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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62화 (362/369)

362화

사람이 죽었다. 그것은 어쩜 보기 쉬운 현상일 수도 있었다. 우린 살면서 누군가의 죽음을 항상 뉴스로 접하고, 소식을 통해 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그런 사건이 바로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진다면 느껴지는 감회는 당연히 색다르다. 더불어… 은별은 민국의 죽음에도 큰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설화의 허벅지에 머리를 눕고 있는 민국은, 어둠 속에서 판단해도 안색이 굉장히 창백했으며 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짓는 설화.

"어쩌죠? 어떡해야 하나요 은별 님."

"……."

"민국 님이, 민국 님이 죽었어요."

그리고 서라는 이 광경을 보며, 아주 스치듯이 민국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갑작스런 택시 사고.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난 300년의 기억. 비록 완전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그 감정이 생생하게 치솟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던지 평소라면 내색하지 않을 서라조차도 눈에 띌 만큼 손을 떠는 모습이었다.

"일단…."

가까스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은별이었다. 마법이 있었으니까… 설사 죽는다 한들 되살릴 수 있단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은별은 최대한 침착하게 두 사람을 타이르기로 했다. 옆에 있는 서라의 떨림을 발견하고 감싸며, 은별은 전체에게 말했다.

"일단 진정해…."

"어떡하죠 은별 님? 어떡… 어떡하죠?"

수우우우… 콰장창창! 급작스레 들려온 괴상망칙한 괴음! 그 괴음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하나 하나 박살나기 시작하는 승용차들이 보였다. 콰앙! 콰아아아앙!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하나 하나 박살나기 시작한다. 은별은 그것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뜨다 다시 설화를 돌아보았다.

"어떡해… 어떡해…."

설화의 등 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오로라 같은 게 뿜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희미하여, 일반인에게는 도무지 감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촉이 워낙 예리한 은별만이 이 일들을 설화가 일으켰음을 직감하는 바였다.

"그만해! 멈춰!"

"어떡해요… 어떡하지… 어떡해…."

콰장창창! 쿠우우웅! 결국엔 승용차 한 대가 폭발하면서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버린 지하주차장의 모습에 은별은 뒤를 돌아보면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야!"

"꺄아아아악!"

괴음이 워낙 컸던 탓인지 멀리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보였다. 걔 중에는 근처 아파트에서 졸음에 눈을 깜빡이던 경비원도 있었다.

활활 타오르기 시작하는 승용차의 모습에 다른 차에도 불길이 번질라, 서둘러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 동시에 경비원은 어두운 지하주차장 안에서 후레쉬를 키고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이었다.

"엇! 거기 누구쇼!"

"……."

"누구…!"

은별은 이 순간만큼은 어찌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평소 자신의 길에 한 치의 어긋남 없던 그녀라고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어두운 오로라를 뿜고 있는 설화는, 이미 지성이란 것을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는 수준 같았다.

"…강서라."

은별은 서라를 뒤에서 껴안았다. 백허그를 당하듯 안긴 서라 역시 설화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300년의 공포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 얼굴에서 절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도망치자…."

일단 빨리 이곳에서 나가서, 흑설 공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최고의 답인 듯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별은 잽싸게 몸을 뒤로 돌리려고 했다. 경비원이 다시금 소리친다.

"거기 잠깐…!"

불길이 아직 덜 번진 상태에서, 구석진 곳에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오던 경비원이었다.

"거기 뭐하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막 서라를 안고 뒤로 돌아서던 은별은, 등골을 소름끼치게 하는 위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솨아아아악! 그것은 자신의 등을 간신히 스쳐 지나가… 후레쉬를 발하던 경비원의 몸을 향해 뻗어 나갔다. 푸웃!

"컥…! 으아아아아악!"

"……."

"……!"

경비원이 들고 있던 후레쉬가 바닥으로 데구르르 떨어진다. 동시에 핏줄기가 한 가득 튀어나오기 시작하고, 사방 천지에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쪽으로 뛰어오던 경비원의 팔다리가 제각각 뜯겨나가 피를 토해낸 것이다.

"……."

데구르르르…. 심지어 떨어져 버린 목이 서라와 은별의 발치까지 다가왔다.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경비원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순간, 창백해지는 두 여인이었다.

"뛰…."

은별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가까스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부셔버릴 거예요…."

"뛰어…."

"부셔버릴 거예요 전부. 모두."

콰장창창!

"뛰어!"

서라의 손목을 붙잡고 잽싸게 뛰기 시작하는 은별이었다. 콰장창창! 또다른 승용차들이 일제히 박살나기 시작하고, 주차장 안으로 들어와 상태를 살피던 사람들 역시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려고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한 손들이 얼마나 빠른 지… 몸을 돌리는 사람들을 삽시간에 붙잡아 끌어당기고는 이리저리 뜯어버리기 시작한다.

"꺄아아아악!"

"팔이… 아악! 내 팔이이이!"

"사람… 사람 살려!!!"

여자고 남자고 할 것도 없이,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조차 끔찍하게 집어삼키기 시작하는 설화였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적으로 보였다.

"몬스터들… 몬스터들보다 더 사악한 사람들…."

"……."

"당신 것들은, 필요 없는 것들이에요."

푸슈웃! 보이지 않는 손들에 들려 있던 사람들이 무수히 핏줄기를 뿜어내며 생명을 끊는다. 그리고….

"꺄하핫… 꺄하하하하하하핫!"

광녀의 웃음과도 같은 오싹한 웃음이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지하주차장을 울리는 그 웃음소리에 은별은 등골이 연신 차가운 것을 느끼며 지하주차장 바깥으로 거의 달려나가던 찰나였다. 솨아아악!

"아읏!"

"어디가는 거시와요 은별 님~ 은별 니임~."

"언니!"

뒷발이 붙잡혀 늘어지는 은별의 모습을 보고 소리치는 서라. 엎드린 상태로 어떻게든 끌려가지 않기 위해 무모한 발악을 하는 은별이었으나,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그런 은별을 내려다보던 서라가 재빨리 발목 쪽을 돌아본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순한 무언가가 은별의 발목을 확실히 붙잡고 늘어졌다.

그것을 직감으로 파악한 서라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꺼내들어 후다닥 뛰어간다. 그리고 있는 힘껏! 은별의 발목을 붙잡은 그 투명한 손을 향해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잇!"

퍽! 퍽! 둔탁한 소음이 몇 번이고 울려 퍼진다. 쉽사리 떨어져 나가지 않던 투명한 손은, 서라가 몇 번이고 내리치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

"어디 가시는 거와요~ 어디 가시는…."

"빨리!"

서라가 이번엔 은별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긴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민국의 얼굴을 보며 읊조리는 설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일단 지하주차장에서 벗어나는 두 여인.

"민국 님~."

설화의 맛이 가버린 이성은, 이젠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죽어 있는 싸늘한 민국의 볼을 만지며 그녀는 웃음 지었다.

*

그리고 설화는 민국의 시신을 얼싸안고 길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나 하나, 곁에 있는 사람들의 사지를 찢어발기며,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핏물을 토해내게끔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금세 뉴스를 통해 속보가 들어갈 만큼 큰 논란으로 불거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 경찰까지 동원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마!"

"……."

"다시 한 번 경고한다! 움직이지마!"

보이지 않는 손들에 들려 있는 서민국을 내려다보는 설화. 그녀의 핏물이 묻은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싸악 그려지기 시작한다.

"민국 님~."

싸늘해진 그의 볼을 만지는 설화는, 여느 때처럼 투명한 손을 꺼내들 뿐이었다.

한 편….

'뭐지? 슈벌… 진짜 죽은 건가?'

이곳은 정체 모를 어딘가…. 하얀 백지만이 가득한 세계. 그 공간에서 민국은 고뇌하고 있었다. 그는 돌이켜본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필시 열등감으로 부들부들 떨던 해커를 보호하다가 설화의 공격을 대신 맞았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로 의식이 완전히 끊겨버렸는데.

'설마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허탈할 따름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별의별 식으로 다 죽어본 민국이었기 때문에 충격은 그다지 없었다. 다만….

'일어나라.'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예끼 이놈아 일어나.'

그저 맛이 가서 들려오는 소리겠거니 생각하던 그때일까.

'예끼! 일어나래두!'

딱콩!

'으악!'

비명을 지르며 이마를 부여잡는 민국.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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