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그렇게 그녀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럼 잘 쉬고."
"응… 민국이 너도 잘 쉬어."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민국과 예나였다. 예나는 통로를 통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고, 홀로 남은 민국은 옷깃을 정리하고 천천히 안방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 끼이익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반응해 뒤를 돌아보자 조금 놀란 듯 움찔거리는 설화가 있었다.
"앗, 민국 님."
"앵?"
방안에 있을 줄 알았던 설화가 바깥에서 나타나자 조금 놀란 민국이었다. 평소에 민국과 함께가 아니면 밖에 나가는 일은 일절 없던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설화 네가 왜 바깥에서 들어오냐?"
"…민국 님도 참~. 옥상에서 잠깐 바람 쎄고 있었사와요~. 민국 님 언제 오시려나 생각하면서요~."
그리고 언제 땀을 흘렸냐는 듯, 청초한 모습으로 싱긋 미소 짓는 그녀였다. …실은 엄청난 사건 한 가지를 터트리고 온 그녀였지만 말이었다.
"흠흠."
민국은 그런 설화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안방으로 향할 따름이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주머니 속을 뒤적여 종이 한 장을 꺼내드는 그였다.
'꼭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건네주면서 넌지시 던졌던 강민호의 말. 민국은 그것을 곱씹으면서 주머니 속에 종이를 도로 집어넣을 따름이었다.
*
"어이쿠, 유이 씨.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자기 위로 충만히 하셨습니까?"
"……."
다음 날이었다. 대학교가 끝난 직후, 기습적으로 유이의 집에 들이닥친 민국은 그리 안녕 인사를 하였다. 당연지사 소리소문 없이 나타난 민국의 행위에 유이는 입을 굳게 다물 따름이었다. 이윽고 1층 텔레비전이 있는 넓은 거실로 향한 그녀를 보며 민국이 말했다.
"참고로 제가 인사를 할 때 말씀드린 자기 위로란, 자기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다듬는 행위를 일컫는 것입니다. …헉! 설마, 유이 씨…. 자기 위로에서 다른 의미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정말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
난들 알겠는가. 일단 유이는 그저께와는 다르게 조금 상태가 많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기억이 느슨해질 때쯤엔 본래대로 돌아오는 게 사람의 본질이었다.
"어떤 일…."
"아니, 우리 사이가 꼭 어떤 일이 있어야 만나고 말고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유이 씨도 참. …헉, 설마 유이 씨는 지금까지 저랑 만날 때 꼭 명분을 필요로 한 건 아니겠지요? 정말 그렇다면 실망입니다!"
"……."
어쩐지 데자뷰스러운 대화였다. 이윽고 담담히 앉아있는 유이를 보며 민국도 거실에 앉았다. 거실 바닥은 꽤 따뜻했다. 보일러를 뜨끈뜨끈하게 키운 모양이었다.
"뭐, 그냥 상태도 어떤가 보고, 한 가지 전해드릴 것도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
전해드릴 것. 어쩐지 민국이 유이를 쳐다보는 눈빛이 조금은 진지해져 있었다. 유이도 그 진지함에 조금은 빠지는 듯싶었다.
"이거 보십쇼."
이윽고 민국이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 한 장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민국이 그것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저께 유이 씨가 달아날 때 만났던 남자에게서 받은 전화번호입니다."
"……."
"어제 영화관 갔다가 우연히 만났는데, 이 전화번호로 꼭 좀 연락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뭐 사과할 게 있다나 뭐라나."
문득 이전의 일이 떠오르는 유이였다. 비록 이젠 십년이 지난 과거의 일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불행한 순간에 위로가 아닌 자기 욕망을 채우려 했던 그 짐승의 손길이….
"……."
그래서 유이는 그 종이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접힌 것을 펴서 확인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인지는 몰라도 한 번 연락은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잠자코 지켜보던 민국이 운을 띄웠다. 애초에 유이의 속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 연거푸 들리면서 민국은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겐… 부모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느 벽면에도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액자도 달려 있는 게 없었고, 가족에 대해서 언급을 할 때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였다. 비록 표정이 풍요롭지 않고 다양하지도 못한 유이였지만, 그래도 몇 번 함께 하다 보니 이젠 그녀의 무표정에서 감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된 민국이었다.
"그 양반도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로 유이 씨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 같았고요."
"……."
사과. 이제 와서 사과를 한다…. 어떻게 보면 코웃음 칠 만큼 웃긴 일이었다.
"뭐… 어찌 됐든 이건 유이 씨의 선택이지만 말입니다."
유이는 가만히 종이만 내려다 볼 뿐이었다.
민국이 돌아간 후였다. 홀로 남은 유이는 한참동안 테이블의 종이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이젠 다 끝났다. 이제 와서 사과는 우스운 일이다. 모든 것이 다 부질 없단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론 과거의 향기가 사람을 우습게 만들었다. 지난 추억은 모두 조금씩은 미화되고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고… 마치 그 경험으로 인해 이런 '좋은' 결과가 생겼다는 것처럼….
"……."
아이러니하게도 유이는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우습게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고 말았다. 마음과 이성이 서로 교차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그 양반도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로 유이 씨에게 사과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런 거 같았고요.'
그런데 그때, 웃기게도 민국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느닷없이 그의 얼굴과 그의 목소리가 곱씹어지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만일 민국이 했던 말처럼 정말로 사과하고 싶은 게 맞다면…. 그렇다면….
"……."
유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휴대전화를 잡게 되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
객관적으로는 짧았지만, 유이에게는 한 차례의 신호음이 1분처럼 느껴진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전화 신호 끝에 마침내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유이는 그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입을 열어 소리를 내려다가 순간적으로 숨죽이게 된 그녀였다. 예전처럼,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참을 '여보세요'거리면서 상대방의 대답을 요구하던 그였다. 잠시 침묵이 스쳐간 뒤… 그가 천천히 운을 띄었다.
"설마 유이…?"
그녀의 심장이 쿵하고 뛰었다.
"유이지…? 그렇지…?"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재촉에, 유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렵지만 용기를 내서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동시에 간신히… 숨처럼 대답을 토해낼 수 있었다.
"응……."
그것은 그녀에게 기적과도 같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유이 맞구나…."
그녀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안도하는 목소리를 보이는 남자, 강민호였다. 잠시 후 강민호가 운을 띄우며 질문한다.
"유이야… 잠시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
"하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아. …난 그때 네가 그 정도의 일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 날 이후로 네가 사라질 거라곤…."
"……."
"아니야, 미안해 유이야. 그때 난 네가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알았지만… 하지만 그렇게…."
그렇게 힘들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유이야. 한 번만 얼굴을 보고 대화해보자…."
"……."
이미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그와 대화를 함으로서 더욱 유이의 마음이 완고해지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저으면서 유이는 대답했다.
"아니…."
"……."
"……."
한참의 정적. 하지만 곧 한숨 소리와 함께, 강민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역시 용서 못하는 게 당연한 거겠지."
"……."
"유이야."
이윽고 그녀를 부르며 그가 말을 이어왔다.
"…출소한대. 그 아저씨."
그 말에 쿵하고 가슴이 뛰는 유이였다.
"…한 명이 아니라 워낙 많은 애들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감옥에 계속 있었지만, 결국 나오기로 했나봐."
"……."
"만일… 만일 만날 생각이 있다면… 한 번 만나봤으면 해."
마치 설득하듯 답하는 강민호였다. 그것은 숨기려 하는 지난 과거가 들춰지길 바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과거와 부딪힘으로서 그 아저씨에게 따져보라는 뜻이겠지.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하려고 했냐는 것처럼.
"만일 네가 필요로 한다면… 나도 함께 가줄 테니까…."
"……."
유이의 앙금을 씻어내주고 싶었다. 강민호의 행동에 나쁜 맘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끌리지 않는 건 변함이 없었다. 오랜 과거의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을 죽이고 살아가려는 유이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
유이는 통화를 끊었다. 더 이상 그와 나눌 이야기는 없었다.
"흐음."
민국은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냐고 하면 유이와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라고 할까.
'이 양반이 나에게 만나자고 제안을 하자니, 허허 참으로 진귀한 일이 아닐 수 없구만.'
그렇다. 먼저 만나자고 제안을 해온 건 유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결코 놀자는 의미에서 만나자고 제안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얼마지 않아 도착한 약속 장소의 역 앞에서, 유이는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어두컴컴한 옷을 입고 있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눈에 조금은 진지함이란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흠, 뭐 그냥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어 달란 말입니까?"
"……."
민국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데, 그저 곁에 함께 있어 달라는 뜻이었다. 민국은 문득 의문이 들어 물었다.
"혹시 전화번호 드렸던 그 양반 말하는 겁니까?"
"……."
그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고개를 내리숙인 유이에게서 왠지 모를 암울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민국은 '끙'하고 곧 관자놀이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좋아요, 그럼 한 번 가봅시다."
"……."
그래도 혼쾌히 승낙하는 민국의 태도에, 유이는 조금은 결단이 선 마음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교도소 후문에는 범죄를 저질렀던 이들이 출소를 할 수 있는 문이 있었다. 높은 벽들로 이루어진 그곳은 음침하기 짝이 없었고, 철창으로 된 후문에는 두 사람의 경비로 보이는 사람이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
유이는 후문이 보이는 그곳에서 말없이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과거에 상처를 안겨준 남자, 행복했던 지난 시간들을… 사실은 무의미하게 만들었던 그 남자. …민국은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
끼이익.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침한 철창 소리와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남자 한 명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는 유이의 눈동자가 서슴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
팔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난 날의 공포와 트라우마가 유이의 감정을 잠식하려고 했다. 유이의 손목을 붙잡고 안 놔주던 놈의 공포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후우."
출소한 그 남자는 오랜만에 보는 바깥 풍경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그 목소리조차 귀에 닿는 순간 오싹할 따름이다. …유이는 과거를 맴돌고 있었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 날의 족쇄에 묶여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앞으로 향해서 대화를 나눈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건 그녀에게는… 타다다다닥! 그 순간이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퍼억!
"아악! …이 새끼 너 뭐야!"
"어이쿠! 찰진 소리 날 줄 알고 때려봤는데 둔탁한 소리가 나네! 요즘 대세는 대머리다 이 자식아! 삭발 좀 해라!"
언제 옆자리에서 벗어났는지 몰라도, 유이가 쳐다보고 있던 남자에게로 순식간에 달려나간 민국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대갈빡을 있는 힘껏 후려친 남자였고, 그의 욕사발에 곧장 반격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남자가 어이없단 얼굴로 분개하려고 하자 민국이 곧장 유이에게로 달려오면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뛰어요 유이 씨!"
"……."
감정에 혼란을 겪고 있던 유이는, 자신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하는 민국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재촉에 결국엔 뛰게 되었다. …멀리서 두 사람을 붙잡기 위해 뛰어오는 남자의 소리가 있었지만, 그는 이미 너무 노쇄해버렸는지 곧 쫓다가 지쳐서 나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핵핵! 에고 죽겠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민국은 앞만 보며 달릴 따름이었다. 유이는 그런 그의 옆얼굴을 보면서, 동시에 저도 모르게 그의 넓은 등판을 바라보면서…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달릴 때 뛰는 고동과도 같았지만, 삶을 다시 재시작해주기 위한 고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