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56화 (356/369)

356화

"읭…."

서라는 계속해서 무반응인 은별을 보고는 서서히 오바를 떨던 것을 멈추었다. 왠지 모르게 은별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굉장히 냉랭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그 차가움은 단순히 표적을 민국으로만 둔 것이 아니라… 서라 자신에게까지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민국 역시 은별의 태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고는 물었다.

"은별 낭자? 갑자기 왜 그러오?"

"뭐가 왜 그래? 난 그냥 평상시랑 똑같은데."

"흐음, 뭔가 다른 거 같은데."

민국이 조금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추궁하자 은별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결코 달가운 미소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내재된 분노를 참기 위한 인위적인 미소에 불과했다.

"다르지 않아. 계속해."

"……."

"계속하라니깐?"

순식간에 분위기는 차가워졌다. 마치 얼굴에 냉랭한 물을 정면으로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일순간 바뀐 그녀의 분위기에 민국도 다소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은별아 왜 그래?"

"왜 그러냐니, 몰라서 물어?"

사실상 의심만 가졌을 뿐이다. 또한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서라는 은별 자신이 보아도 정말로 예쁘고 귀여운 동생이었고… 그런 그릇된 짓을 할 만큼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산산이 조각났고… 심지어 안고 있던 신뢰감은 곧 배신감으로 변모한 지 오래였다.

"자."

"……."

"……."

은별은 더도 말고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휴대폰은 은별이의 것이었다. 은별은 휴대폰 메시지함을 클릭하여… 어떤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온 화면을 띄어주었다.

"처음엔 가짜일 거라고 생각했어."

"……."

"하지만, 아닌 거 같더라."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은별은 직감했다. 그녀는 이래봬도 민국의 곁에 있는 여자들 중에 가장 촉이 좋은 여성이었다. 다만… 서라니까 신뢰감을 갖고 아닐 거라 고개를 저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땔 래야 땔 수 없는 증거물이 눈앞에 당도한 이상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

민국 역시 그 휴대폰 메시지를 보는 순간 직감했다. 결국 이런 일이 생겼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바람을 피려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은별이를 엄연히 속인 중죄인 것은 자명했다.

'해커.'

휴대폰에는 같은 대학교 동기의 못된 해커가 보낸 메시지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 중에는 서라와 민국이 나눈 메시지의 흔적까지 있었다.

"……."

민국이 몰랐을 뿐, 이미 그 녀석은 민국의 휴대폰도 한 차례 해킹했던 것이었다. 물론 해킹한다고 해서 나올 꺼리는 별 거 없었다.

그냥 민국이 대학교 동기들 몰래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단 사실과… 이외 다른 여자들과 접전이 있었단 사실, 그리고 비제이 현대왕이란 사실. 어차피 대학교 동기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봤자 큰 문제는 터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해커였기 때문에… 차라리 민국과 가장 가까운 관계자를 건드리자고 생각한 것이었다.

"……."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너희들이 말하는 비밀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내가 느낀 감으로는 보통 비밀이 아닌 건 분명한 거 같네."

일단 연인은 아니다. 그건 민국과 서라도 해명할 자신이 있었다. 또한 주고 받은 이야기도 절대 연인 관계의 사람들이 나눈 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주 오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필시 연인 관계로 가기 위한 일종의 가벼운 절차가 분명했다.

은별은 이미 메시지들을 쭉 훑어보는 순간 확신한 것이었다.

"은별아, 오해야."

"오해도 있겠지. 하지만 확신도 있어."

민국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자는 듯 운을 띄었다. 그러자 은별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끊었다.

"…그리고, 그 확신이 도무지 틀릴 거란 생각이 들지를 않아."

"은별아!"

"예나 그 여자 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참고 넘어갔어. 애초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너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책임지겠다고 용 쓰면서 행동하는 네 모습에서 솔직히 책임감도 느껴서 지금까지 지켜봤어.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은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는 그늘에 져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서라를 마주했다. 서라는 순간 움찔하면서 오한이 들었다. 동시에… 두려움에 여린 얼굴로 운을 띄었다.

"언니…."

"일어날게…."

의자에서 먼저 일어나 돌아서는 은별이었다.

"은별아, 은별아!"

먼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은별의 뒷모습에 민국이 서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라야, 나중에 얘기 나누자. 일단 오해는 풀 테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

"……."

그리 말하고 서둘러 은별을 붙잡기 위해 뛰어 나가는 민국이었다. 홀로 커피숍에 남은 서라는 말없이 고개를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이 차츰… 매섭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은별아!"

"잡지마. 잡으면 한 대 맞을 줄 알아."

"으억."

옷깃을 붙잡기도 전에 살벌한 그 한 마디에 민국은 움찔하며 멈추어섰다. 그리고는 걸어가는 은별의 뒷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맞아, 은별이 네가 추측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을 거야."

"……."

그 말에 움찔하고 걸음을 멈추는 강은별이었다.

"하지만 네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도 있어. 특히 메시지에 적힌 비밀이라는 건."

"연인 사이의 비밀 같은 건 그 사람들에게나 중요한 거지."

"그런 비밀이 아니라니까 은별아!"

그리고 은별이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돌리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민국도 확실히… 은별이 이번엔 뭔가 작정을 했다는 것을 얼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은별은 최대한 얼굴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전처럼…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울상을 짓거나 하는 행위가 도저히 없던 것이다.

"솔직히, 내가 이해할게. 너는 여자들에게 인기 많으니까."

"은별아!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고 나 역시 다른 남자들에게도 인기 많아. 그러니까 이제 슬슬 서로를 정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민국은 말문이 텁하고 막히고 말았다.

"은별이 너…."

"……."

"지금, 헤어지자는 거야?"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은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래 사귀었고, 솔직히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잖아? 이제 너도 나에게 좀 질렸을 테고…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

"그러니까, 차라리 새로운 인연이나 만나자."

웃으면서 얘기하는 은별이었다. 금방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꿋꿋한 의지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않았다.

"강은별!"

"이만 갈게. 놔줘."

민국은 이전처럼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여느 때보다도 쌀쌀 맞았다. 결국 돌아서는 은별이었고, 민국은 왠지 모르게 그녀를 더 이상 붙잡을 수가 없었다. 허공으로 손을 뻗던 민국도, 결과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실망시키는 짓을 했는지 알고 있던 것이다.

"젠…장…."

고개를 내리 숙이며, 민국은 결국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

혼자 돌아온 강은별은 곧장 흑설 공주와 얘기를 나누었다. 더 이상 방을 연결시키는 구멍 따위도 필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은 흑설 공주는 더도 말고 곧장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

민국의 집 거실에서, 말끔히 사라진 자신의 구멍을 보면서 은별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

"빈유 님이 어인 일로~."

"…그놈의 빈유 그만 붙여줄래? 안 그래도 상태 안 좋거든?"

그 말에 '후후'하면서 미소를 짓던 설화가 말을 잇는다.

"상태를 보니 그 날이신가 보시와요~."

"그 날이었으면 아마 더 열받아서 다 부셔버렸겠지…."

진짜 화가 나고 열불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동시에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눈물도 그렁그렁 맺게 된다. 하지만 은별은 끝끝내 참는 모습이었다. 설화는 그런 은별의 뒷모습을 보면서 정확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결정은 항상 트러블을 가지고 온답니다~."

"……."

설화의 조언 아닌 조언에 은별은 몸을 홱 돌렸다. 곧장 현관문으로 나가려는 그녀였다. 그때… 쿵! 하고 무언가에 들이받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구멍으로 넘어오는 예나가 보였다.

"으… …은별 씨?"

"……."

무슨 연유에선지 민국의 방에 있는 은별을 발견하고는 그리 중얼거리는 예나였다. 하지만 은별은 그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얌전히 신발을 신고 현관문으로 나갈 뿐이었다. 도통 이유를 모르겠단 얼굴을 짓는 예나와 더불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홀로 미소 짓고 있는 설화만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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