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양치기 소년>
"설화야."
"네 민국 님~ 무슨 일이시와요?"
때는 바야흐로 봄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계절, 화창한 봄날에 대학교에서 돌아온 민국은 굉장히 마음을 다진 얼굴로 설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설화는 자신의 어깨에 올린 민국의 손을 보다가 민국을 돌아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민국은 웅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설화 너에게 부탁이 있구나."
"부탁이요? 설마 민국 님~ 드디어 저에게 사랑의 씨앗을 줄 생각을 하신 건가요?"
민국은 '암 그러고 말고.'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의미에서 사랑의 씨앗이지. 하지만 설화야, 그 사랑의 씨앗을 주려면 일단 내가 해야 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뭔가요 민국 님?"
이번엔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설화였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민국은 '훗'하고 이마에 손을 갖다대다가 폼나게 말했다.
"오늘 내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거든. 좀 있으면 딸통법이 실시되어서 말이야."
"앙~."
그 말에 설화가 미소 짓고는 민국에게 안긴다. 그리고는 민국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면서 말했다.
"하지만 민국 님~ 굳이 휴지통을 임신시키지 않으셔도 제가 곁에 있사옵니다~. 어째서 곁에 있는 저를 두고 컴퓨터와 짝을 지으시려는 건가요오?"
"흠흠! 나 역시 설화 너를 내 휴지통처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 두 번 했던 게 아니야. 하지만 그랬다간 내 인생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목잘려 끝날 수도 있거든."
은별이라던가 예나라던가, 보는 눈이 두 개나 있으니 욕망에 휩싸여 움직이는 짓은 절대 금물이었다. 설화는 '후훗'하고 입가에 손을 갖다대며 몸을 물렸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한다.
"그러시군요~."
"그래. 그런고로 오늘은 내가 3D 서양물과 함께 하는 마지막 날을 갖고 싶구나. 그러하니 오늘은 잠깐 예나의 방이나 은별이의 방에 있어줄 수 있겠니?"
"알겠사옵니다~. 예나 님의 방에서 잠시 머물도록 하겠사옵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하신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와요~."
"그래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이윽고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민국이었다. 설화는 그 쓰다듬는 손길을 느끼다가 치마 끝을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민국은 혼자 방에 남게 되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컴퓨터 쪽으로 향했다.
"그럼, 오늘이 나의 마지막 시간이 되겠군."
민국은 마지막 시간이니 만큼 강렬한(?) 추억을 남기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방문을 나갔던 설화였다.
'후훗, 민국 님~.'
설화는 닫았던 방문의 틈 사이를 벌린 다음 그쪽으로 카메라와 함께 눈을 빼끔 보이고 있었다.
'민국 님의 행위를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인지라요~. 눈으로 담아두는 게 훗날 경험을 위해서 좋을 거라 생각하옵니다~.'
예나의 방에 가겠다는 건 일종의 훼이크. 과연 민국이 혼자서 어떤 식으로 자신을 위로할 지 궁금하여 몰래 지켜보려던 설화였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뭐하고 있어?"
"앗."
이윽고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에 설화가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가볍게 놀라는 표정을 보였다. 맞은편에는 구멍을 타고 넘어온 은별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설화는 문 틈 너머에서 컴퓨터 화면 폴더를 뒤적거리고 있는 음흉한 얼굴의 민국을 곁눈질하다가 은별을 보았다. 그리고 눈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예나 님의 방으로 가고 있었사옵니다~."
"……."
"민국 님의 좋은 추억 만들기를 존중해주시길~."
그리고는 총총 걸음으로 은별을 비껴 지나가 예나의 방이 있는 구멍으로 쏙하고 들어갈 따름이었다. 은별은 그런 설화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그녀가 구멍 안으로 사라지자 민국의 방문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뭐야…."
중얼중얼거리며 대체 설화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은별이었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하는데, 마침 안에서 '탁탁탁'하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깨름칙하고도 익숙한 그 소음에 은별은 순간 움찔거리면서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그 소음을 들으면서 문손잡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설마.'
천천히 문틈 안을 들여다보는 은별이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살색의 무언가가 열심히 부딪히고 있는 음흉한 행위의 화면이 있었다. 은별은 어이없음에 순간 입을 벌리고 한참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스고이! 스고이데스요!"
"김치! 김치 맛있었스무니까!"
"헉헉! 김치 존나 맛있지! 얼큰하고 죽여줘요!"
야한 화면 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남녀에게 끼어들듯, 멘트를 치면서 열심히 자신을 위로하고 있던 민국이었다. 그때 끼이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어젖혀졌다. 민국은 급작스레 들려온 커다란 소음에 마치 어린 시절 야동을 보다가 엄마에게 들켰던 것처럼 토끼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헉."
"……."
그리고는 벙어리가 되어 은별을 쳐다보는 민국. 마치 이런 상황에 결코 나타나선 안 될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마냥 민국은 한참동안 말을 맺지 못했다. …그런 그를 대신해서 은별이 운을 띄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으, 은별아!"
그제야 허겁지겁 의자에서 일어나며 컴퓨터의 영상을 끄고는 바지를 입는 민국이었다.
"아, 아니야 은별아! 이건…! …으악! 바지에 끼인다!"
"……."
"은별아! 침착히 생각해! 이건 결코 네가 질려서가 아닌 남자로서의 어쩔 수 없는 생리 현상으로!"
"아, 그러셔요?"
이윽고 민국의 변명에 씨익 미소 짓는 은별이었다. 그 미소에 얼떨결에 따라 웃는 민국.
"헤헤…."
"……."
바보처럼 미소 짓고 있자니 금세 정색한 은별이 저벅저벅 민국의 컴퓨터 앞에 다가와서는 마우스를 빼앗는다. 그리고는 화면에 보이는… 여태까지 찾지 못했던 숨어 있는 폴더를 마우스로 클릭… 오른쪽 버튼을 눌러서….
"으아! 안 돼! 은별아 아노돼애애!"
"……."
딸칵. 삭제.
"으아아아악!"
심지어 휴지통에 들어가서 삭제.
"으아아아아아악!"
마치 몽크의 절규라는 화가의 초상화처럼 양볼에 손을 대고 절규하는 민국. 그런 민국의 절규는 둘째치고, 그제야 마우스에서 손을 땐 은별이 가볍게 호흡을 하고 말했다.
"다음 번에 또 이런 거 보면 그땐 아주 죽어."
"으아아아악!"
"그럼 갈게."
그리고는 저벅저벅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그런 은별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동안 절규를 하였다.
"으아아아악!"
끼이익, 쿵!
"으아아아아악!"
한참동안… 더 절규를 하였다.
"으아아아아아악!"
더 더.
"으아아아아악!"
그리고.
"…이쯤이면 됐겠지?"
슬그머니 절규하던 것을 멈추고 안방의 닫힌 문을 돌아보는 민국이었다. '후훗'하고 가벼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다시금 마우스를 붙잡고 화면을 돌아보는 민국.
"훗. 이럴 줄 알고 따로 복사 폴더를 만들어두었지."
"……."
"보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 여러 방편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으니까."
그는 철저했다. 이윽고 또 다른 폴더에 숨어 있던 복사된 폴더를 클릭하여 다시 유유히 야동을 즐기는 민국. 두 팔을 뒷머리에 얹고 여유롭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폰을 착용한다. 이번엔 들키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를 한 뒤 볼려고 하는데….
"아차, 안방 문도 잠가야지."
혹시나 이런 타이밍에 은별이 문을 열려고 하면 잠겨 있는 문에 의심이 사겠지만, 절대 안 봤다고 삭제하지 않았냐고 시치미를 때면 된다. 본래 여자 친구와 다툼이 있을 때 야동에 관련된 다툼은 필히 있는 법이다. 그럴 때 민국을 따라하면 된다.
"후후후후."
이윽고 여유롭게 안방 문을 잠그러 안방 문으로 향하던 민국이었다.
"아, 그리고…."
"……."
끼이익.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열어젖혀지는 문과 더불어 다시 등장한 강은별. 막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까먹었던 것을 다시 얘기하려고 왔던 그녀였다. 그러나 열린 문 너머로 또다시 보이는 살색 화면에 은별은 침묵했다.
"으, 은별아."
"……."
"은별아! 제발 이러지 말아줘! 아직 저 폴더는 복사도 못했단 말이야!"
저벅 저벅….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려도 방법이 없다. 본래 여자란 완고할 땐 완고한 법이었다. 울먹이며 구슬프게 매달리는 민국을 뒤로하고, 곧장 컴퓨터 앞으로 향한 은별은 마우스를 클릭하여 다시 폴더를 삭제해버렸다. 더불어 휴지통에서도 완전히 삭제.
"끼야아아아아아악!"
이번엔 진심으로 절규하는 민국이었다. 진짜로 복사해둔 폴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민국의 진심 어린 절규에 은별도 진짜인 걸 알았는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말했다.
"나중에 봐."
"끼야아아아아아악!"
끼이익, 쿵!
"크윽… 내 미친 짓을 하면서까지 긁어모았던 야동 폴더가…."
울며 겨자먹기를 하는 사람마냥 민국은 다시 야동 파일을 긁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엔 은별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설화와 은별이 자는 밤 시간에 몰래 말이었다.
'곁에서 설화가 자고 있으니 오늘 하는 건 무리겠고… 내일을 노려야 하나….'
하지만 내일 대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은별과 같은 시간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필시 다시 자기 위로를 할 여유는 절대 없을 텐데….
'으아아아, 신이시여. 어째서 당신은 여자에게 질투라는 것을 만들어주신 겁니까?'
잠깐 하늘의 신을 원망하고 있는데, 불현듯 서랍 맨 위에 끼어 있는 동화책 한 개가 보였다. 민국이 아주 어릴 때 읽었던 양치기 소년이란 책이었다.
'크으, 나도 저런 소년 시절에는 이런 야동 같은 거로 힘들어하지 않았는데!'
순수함으로 무장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울먹이던 민국.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잠깐!'
좋은 생각이 번쩍 든 것이었다.
'어쩌면… 이 방법으로 은별이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지도!'
그리고 대망의 다음 날….
역시 예상했던 대로 민국은 은별과 같은 시간에 집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은별은 어제 한 번 그런 일이 있던 지라… 민국의 집을 어제보다 더 많이 들락거리면서 감시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민국은 전부 예견해두고 있던 일이었다. 고로 오늘… 민국은 필살의 스킬을 한 번 사용해볼 생각이었다.
이름하여 양치기 소년 스킬!
"크흠! …어디 방송이나 한 번 해볼까?"
"……."
마침 은별은 말없이 민국을 감시하면서 그의 방에 있는 참이었다. 민국은 컴퓨터를 키고는 과장된 콧노래와 함께 방송을 키는 척하였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방송을 하려는 듯한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가볍게 안도를 하고는 자기 방으로 잠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윽고 방문이 닫히는 순간 민국이 그 틈을 노려서 곧장 컴퓨터를 두들겼다.
"어라? 이거 왜 이러지? 은별아! 잠깐 도와줘!"
"…왜 그러는데?"
갑작스레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은별이 돌아가다 말고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민국이 컴퓨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방송 프로그램이 이상한 거 같네. 이 부분에 대해서 네가 나보다 잘 아니까 한 번 도와줘."
"…늘 하던 거랑 다른 게 없는데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정말… 기다려봐."
궁시렁대면서도 마우스를 손에 갖다대며 도와주는 은별이었다. 하지만 별로 큰 문제는 없었다.
"봐, 되잖아."
"아, 그러네. 후후, 역시 내 아리따운 여자 친구!"
"…좋댄다."
그리고 쿵하고 다시 문을 닫고 방으로 향한다. 민국은 그 틈을 타서 10초 후, 다시 컴퓨터를 두들기면서 말했다.
"으아! 이거 또 왜 안 돼! 은별아! 도와줘!"
"…아 진짜!"
결국 다시 돌아온 은별. 그리고 다시 마우스를 붙잡고 대신 해결해준다.
"봐, 됐지?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허허, 아까전만 해도 잘 안 됐는데 말이여."
그리고 쿵!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은별. 민국은 이번엔 30초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소리쳤다.
"은별아! 이거 계속 안 된다! 다시 도와줘!"
"……."
"은별아! 은별아아!"
"……."
"훗, 갔나 보군."
자고로 양치기 소년은 늑대가 왔다고 거짓말을 쳐서 사람들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했다. 이것을 인용한 방식이었다.
"후후훗."
이윽고 살색 야동을 트는 민국이었다. 이번엔 자신의 계획대로! 약 5분 동안은 은별이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고로 그 안에 이 쾌락을 만끽하기만 한다면…!
"죽고 싶나보지?"
"……."
그러나 너무 자신을 믿는 것도 문제였다. 돌연 들려온 음침한 소리에 민국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피식 웃음을 머금고 내려다보는 은별이 있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