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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65화 (365/369)

365화

그렇다. 세상엔 일찍 태어나 안쓰러운 나이에 죽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 어린 아이들도 갑작스런 사고로 죽기도 마련이고, 그 아이를 지켜야만 하는 나이에 이승을 떠나는 부모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세상의 돌고 도는 이치, 그야말로 일종의 흐름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놈들이 죽고 싶겠냐고요."

"세상의 이치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의 흐름을 어기는 자야말로 올바르지 못한 자이니."

"슈벌, 광신교세요?"

염라대왕을 향해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응하는 민국이었다. 이윽고 민국에게 제압 당하고 있던 저승사자가 그 발언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네 이놈! 감히 염라 대왕님께 무슨 소리를…! 네가 이러쿵 저러쿵 할 분이 아니다!"

"안 물어봤다 요다야, 이야이야호."

"으아악!"

꽈악하고 저승사자의 불알을 강하게 움켜쥐는 민국이었다. 감촉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같은 동성으로서 뭔가 꺼림칙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제 와서 때기에도 늦었다. 울먹이면서 비명을 지르는 저승사자를 보며 민국이 물었다.

"그럼 이 저승사자의 목숨이 여기서 사라지는 것도 세상의 이치입니까?"

"기어이 죄를 지으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민국이 방심한 찰나였다. 염라대왕이 허공에서 손을 홱 그었다. 그러자….

"어억? 어억!!!"

민국은 언제 저승사자의 불알을 잡고 있었냐는 듯 손을 회수하게 되었고, 심지어 몸을 뒤로 완전히 물리게 되었다.

"포기해라 서민국.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이런, 미친."

손을 물린 민국은 어이없는 얼굴을 지었다. 하지만 확실히 염라대왕은 염라대왕인가 보다. 자기 몸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수준이라니. 그러나 민국에겐 아직 미련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백색의 공간에 미련을 갖고 남게 된 것이다.

"그만 포기하거라. 민국아."

자칭 할애비라 하는 노인이 민국에게 말한다. 노인 역시 씁쓸한 눈매를 짓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후우."

가볍게 숨을 모았다가 내쉬는 민국이었다. 꿀꺽 침을 삼키는 그에게 현재 이렇다 할 능력 같은 건 존재치 않았다. 어떻게 보든 일개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우우우웅.

"앵…?"

"…!"

"여, 염라대왕 님! 저것은!"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급작스럽게 민국의 몸에서 빛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은 서서히 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민국 역시 깜짝 놀랄 정도의 강렬한 빛에 염라대왕이 험상 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요망한 마녀의 행위로구나."

요망한 마녀, 흑설 공주의 행위. 염라대왕의 말을 통해 그 뜻을 가늠한 민국이 정면을 바라보았다. 염라대왕은 단호하게 말을 짓고 있었다.

"서민국. 결국 그 세상으로 돌아가더라도 너는 항상 죽음에 쫓겨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대로 포기할 거라 생각하느냐?"

"……."

"지금이라도 너의 가족들과, 너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멈추어라. 그게 우리를 노하지 않게 하는 행위니."

결국 다시 돌아가더라도 문제는 생길 것이다. 민국은 항상 염라대왕의 손아귀에 쫓겨다닐 것이고, 그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도 피폐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서라면 아무래도 돌아가지 않는 게 올바른 길일 것이었다.

"조시나 까잡숴."

"……."

"난 아직 못 본 야동도 많고 나눈 행복도 적습니다요. 이대로 죽기엔 아쉽지 않겠습니까?"

염라대왕의 노한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옆에 서 있는 저승사자가 그것을 보고 오들오들 떨 지경이었다.

"결국 지옥을 택한 것이냐."

"지옥인지 아닌지는 내가 결정하지요. 댁이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힘들 일이 있을 리 없잖아?"

민국은 자기 가슴을 퍽 치면서 소리쳤다.

"내가 다 살려낼 거니깐!"

씨발 내가 다 살려낼 테니깐!

그 오그라드는 한 마디와 함께 강하게 번진 빛은 마침내 민국을 삼켜내 버렸다. 백색의 공간에 남게 된 노인과 저승사자, 염라대왕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설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순간 분명 이 검은 코트의 소녀는 자신을 공격해서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만한 능력이 있음을 단숨에 보여준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자신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

그녀의 시선은 이미 숨이 멎어버린 시체, 서민국에게로 향해 있었는데….

"……!"

어느 순간이었다. 설화는 숨이 멎어버렸어야 할 서민국의 안색에 다시 생기가 돋기 시작하는 걸 목도하게 되었다. 그녀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고,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민국… 님!"

"……."

서서히 눈을 뜨게 된 민국은, 자신의 눈앞에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흘리는 설화를 보게 되었다. 얼굴에 핏물이 가득 묻어 있는 그녀는 누가 보아도, 걸어가선 안 될 길을 걸어간 모습이었다.

"설화야."

"민국… 민국 님! 으아앙!"

설화는 민국을 보자마자 삼키고 있던 슬픔이 터져 나왔는지, 저도 모르게 오열하기 시작했다. 민국은 자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오열하는 설화를 보다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흑마법사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흑마법사 님."

"그래."

"부탁이 있습니다. 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혹시 흑설 공주처럼 조건을 내걸까 궁금해하던 민국이었다.

"들어주도록 하지."

그러나 그 궁금증은 사실 무의미한 것이었다. 흑마법사는 결코 그런 조건을 내걸고 민국을 도울 인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우우우웅….

"……."

따뜻한 감각이 새어 들어온다. 동시에 다시 절로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오열하던 설화 역시,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잠자는 아이처럼 새근새근 곤히 눈을 감고 말았다. 동시에 핏빛과 논란으로 떠들썩하던 거리가 지우개에 지워지듯 새하얗게 사라지고… 얼마지 않아 이 세상은….

"…라는 내용으로 전개를 해보았는데…."

"좆투더망이군요. 흠흠."

이곳은 유이의 집. 민국은 팔짱을 끼고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적은 작품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이유는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지금까지 적은 작품의 마지막 전개를 어떻게 구상할까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데, 혼자로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주변 인들의 조언을 구해보기로 한 것이었다.

"슴가의 제왕, 유이 씨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좆투더망이랍니다. 정말로 앙칼지고 솔직한 여자가 아닐 수 없군요. 때때로 저보다 더 사악해 보인다니까요?"

아무 말도 않고 있던 유이는 졸지에 나쁜 여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유이는 그저 우물쭈물거리면서 손만 꼼지락 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민국의 옆얼굴을 스리슬쩍 훔쳐볼 따름이다.

"……."

그를 짝사랑하게 된 지도 벌써 몇 주는 흐른 실정이었다. 아직 마음을 밝히지도 않았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확신을 하면서도 여전히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제 막 마음 속 감정이 다시 싹트기 시작한 그녀로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거쳐 지나가야 할 순서가 많았다.

"그, 그렇게 별로입니까?"

"별로고 자시고 거기서 염라대왕이 왜 튀어나옵니까? 너무 뜬끔없지 않아요?"

"하지만 어차피 개막장인 작품이니까 상관없을 텐데…."

"억, 씨발. 듣고 보니 그러네."

갑자기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

"그럼 합격!"

결국 합격 처리! 마지막 내용 전개는 이렇게 정해진 모양이었다. 추천 받고 싶어 하는 작가도 비제이 현대왕인 서민국이 혼쾌히 OK 처리를 하자 그 스토리로 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유이 씨, 뭔가 목 마르지 않습니까? 물 있어요?"

"물은…."

"헐, 물이 있다고요? 세상에, 유이 씨의 집에 물이 있다니!"

'꺄아아아!'하고 진심으로 비명을 지르는 민국. 공포의 도가니가 아닐 수 없다! 유이 씨의 집에 물이 있다니!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 히키코모리의 집에 물이 있다니!

"……."

유이는 그저 입만 굳게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근처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라도 몇 개 사오겠습니다. 유이 씨는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

"내 정액 말입니까? 이 음란한 여자 같으니. 그냥 음료수 사오기로 하지요."

"……."

"작가님은 뭐 드시고 싶으십니까?"

"아, 저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작가 말은 순식간에 스킵 당하고, 민국은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근처의 슈퍼마켓으로 향하며 민국은 내리쬐는 하늘의 햇볕을 올려다보았다.

"맑구만."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완결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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