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57화 (357/369)

357화

"염려하지 마 서라야."

"……."

은별과 뜻밖의 결말을 맞이한 지금, 민국은 커피숍으로 돌아와 일단 서라를 진정시켜주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위로가지고 나아질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

무엇보다 서라의 극도로 침울해진 얼굴…. 그야말로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짓는 것에는 역시 죄책감과 더불어… 여러가지 충격이 혼합되어 있겠지.

"……."

민국은 일단 그런 서라를 집까지 데려다줄 따름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였다.

"오셨어요 민국 님~."

설화는 변함없이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거리면서 다가왔다. 민국은 그런 설화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고개를 돌려 벽면의 구멍이 있는 쪽을 보았다.

"……."

그리고는 이전에 있던 벽면의 구멍이 없음에 가만히 말문을 다무는 모습이었다. 설화가 웃음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은별 님이 아까 오셨어와요~."

"그때 저 구멍도 막은 거야?"

"그렇사와요~."

그것은 은별이 얼마나 여러가지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인지 알 수 있는 증명서였다. 민국은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 홱 몸을 돌려 다시 현관으로 나갈 따름이었다.

"민국 님?"

"잠시 나갔다 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네~."

민국의 진지한 음성에 설화가 미소 짓고 답하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곧장 은별이의 집으로 향했다.

늘 구멍을 통해 왔다갔다 하다 보니 가는 길을 까먹을 수도 있었으나, 절대 그렇지 않았다. 무사히 은별의 집 앞에 당도한 민국은 하늘에 도사리기 시작한 먹구름을 뒤로하고 휴대폰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은별아, 잠시 나와봐. 지금 네 집 앞이야.]

물론 은별에게 답장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방안 의자에 앉아 틀어박힌 상태였다. 우우웅…. 하지만 지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짜쿵짝]

[…좀 나와봐 은별아]

이런저런 드립도 쳐보고 조크도 쳐보지만, 역시 그런 가벼운 상황은 아니다. 결국 민국은 진지하게 부탁하듯 말했다. 계속해서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을 은별 또한 무시할 수 없던 것일까. 얼마지 않아…. 끼이익.

"……."

"……."

현관문을 열고 마당으로 걸어 나오는 은별이 담 너머로 보였다. 뚝… 뚝… 서서히 한 방울 한 방울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시하며 마당을 걸어 나온 은별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 이상 할 말 있어?"

"우선 오해는 풀자 은별아. 서라랑 내가 그렇게 된 건…."

"오해고 뭐고, 필요 없어."

은별은 간단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로 듣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오랫동안 알아온 동생이고, 애정 관계는 아니라고 네가 단호하게 말했었지만… 거봐, 역시 남녀 관계는 달라지잖아."

"……."

"어쩌겠어… 그게 당연한 건데."

그리고 몸을 홱 돌려 다시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은별을, 민국이 단호하게 붙잡았다.

"서라랑 내가 그렇게 된 건 마법 때문이야! 이전에 예나 일처럼 그리 된 거라니까!"

"……."

길게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민국은 본론만 간략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서라가 자신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거절하고 은별만을 바라보려고 했던 자신의 행동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생긴 불운 때문에 마법을 겪어야 했던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은별이 네가 괜히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쓰게끔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무엇보다 서라와 은별의 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는 사이. 예나처럼 천적 관계로 으르렁거리던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은별이 이토록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필시 어마어마한 배신감 때문이겠지….

"은별이 결코 널 속일 생각은 없었어."

"……."

은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맘 같아선 한 대 치고 싶었으나 그래봤자 무의미하단 걸 알고 있었다.

사실 자기 자신의 이런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란 건 때때로 합리적인 것을 벗어나는 법이었다. …오랜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민국에게 달라붙는 예나와 으르렁거리며 다투었고, 마법 때문에 생긴 일들 또한 혼자서 감당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지금 다 말한다고 해서…."

"……."

"마음의 상처가 다 낫는 건 아니잖아?"

몸을 돌려 민국을 바라본 은별이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웃는 얼굴과는 반대로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별의 한 손이 자신의 가슴 중심부를 정확히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민국은 은별이 그간 감당해온 것들이 싸그리 상기되었다.

원치 않게 아기를 임신했고, 그 와중에도 예나가 민국을 좋아한단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며, 민국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위로를 해주고 항상 도와주었다. 늘 손길을 뻗어주고… 민국이 처음에 죽을 병으로 힘들어할 때도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끔 허락해주었다.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들 투성이었지만 은별은 민국을 신뢰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의 한계치에 도달하고 있던 것이다. 은별도 결국엔 사람이다. 그리고 여자다.

당연히 자신의 애인에게 다른 여자가 들러붙는 걸 보고 싶어할 리 없었고, 혼자서 다 감당하기엔 인간의 신체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가슴 아픈 건, 믿고 있던 동생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애인과 알콩달콩 지내왔다는 사실이었다.

"……."

그리고 민국은 모르겠지만, 은별은 미래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헤어지라던 민국 역시도 감당했었다. 그러나… 역시 그건 그냥 오기에 가까운 행동이었나 보다.

"이제 놔줘."

"아기는…."

손목을 놓지 않고 민국은 소리쳤다.

"아기는 어떡할 건데!"

민국의 외침에 은별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내리 숙이고는 그늘을 만들더니 고개를 홱 돌린다.

"놔…."

"……."

"놔!"

버럭 외치며 은별은 민국의 손을 내치었다.그리고는 쿵! 하고 잽싸게 대문을 닫고 마당을 뛰어갈 따름이었다. 얼마지 않아 현관문을 닫고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민국은 고개를 내리 숙였다. 쏴아아아… 무수히 쏟아지는 빗줄기에 민국은 한참동안 그러고 서 있었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온 후, 민국은 완전히 비에 쫄쫄 젖은 복장으로 거실에 들어왔다.

"오셨어와요 민국 님~."

"그래. 나 샤워 좀 하고 올게."

내심 웃는 척하면서 그리 말하지만 슬픔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설화는 가볍게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민국아…."

잠시 후 예나도 대충 감을 잡았는지 민국의 방에 들어와서는 그를 위로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랜 사랑의 결과가 이리 참담한데, 고작 하루만에 나아질 리는 없었다. 쉬고 싶어 하는 민국의 모습에 예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고, 민국은 침대에 누웠다.

"많이 힘드신가 보아요 민국 님~ 자장가 불러드릴까요오?"

"괜찮아 설화야. 그냥 한 숨 좀 잘게."

"네에~."

그리고 민국이 눈을 감고 침대에 드러누운 실정에, 설화 역시 안방을 조심스레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

그리하여 안방에 홀로 남은 민국은 눈을 감고 잠에 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될 리가 전무했다. 그리고… 문득 흑설 공주와 나누었던 이전의 얘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서라의 300년 사건 이후 나누었던 대화였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다.'

"……."

민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달고 난 사나이였다. 아무리 발버둥치고 도망가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흑설 공주가 마법을 써서 도와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일을 도와주는 조수로 노동을 하기로 했지만… 사실상 무의미하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계속 죽는 모습을 보는 것도, 결국엔 날 사랑하는 사람에겐 감당해야 할 일이 될 테니까.'

모든 것을 감당하고 지친 얼굴을 보인 오늘의 은별이 다시 한 번 뇌리에 스쳐 지나간다. 오랜만에 조금은 마음이 약해지는 민국이었다.

이렇게 우울함을 느끼는 건 정말이지 바캉스 사건 때와… 처음으로 목에 죽을 병을 달았단 사실을 통보 받았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아주 오랜만에 이런 침울한 감정을 또 느끼게 된다.

"좀 자자."

조금은 지친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리며, 민국은 다시 눈을 감았다.

끼이익…. 민국이 잠에 든 이후였다. 설화는 민국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잠에 드셨네요~."

어지간히 심신적으로 지친 모습인 걸 설화도 느끼고 있었기에, 그냥 웃기만 할 뿐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홱 하고 고개를 돌리는 설화. 그녀의 눈이 향한 곳은 책상에 있는 민국의 휴대폰이었다. 슬그머니 그곳으로 다가간 설화가 휴대폰을 들어 이리저리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어머나?"

그러다가 이전에 해커와 대화를 나누었던 대화 기록을 확인하고는, 사건의 잔상을 대충 깨달은 듯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 때문이었네요 민국 님~."

"……."

"정말이지~."

설화의 고개가 다시 창문으로 돌아갔다.

"이 세상에도 몬스터가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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