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에잇 쯔쯔쯔쯔, 우매한 놈! 얼마나 나이 쳐묵었다고 또 여기오고 지랄이냐!’
‘뭐요… 저 아십니까?’
딱콩!
‘끄악! …아니, 저 언제 봤다고 때리고 그래요!’
‘이놈이 나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까먹어! 니 엄마 아빠는 부모도 없다냐!’
‘슈밤… 제 엄마 아빠 부모님 없거든요!’
‘이놈이 폐드립치는 거 보게!’
딱콩!
‘끄악!’
폐드립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실이었지만… 민국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팡이로 하도 두드려 맞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민국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하얀 백색의 공간.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이 백색의 공간은 그야말로 민국이 죽었음을 확실하게 인지시켜주고 있었다. 민국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설마 그렇게 또 어이없이 죽을 줄이야….’
심지어 억울한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열등감 해커를 보호하느라 설화의 공격을 대신 맞아주다니….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고 답답했다.
‘에잇 쯔쯔쯔, 인생 좀 일취월장하며 산다 싶더니 또 그런 꼬락서니로 죽고 말이야. 하늘에서 지켜보던 할애비가 노하시겠다 이놈아!’
‘할애비 없는데요?’
‘여기 있다 이놈아!’
딱콩!
‘끄악!’
자칭 민국의 할애비라고 하는 노인을 만나 하얀 백색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민국이었다.
‘그런데 대체 여긴 어디예요? 무슨 하늘나라는 아닐 테고.’
‘그래. 하늘나라는 아니지. 네놈도 워낙 기구한 인생이라서 말이다.’
민국은 옆에서 걷는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허리를 굽힌 채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가는 할아버지는 아무리 봐도 생전 처음 보는 할아버지였다. 애초에 그때 접했던 건 꿈속에서 아주 잠시간이었으니… 기억이 날 리도 전무했다.
‘네놈이 미련을 갖고 있다는 거야. 이승에 말이다.’
‘…….’
민국은 고개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끝자락을 마냥 바라보고 있자니, 흑설 공주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사실상 희귀병에 걸렸을 때부터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던 서민국은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우연찮게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일 년의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그 삶은 워낙 버라이어티하였고 죽음이란 현상 또한 번번히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젠…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늘께선 네가 일찍이 삶을 접고 올라오길 기다리고 계시지.’
‘…….’
‘하지만 그것을 원치 않으니 너는 하늘도 뭣도 아닌 이런 곳에 서성이고 있는 거야. 죽은 후에도 말이다.’
노인의 말에 민국은 정면만 쳐다보며 말문을 닫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
‘돌아간 후에도 앞으로 네 팔자가 나아지는 건 없을 거다.’
노인은 마치 민국의 앞으로의 삶을 전부 꿰뚫고 있다는 것처럼 한탄하고 있었다.
‘평생 쫓겨 다닐 거야. 죽음의 그늘에 말이다.’
‘…….’
‘차라리 여기서 멈추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 뜻이다.’
만일 이렇게 생각해보자. 서민국이 목소리의 희귀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과연 이 지경의 일이 벌어졌을까? 비록 소꿉친구인 예나는 미친 듯이 슬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을 한 상황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연결이 되는 고리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설사 자신이 죽었다 한들 그녀에게도 큰 피해가 없었을 것이다. 그건 은별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때부터 자신에게 이미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들, 결코 서로가 서로에게 집착하고 힘겹게 인내하는 꼴은 없었을 것이다. 서라 역시도 300년의 기억에 얽히지도 않았을 것이고… 유이 씨도….
“…….”
그리고 지금, 민국은 현실의 상황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떤 식으로 돌아갈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남자를 잃어버린 설화는 지금쯤 아마….
*
설화는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 여자였다. 늘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그녀의 성격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어찌 보면 광기에 가까운 집착 성향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이상한 방면으로는 남들보다 관대하고 마음이 넓었던 지라, 한없이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지금은, 정신을 놓은 상태로 길을 떠돌고 있었다.
탕! 탕!
“…….”
총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진다. 이젠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닿아 버린 이 사건은 현재 각 뉴스의 생방송 속보로도 접수될 만큼 이슈로 불어 닥치고 있었다. 네티즌들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사람들을 유린하고 도살하는 그녀의 끔찍한 힘에 경악하여 물밀 듯 토론을 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사건의 주요 대상인 설화는, 자신의 앞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민국의 시체를 바라볼 뿐이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시체는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조금이라도 눈을 떠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면 좋을 텐데…. 그런 씁쓸한 상황에 설화는 분노했다.
‘당신들이 잘못된 거랍니다.’
설화는 웃음 지었다.
‘당신들이 죽어야 하는 거예요~!’
콰아아앙! 또다시 불길이 치솟고 애꿎은 승용차가, 애꿎은 건물이 폭파된다. 그럴 때마다 한없이 도망가던 사람들이나 숨어 있던 사람들의 부상이 일어나고, 경찰들은 더 급히 지원을 요청하는 모습이었다.
“빨리 지원 요청 바란다! 대상자는 지금… 끄아아악!”
보이지 않는 무수한 손들이 경찰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가운데, 설화는 핏빛의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
한 편 이 속보를 보도되는 뉴스의 영상으로 구경하고 있는 서라와 은별, 예나는 입을 굳건히 다물고 있었다. 이곳은 민국의 집안으로… 소유하고 있던 열쇠를 이용해 문을 따고 들어온 것이었다.
은별은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설화의 광경을 영상으로 확인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리고 흘긋 고개를 돌려 옆을 살펴본 은별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서라와 패닉에 빠져 있는 예나를 한 눈에 보게 되었다.
“민국아… 민국….”
예나는 차마 민국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크게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단연 소꿉친구,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그녀였으니 충격이 없을 리 전무했다. 서라 또한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창백해진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나마 은별이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흑마법이 있으니까….’
살아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 저 폭주도 막을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항상 일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지 않겠느냐?”
“…….”
부탁을 하는 그녀들에게, 흑설 공주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는 무일푼으로 도와주는 자선단체가 아니었다. 마법이란 것은 생명까지 살려주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것을 공짜로 사용해주는 건 다소 무리가 있었다.
“어떤 일이든… 어떤 대가든 치를게요.”
먼저 운을 띄운 건 예나였다. 그녀는 더 이상 민국의 죽음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듯 괴로워했다.
“더 이상 민국이가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은별 역시 맘은 마찬가지였다. 아마 여기서 서라 역시 마찬가지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세 여인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흑설 공주는 왠지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 모르고 있는 것이느냐?”
“……?”
“서민국이 아직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흑설 공주는 이미 서민국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세 여자가 의혹 어린 표정을 짓자, 흑설 공주는 미소만 지으며 그 대화에 관한 것은 일절 꺼내놓지 않았다.
“대가만 제대로 치른다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
“…….”
“…….”
“…….”
세 여자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결의를 가진 모습들이었다. 물론, 서라는 300년의 기억에 관한 오감을 느끼고 있던 지라 한 편으론 그녀들을 말리고 싶었다. 그래도 만일 서민국을 다시 되살릴 수 있다면….
‘이렇게 계속 부질없는 일들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니라.’
세 여자를 바라보며 흑설 공주는 생각했다.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되살려도, 결국엔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법이지.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자신들의 결심도 무너지기 마련이란다.’
어차피 사람은 한결같다. 결과적으로 바뀌는 건 없다. 이미 그런 식으로 마인드를 관철하고 있던 흑설 공주는… 자신이 대가로서 받고 싶은 것을 언급하려고 했다.
“그럴 필요 없다.”
“…….”
“너희들이 대신 대가를 지불할 일은 없으니까.”
그러나 그때, 흑설 공주의 뒤로 어두운 코트를 입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자연스레 은별의 눈이 커다래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나머지는 나에게 맡겨라.”
흑마법사는 스치듯 흑설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다 비껴 지나갔다.
“지금까지 감당한 것은 오늘을 위해서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