채로 들어온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신입 공채 교육에 관한 내용은 잘 알지 못했다.
김정민이 말했다.
“일단 설명부터 들어보자.”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찾아낸 문제에 관해 설명해 나갔다.
“보시면 FTP로 가져온 파일을 오라클 디비의 VAN_PAYMENT 테이블로 넣어야 하는데 들어가질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를 살펴봤더니 오라클에서 사용하는 시퀀스가 MAX에 도달해 있었어요.”
김정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쉽게 말해봐.”
강철의 머릿속으로 과거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맞다. 김 과장님도 IT 베이스가 아니었지.’
대산 D&S는 IT 회사였지만 엔지니어보다는 관리자가 많은 회사였다. 대부분의 일이 협력사 관리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데이터 11개를 넣어야 하는데 10개까지밖에 못 넣게 제한이 걸려 있었습니다.”
김정민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몰랐어?”
눈빛에는 강한 질책이 담겨 있었다. 우물쭈물하던 박철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일단 정산 금액 확인부터 하느라…….”
“그건 내가 화면으로 만들어두라고 하지 않았어? 언제까지 일일이 DB에 쿼리 날려서 확인할 거야.”
박철수도 가만히 듣고만 있진 않았다.
“차세대까지 진행하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김정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익숙한 모습에 강철은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졌다.
‘내가 겪은 과거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아.’
그렇다면 자신만 잘하면 된다. 양아치에게 맞아 죽는 결말보다는 헤피엔딩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당장의 문제는 MAX 값을 최대치로 올려주면 해결될 겁니다.”
김정민이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그럼 뭐 해, 당장 올리지 않고.”
강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임시방편입니다. 살펴보니 해당 값에 제한을 정해놓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정민을 비롯해 박철수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응?”
“보시면 해당 테이블은 임시 테이블입니다. FTP로 데이터를 끌어올 때마다 전체 데이터가 리셋되고 있어요.”
“어…… 그럼 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 아냐? 어차피 매번 데이터가 리셋 되니까.”
“문제는 해당 테이블이 아니라 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박철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밴사에서 올라온 데이터를 사용하는 곳이라면…….”
“네. 우리 쪽 POS 데이터와 비교 확인하는 집계 배치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박철수는 여전히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강철은 여전한 박철수의 모습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유통이 본업인 회사다 보니 대산 D&S에는 IT 능력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박철수도 능력이 없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속도 문제 때문에 ROWNUM을 사용해 1억 미만의 데이터만 가져오도록 해놨더군요. 거기에 아예 데이터 생성 자체를 1억 미만으로 막는 이중 장치를 걸어둔 거고요.”
김정민이 말했다.
“쉽게.”
“그러니까. 애초에 10건만 가져오게 쿼리문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11건을 가져오면 성능상에 문제가 있어서요. 그것부터 수정해야 합니다.”
김정민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진짜야?”
고개를 끄덕인 강철이 오라클 배치 프로시져를 화면에 띄웠다.
프로시저를 클릭하자 배치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에 적혀 있는 쿼리에는 선명하게 ROWNUM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강철의 입에서 청산유수로 말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여기 이 부분입니다.”
김정민이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흠…… 결국 오라클 성능개선을 해야 한다는 말이잖아. 여기 쿼리 튜닝 할 줄 아는 사람?”
박철수는 눈빛을 돌렸고, 조용훈의 시선도 탁자 위 수첩을 향해 있었다.
쿼리 튜닝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이들이 모르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김정민이 박철수를 보며 말했다.
“협력사에 할 줄 아는 사람 있나 한번 물어봐.”
강철이 그런 김정민을 보며 말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 혹시 너…… 할 줄 알아?”
“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정민은 신입이 쿼리 튜닝을 한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이야? 쿼리 튜닝이 뭔진 알고 있는 거지?”
하지만 강철은 보통 신입이 아니었다. 강철은 바로 실력으로 보여주었다.
“현 상황의 경우에는 인덱스 컬럼 순서를 몇 가지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해결 가능합니다. 성능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큰 요소는 인덱스니까요. 쿼리 튜닝 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박철수는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그건 조용훈도 김정민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들은 개발자라기보다 관리자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김정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는 말이지.”
강철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짧은 시간 안에 이걸 찾아냈다고?”
“오전 회의 시간에 이 내용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서 한번 찾아봤습니다.”
김정민은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어차피 문제가 해결되면 좋은 일이다.
회사는 과정이 아닌 결과로 말하는 곳이었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만 하자. 그 인덱스 튜닝이란 거 해서 박 대리한테 말해줘.”
“네.”
그 말로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온 강철을 조용훈이 슬쩍 불렀다.
“커피 한잔할까요?”
“네. 조 주임님.”
조용훈은 강철을 데리고 국내 최대 커피 체인점인 커피트리로 갔다. 주문한 조용훈이 사원증을 내밀었다.
“여기 사원증이요.”
커피트리도 대산 그룹의 자회사였다. 더구나 사원증이 있으면 30%나 할인이 된다.
하지만 조용훈은 꼭 할인 때문에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다.
“할인되셨습니다.”
그러자 뒤에 있는 사람이 조용훈을 힐끔거렸다. 다시 사원증을 목에 건 조용훈이 보란 듯이 계산대를 나섰다.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본 강철의 입가에 피식하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여전하구나. 여전해.’
하긴 과거로 돌아왔으니 여전할 수밖에 없나. 그런 생각으로 물끄러미 조용훈을 보았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조용훈이 급히 입을 열었다.
“별건 아니에요. 오자마자 제대로 인사도 못 한 것 같아서.”
“아, 네.”
“학부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에요. 오자마자 문제도 턱턱 찾아내고.”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
“하긴 뭐, 그렇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니까.”
강철의 이마에 힘줄이 꿈틀거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훈이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나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문제였는데. 보셨다시피 개발 일만 하는 게 아니라서요. 협력사 관리만 해도 정신이 없거든요. 산출물 확인하고 개발 테스트해 주고.”
강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후루룩 커피를 마셨다.
“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그런 거 찾아내면 저한테도 살짝 귀띔부터 해 주세요. 제가 그래도 명색이 강철 씨 사수인데 뭘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강철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굳이 이 자리에서 논쟁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하다 보니 내 이야기만 했네, 혹시 회사 생활에 관해서 궁금한 거 있어요?”
강철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이요. 지금은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라서요.”
그 말에 조용훈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막 들어왔으니 그럴 수 있겠네요. 궁금한 거 생기면 언제든지 물어봐요.”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저녁때 팀장님이랑 식사 있어요.”
“네.”
친절하게 자신을 위해주는 것 같지만 강철은 저 안에 숨겨진 가면을 알고 있었다.
‘친절한 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굳이 내뱉지는 않았다. 어차피 조용훈 정도는 간단하게 요리 할 수 있었다.
강철은 다른 쪽으로 생각을 집중했다.
‘보안 점검, 그것부터 해야 해.’
곧 보안 사건이 터진다. 강철은 그걸 막아내고 팀장의 눈에 들 생각이었다.
* * *
저녁 시간.
사무실에는 수십 명이 근무하고 있지만 대산 D&S 사람들은 7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도 프리미엄 아울렛 팀 사람은 4명. 그 네 명에 팀장인 하진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강철이 하진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다시 만났네요. 팀장님 이번에는 꼭 끝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하진기.
그는 정보처리기술사라는 어려운 자격증을 딸 만큼 IT분야의 실력자였다. 자신이 실력이 있는 만큼 능력 있는 인물을 좋아했다.
강철은 능력을 보여주었고, 하진기의 총애를 받아 우수사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강철이 퇴사를 결정했을 때도 가장 아쉬워한 사람이 하진기였다.
하진기가 강철을 보며 물었다.
“오자마자 한 건 했다고?”
“네. 오라클 시퀀스 관련 문제를 하나 찾아서 해결했습니다.”
“요즘 신입사원 교육 때는 그런 것도 배우나?”
하진기도 대산 D&S 공채 출신이었다. 그랬기에 그도 신입사원 공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에 이런 문제를 해결할 만한 교육은 없었다.
“관련해서는 학교에서 꾸준히 공부했었고, 신입사원 교육에서는 영업 정보 시스템의 큰 그림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진기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강철을 보았다.
“그걸로 오자마자 문제를 파악해 해결했다고?”
“네.”
그 말에 하진기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 이제야 좀 제대로 된 놈이 들어왔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영 없는 건 아니야.”
그러자 박철수와 조용훈이 움찔거렸다. 이 둘은 평소 실력 때문에 하진기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열심히 해봐. 어려운 점 있으면 여기 김 과장이나 나한테 이야기하고.”
그 말에 강철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그럼……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넷의 시선이 강철을 향했다. 박철수는 또 자신의 실수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했고, 조용훈은 굴러들어온 돌의 행태가 영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진기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편하게 말해봐.”
“자체 보안 점검을 한 번 시행했으면 합니다.”
“뭐?”
“신입 공채 교육 시간에 배웠는데 보안은 공기 같은 거라 잘 돌아갈 때는 모르는 데 문제가 생기면 아주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기억을 떠올려 오후에 몇 가지 테스트를 해보니 문제 소지가 있어서요.”
하진기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할 수는 있지만 언제나 예산이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흠…….”
강철이 그 점을 파고들었다.
“혹시 예산이 문제면 제게 시간을 주시면 일정 수준까지는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 그쪽도 공부한 모양이지?”
“혹시 몰라서 두루두루 공부했습니다.”
하진기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신입 때는 여러 방면을 넓게 아는 게 좋지.”
그러곤 김정민을 보며 말했다.
“김 과장. 들었지?”
“네. 보안 점검시키겠습니다.”
“그래.”
마침 종업원이 음식을 들고 왔다.
“주문하신 안심 4인분입니다.”
다들 준비된 음식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을 때 조용훈의 표정은 썩어들어갔다.
강철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