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화
"아이고 핵핵."
"……."
마치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사람처럼 불티나게 도망친 민국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숨을 내쉬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던 유이였다. 호기심이 컸던 것인지, 그녀가 처음으로 운을 띄었다.
"왜…."
"에고야 에고."
하지만 어지간히 숨이 벅찬 모양이었다. 몸을 쉽게 가누지도 못하는 그의 모습에 유이는 한참을 침묵했다. 하지만 그녀가 은근슬쩍 건넨 목소리를 결코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 그랬냐고 물으시는 겁니까? 그야 이 사람아, 가까이 하기도 싫어하는 게 표정에 드러나는데 그걸 놔둘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
"에고야, 나 죽겠네. 이렇게 미친 듯이 달려본 게 몇 년만인지… 훗, 이것도 하나의 청춘인가?"
유이는 줄곧 민국을 쳐다보았다. 민국은 출소한 남자를 쳐다보던 유이의 표정에서 한 가지 확신을 할 수가 있었다.
그녀가 결코 지켜보고 있던 남자에게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 …애초에 표정에서 확연히 공포심을 드러내던 유이였다. 그녀가 그런 얼굴을 짓는 것은 민국의 앞에서 생전처음이었기 때문에, 민국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던 것이다.
"……."
하지만 유이의 과거 남자 친구, 강민호는 말했었다. 삐뚫어진 과거의 앙금이 남아있다면 직접 부딪혀서 해결하라고. 물론 자신을 불러주기만 한다면 곁에서 의지가 될 수 있도록 지켜봐주겠다고 말도 했던 그였다. 하지만 유이는 강민호보단 민국을 택했다.
어째서인지는 그녀도 이유를 모른다. 그저… 요즘은 민국을 더 많이 봤기 때문에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유이 씨."
어느 정도 숨을 돌린 민국이 진지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땀에 젖은 옆얼굴은 언제 봐도 잘 생겨 보일 테지만, 유이는 그런 단순한 것에 흥을 느끼는 여자가 아니었다.
"도망치는 게 무조건 틀린 건 아닙니다."
"……."
필시 유이가 강민호가 아닌 민국을 택했던 건, 그의 이따금씩 드러나는 진실된 마음 때문일 것이었다.
"사람들은 도망치지 말고 맞서 싸우는 게 올바르다고 하지만, 맞서 싸움으로서 또다시 과거의 상처를 해집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걸로 더 큰 상처가 생기고 돌이킬 수 없어질 수도 있어요."
"……."
"그렇다면, 차라리 도망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유이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인 고동은 아니었다.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에… 유이는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에혀. …아무튼 그렇다고요. 으아, 힘들어."
긴장이 사그라들자 다리도 풀리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유이가 만나기로 작심했던 사람이 출소한 범죄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그 자식 내 얼굴 기억하고 있는 거 아녀? 언제 칼침 놓을지도 모르는데… 슈밤, 흑설 양반에게 또 도움 요청해야 하나?'
흑설 양반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이번에는 또 어떤 것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나, 고심을 하자니… 여기서 이러고 있는 자신을 깨닫는 민국이었다.
"어쨌든 집으로 돌아갑시다. 데려다드릴 테니까요."
"……."
그리고 민국은 유이를 데리고 전철에 탑승했다. 유이는 벅차 오를 듯 높아져만 가는 고동에 숨을 죽이면서 따라갈 따름이었다.
이윽고 민국의 안내로 집에 도착한 유이였다. 결과적으로는 유이 자신의 집이었지만 말이다. 꺼진 불 스위치를 하나 하나 키고 민국은 말했다.
"크흠, 뭐 누추한 집이지만 물이라도 한 잔 드릴깝쇼?"
"……."
그런 식으로 조크를 날리며 민국은 주전자로 물을 데웠다. 그리고는 뜨거워진 물을 가지고 그녀의 곁으로 와서 건네주었다. 유이는 앉은 테이블 앞에 놓인 물컵을 내려다보며 막연히 있었다. 민국은 유이의 옆에 앉아서 슬그머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먹여드릴깝쇼?"
"……."
"아니, 이 가슴 대마왕아. 대답 좀 해요. 뭔가 이 양반은 사람 암 걸리게 하는데 재주가 있다니까!"
여전히 축 처진 듯한 분위기를 등진 유이를 보며 한 마디하는 민국. 그것이 이유가 되었을까. 유이가 천천히 운을 띄우기 시작했다.
"만일…."
"……."
"도망치는 게 맞다면…."
유이는 고민하고 있었다.
"앞으로… 난…."
자신이 지은 죄를 어떻게 사과해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털어놓은 것은….
"유이 씨는 일단 그 낯가림부터 고쳐야 합니다."
"……."
"그리고 사람이 살다 보면 다 실수도 하고 남에게 잘못도 저지르곤 해요. 물론 그 잘못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지긴 하지만."
자신의 잘못은 크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애에게 아저씨의 욕구를 떠넘겼으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 유이 씨는."
민국이 말을 잇고 있었다.
"굳이 자신이 감당할 필요도 없는 일까지, 죄책감을 안고 스스로 감당하려는 듯한 느낌이에요."
"……."
"그럴 필요는 더 이상 없습니다."
유이가 고개를 들어 민국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처음으로 자신을 반듯이 마주하는 유이의 시선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윽고 유이가 또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여전히…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건 변함이 없었다.
"에휴."
한숨을 쉬는 민국이었다. 어쨌든, 이제 유이도 조금 안심한 것 같으니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찌 됐든 간에,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는 그 버릇 좀 고치세요 유이 씨."
"……."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요. 이 이상 늦으면 은별이에게 맞을 것 같아서."
그리고 휴대전화를 보는 민국이었다. 다행히 아직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듯, 연락이 온 흔적은 없었다.
이윽고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뜨거운 물 꼭 드십쇼.'하고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저벅 저벅. 서서히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유이는 테이블만 막연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
저벅… 저벅… 끼이익…. 현관문이 열리고, 쿵! 닫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이 순간 유이의 심장은 계속해서 높은 박동수로 고동을 치고 있었다.
"아이고 은별 마님, 예압. 지금 집으로 출두하겠습니다. 훗, 발정난 그대의 몸을 놔두고 나온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현관문 너머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민국의 음성이 들려왔고, 유이는 자신의 가슴 중심부 쪽에 손을 얹었다. 뭔가 콱 막히는, 묘한 답답함과 빠른 심장 박동수가 유이를 괴롭게 만들었다.
"헉, 집에 돌아오면 맞아 뒤질 줄 알라고? 이럴 수가! 과연 무엇으로 맞아 죽이려는 거지?!"
우스운 조크를 내뱉는 그의 음성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하아… 하아…."
한 편, 중심부에 손을 얹고 있던 유이의 손이 주먹으로 바뀌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침통하던지, 유이는 멀어지는 그 목소리를 계속해서 귓전에 붙잡으려고 했다.
"알았어 빨리 갈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려온 그 목소리에 유이는 잽싸게 바닥에서 일어났다. 타다다닥…! 그리고 빠른 속도로 현관문 쪽으로 향해 열어젖혔다. 끼이익! 맨발로 골목길까지 나온 유이는, 사람 한 점 없는 좁다란 그 길 안에서 유유히 사라지는 민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숨을 내뱉던 유이가 곧 입을 콱 다물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입을 열며 그를 부르려고 했다.
"……."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행동은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이 용기가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겁에서 비롯된 것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 중요한 것은….
"……."
서서히 멀어지는 민국의 뒷모습. 붙잡아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아야 해. 자신의 욕구가 그리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간의 사람을 멀리 했던 버릇이 만들어낸 결과인 모양이었다.
"하… 읍…."
결국 토해내려던 말을 도로 삼키며 유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가슴 중심부에 얹은 주먹은 여전히 불끈 쥐어 있었다. …그리고, 민국은 저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
바보 같았다.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이. 그러나 한 편으론 이 감정이 무엇이고,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뇌한다. 왜냐하면 사람과 함께 하는 것 따위… 멀리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기억을 거듭하고 거듭하던 유이는….
"……."
마침내 그것이 오랜 과거에 느꼈던 따스한 감정임을 알 수 있었다. 고아원에서 느꼈던… 그리고 학교에서 느꼈던… 이젠 딱딱한 기계처럼 감정을 버린 상태에서 다시는 찾지 못할 줄 알았던 감정….
"……."
그렇게 그녀는,
퇴보일 지도 성장일 지도 모를 그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
"콜록 콜록!"
"일람아, 괜찮니? 약은 먹었어?"
환자 병실에서 기침을 토하는 소년을 보며 어머니가 물었다.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한참을 기침하던 소년이 곧 어머니의 염려에 짐짓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엄마…. 약은 아까 전에 먹었어요.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심려라니…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허약하고 창백한 안색의 소년을 보면서 어머니는 어떻게든 웃음을 보였다. 머리에 칭칭 붕대를 감고 있는 소년은 마찬가지로 미소 짓다가, 곧 눈앞에 있는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렸다. 노트북 화면에는 BJ로 보이는 어떤 남자 목소리와 함께 게임하는 장면이 비추고 있었다.
"그게 그렇게 재밌니?"
"네. …황당하기도 하고, 심심할 때 웃음도 나오게 해주니까요."
노트북 화면 속 게임을 즐기는 비제이의 음성은 다소 막장스럽고 맛깔난 느낌이었다. 피식 미소를 지으며 방송을 시청하던 소년은, 곧 방송이 끝났음에 노트북을 닫고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따사로운 봄의 향기가 내비추는 오늘의 날은, 풍요롭기 그지 없었다.
*
타다다다닥… 타다닥.
어두컴컴한 집안에서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어느 한 남자. 민국과 같은 또래의 남자로 떡진 머리에 후줄근한 반팔티를 입은 남자는, 누가 봐도 그냥 평범해 보이는 느낌이었다.
"으흐흐흐흐… 뭐야 이거, 빅 뉴스잖아?"
그러나 그 남자가 짓고 있는 웃음은 도무지 일반인과 닮지는 않았다. 무언가 수상쩍인 냄새를 풍기는 느낌이었고, 그 증거로 남자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서민국… 이 자식이 비제이질을 하고 있다고?"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될 예정이었다.
*
"씨발… 요즘 애새끼들 개판이네."
오늘 오전에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드디어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 늙은 남자. 방금 전에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던 그놈을 찾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놈의 얼굴은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중에 찾으면 조져버리든가 해야지. 얼굴도 기억해뒀으니까."
기억을 더듬던 도중, 뒤통수를 때렸던 남자가 붙잡았던 여자가 떠올랐다. 아주 순간 옆얼굴을 본 것 같은데….
"어디선가 본 얼굴이던데… 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짓을 시켰던 여자가 한 두명이어야 말이지.
"빨간줄도 그어진 마당에 뭐하고 살겠냐만, 다시 하던 짓이나 하면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크흐흐."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허리를 숙인 불량한 자세로 걸어나가는 늙은 남자. 하지만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파지이익!
"끄아아아아악!"
강렬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남자는 어느 틈엔가 주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의 한 쪽 팔이 거꾸로 분질러 진 채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싱긋 웃으며 어떤 여자가 중얼거렸다.
"많이 아프신가 보네요~."
"끄… 뭐, 뭐야…!"
참고로 여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자의 한 쪽 팔이 갑자기 반대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주저앉아 괴로워하는 남자에게로 다가가서는, 눈웃음을 짓고 말했다.
"민국 님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와서요~ 보복이라던가 복수라던가 그런 건 제가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아요~."
"……."
"한 팔만 더 가져갈게요오~."
뿌드드득!
"끄아아아아악!"
다른 한 쪽 팔도 순식간에 박살났고, 남자는 거품을 물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 비명 소리에 주변에서 곧장 사람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고, 여자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벗어나며 '우훗'하고 입가에 손을 대며 미소 지었다.
'민국 님을 건드리는 사람은 그 누구든… 부서질 거예요~.'
사람들이 모여드는 거리에서, 설화는 신기하게도 일말의 인기척 없이 종적을 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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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한 말씀 중에 노력한 사람 추천받는다란 말이 있음
추천 ㄱ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