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한참을 걸어가던 끝에였다. 저평선도 없이 오로지 무로만 이루어진 그 하얀 공간에 어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모자를 쓴 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창백한 안색의 그 남자는 마치 여자들이 엉망으로 화장을 한 듯한 끔찍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민국은 대번에 알고 있었다. 저 양반이 저승사자구나!
"서민국."
"……."
"자네를 데리러 왔네."
저승사자는 서민국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말했다.
"이제 이승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그만 따라오게."
마치 한참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저승사자의 노여움이 서린 말에 민국은 침묵했다. 민국의 자칭 할아버지라 하는 노인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떡할 거냐."
"……."
어차피 지금 다시 되살아난다 해도 민국은 계속 죽음의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위협이 지속되면 지속될 수록 결과적으로 힘들어지는 건 민국과 주위 사람들이다. 특히나 민국을 사랑하고 그를 아끼는 주위 사람들 입장에선, 그의 느닷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결코 달갑게 받아들일 리 전무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플 것이었다.
"……."
그것을 감안하면 차라리 여기서 숨을 거두는 게 올바를 지 모른다고, 서민국은 조금은 생각했다. 사실 비관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낙천적인 인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늘 자신감과 긍정적인 힘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인생이었다. 비록 엿같고 좆같은 일도 많았지만! 그래! 늘 그렇게 살아왔었다!
'하지만 말이지. 이쯤되면 여기서 손을 놓는 게 올바를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단 말이야.'
아무리 긍정적인 인간이라 해도 결국 인간은 인간이었다. 훗날 있을 위기까지 감안을 하면, 차라리 여기서 손을 때는 게 민국으로서 올바른 도리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민국은 천천히 저승사자에게로 군말없이 걸어나갔다.
노인은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았고, 저승사자는 마음을 접었나 보다 생각하여 손을 건네고 있었다.
"이 손을 잡게."
"……."
민국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 손을 잡으면 이제 이승과의 연은 끝나는 셈이다. 은별도, 예나도, 서라도, 더 이상 슬퍼하는 일 없이 끝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민국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저승사자의 손을 붙잡으려고 했다. 아주 천천히, 천천히….
"으억!"
"아도도도도!"
"이, 이… 이이! 천박한 놈이 무슨 짓이냐아아아!"
그리고 붙잡는 척하면서 빠르게 저승사자의 팔을 꺾는 서민국이었다! 그의 느닷없는 해괴한 행동에 저승사자는 진심으로 황당한 듯 그렇게 호통을 쳤다. 하지만 팔이 뒤로 꺾여 있는 상태라 차마 대응하기도 버거운 상태. 민국은 나머지 손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얼굴을 붙잡으려고 하는 저승사자의 팔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말했다.
"야 이 못돼처먹은 저승사자 놈아."
"?!?!?!?!"
민국은 진심을 담아 호통쳤다.
"넌 슈벌 오래 살다 죽어서 이승에 미련이 없는지는 몰라도 나는 아닙니다요. 아직 섹스도 덜 해봤고 가슴도 덜 만져봤고 데이트도 덜 해봤어!"
"이, 이런 추잡한…!"
"추잡하긴 뭐가 추잡하냐! 니 엄마도 미역국 먹고 너 낳기 전에 네 아빠랑 으쌰으쌰 운동했다 자식아!"
이것이 진정한 패드립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하염없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민국이었다. 사실상 민국도 열이 받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평범하게 좀 살고 싶은데 이놈의 거지 같은 놈들이 자꾸 자신을 죽여대고 있으니! 기분이 영 착잡하지 않을 소냐!
"사람이 최소한의 양심이 있으면 젋은 나이에 발버둥치는 거 보고 '아! 이놈 정말 살고 싶구나! 좀 봐줘야겠다!'하며 아령을 배풀 생각도 해야지, 염라대왕이 얼마나 뇌물 쳐먹었으면 그런 아령도 안 배풀어!"
"이, 이거 놔라! 이 추잡한…!"
"조까 내 코딱지나 쳐먹어!"
"…으아아악!"
코를 파서 왕건이 나온 것을 그대로 저승사자의 입속에 쑤셔버리는 민국이었다. 저승사자는 퉷퉷 거리면서 그 왕건을 뱉어내는데 기를 썼다. 민국은 졸지에 손가락에 묻은 저승사자의 침을 더럽다는 듯 '으으으~'하면서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무튼 팔 부러뜨리기 전에 빨리 돌려보내줘라. 이건 명령이다."
"그, 그런… 세상의 이치에 어긋나는 행동은 우리의 도리가 아니다!"
"슈벌 젋은 나이에 요절하게 만드는 건 세상의 이치냐!"
팔을 부러뜨릴 듯이 더욱 강하게 꺾는 민국이었고 저승사자는 울며불며 비명을 지를 따름이었다. 할애비 되는 노인이 그만하라고 제지를 가하려던 찰나였다. 그때, 하얀 공간을 뒤흔드는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쿠웅!
"뜨억?"
너무나도 큰 굉음에 하던 행동을 멈추고 순간 눈을 크게 뜨는 민국이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찾던 서민국. 근데 이상하게도 팔이 꺾여 있는 저승사자가 무언가에 질려버린 것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민국은 그런 저승사자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다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러자 하얀 공간 위에서 누군가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정말이지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덩치가 굉장히 크고, 피부색이 붉었으며, 얼굴은 마치 한 나라를 지배하는 왕처럼 강대하고 굳건했다.
"여, 염라대왕 님!"
호랑이가 제 말하면 찾아오듯이… 염라대왕도 제 말하듯 민국의 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
설화의 폭주로 인해 사건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었다. 결국 부대까지 파견하여 설화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실제로 총격까지 발생하기 시작했다.
결국 사살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자그마치 세 시간 동안 설화가 죽인 사람의 숫자만 해도 백명이 넘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죄악감이 없다.
민국이 죽은 지금 그녀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악이자 죄로 보일 뿐이었다.
"다 없애버릴 거예요~."
등에서 뽑아 나오는 무수한 투명 손들이 허공을 가르는 탄알들을 막아주고, 심지어 그 투명 손들이 100미터가 넘는 곳을 넘나들며 경찰들의 살아있는 부위를 유린한다. 비명 소리가 사방 곳곳에서 퍼져 나오고, 사람들은 그저 대피하기에 바쁘다.
설화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다 무의미했으며, 지금 이곳에서 그녀는 단연 최강이었다.
"……."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검은 코트의 소녀가 있었다. 15살의 소녀로 보이는 듯한 그 어린 듯한 아이는, 얼굴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도 냉랭하고 진중한 모습이었다.
검은 코트의 그녀는 경찰들에게 사격 받고 있는 설화에게로 걸어 나갔다. 그 와중에 허공을 가르는 총알 세례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검은 코트의 소녀에게는 조금도 닿지 않았고, 심지어 그들은 검은 코트의 소녀가 존재한단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설화는 볼 수 있었다.
"당신도 몬스터인가요?"
"……."
"그럼 죽이는 게 옳겠죠~."
그리고 설화가 미소를 지으며 투명 손을 내뻗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뻗어 나간 그 투명 손은 검은 코트의 소녀를 집어삼킬 듯이 움직였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 투명 손이 닿은 곳은 허공 뿐이었다.
"……."
"……."
거의 빛과 맞먹는 속도로 설화의 앞에 다다른 흑마법사였다. 그녀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놀란 얼굴을 짓고 있는 설화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스윽 눈길을 내려 투명 손에 받들려 있는 한 남자의 씁쓸한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
"어리석구나, 꼬맹이여."
"허허."
민국은 허탈한 웃음밖에 내뱉지 못했다. 앞에 서 있는 강대한 그것은 정말이지 산에 가까웠다. 저승사자를 통해 염라대왕이라 불린 그 존재는, 민국을 내려다보면서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늘에 도전하는 건 우둔하고 어리석은 짓이지. 훗날 환생의 기회도 철회될 수 있는 법이다."
염라대왕이 말을 이었다.
"서민국. 너는 오랜 시간 동안 세상의 이치를 더럽히는 마녀들의 도움을 받아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질서와 이치를 무너뜨리는 행위. 그것이 정녕 올바르다고 생각하느냐?"
세상을 이치를 더럽히는 마녀들. 그것은 필시 흑마법사와 흑설 공주를 의미할 것이었다. 민국이 죽음을 앞다투고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도와주었던 그녀들. 물론 걔 중에는 대가를 요구하는 마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민국에게 이로운 행동을 한 건 자명했다. 민국은 입을 열었다.
"그럼 젋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도록 만드는 것도 세상의 이치에 속합니까?"
"너보다 더 젋은 나이에 죽는 꼬마 아이들도 있지. 어떤 사건으로, 혹은 질병으로, 그들 역시 억울함과 원통함을 가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