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설화는 자신이 살던 세상을 증오했다. 몬스터로 가득한 세상…. 사람들은 항상 몬스터에게 당해 나약함을 증명했고, 가족을 잃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외로움에 굶주린 세상에서 설화는 항시 자신을 위로해줄 구원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찮게 나타난 것이다.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를.
'서민국.'
그 남자는 설화에게 상냥함을 베풀었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늘 자신을 지켜주었다. 그런 남자의 마음에 설화는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고 마침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오했다.
'아아.'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남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하겠다라고.
비록 픽션에서 비롯된, 어디까지나 허상의 이야기 속 두 주인공이었지만 설화는 그걸로도 족했다. 자신도 픽션에서 비롯된 인물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그 픽션이 아닌 현실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나쁜 거 같사와요 민국 님.'
예전엔 몬스터들이 그릇됐다. 항상 생명을 함부로 여기며 자신들만의 안위를 본능적으로 여기던 녀석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여기서만큼은… 적어도 몬스터보다 더 인간들이 못된 것 같다. 설화는 이 세상을 배우면 배울 수록 그렇게 느낄 따름이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우우웅.
[얘기라, 크크… 무슨 얘기?]
답장은 곧장 왔다. 설화는 어두운 새벽, 플래시를 비추는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메시지를 적어나갈 따름이었다.
다음 날이었다. 민국은 잠을 뒤숭숭하게 잔 탓인지 머리가 많이 어질거렸다. 하지만 곧 정신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후우, 그래도 학교는 가야지."
그리고 평상시처럼 화장실로 향하는데…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벽면을 바라본다.
"……."
언제나 그렇듯이 있던 벽면의 구멍이 사라져 있었다. 늘 아침 때마다 들어가서 몰래 놀래켜주곤 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젠 그 재미난 생활도 하지 못한다.
"…크흠."
어색하게 기침을 하고 애써 기운을 복돋기 위해 노력하며, 민국은 일단 화장실로 전진할 따름이었다. 쏴아아아아….
"흐아암~ 민국 님 학교 가시는 거세요오?"
"그랴. 그리고 학교 갔다가 잠시 어디 좀 들리고 올 거 같아."
"어디요오?"
"훗. 네 마음 속."
"아앙!"
민국의 뜬금없는 느끼한 멘트에 설화는 진심으로 애교를 부리듯 좋아했다. 이윽고 웃으면서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민국을 보며, 설화는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쿵!
"……."
그리고 혼자 남은 설화는 침대에서 가볍게 일어났다.
"후훗."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
어차피 오늘 대학 수업은 저녁에 있을 따름이었다. 고로 은별은 아침 시간 동안은 그냥 누워서 잠이나 계속 자자고 생각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자꾸만 그의 얼굴이 뇌리 속에 스쳐 지나가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은별아~ 쓰레기 봉투 좀 버리고 올래?"
"……."
"은별아~."
"…엄마! 나 오늘은 좀 놔두…."
"쓰레기 봉투 먹고 싶니?"
"……."
아무리 강한 은별이라고 해도 그보다 더 강하신 어머님께는 대적하지 못한다. 결국 투덜투덜대면서도… 은별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주는 봉투를 받아 현관문을 열고 대문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저벅 저벅….
"왜 아침부터 쓰레기 버리라고 난리야…."
투덜투덜거리면서도 할 일은 다 하는 그녀였기에, 이젠 대문을 열고 바깥 전봇대 쪽에 쓰레기 봉투를 투척하려고 하는데.
"……."
"……."
문득 느껴진 인기척에 쓰레기 봉투를 던지려던 은별의 손동작이 멈춘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천천히 옆으로 돌아간다.
"……."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한 어린 양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말문을 다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마치 수천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참을 가만히 있던 은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투박한 목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역시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쉽게 절제되지 않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은별은 컨트롤을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언니…."
"……."
"잘못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릿여릿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믿을 수 없는 그 음성이 들려온다. 은별은 결국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피하면서 말했다.
"말했지만 네 잘못 아니야."
"……."
"어차피 그런 일이야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있는 거고, 다만 그놈이 원했던 건 나보다 너였던 거 같으니까."
몸을 홱 돌리며 등을 보이는 은별이었다. 빨리 대문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굳이 나한테 와서 사과할 필요는 없어."
"아, 아님여!"
'아니에요!'라고 말하려다가 급하게 얘기했기 때문인지 그만 평소의 말투가 나와버린 서라였다. 순간 너무 장난처럼 대응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자신의 입술에 손을 얹던 서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언니… 제 잘못이에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
"그러니까 화는…."
"화?"
순간 고개를 돌려 서라를 바라보는 은별이었다. 고개를 내리고 소심하게 말하던 서라가 은별의 날카로운 눈총을 받게 되자 움찔했다.
"화라고?"
"……."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거 같아?"
정확히 화를 내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문제는 어째서 화를 내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래, 화를 내고 있다고 치자. 그럼 왜 화를 내는 거 같은데?"
"……."
"서민국이 또 바람을 펴서? 아니면 그놈이 그런 짓을 해놓고 먼저 나에게 말하지도 않아서?"
다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이해는 할 수 있다. 서민국이 직접 말해주기도 했으니까. 애초에 환경에서 비롯되는 일들을 인간인 그가 혼자 전부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끝끝내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포기하고만 이유는….
"아니야 나는…."
"언니이…."
"적어도… 적어도 너는!"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은별이었다. 홱하고 고개를 돌려 또다시 얼굴을 감춘다. 서라도 이미 울상을 짓고 눈물을 흘릴 실정이었다.
"빨리 학교 가. 왜 느닷없이 여기에 오고 난리야."
"……."
"그럼."
그리고 대문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으려던 찰나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의 윗도리를 강하게 붙잡는 양손이 있었다. 서라의 두 손이었다.
"지도…."
"……."
"지도 참고 싶었다능!"
평소의 말투로 돌아온 서라였다. 꽤나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말투가 그녀의 본래 말투였으니까. 오히려 이게 진심에 가까울 것이다.
"지도 참고 싶었다구여! 그래서 참았다구여! 언니니깐… 언니니깡!"
결국 참지 못하고 서라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그간 참았던 죄책감과 서러움이 폭발하듯.
"언니에게 상처 주고 싶지… 흐끅! 않아서…! 흐으그극!"
"……."
"끄런데… 딸꾺! 끄, 끄런데… 딸꾺! 딸딸꾹! 딸꾺꾺!"
"…알았어. 근데 얘기할거면 진정하고 얘기해."
일단 듣기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은별은 서라를 다그쳤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서라가 간신히 운을 띄었다.
"참았단 말이에여… 계속해서… 끅… 참았는데…!"
"……."
"근데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에여… 이상한 일 때문에… 마음이 말을 안 듣게 됐단 말이에여!"
윗도리를 손으로 쥐면서 서라가 어렵사리 얘기를 꺼내고 있었다. 은별은 그런 서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니에게 미안함여…! 미칠 듯이 미안함여! 지금도 미안해서 토마토 될 거 같단 말이에여!"
"……."
은별은 이때까지만 해도 그냥 변명으로만 치부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컨트롤하고 냉정해지려고 노력했다.
"언니찡 안마해주면서… 언니랑 좋은 사이가 되려고 노력했단 말이에여…."
"……."
하지만, 순간 옛날 자신에게 안마를 해주었던 그때의 그 좋은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은별은 이상하게 그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 감정이 울컥하는 걸 느꼈다. 서라가 계속 끅끅거리면서 감정에 복받쳐 소리쳤다.
"온니짱이랑 언니찡이 잘 되길 진심으로 기도했단 말입니다여! 정말 그러고 싶었단 말이에여!"
"그랬으면… 그랬으면 끝까지 모른 채하면 되잖아! 왜… 왜 안 그런 건데!"
"그건… 그거어어언… 끅!"
고개를 내리고 엉엉 울던 서라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보이자 은별은 더 울컥해버렸다. 눈물 콧물로 가득한 서라의 얼굴.
"미… 끅! 아느… 끅! 해으여… 끄으윽!"
"……"
"딸꾹! 딸꾹! …언ㄴ딸꾹! …ㄴ찡! 딸꾹꾹!"
"……."
"으아아아아아아아앙!!!! 딸꾹…! 아아아… 딸꾹! 아아아아앙! 딸꾹!"
"이, 이 바보가……."
서럽게 우는 서라의 모습에 은별도 결국 눈물을 서서히 흘리기 시작했다.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그건 격분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의미에서, 서라의 슬픔을 공감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가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한 건지… 순식간에 마음 속에 와닿았으니까. 그리고 서라가 얼마나 자신에게 착한 여동생이 되려고 노력했는지, 은별은 알고 있었으니까.
"미안해여 언니찡!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흑… 바보야… 바보야아아아아아아아앙!"
결국 은별과 서라는 한동안 부둥켜 안고 울부짖었다. 아침부터 느닷없이 대문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는 두 여인의 모습에… 막 출근을 하던 직장인들은 길거리를 지나가며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지나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