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폭풍전야>
"행님, 원래 인생이란 화장실에서 큰 일을 보는 것과 같음. 고로 그 사건은 일종의 끙아와 같은 이치라고 보시면 되여."
"존나 고맙다 못해 눈물 날 위로구나."
"에헴! 뭐 이 정도쯤이야요."
자신의 위로가 적절히 먹혀 들어갔다고 생각이라도 했는지, 가슴을 당당하게 피면서 자신 있게 웃음 짓는 서라였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빈틈을 노리고는 은근슬쩍 그녀의 옆구리에 손바닥을 가져갔다.
"아앗!"
"간질간질!"
그리고는 서라가 뒤늦게 눈치를 챌 사이에 잽싸게 옆구리를 양손으로 간지럽혔다. 서라는 그 양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바둥거리면서 소리쳤다.
"까, 까까먹어버렷!"
가까스로 양손에서 벗어난 서라가 자신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감으면서 민국에게서 물러난다. 꽤나 얼굴이 붉어진 서라가 민국을 쳐다보며 한 마디한다.
"행님… 요즘따라 지를 노리는 손길이 한층 요염해진 거 아시나여?"
"이 정도로 요염하다고 하다니, 의외로 너의 야동력은 낮은 편인가 보구나."
"의잉… 야동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행님."
슬쩍 토라진 척 표정을 짓는 서라였다. 자… 사건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자면, 우선 민국의 같은 학과 동기였던 그 해킹범은 대학교 내에 소문이 죄다 퍼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일반인도 아니고 유명인에 속하는 민국인을 건드렸으니… 여자들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다행히 해킹범의 부모님이 굽신거리며 사죄를 한 탓에 무사히 풀리긴 했지만… 앞으로의 교우 생활은 그에게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뭐, 반 동기들도 하나같이 얼굴을 모르던 걸 보면 출석 자체는 불성실하게 하던 학생인 것 같으니까.'
애초에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나오다 말고 나오다 말고 빼먹던 학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교수들도 그 학생을 그다지 좋은 감정으로 대우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민국은 적절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본보기도 확실히 보여줬고, 더 이상 건드리는 일은 없겠지.'
애초에 일반인이라면 보통 그 정도 혼쭐을 내면 멈추기 다반사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세상엔 이따금씩 등신 아닌 등신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 사실을 호구마냥 잠시나마 망각한 게 문제였다. 우우우웅.
"은별이네."
"빈유의 표본님이여?"
"그렇지."
서라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지는 없는 척하면 됨요?"
"뭣하러 없는 척을 하냐. 어차피 너 만나러 가는 거 얘기했었어."
"헐? 레알임?"
"그럼 레알이지. 어차피 은별은 그거에 대해선 모르잖아."
그 말에 서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다. 아무것도 모른다. 민국과 서라,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민국과 서라 단 둘뿐이다. 애초에… 어느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받는다."
그리고 민국은 곧장 연락을 받았다.
"마님, 어연 일로 연락하십니까."
"서라랑 만났다고 했지?"
전화를 받자마자 냉큼 그렇게 돌직구적으로 질문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서라를 흘긋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지요."
"나도 만나러 가도 돼?"
어쩐지 조금 진지한 음성이었다. 반문해보이는 민국이었다.
"혹시 은별 낭자, 내가 서라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질투가 불쑥불쑥 솟아올라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마. 그냥 간만에 얘기하려고 보려는 거니까."
그 말에 민국은 '흐음'하더니 휴대전화를 멀리하고 서라에게 물었다.
"은별이가 간만에 네 얼굴 좀 보자는데 어떻게 생각해?"
"왕, 언니찡이 지를요?"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 서라도 이윽고 고개를 따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나님은 개좋음여! 보고 싶음여! 보자마자 아스팔트에 얼굴을 비비고 싶음여!"
"된대 은별아."
"응, 그래. 그리고 아스팔트에 깔릴 수도 있다고 전해줘."
"히이익."
어느 정도 들렸던 모양이다…. 어쨌든 오래간만에 은별과 서라의 교류가 있을 예정이었다. 민국은 느닷없이 은별이 갑작스레 만나자고 제안을 하니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안 그래도 과제 때문에 바쁠 마당일 텐데. 뭐, 은별이도 서라랑 꽤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게 좋으려나?'
뭔가 은별과 서라 둘 사이에는 민국이 모르는 여러가지 기밀(?)도 있던 것 같고 말이다. 단순 만나서 대화를 하기 위함에 찾아오는 것이라 추측을 하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서라와 민국 둘 사이에 은별도 껴들게 되었다.
"…오랜만이네."
"우왕 언니찡!"
만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드는 서라였다. 팔짱을 낀 은별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는 그녀! 그리고 잠시 후, 그 가슴에 대해서 이렇게 소감을 표명하는 모습이었다.
"역시 이 달라붙는 느낌은 은별 언니찡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느낌임! 딱풀이 종이에 강하게 달라붙는 이 느낌!"
"…간만에 만나서 그런지 관자놀이에 불을 내고 싶네? 어때, 서라야? 기분 좋지?"
"으갸아아악! 살려주세염 언니찡!"
서라의 관자놀이를 뱅뱅 주먹으로 돌리는 은별이었고, 비명을 지르면서 연신 구해달라고 외치는 서라였다. 이윽고 서라가 '우으…'거리면서 관자놀이 쪽을 양손으로 비빌 때, 은별이 다시 팔짱을 끼면서 '흥….'하고는 말을 잇는다.
"…잘 지냈어?"
"실은 은별 언니찡이랑 대화를 못하니 기운이 쭉 빠져서 하루하루를 후회의 나날로 살고 있었음여!"
"농담은 쓸데없이 잘해…."
하지만 그런 농담이 결코 기분이 안 좋을 리 없다. 내심 흐뭇하게 웃는 은별과, 그런 은별의 뒤를 졸졸 따라붙는 강서라.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는 서민국.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런 평화로운 순간이 아수라장으로 변질될 것을.
"그래서, 둘이 뭐하고 있었는데?"
"그냥 길 걸으면서 산책이나 하고 있었지. 요즘은 게임보단 이런 게 더 낭만적이지 않소 낭자?"
"…그렇긴 하지. 애초에 비제이라는 게 주구장창 컴퓨터만 하다 보니 게임에 게자만 들어도 금세 질려버리니까."
왜, 즐기던 것이 직업이 되면 그것은 결코 즐길 수 없게 되는 법이다. 그것은 비제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게임을 하는 비제이들은 게임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돈을 벌다 보니 직업에 대한 의무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의무감 때문에 게임을 결코 달갑게 여길 수가 없게 되고… 인식 자체가 완전히 바뀌고마는 것이다. 특히나 여기 있는 세 사람은 모두 게임 비제이였기 때문에 하나같이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정 뭐하면 카페라도 가던가."
"카페여 언니찡?"
서라의 물음에 은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향하게 되었다.
조용한 거리의 오후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없는 편이었고, 한 테이블석이 굉장히 넓은 편에 속하다 보니 대화를 나누기가 편리했다. 이윽고 은별과 민국이 앉고, 서라가 맞은편에 앉았다.
싱글벙글 웃는 서라를 향해 은별이 메뉴판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뭐 먹을 거야?"
"헐, 지금 나님 사주시려는 거임여? 부끄부끄…! 언니찡 사랑해여엉!"
"그래, 사랑해주는 건 좋으니까 커피나 빨리 골라."
"넹."
이윽고 서라가 메뉴판에서 괜찮은 커피를 하나 골랐고, 민국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민국이 카운터로 향해 커피 주문을 넣는 동안… 은별이 서라를 돌아보았다. 계속해서 싱글벙글 웃는 서라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은별. 이윽고 그 시선에 서라가 의문을 가진 듯 깜찍하게 묻는다.
"왜 그러심여? 나님 얼굴이 그렇게 사랑스러움여?!"
"……."
그런 서라의 애교에도 은별의 표정은 까딱도 하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 그리고 한 편으론… 부디 아니길 애원하는 표정. 이윽고 자신의 애교에도 반응이 없자 기죽은 강아지처럼 '의잉…'하면서 고개를 천천히 숙이는 서라. 그때,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테이블에 돌아오는 민국이었다.
"커피 대령하옵니다요."
"그래, 고마워."
"훗. 애인 사이에 이 정도 에티켓은 기본이지."
생색을 부리면서 은별의 옆자리에 다시 착석하는 민국. 그리고 조용한 그 테이블 석에서 은별이 천천히 커피를 홀짝인다.
"하아…."
커피의 맛이 혀속에 짜릿하게 전달되었는지, 숨을 토해내면서 은별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봄의 따사로움이 아름답게 흘리고 있었다.
"예쁘네."
"하지만 저런 봄의 수려함 따위 은별이 너의 가슴보다 몇 백배는 시원찮아! 그렇지 않냐 서라야!"
"맞습니다 행님! 언니찡의 슴가슴가는 다른 기준으로 볼 때 독보적인 1위입니당!"
주고받고 개그를 치는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에게 평소라면 태클을 걸었을 은별.
"……."
그러나 무슨 연유에선지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