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무서운 이야기 2>
"오우! 뻐킹맨! 유 마이네임이즈 기.억.남쌤?"
'어머나 씨발.'
세상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 민국은 어이없는 얼굴로 민철이 소개해준 그 흑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다시금 민철을 돌아보며 묻는다.
"이 흑인 양반이 네가 알고 지내는 형이라고?"
"그래. 아는 사이냐?"
민철도 흑인 형과 민국이 어쩐지 초면인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자 그렇게 반문했다.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암, 알고도 잘 알지."
민국은 옛일은 아니고, 지난 일을 돌이켜보았다. 때는 바야흐로 석기 시대 1500년 전…은 훼이크고 목욕탕에서의 만남… 그리고 그곳에서 보았던 커다란 대물…. 그 무거운 흉기로 인해 민국은 자괴감을 느꼈고 그만 시비를 털게 되었다! 이후 유이의 훈련을 받아 강해진 민국은 흑인과의 싸움 끝에 경찰서에 끌려 가는데….
"오 맨~ 유어 찌릿찌릿맨~."
흑인도 민국의 얼굴을 잊지 않았는지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사람 인연이 이렇게 아스트랄 할 수가.'
그러게 말이다. 하필이면 만나도 이 흑인을 다시 조우하게 되다니 말이다. 하지만 민철이 아는 형이라고 하니 민국도 참 뭐라 함부로 하기 뭐해졌다.
"오 맨, 싸우긴 했지만 맨. 친하게 지내자 맨."
"요 맨, 알겠습니다 맨. 유 뻐킹맨."
"오우?! 뻐킹맨?! 컴온 맨!"
"유 마덜 뻐커!"
흑인식으로 악수를 건네던 흑인은 민국의 도발에 다시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면서 덤빌 자세를 취했다. 민국 역시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하면서 주먹을 들 따름이었다. 도중에 민철이 말려주어서 다행이었지 말이었다.
"뭔 유치하게 목욕탕에서 싸우고 있냐. 심지어 경찰서까지 갔다 오다니, 인연 기괴하네."
"난 그런 흑인이랑 형 동생 지내고 있던 네가 더 신기하다."
대충 상황은 종료되고… 흑인과 다투지 않기 위해 멀리 떨어진 민국이었다. 그리고 잠시 민철이 흑인에게로 향한 사이, 멀리 있던 흑인과 눈을 마주하게 되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홱 가로저어 무시하는 모습이었다.
'가서 니가라고 외치고 싶다.'
어쨌든 그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게, 일단 이 모임의 주최자이자 앞으로의 등산 루트를 전부 알고 있는 장본인이니 말이다. 민철의 제안을 승낙한 상태였기에 이제 와서 뒤로 뺄 수도 없었고, 어차피 1박2일로만 진행될 모임이니 그냥 올라보자고 생각했다.
"레스고! 컴온컴온!"
그렇게 하여 등산이 시작되었다. 등산을 하게 된 산은 인위적으로 계단이 즐비하게 설치된 산이었는데, 등산객들이 많이 오가는 산인 모양이었다.
'역시 봄답게 풍경은 좋군.'
겨울은 추위 때문에 꽃들도 나무도 고개를 숙이는 계절이었다. 하지만 봄은 다르다. 봄은 모든 것이 다시 새싹을 피우는 계절… 그렇기 때문에 수려한 느낌이 드는 건 당연했다.
"무브무브!"
선두에 선 리더 흑인이 모임 일원들을 계속해서 지도했고, 민국은 맨 뒤에서 핵핵거리면서 올라갈 따름이었다.
'조, 존나 힘들다….'
돌이켜보니 민국은 운동을 제대로 했던 게 고등학교 때 애들이랑 축구차던 이후가 끝이란 걸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몇 년이 지난 지금 당연히 등산을 하는 다른 일원들에 비해 현저히 속도가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운동을 얼마나 안 했길래 그러냐."
"슈벌, 사람 살려."
장장 세 시간쯤 산을 올랐을까. 경치도 좋고 풍경도 좋은 계곡 앞에 도달한 일원들이었다. 그러자 평지로 된 곳에 돌무더기들이 깔려 있고, 더불어 모래 들판에 수풀이 새근새근 나 있는 광경이 드리웠다. 한참을 땀 흘리며 올라온 민국은 건장한 흑인이 '여기서 머뭅시다 맨.'하고 외치는 소리에 다리를 떨어뜨렸다.
"으어어…."
"텐트치고 온다."
기진맥진한 민국과는 달리 민철은 아직 괜찮은 모습이었다. 민국은 그런 민철을 보면서 운동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윽고 일원들 전부 각자 텐트를 친 마당에 민국도 조금은 힘이 생긴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흑인이 민국의 앞으로 다가와서 대뜸 제안한다.
"요 맨, 이제부터 파티를 할 겁니다 맨. 할 겁니까?"
"파티? 아아, 오케이 오케이."
비록 다퉈서 서로 간에 감정이 좋진 않지만 그래도 이 상황에서 또 싸우는 건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이었다. 흑인도 더 이상 다툼은 원하지 않는 모습이고 말이다.
그리하여 날이 조금씩 저물기 시작했을 때 텐트 근처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서로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초면인 신입생도 몇몇 있었고 민국도 포함되었으나, 그래도 늘 인간 관계는 곧잘 소화해온 민국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외 신입생도 기존 일원들이 잘 조율해주는 모습이었고 말이다.
'나쁘지 않은데.'
꽤나 적응하기 쉬운 분위기였다. 비록 서로가 서로를 깊게 알아가게 되면 또 갈등이 있겠지만, 적어도 초면인 사람이 볼 때 꺼림칙한 분위기는 일지 않아서 매우 좋았다.
"왓섭맨 유 핸섬."
"오, 유 대물맨 대물 핸섬."
심지어 그토록 다투던 흑인과도 온전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자 절로 친구가 되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흑인 역시 인간관계를 중요시 여기는 타입 같았고, 그래서 나라가 달라도 사람 간에 친근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민국 역시도 그 흑인에 대해서 알게 되어가자 슬슬 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거시기만 흉기일 뿐 마음은 착한 양반이었구만!'
그리하여 민국과 흑인은 의외로 급속도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초면에 우격다짐을 했기 때문에 더 빨리 끈끈해지는 걸 지도 몰랐다.
"헤이 디스이즈 나비맨. 유 나비 스텐두유?"
"두유? 예스 두유. 두유 맛있지. 설마 내가 두유도 모르겠냐?"
그렇게 친근하게 얘기를 나눠가면서 이젠 어깨 동무까지 하고 노는 모습이다. 그런데 근처 산길을 이동하고 있던 찰나였을까. 흑인이 그만 발치의 돌무더기를 보지 못하고 발에 걸려버렸다.
"오우 맨!"
"어머나 이 흑인 새끼야!"
돌무더기에 걸려 넘어지려는 흑인을 보고 잽싸게 손을 뻗어 부축해주는 민국이었다. 그만 돌무더기 때문에 바닥에 머리를 박을 뻔했던 흑인은 민국의 부축에 콩닥콩닥거리는 가슴의 두근거림을 참아내면서 말했다.
"땡큐… 맨."
'응? 뭔가 이상한데?'
민국은 순간적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흑인의 눈빛이 다소 달라진 것을 느꼈다. 어쩐지 상냥해졌다고 할까…. 하지만 민국은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여기면서 그의 어깨의 주름을 털어줄 따름이었다.
이후, 민국과 흑인은 다시 파티가 벌어지는 텐트 쪽으로 와서 밤새도록 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면서 진탕 놀고 있자니 민철이 다가온다.
"인마, 싸운 것치곤 형이랑 금방 친해졌잖아."
"아아, 생각보다 괜찮은 양반 같더라고. 금세 친해졌지."
심지어 이 모임에 강한 호감을 갖게 된 민국이었다. 앞으로 이 모임에서 사나이들의 끈끈한 우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장시간 참여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남정네들과 함께 술잔을 부딪히면서 즐겁게 놀던 어느 때였을까.
"크아! 취한다!"
"크아아악! 끝내주네 맛!"
서서히 다들 몸이 달아오르는 모양이었고, 술에 취한 몇몇은 근처에 드러누워서 잠을 자거나 하는 모습이었다. 몇몇 남자들만이 깨 있었는데, 걔 중에는 흑인이랑 민철이, 그리고 남자 한 명 정도였다. 술을 마저 홀짝이던 민국이 그들을 발견하고 근처로 다가갔다.
"무슨 얘기 나누고 계십니까?"
그들은 꽤나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처로 민국이 다가가 질문하자, 남자 한 명과 민철이 다소 진지한 얼굴로 민국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진지한 분위기에 민국도 술에 좀 취했음에도 입을 다물고 다가갈 따름이었다.
'뭔데 이렇게 분위기가 우중충하다냐.'
다른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명나게 술에 취해 자고 있는데 말이었다.
"유맨… 나 말입니더…."
그런데 그때 흑인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남자… 하트맨입니더…."
"……."
앵?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심각한 얼굴을 짓고 있는 민철과 남자 한 명을 제외하고 민국은 여전히 이해 못한 얼굴을 지었다. 이윽고 흑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크흑… 지금까지 속여서 맨… 미안합니 맨…."
"……."
민국은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해 민철을 돌아보았다. 민철이 짧게 대답해주었다.
"게이라고…."
"……."
"지금까지 숨긴 거였나봐."
그 후, 술에 취해 진실을 말한 흑인 형을 달래고 남은 사람 민철과 남자 한 명, 그리고 민국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들을 저마다 텐트로 안내해주었다.
"형, 괜찮아요?"
"흐으윽… 매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술에 취한 흑인 형을 부축하여 텐트로 안내해주는 민철. 그래도 그동안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인지 갑작스런 동성애자 고백에도 민철은 이해해주는 모습이었다. 민국 역시 민철을 따라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진정하시고 형, 이제 주무세요. 형에 관련된 거 다른 사람들에겐 말 안할게요."
"고맙다 맨… 크흑 맨…."
그리고 민철의 달램 끝에 중간 자리에 누워 잠을 자게 된 흑형. 민철은 텐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쪽으로 누웠고 민국은 맨 구석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민철이 너 괜찮냐?"
"조금 놀라긴 했는데… 그래도 형이니까 감수해야지."
그리고 피곤한지 더 이상 말 않고 눈을 감는 민철이었다. 민국은 그런 민철을 보다가 천천히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다.
'뭐, 나도 조금 놀라긴 했지만. 사실상 동정애자라고 해서 차별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하다. 민국도 동성애자에 대해서 크게 나쁘게 생각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세상엔 얼마든지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래, 그리고 살기 얼마나 힘들겠어.'
민국은 자리에 누운 상태로 눈을 감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합니더 맨…."
"……."
문득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은 고개를 돌려 그 흑인 쪽을 보았다. 흑인은 눈물을 흘린 상태로 잠에 들어 있었는데,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국… 좋아합니더 맨…."
"……."
"민…."
"……."
순간 민국은 침묵했다. 흑인의 얼굴이 워낙 애처로워보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입가에서 나온 소리가 왠지 모르게….
'지금… 내 이름 불렀나? 내 이름 불렀지? …슈발?'
아니다, 아닐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흑인이 잠결에 했던 말이 왠지 민국의 생각에 들어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파박하고 스쳐 지나가는 아까 전의 기억!
'고맙맨….'
쓰러지려던 것을 부축해주자 자신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던 흑인. 그것을 떠올리자 민국은 가슴이 두근! 거리는 걸 느꼈다.
'…씨, 씨발.'
그와 동시에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렸고, 몹시 숨이 가쁘다 못해 식은땀까지 들 정도였다.
'아…?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닐 거다 씨발….'
하지만 느닷없는 게이 고백과 더불어… 잠결에 부른 자신의 이름… 그리고 아까 전 그 상냥했던 눈빛…!
'슈…발?!'
동성애자의 가치관은 존중한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럴까… 민국은 갑자기 엉덩이가 시리는 걸 느꼈다.
'처, 천장보고 자야지 룰루랄라~.'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입이 불안하다.
'슈발…!'
이번엔 엎드렸다. 그러자 이번엔 엉덩이가…. 그래서 이번엔 새우잠을 자듯 좌측으로 꺾자 여러모로 또 엉덩이가… 흑인 쪽을 마주보자니 키스할 것 같아서 입술이….
'…아니다 아닐 거다. 아닐 거야 헤헤, 아닐 거야.'
"……."
"……."
하지만 그날, 민국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왠지 모를 오한이 자꾸만 등골에 불어닥쳤고… 이불을 목끝까지 쓴 채로… 민국은 결코 눈을 감지 못하였다…. …그것이… 민국이 겪은 사상 최악의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 이후… 나는 항상 엉덩이 구멍에 데이밴드를 붙이고 다닌단다…."
"……."
"똥 쌀 때를 제외하면 항상 어느 위험에서든 벗어나기 위해서지…."
훗날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하던 형의 말에… 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