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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66화 (366/369)

366화

<바람은 멈추고>

서민국은 결국 운명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하늘의 이치였고 세상이 정한 보이지 않는 법칙이었다.

다만 그것에 연연할 정도로 그는 나약하지 않다.

인간으로서 발악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되, 그렇다고 해서 그를 도와주는 상식 외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버틸 수 있다. 그에겐 그런 힘이 있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한 퍼즐 또한, 이제는 알고 있다.

"흐음."

민국은 오래 전, 300년의 기억 사건 이후 흑설 공주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떠올리자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그 후 흑설 공주에게 듣게 된 퍼즐들은 엄청났다. 세상에 운명의 이치라는 것이 존재하고, 민국은 애초부터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건 역시 그 양반이겠지.'

민국은 터벅터벅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1층 문을 열고 하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내리쬐는 햇볕은 쨍쨍하여 아직 오전 시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계단을 올라간 끝에 마침내 현관문 앞에 도달한다. 하지만 도달한 현관문 역시 비껴지나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걸었다.

"……."

한참을 오른 끝에 마침내 옥상에 도착하게 되었다. 성큼 옥상에 도착하여 정면을 보자, 이미 한 소녀가 저평선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뒷모습은 한없이 여리고 어두워 보인다. 이 여름 날씨에 맞지 않게 입고 있는 검은 코트는 이따금씩 부는 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민국은 그것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크흠! …그렇게 입고 있으시면 감기 걸립니다?"

"왔나."

"왔습죠."

대충 대꾸하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이번엔 흑마법사의 옆에 서서 똑같이 머나먼 저평선을 바라보는 민국이었다. 흑마법사는 민국에게로 향해 있던 고개를 다시 저평선으로 돌렸다.

"일단 감사의 말은 전해야겠지요.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리 말하며 흑마법사가 민국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때 또 한 번 바람이 불었다. 흑마법사의 여린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그녀의 코트도 또 한 번 흔들렸다.

"당연한 거니까."

"……."

민국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겠지. 당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런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 이 얼굴을 보고 있으니 확신할 수 있다.

"흑설 공주."

"……."

"당신도 그녀였군요."

흑설 공주. 앞에 있는 흑마법사와는 분명히 다른 여자였다. 좀 더 이기적이고, 오고가는 보답과 대가를 중요시 여기며, 인간성보단 물질성을 더 우위로 여기는 여자였다.

이미 자신이 꿈꾸던 낭만은 모두 현실이란 구렁텅이에 던져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흑설 공주는 다르다. 현재의 그녀와는 달리 과거의 그녀는 누구보다도 순진해 보였고 순수해 보였다.

"……."

흑설 공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저평선을 바라보았다. 앳된 그녀의 얼굴에는, 사실 앳된 것이라 표현하기에 우스울 만큼의 고된 아픔들이 담겨 있었다.

"만난 건 이 근처의 골목길에서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남들과는 다르게 마법을 갖고 태어난 나는 마녀라고 불리며 살았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삿대질을 두려워해 결국 이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

"오랜 노력 끝에 결국 이 세계에 발을 딛게 되었지만 마법을 발동하는데 사용된 정신적 데미지 때문에 심신이 지쳐 있었지."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비릿한 미소였지만, 그것은 기쁨이 가득한 미소가 분명했다.

"그때 네가 나타나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다. 지금의 너보다는 한 살이 어린 모습이었지."

서민국과 흑마법사가 처음 조우했던 해였다.

"나는 너에게 내가 살던 세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상냥함을 받았고, 나는 그런 너에게 빠져 사랑하게 되었다."

서로 사랑했고, 일 년간 함께 사랑을 싹터갔다.

"그러다 느닷없이 죽음이 찾아왔지. 그 누구도 예상 못한 어이없는 죽음."

"……."

"너를 시기 질투하던 누군가가 너를 칼로 찔러 죽였고, 결국에 너는 그 세계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렸다."

흑설 공주는 울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인간 취급해주던 그가 죽었음에.

"과거로 돌아가는 마법이 그때 나에겐 없었다. 그저 나는 널 살릴 방법만을 강구하고 있었지. 그리고 생각한 게 또 다른 세계의 너를 만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흑마법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고, 그 순간 그녀만이 걸어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

"나는 너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나에게 없었기에, 나는 또 다른 너를 만나러 갔다."

"……."

"그리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리기를 반복했지."

하지만 계속 죽어 나갔다. 운명의 흐름이란 이상한 세상의 이치 때문에 계속해서 다른 세계의 서민국은 죽어 나갔다.

은별과 단둘이 사랑을 하고 있던 민국이 죽기도 했고, 서라와 슬슬 썸을 타던 와중에 죽기도 했다. 예나만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던 민국이 죽기도 했다.

설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들 그를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던 흑설 공주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넌 죽었다."

"……."

"그리고, 그때 찾은 것이 바로 이 세계."

"……."

"나는 이 세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이미 자신이 겪었던 과거를 전부 지나간 그녀. 그러나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을 고된 시련과 싸워온 지라 결국엔 운명의 흐름을 받아들이자고 생각한 그녀.

"그녀에겐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마법이 있었지. 나는 그녀에게 그것을 배웠고, 너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흑설 공주는 말했었다. 아무리 살리고 살려도 결국엔 또다시 죽게 될 거라고. 그때마다 느끼는 가슴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누군가가 옆에서 계속 죽어나가면서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거의 흑설 공주는 지금 이곳에서 민국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살리고 싶었다. 서민국."

사실상 팬이고 뭐고 그런 건 다 헛소리다. 흑마법사는 남 모르게 비밀을 안고 왔던 것이다. 민국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운을 띄었다.

"…크흠, 당신에게 상냥했던 저는 꽤나 로리콘이었던 모양이군요."

"지금도 그렇지 않나. 아닌가?"

흑마법사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묻는다. 민국은 '서라를 생각하니 왠지 부정은 할 수 없네.'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뒤 물었다.

"그럼… 이젠 어떡하실 겁니까?"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알게 되었겠다… 이제 나를 기다리던 민국에게로 가야겠지."

사실상 오늘이 눈앞의 흑설 공주와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이 되는 셈이다. 애초에 현재 시대의 흑설 공주가 그녀인 셈이었으니까.

"그렇군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이지. 그런 건."

또다시 비릿하게 웃음 짓는 흑설 공주. 하지만 그건 정확하다. 현재 시대의 흑설 공주는 분명히 민국을 몇 번이고 되살렸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손을 놓은 이유엔, 뭔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흑마법사도 요 몇 개월간 잠적을 하며 알아본 끝에 답을 내린 결론이 있었다. 아무리 다른 세계의 민국을 되살리고 되살려도, 결국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시 죽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필시 민국은 그것이 문제점일 거라 생각했다. 하늘의 이치를 지켜야 한다는 그놈의 대왕 새끼는… 어떻게든 민국을 하늘 위로 끌어오려고 했으니까.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자니 괴로웠던 거겠지.

"그렇지요."

민국 역시도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늘 지어 보이던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사실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이제 알 건 다 알게 된 지 오래였고, 이제부턴 어떻게 자신의 것들을 지켜나가느냐가 제일 중요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민국 고놈은 일편단심인가 봅니다. 여자에게 손버릇은 안 들이겠네요."

"훗."

그 말에 흑설 공주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만일 여기 서민국처럼 행동했더라면 진작에 죽도록 내버려뒀겠지."

"사, 사스가 흑설 공주…!"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결국 도왔을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미소를 지었고, 흑설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다."

"저야 뭘요."

그리 말하는 순간이었다. 민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게 되었다. 그러자 앞에는, 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후우…."

고개를 돌려 다시 저평선을 바라본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에필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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