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바람>
“온니찡. 우유 드실래염?”
“우유 마시면 입 냄새난다.”
“하지만 안 마시면 홀아비 냄새나는데여?”
“홀아비 냄새는 사나이의 상징이지. 남자의 냄새는 여자들을 유혹시키는 일종의 호르몬제다. 우유 냄새보다 훨씬 낫지.”
“그렇군여. 그럼 지만 마실게염.”
“잠깐. 무슨 우유냐?”
“당연히 초코초코지여.”
“이놈이? 나도 한 잔 줘라.”
서라가 양 검지를 들어 민국을 가리키며 한 쪽 발을 든다. 일종의 깜찍이 포즈다.
“행님의 홀아비 냄새를 지키기 위해 초코 우유는 지 혼자 다 마시겠음!”
“이럴 수가. 지금까지 병만 주던 동생 놈이 약을 준댄다… 갭모에냐?”
갭모에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의외의 행동을 할 때 호감이나 놀라움을 느끼게 되는 모에를 의미한다. 어찌 됐든 민국과 서라는 지금 한 집 한 방에 있었다.
위치는 다름 아닌 서라의 집이었는데… 이번 수능 공부를 하면서 어지간히 시험 문제들이 어려웠던 지라 고생이 장난 아니었다. 서라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참으로 가엾은 맘을 느껴 민국이 몸소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근데 너 과외비는 왜 안 주냐?”
“읭? 행님 웃기시네염! 나님이 언제 행님에게 과외비를 안 줬음여?”
“그럼 언제 줬는데?”
“지금도 주고 있잖아염!”
그리고는 ‘온니짱!’하면서 와락 민국의 옆구리를 양손으로 포옹하면서 달라붙는다.
“온니짱 아이시떼루!”
“허얼.”
그야말로 애교로 과외비를 대신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포옹을 한 상태에서 머리로 가슴팍을 문지르는 서라의 언동에… 민국의 마음이 안 움직일 리 없었다.
“에라이, 오냐 좋다. 과외비는 네 애교로 석섹스.”
“우왕 역시 온니찡 멋지네염! 하지만 마지막 뒷말은 뭔가 안 멋져염!”
“너 모르냐? 원래 영어에서 석세스는 석세스가 아니라 석섹스야. 그런데 석섹스라고 하면 말을 쓰기가 뭔가 민망하니까 미국인들이 석세스로 바꾼 거다.”
“되게 아이러니한 역사네여. 역시 수능을 가르쳐주는 온니찡은 모르는 게 없군여? 나중에 은별 언니찡에게 좋은 거 배웠다고 알려드릴게여!”
“오냐, 내가 잘못했으니 계속 공부나 하자.”
그리고 서라가 건네는 초코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시고는 출제 문제집을 돌아보는 민국이었다. 이것 이것 문제가 출제될 것이다… 하면서 일단 이번 중간고사부터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단순 수능 시험도 중요했지만… 이번 중간이나 기말도 역시 잘 보면 더 좋을 게 자명했다.
“의잉…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염 온니찡?”
“이건 말이다. 이렇게 해가지고….”
대충 샬롸샬롸 서라가 모르는 게 있으면 설명해주면서 도와주는 민국이었다. 동시에 서라가 풀이할 수 있도록 보조 역할도 해주는 모습이었다. 치고 빠질 때를 아는 민국. 괜히 인간관계에 능력이 탁월한 그가 아니었다. 이런 재주는 언제 어디서든지 누군가를 가르칠 때도 사용이 가능했으니.
“새삼 느끼는 거지만 온니찡은 뭔가 사람이 의지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는 거 같음여.”
“당연한 거 아니겠냐. 세상 어디에도 나 같은 남자 없다.”
“그 나 같은 남자라는 건 좋은 뜻이 아니라 나쁜 뜻이 분명함을 느낍니다여 역시 온니짱 짱짱 솔직함!”
“이 녀석… 가면 갈수록 돌려서 말하는 법이 늘고 있구나. 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군.”
그러고 보니 서라도 일 년만 지나면 이제 성인이다. 민국은 열심히 공부하는 서라의 옆모습을 턱을 괸 채로 가만히 주시하였다.
‘이놈이 벌써 성인이 될 준비를 한다니.’
심지어 자기 자신도 벌써 한 살 더 먹었다. 대학교도 학년이 하나 더 올랐고 말이다. 이렇게 다들 나이를 먹어가는 거겠지… 서로 조금씩 달라지면서,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서.
“…….”
하지만 돌이켜보면 민국의 요 일년은 남들보다 굉장히 남달랐다. 희귀병으로 목이 망가지다 못해 방송도 못하게 되고… 심지어 죽을 위기에 처한 실정에 흑마법사란 존재를 조우…. 가슴을 하루에 한 시간만 만지면 살 수 있는 조건으로 민국은 구원의 손길을 얻게 되었다.
요즘은 여자친구 강은별의 힘을 빌려 가슴을 하도 만지다 보니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는 상태였지만… 어쨌든 그 후에도 이런 저런 일이 있었고… 민국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년이었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놈하고도 이런 애매한 관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 말이지.’
민국은 진심으로 걱정 중이었다. 말은 안했고, 토로한다 한들 해결책도 마땅히 존재치 않아 난감했지만….
‘나는 어찌해야 할꼬.’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이토록 궁지로 몰아넣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상 민국은 다른 여자들을 정리하고, 은별만을 바라보는 일편단심 해바라기 존재가 되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러기에는 물 건너갔고.’
이젠 그녀들을 설득해서 다 포옹을 하는 한국 일부다처제를 노리거나… 아니면 막판에 한 여자만을 선택하는 기로만이 남은 실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은별을 배신하고 싶은 맘은 추호도 없었다. 민국은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으니까.
“야.”
“호.”
“이놈이?”
“헤헤. 왜 부르심?”
언제나와 같은 여린 미소와 함께 고개를 돌리는 서라. 턱을 괸 상태로 민국은 그런 서라를 쳐다보면서 불현 듯 돌발적으로 질문했다.
“너 지금도 나 좋아하냐?”
“…헐.”
서라가 조금 놀란 듯 벙을 찌다 대답했다.
“온니찡 어떻게 여자에게 그렇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실 수가 있지여! 심지어 수능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이빠이 받고 있는 가녀린 여고생에게!”
“그러게. 근데 좀 궁금해서.”
민국은 그냥 서라를 쳐다보며 다시 질문했다.
“진짜 나 좋아해?”
“…….”
서라는 잠시 말이 없다가 문제집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의잉….’하고는 책상 서랍에 있는 작은 인형 하나를 양손으로 쥐어서 민국에게 보여준다.
“이 인형느님은 좋아한다네여!”
“…….”
“고개를 까딱까딱!”
인형의 고개를 까딱까딱 억지로 끄덕이게 하는 서라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민국은 가만히 쳐다보다가 곧 미소 지으며 서라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툭.
“녀석.”
“까딱까딱! 까딱까딱!”
“진솔하게 대답한다 해서 내가 여기서 너 안 잡아먹는다. 성인 아닌 여자애 잡아먹고 탈난 남자들 요즘 이슈되고 있는 거 모르냐?”
“맞음! 지금 나님 드시면 탈나는 수준이 아니라 토할 거예염!”
토만 하면 망정이지… 아리아가 들고 일어나서 민국을 밟아 죽이러 올 지도 모른다. 민국은 아직도 꿈속에서 뵈었던 아리아의 분노를 잊지 않았다.
“어쨌든 훗날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라. 본래 인생은 공부가 전부인 법이야.”
“아닌데여? 돈이 전부인데여?”
“…이 녀석. 현실을 아는군.”
“행님 요즘 애들 만두처럼 만만히 보시네여!”
공부를 마치고, 슬슬 민국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집 바깥까지 배웅해준 서라가 손을 흔든다. 민국은 그런 서라의 손을 따라 똑같이 손을 흔들어주다 몸을 돌렸다.
“좋은 발기되세여!”
“어휴, 소름.”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서라와 이런 관계가 되기 전에… 일 년 전 ‘발기찬 하루가 되세요!’하면서 2층에서 집에 가는 민국을 보고 손을 흔든 적이 있지 않은가? 저런 이쁘장한 얼굴의 강서라가 그런 행위를 하니 여러모로 모에 요소가 분명했지만, 그래도 천하의 민국조차 민망하게 만드는 건 어지간히 엄청난 일이었다.
‘과연 이런 시간이 계속되어도 괜찮으려나.’
은별이를 속이고 이런 은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게 괜찮을까? 물론 가까스로 단둘이 있는 와중에도 서라에게 일말의 접촉도 하지 않은 민국이었다. 그것을 감안할 때 은밀한 관계라고 하기에는 다소 뭐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은별이가 모르는 묘한 감정이 계속해서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오, 이 망할 하느님 새끼여. 부디 저에게 해결책을 내려주십소서.’
모든 것을 하늘 어딘가에 있을 하느님에게 떠맡기며 민국은 길을 거닐었다.
“휴우우우우우우웅!”
집으로 돌아온 서라였다. 진심으로 안도하듯 숨을 내쉬면서 서라는 자신의 가슴 상복부에 손을 갖다 올렸다. 그리고는 콩닥콩닥 열심히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수를 느꼈다.
“으아… 너무 심하게 뛰네여….”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집에서 싸울 폼을 잡아보는 서라였다. 물론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녀로선 폼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무릎을 굽힌 상태로 머리 근처에 팔을 갖다대며 ‘흡! 얍! 산호철조!’하고 손을 고양이처럼 휘두른다. 물론 허공에.
“에구궁… 더 뛰네여!”
하지만 오히려 심장 박동수가 더 높아지는 문제가 생기자, 결국 곧장 냉장고에 있는 하드를 꺼내 쪽쪽 빨아보는 서라였다. 그러다가 그만 하드의 차가운 얼음에 혀가 붙고만다.
“띄띔! 띄띄띄띙!”
한참동안 방방 뛰면서 하드를 혀로 녹이고 나서야, 그제야 때어지는 모습이었다. 서라는 부들부들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찌해야 할까여….”
서라도 이만저만 고민인 건 마찬가지였다.
*
흑설 공주는 오늘도 와인을 홀짝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인을 통해 떠올리는 옛 기억은 이따금씩 무의미한 감정만을 떠올리게 만들 따름이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무의미한 짓이 아니겠느냐.”
마치 지금도 어느 곳에선가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고 있을 한 여자 아이를 떠올리며, 웅얼거리는 흑설 공주였다. 그녀는 와인잔을 내려놓고는 천천히 방을 나와 거대한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또각또각… 유독 그녀의 구두 소리만이 로비를 울리는 가운데, 흑설 공주는 천천히 운을 띄었다.
“피해간다는 건 불가능할 터인데 말이란다.”
이제부터 불어 닥칠 바람을 그녀는 짐작하고 있었다.
*
“…….”
예나는 자기 방의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복부에 손을 스리슬쩍 갖다대고 있었다.
‘여기에….’
이 뱃속에는 한 때 아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유산해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일정 시간 동안 일반인처럼 만들어주는 약을 먹고, 지금 그 효과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벌써 어연 반 년 정도가 흐른 시점에서…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시….
‘민국이는… 정말 괜찮은 걸까…?’
예나는 흑화 소주 건의 일에 대해서 아직도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민국이가 가져왔던 그간의 생각을 무너뜨렸고, 또 다른 책임감을 끌어 안게 했다. 그리고 비록 은별과도 신경전을 벌인 사이였지만… 그래도 예나가 원했던 건 이런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
예나는 그저 말없이 거울 속의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구부리면서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포옹하였다. 마치 언젠가 나타날 싹을 보듬기 위함인 듯….
*
“…….”
쿵쿵! 유이는 이따금씩 벽면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자신의 이러한 심리 상태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통제가 되지 않는 심장에 진정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그녀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꽝스럽고 적응이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하아, 하아….”
하지만 몇 번이고 그 짓을 반복해도… 머리에 피가 나기는커녕 그저 심장만 계속해서 두근두근 거릴 따름이었다. 문득 민국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끼면서… 유이는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을 따름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벗어나려 해도 그녀는 피할 수 없다. 그렇다. 이것은 엄연한 짝사랑이다.
*
“룰루랄라~.”
설화는 민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민국의 방 창문에 턱을 괴고 바깥의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미소 짓는 모습이었다.
“바람이 좋네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