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제 좀 보기 좋구만요."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유이는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녀도 기존에 입던 옷보다 훨씬 꾸밈 있는 옷을 입자 조금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엄지 손가락을 척 들고 칭찬을 하는 민국의 행위에 그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자, 그럼 나머지 쇼핑이나 진행합시다."
"……."
"다음 차례는 속옷으로 하지요."
물론 그것은 단칼에 거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쇼핑은 의외로 빠른 시간 안에 끝났고 민국은 유이의 집까지 도착하고 난 뒤에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말했다.
"앞으로 그렇게 입고 다니란 말입니다. 보십시오, 그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와 두드러지는 넓은 골반! 지나다니는 남자들 전부 뻑가겠네!"
"……"
오늘따라 유난히 자신에게 잘해주는 듯한 민국. 그래서 그런가… 뭔가 의심이 들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기쁜 감정도 들었다. 이윽고 칭찬을 늘어놓던 민국이 얘기했다.
"어찌 됐든 이제 일도 다 끝났겠다 집으로 돌아가보아야겠군요. 아! 그리고 유이 씨."
"……?"
"이제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 겁니다. 저도 학교 가야 하고 비제이도 계속해야 하니까요."
"……."
민국의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든 유이였다. 하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뭐 유이 씨도 항상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는 타입이다 보니 오히려 더 속편하지 않겠습니까? 게임도 다 완성되었고요."
그 말에 유이는 천천히 입을 열려고 했다. '아….'하고 숨결 같은 목소리가 새어나오는 듯 싶었지만, 곧 그녀는 다시 입술을 다물고 말았다. 민국은 피식 미소를 머금으면서 대답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나중에 비제이 할 때나 다시 봅시다."
"……."
"크흠! 게임 홍보는 확실히 해드릴 테니 염려하지 마십쇼."
그리고 손을 흔들다가 몸을 천천히 돌리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의 뒷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아…."
그리고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삼키게 되었다.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와 더불어 그를 어떤 식으로 붙잡아야 할 지도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이는 결국 돌아가는 민국의 뒷모습을 씁쓸히 바라보며 서 있을 따름이었다.
"……."
인생이란 참으로 신기한 법이다. 전혀 일어날 거라 상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혀 그런 행동을 안 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상식 밖의 행동을 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 오늘의 그 주인공이 있다.
"……."
그녀의 이름은 최유이. 푸른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예쁘장한 여인으로서 비록 낯을 심하게 가렸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비쥬얼은 아우라가 넘쳐났다. 지금은 전봇대에 숨어 누군가의 집 쪽을 조심스레 지켜보고 있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혹 쳐다볼 때마다 모두들 그녀의 외모에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리는 모습이었다.
"……."
날개 옷을 입은 천사는 더 예뻐진다고, 필시 그녀에게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이따금씩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자꾸만 고개를 더 숙이게 되었다. 동시에 입고 있는 푸른색 원피스의 끄트머리를 손으로 잠시 잡거나… 하면서 어색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
사실 지지리 궁상맞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과연 자신에게 실로 어울리는 옷인가 아직도 고민이 될 따름이었다.
'좋습니다 유이 씨! 그 풍만함! 아주 좋아요!'
하지만 어제 자신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칭찬을 하던 민국의 모습을 떠올리니… 유이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안도되는 걸 느꼈다. 이런 게 아마….
"……."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민국의 집을 돌아보는 유이였다. 문제는 어떤 명분으로 민국을 만나냐는 것이었다. 왜 자신이 민국을 계속 만나고 싶어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와 좀 더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그와 접촉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이럴 때 그에게 여자 친구가 없었더라면 조금은 쉽게 접근했을 텐데… 라는 생각까지 무의식적으로 들 정도였다. …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민국의 집 앞까지 당도한 유이였다.
"……."
2층 계단을 오르기 위한 철문 앞에 선 유이. 하지만 그 철문의 손잡이를 굳게 쥐려고 하자니 쉽지가 않다. 올라가서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게임이 덜 완성된 것 같으니 스토리의 기반을 다시 충실히 쌓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평소 도움을 요청하지 않던 유이로서는…. 저벅 저벅.
"……."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계단을 선선히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유이는 자연스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손잡이를 쥐려고 하던 철문 너머였다. 저벅 저벅….
"흐아암."
동시에 익숙한 하품 소리까지 들려온다. 유이는 순간 어깨를 들썩였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좌우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숨을 곳을 찾기 시작한다. 끼이이익… 막 철문의 손잡이를 붙잡는 소리가 들리고, 그것을 목도한 유이는….
"어이쿠야."
"……."
쌩!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아나 방금 전 있던 전봇대에 무사히 몸을 숨겼다. 쿵쾅쿵쾅! 심장 박동이 한층 거세졌지만 최대한 숨을 죽인다. 이윽고 길을 지나는 어린아이가 '엄마! 저 누나 이상해!'라고 가리키는 가운데… 유이는 철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민국을 지켜보았다.
"날씨 무지하게 화창하네. 수영하러 가기 좋은 날이야."
"……."
"웃차차."
그리 말하면서 손에 쥐고 있는 봉투를 근처 쓰레기 봉투들이 모인 곳에 투척하는 민국이었다. 아무래도 쓰레기 버리려고 나온 모양이었다. 이윽고 쓰레기를 버리자마자 다시 철문을 닫고 들어가버리는 민국을 보며 유이는 전봇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안도의 숨결이 아주 가벼이 내쉬어졌다. 이윽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킨 모습으로… 다시금 민국이 사는 집의 철문으로 걸음을 옮기는 유이였다. 어쩐지 아까보다 걷는 자세가 딱딱해져서 마치 로봇을 연상시켰다.
"……."
그리고는 아까와는 달리 조금은 빠르게 철문의 손잡이를 잡는데 성공했다.
"아, 맞아. 버릴 쓰레기가 더 있었지."
"……!"
그런데 그때 또다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도 쏜살같이 전봇대에 숨는 유이였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고, 또다시 내려온 민국은 나머지 쓰레기 봉투까지 봉투더미들에 투척한 뒤 손을 털고 안으로 들어갈 따름이었다. …참으로 날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유이도 처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그리 소감을 표했다.
"……."
그런데 왜 자신은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누가 봐도 참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텐데. 하지만 여전히 그를 만나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유이도 그런 자신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
하지만, 유이는 다시금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철문 쪽에 귀를 갖다대본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히려 쿵, 하고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면 조심스레 계단을 오를 수 있을 것이었다.
끼이익… 이윽고 철문의 손잡이를 쥐고 조심스레 철문을 연 유이였다. 그리고 마치 도둑처럼 소리 없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차차 오르기 시작한다….
"……."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그러자 어디선가 2층 집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역시 민국 님의 품에 안기면 마음이 따뜻해지와요~."
"훗, 그러니 설화야? 나란 남자… 참으로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남자로구나."
"…나 갈래."
"어디 가 은별아!"
세 사람의 왁자지껄 거리는 소리에 유이는 계속해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또각 또각… 마침내 현관문 앞까지 거의 도달한 그녀였다. 안에서는 계속해서 함박 웃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정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면 날 밟고 가라!"
"그래."
"으악! 내 허리!"
"앙~ 민국 님 허리 다치시면 아니되와요~ 아직 저랑 하지도 못했는데~."
무의식적으로 현관문 손잡이에 손을 갖다대려던 유이였다. 문득 들려오는 함박 웃음 소리에 재차 정신을 차린 그녀.
"……."
곧 이게 무슨 짓인가, 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신의 입장을 깨닫게 된 그녀였다. 결국 유이는 지속해서 들려오는 함박 웃음 소리에 천천히 손을 내리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그것을 유이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막판에 이렇게 통제를 하는 것이었다. 끼이익, 쿵. 그리고 결국엔 철문을 닫고 밖으로 돌아온 유이였다.
"……."
가슴이 무언가에 콱 막힌 것처럼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이전에 느낀 사람을 통한 배신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떤 의미에선… 이게 더 아픈 느낌도 들었다.
"으아아아아앙! 엄마아아아아!"
"에구머니나, 이를 어쩌니."
"……."
마침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 아이가 나무에 걸린 연을 보면서 엉엉 울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 되는 사람은 높이 솟아 있는 나무에 걸린 연을 보며 난처해 할 따름이었다.
"……."
울고 있는 그 남자를 보자니 돌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되는 유이였다. 필시 자신도 저런 식으로 슬퍼했겠지.
"……."
하지만 그때 그런 자신에겐 도움을 주는 이는 어느 누구도 없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유이는 아이가 슬퍼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외면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으아아아아앙!"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유이는 어느 순간 나무 쪽으로 향해 도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높게 도약한 끝에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빼내는데 성공한 유이. 도무지 평범한 인간이 선보일 수 없는 굉장한 높이의 도약에 울던 남자 아이와 어머니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
연을 쥐고 내려온 유이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누군가를 돕고, 믿음을 주고 받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외면하려는 찰나에 유이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만 것이다.
'어디에 계신데?'
미아가 되어버린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손수 나서던 민국의 모습 말이었다. …이윽고 몸을 돌린 유이가 천천히 남자 아이에게로 향했다. 남자 아이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면서 눈물 젖은 눈동자가 천천히 커지는 걸 느꼈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연을 건네는 유이였다.
"아…!"
"……."
그 연을 두 손으로 냉큼 받는 남자 아이. 더불어 눈물 자국이 묻어 있는 아이의 얼굴이 급격히 활짝 웃는 모습으로 바뀐다.
"고마워요 누나!"
"……."
그 아이의 미소에 유이는 침묵했다. 아이의 엄마도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할 따름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고맙단 인사에 유이는 뭔가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뿌듯한 느….
"어라? 유이 씨?"
"……."
그 찰나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음성에 유이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있어선 안 될 인물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서민국이었다.
"유이 씨가 이곳엔 웬일이십니까?"
민국은 남자 아이와 유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쓰레기 스티커였는데, 아무래도 음식물 쓰레기통에 붙이려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목도한 유이는… 순간 굳어버린 표정으로 민국을 바라보다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
쌔애애애애애애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저 편으로 달려갈 따름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민국은 눈을 껌뻑거리면서 멍청히 서 있었다.
"헐…."
*
"하아, 하아…!"
집으로 돌아온 유이였다. 거친 숨결을 토해내면서 집안에 당도한 유이는 한참동안 현관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정신을 차리자….
"……."
아이에게 쥐어주었던 연을 쥐고 집까지 달려왔단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땀으로 흥건히 젖어버린 모습으로, 유이는 그만 벽면에다가 자기 머리를 쿵쿵! 하고 두들길 따름이었다.
"……."
바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