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좋은 아침이와요~."
아침에 멋드러지게 기지개를 피면서 일어난 설화였다. 그리고 기분 좋은 미소로 고개를 돌리며 민국이 있던 자리를 돌아본다. 민국은 이미 대학교에 간 듯,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너무 빨리 가셔라~."
결국 오늘도 혼자다. 하지만 혼자라고 해서 외로움을 크게 타는 타입은 아니었다. 비록 게임 설정에서 탄생한 그녀였지만, 애초에 어릴 때부터 혼자였던 그녀였고 그런 그녀에겐 오로지 민국이란 사람 단 한 명만이 자신의 가족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위협이 없는 이상… 설화는 그저 살아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특이한 여자였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네요오."
창문에 다시 팔꿈치를 대면서 설화는 쨍쨍한 햇볕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온 지도 어연 한 달은 경과한 실정. 이젠 이 세상에 익숙해지다 못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법조차 완연히 터득한 상태였다.
'본래라면 대학교 생활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반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까요~.'
민국이 대학교에 출석하는 것을 떠올리면서 그리 아쉬워하는 설화였다. 하지만 민국의 공부까지 방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결국 인내를 하며 설화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생각 중이었다.
'외출이나 할까요?'
같이 놀아줄 사람도 없겠다, 설화는 호화로운 아침 햇살이나 맞으면서 시간을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획에 필요한 준비물부터 일단 찾는다.
'옷이 좀 부족하긴 하네요~.'
하지만 외출을 하기 전 민국의 안방에서 옷을 여러 벌 찾던 설화는, 자신의 옷이 아직 부족하단 사실을 절감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설화가 이윽고 두 손을 '짝!'치면서 '아하!'하고는 가볍게 웃는다.
"실례~."
그리고 설화가 향한 곳은 다름이 아닌 은별이의 방…. 은별이도 마침 대학교를 간 실정이라서 방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심지어 가족 또한 외출을 한 상태이니… 그야말로 설화가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아무것도 모를 터. 고로 설화는 은별이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장롱을 열어 이것저것 뒤적이기 시작했다.
"음~ 너무 노출이 심한 옷밖에 없네요~."
장롱 안을 뒤적거릴 때마다 나오는 건 죄다 노출이 심한 여름 옷뿐이다. 겨울 옷이야 그래도 나름대로 추위를 피하기 위함에 조금 두터운 털로 된 옷들이 많았지만, 이런 봄 날씨를 상대로 입을 옷은 결코 아니었다.
"으음~."
그러다가 이윽고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은별이의 팬티. 어지간히 속옷은 여성스러웠던 지라, 그것을 두 손으로 잡고 늘어뜨려보던 설화는 은근슬쩍 코도 갖다대서 냄새를 맡아보았다.
"킁킁."
그러고는 소감.
"…여자네요?"
마치 의외라는 것처럼 그리 소감을 표명한 뒤 팬티를 침대에 가볍게 던진 후, 재차 옷을 찾는다.
"아~."
그러다가 마침내 괜찮은 옷을 발견한 듯, 옷걸이에 걸려 있는 장롱 속의 옷을 하나 꺼내든다. 그것은 발랄한 분위기가 피어 오르는 원피스로… 은별이가 꽤나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옷 중 하나였다. 주로 중요한 데이트에만 입는 옷이었는데… 이번 여름 시즌이 되면 민국과 데이트를 할 때 입을 계획이었다.
"잘 쓸게요~."
하지만 그런 은별이의 꿍꿍이를 일말도 모르는 설화로서는 그저 전신 거울 앞에서 자기 몸에 옷을 대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웃음 지을 따름이다. 이윽고 입고 있는 옷을 벗어던지고는, 은별이의 옷으로 차려입은 설화. 그리고는 곧장 민국의 방으로 돌아와… 외출에 필요한 양산을 들고 집을 나간다.
…폴짝! 촤악! 1층 마지막 계단을 두 발로 폴짝하고 뛰어 내려온 다음에, 곧장 양산을 펼쳐 어깨에 갖다댄다.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가득히 머금고 은별의 방에서 덤으로 가져온 구두를 신고 걸을 따름이다.
"아름다운 하루예요~."
그렇게 설화의 혼자만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설화는 일단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로 향해 보았다. 그러자 저마다의 커플들이 어깨 동무를 하거나 손을 잡고 걷고 있었고, 걔 중에는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며 바빠 보이는 청년들도 있었다. 직장인들부터 커플들… 혹은 혼자 있는 사람들까지, 여러모로 각자의 삶을 사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신기한 건 마찬가지예요. 몬스터들이 없잖아요?'
설화가 살던 세계에는 몬스터들이 넘쳐났고, 그곳에는 현재의 민국이 아닌 또 다른 민국이 존재했다. 능력을 발동시켜 싸우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으며… 능력자들을 귀중하게 대우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아니다.
이 세상엔 능력자도 없고, 그보다 더 대단한 마법은 있었지만 적어도 몬스터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물론 그런 것만은 아닌 모양이지만요~.'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약자 세력을 조이는 강한 세력이 존재하면, 그 약자 세력은 오로지 강한 세력만을 초점으로 두고 상대한다. 하지만 그 강한 세력이 사라지면 약자 세력은 서로 분열하여 강자가 되어 싸우기 시작한다.
그것을 증명하듯… 설화는 한 불량한 남자가 어떤 할머니에게 으르렁거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거 어쩔거야! 책임지라고!"
"아이고… 그러니까 닦아줬잖여… 이러지 말고…."
"아이씨! 어디 더러운 손을!"
다투는 건 아니다. 할머니가 일방적으로 미안한 얼굴로 손을 내뻗으며 남자의 남자 구두를 닦아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발로 내차면서 소리치고 있었다. 결국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와중에 길을 지나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이봐요! 나이 많으신 할머니에…."
"엉?"
"아, 아닙니다…."
하지만 금세 기죽어서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청년을 뒤돌아본 남자의 얼굴에 칼로 지진 듯한 흉터가 하나 있었고 인상이 워낙 괴팍해서 건드렸다간 괜히 인생에 안 좋은 영향만 끼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왈칵 겁을 집어먹고 무시하는 가운데… 남자는 계속해서 할머니를 내려다보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어유, 어서 와요 아가씨."
"냠."
설화는 그런 두 사람의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맛있는 오뎅이 있음에 곧장 한 입 무는 모습이었다. 포장마차 주인은 찾아오는 다른 손님들 역시 상대하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저 남자 이곳에서 매번 저러기로 유명하니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요. 저런 식으로 어렵사리 사는 사람들 돈 때먹는 게 취미니."
"그래요? 하지만 어쩜 저런 야만한 짓을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최악이네요…."
"뭐? 방금 어떤 년이 최악이라고 했어?"
순대를 집어먹던 여자 두 명이 서로 맞장구를 치면서 뒷담을 까자, 그것을 놓치지 않고 들은 흉포한 인상의 남자가 홱 돌아본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얌전히 순대 쪽으로 시선을 돌려 계속 먹는가 싶더니… 곧 후다닥 자리에서 벗어난다. 설화는 그 와중에도 '냠'하면서 계속 오뎅만 먹을 따름이었다.
"씨발. 좆도 안 되는 것들이."
"우물우물."
"야! 할멈! 이 구두 더러워졌잖아! 어떻게 할 거야? 빨리 적당한 사례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꿀꺽. 이윽고 오뎅 시식을 마친 설화가 돈을 건넨 후, 또각또각 그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비껴 지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그만 실수인 듯… 자신의 구두로 남자의 구두 뒷꿈치를 찍어버리고 만다.
"악!"
"아앗~."
고통이 컸는지 뒷꿈치를 잡고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남자. 설화가 입가를 가리고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한다.
"죄송하시와요~"
"죄송하… 뭐야, 이 년… 말투가 왜 이래?"
어이없는 얼굴로 여자를 훑어보는 남자. 하지만 곧 예쁘장한 그녀의 얼굴과 몸매에… 남자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 이윽고 남자가 '아가씨.'하면서 설화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설화가 기다렸다는 듯 '아응~'하면서 가벼운 신음 소리를 낸다. 남자가 설화의 귓전에 입을 갖다대며 중얼거렸다.
"죄송하면 책임은 져야하지 않겠어?"
"책임이요오?"
"그래. 책임. 도덕 시간에 선생님에게 나쁜 짓하면 책임 져야한다는 거 배운 적 없어?"
그 말에 설화는 남자를 미소 짓고 쳐다보았다.
"배웠어요~."
"그래? 그렇지? 좋아, 따라와."
"따라가겠어와요~."
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남자를 따라 총총 걸음을 움직이는 설화. 그런 설화를 차마 붙잡을 수 없다는 듯 공포에 어린 눈동자로 쳐다보면서 손만 뻗는 할머니. 주변 사람들도 그저 막연히 지켜볼 뿐… 차마 다가가지 못하는 모습들…. 하지만 설화는 그저 할머니를 쳐다보다가 가벼이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으히히히히."
"……."
이윽고 설화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비좁은 길 안으로 들어온 남자였다. 어둑어둑한 곳에 심지어 카메라도 없던 지라, 무슨 일을 당하면 아무 증거도 못 잡을 게 자명했다. 하지만 설화는 가로막힌 길에서도 조금도 떨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마. 천천히 해줄게."
"……."
두 손을 움직이며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설화는 미소 지었다.
"그러시와요~."
투둑! 투둑!
"아아아아아악!"
이윽고 얼마지 않아…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비명을 막는 듯한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고, 어둑어둑한 공간이기 때문에 낭자하는 핏물조차 사람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또각. 또각….
"……."
잠시 후, 비좁은 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설화였다. 그녀는 양산을 쓰고 있었으며, 볼에는 조금 핏물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설화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아~."
쨍쨍한 햇볕은, 적어도 그 세계에서는 볼 수 없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름다운 하루네요~."
그렇게 설화의 산책은 계속되었다.
*
'사람들 엄청 붐비는구만.'
학교 가는 아침, 민국은 전철을 타고 유유히 학교가 있는 역까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두 여학생이 민국을 쳐다보며 속닥속닥거리는 게 보인다. 눈을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면서 시선을 피하는 것이… 또다시 저도 모르게 호감을 주고만 모양이다.
'하아, 나란 남자… 은별이 암 걸리게 하는 남자.'
훗날 은별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향해 '넌 저런 바람 피우는 새끼는 되지 마렴.'이라고 하지 않을까? 근데 문제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게 문제다.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들어 확인하는 민국이었다.
'설화는 잘 있으려나.'
그러고 보니 설화는 연락할 수 있는 휴대폰도 없고, 그저 집에만 쭉 있다 보니 되게 외롭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민국이었다. 그런 설화는 늘 자신만 곁에 있어주면 된다고 하지만 그건 좀 여러모로… 기쁘기도 하지만 위험한 발언이었다.
'돌아가서 의논 좀 나눠봐야겠네.'
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던 민국이었다. 그 순간… 우우웅하고 진동이 울렸다.
"응?"
막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던 민국이 다시 휴대폰을 꺼내들어 액정을 확인했다. 메시지 한 통이 와 있었다.
'누구지?'
그러나 모르는 번호임에 민국은 의문을 가졌다. 아니, 이것은 과연 번호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막 장난친 번호마냥 1만 줄창 써져 있는 번호였으니까. 이윽고 어떤 메시지일까 확인하는 민국이었다.
[서민국]
그리고 그 메시지의 첫 문장은 이러했다.
[나는 네가]
그때까지만 해도 민국은 대수롭지 않은 문자겠거니 생각했다. 그냥 어떤 친구의 장난이겠거니 말이었다.
[현대왕인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그 한 문장에 긴장을 풀고 있던 민국은 단숨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민국이 겪는 생에 최초의 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