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61화 (361/369)

361화

"민국 님…?"

"……."

"민국 님… 민국 니임!"

쓰러져 버린 사람은 남자 해커가 아니었다. 그는 결국 민국의 완력에 저지를 당해 다시 혼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한 인영을 보고는 '히이익! 히이이이익!'하면서 비명만 내지를 따름이었다.

"……."

쓰러진 사람은 서민국이었다. 그는 머리에서 분수처럼 새어 나오는 자신의 혈액을 보며 누워 있었다.

엎드린 자세로 서서히 눈이 감기는 것을 느끼며…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확인한다. 설화였다.

그녀는 차마 남자 해커를 보호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굉장히 놀라고 구슬픈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민국도 원치 않았던 결과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죽인다.'

설화는 지금 그런 행동을 해버리고만 것이었다. 그래서 민국은 어떻게든 눈을 뜨면서 괜찮다고 말을 하려고 했다. 이전처럼 대담하고 태연하게.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은 계속해서 차츰 차츰 감겨왔고… 얼마지 않아….

"민국 니임!"

울상을 짓고 자신을 흔드는 설화가 보였으나, 민국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아아….'

그저 속내로 그리 읊을 따름이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굉장히 공허하고 씁쓸한 감각만이 민국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뭐, 바람피는 못된 놈의 말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끄응… 그래도 은별이랑 예나는 심히 걱정되는데….'

특히 은별은 아직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고… 예나의 경우에는 늘 자신만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온 소꿉친구였으니까. 특히 뱃속에 있을 두 여자의 새로운 생명까지 감안하니… 이거 이상하게도 아빠로서의 책임감이 물씬물씬 풍겨올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서서히 감기던 눈은 끝내 닫히고 만다. 그래도 본래 죽을 날짜에서 오랜 시간 뻐기지 않았는가? 더 이상 욕심을 부려봤자 하등….

*

"방법은 찾았느냐."

짧은 시간이었는지, 혹은 오랜 시간이었는지 그것은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다. 흑설 공주나 흑마법사나 전부 비슷한 개인 사정을 갖고 오랜 시간을 고생해왔던 인물들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찻잔을 들고 있는 흑설 공주는 이미 흑마법사의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없더군."

"그러느냐."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민국은 구할 수 없다. 주어진 생명의 시간을 뒤바꾼다는 건 사실상 무리라는 셈이다.

애초에 현재의 흑설 공주조차 방법을 마련할 수 없는 문제였다. 흑마법사가 몇 번이고 과거를 오간다 해서 해결책을 구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 않느냐."

흑설 공주가 씨익하고 미소 지었다. 어쩐지 그게 흑마법사를 닮아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면, 착각이 아닐 지도 모른다. 흑마법사는 고개를 들어 흑설 공주를 마주보았다. 서로가 과거에 비슷한 아픔을 겪어왔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거란다."

"……."

"발버둥치고, 울부짖어도, 허락해주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지."

흑설 공주는 그리 단정 지었지만, 흑마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가여 언니찡~."

"…안 돼. 지금은 안 가."

"이잉, 갑시다여. 안 가면 지 불편해유우."

한 편, 은별과 서라는 다른 의미로 다투고 있었다. 아니, 다툰다기 보단 서라가 은별을 설득하고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은별은 옷깃을 붙잡고 늘어지는 서라를 보면서 말했다.

"넌 빨리 학교나 가. 벌써 수업 시작하고도 남았겠다고."

"오늘은 언니찡을 위해서 결석을 하겠어와여! 감사하셈여!"

"감사는 무슨 감사야! 으… 진짜!"

어지간히 은별과 민국이 화해하게끔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서라의 고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차마 은별이 끝까지 외면하기도 거시기했다.

"데헷데헷!"

깜찍하게 애교를 부리면서 어떻게든 끌어 당기는 서라의 모습에 결국 은별도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옷 입고 나올 테니까."

"우왕!"

"대신! 화해하는 모습 보고 나면 넌 바로 학교 가기야. 알겠어?"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서라였다.

"알겠음여! 그럴게여! 당연하지여!"

"정말…."

아주 단시간이지만 이런 서라를 미워했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이윽고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은별이었다. 휴대전화를 꺼내기 위함이리라.

"……."

하지만 돌이켜보니 입고 있는 옷도 잠을 잘 때 입던 옷이었고, 휴대폰도 쓰레기 봉투만 처리하고 올 생각이었던 지라 소지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은별을 대충 파악한 듯 서라가 곧장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짜잔! 받으셈여!"

"…내가 걸어?"

"지, 지가 걸어드려도 될 런가영?"

민국과 다시 대화를 하여 접촉을 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면 또다시 은별이 울컥할까봐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서라의 귀여운 행각에 은별은 잠시 쳐다보다가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그래, 그럼 내가 할게."

그리고는 목청을 가다듬는다. 어색한 헛기침. 은별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이건 민국에게서 배운 행동이었다. 긴장하거나 상황을 외면하려고 할 때 자주 쓰던 그의 버릇. 아무리 헤어지려고 노력을 해도 결국 은별은 이미 그와 닮아있던 것이었다.

"……."

이내 민국의 연락처를 입력해 곧장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착신음이 무사히 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금 대학교 수업 중에 있을 텐데 과연 받을까? 받을까는 둘째치고 과연 이런 일찍부터 만나기나 할 런지…. 하지만 민국도 캥기는 게 있으면 곧장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 입장이니까. 뚝.

"…서민국."

이윽고 연락을 받은 상대방이었다. 그리고 찾아온 공허함에 은별은 순간 당황했다. 비록 말을 하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던 것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서라를 보고 도움을 요청할까 했지만… 차마 그러기도 거시기해서 결국 그렇게 운을 띄운 은별이었다.

"은별 님…."

"어…? 뭐, 뭐야?"

"은별 님이신거죠?"

전화를 받은 사람은 어느 여성이었다. 순간 패닉에 빠진 은별이었다.

'이 인간이 나랑 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라는 오해가 생기기도 잠시… 어쩐지 낯익은 음성에 은별은 혹시나 물음을 띄어 보았다.

"설화…?"

"은별 님… 도와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애탔다.

"도와주세요…!"

"하아, 하아!"

소식을 들은 은별과 서라는 곧장 설화에게 들은 장소로 뛰어갔다. 그곳은 민국이 다니는 대학교 근처와 멀지 않은 아파트의 주차장이었고… 어두컴컴한 그 주차장은 의외로 사람 한 명 없이 썰렁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둘러보던 두 사람이었다.

"언니찡…."

근데 우연찮게 무언가를 발견한 서라가 은별의 옷깃을 붙잡는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바닥 한 곳을 가리키는데.

"……."

그곳에는 핏자국으로 보이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선명한 핏줄기가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서라를 따라 은별도 다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있다. 그 설화가. 민국과 함께 말이다.

"……."

은별은 설화에게서 사정을 다 듣고 통화를 했던 기억을 회상했다.

'민국 님이… 민국 님이….'

'진정해… 일단 119에는 신고했어? 119에 신고하고….'

'민국 님이 숨을 안 쉬어요!'

은별의 손이 파르르르 떨렸다. 하지만 끝까지 인내하며 걸음을 옮겼다. 서라도 그런 은별에게 폐가 되지 않게끔 어떻게든 마음을 다지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구석진 곳에서….

"은별 님?"

익숙한 그 음성이 들려왔다.

"설화…?"

반문하는 설화에 반기듯, 소리치는 설화였다.

"도와주세요 은별 님!"

"…너무 어두워. 잠시만 기다려봐."

하필이면 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천장의 불이 고장난 구석진 곳이었다. 은별은 서라에게 도움을 요청해 휴대폰을 꺼내들도록 명령했다. 이윽고 서라가 순순히 휴대폰을 꺼내들어 조명을 비추었다. 구석진 곳을 향해 말이다. 그러자….

"은별 님…."

"……."

"서라 님…."

"……."

그곳에는,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동시에 두 여인 모두 각자의 과거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민국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300년의 기억에 대한 감각…. 자신과 함께 하면 불행해질 거라고 일컫던 미래의 민국….

"……."

"민국 님이… 숨을 안 쉬어요."

구석진 그곳에는, 민국을 자신의 허벅지에 눕힌 채로 눈물을 글썽이는 설화가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누군가의 시체로 보이는 것들이 절단되어 피의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웁…."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은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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