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이봐요! 거기 멈춰요!"
"어디로 가셨으려나? 아~ 여기다~."
잠시 민국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헷갈려하던 설화가 이윽고 영화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쌩하고 빠른 속도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뒤따라가던 남자 직원이 헉헉거리며 '뭔 여자가 저렇게 빨라….'하고는 따라 들어간다. 반면 영화관 안에 들어온 민국은 예나와 함께 표의 자리에 맞춰서 착석하려고 들었다.
"여기네. 예나야 들어가."
"으응."
이윽고 매너 있게 예나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후, 다음 차례로 들어가는 민국이었다. 편안하게 착석한 상태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민국. 이제 보니 커플들이 꽤나 있었고… 하나같이 팝콘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에 반면 예나와의 자리에는 팝콘 하나 있지 않았음에 민국이 운을 띄었다.
"우리는 뭔가 허전하네. 팝콘이랑 음료 좀 사올까?"
"아, 아니야… 괜찮아 민국아."
"정말? 그래도 뭔가 입이 심심할까봐."
"그럴 일은…."
예나는 말하다가 눈을 피했다. 얼굴이 붉은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국이 너만 곁에 있으면…."
"……."
하지만 그 목소리가 민국에게 안 들릴 리가 없었다. 민국은 부끄러워하며 용기를 내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곧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호명한다.
"예나야."
"으, 으응…."
이윽고 손을 내미는 민국.
"손 잡아도 될까?"
"……."
그 말에 심장의 고동이 한층 거세지는 예나였다. 이윽고 높아지는 박동수에 어쩔 줄 몰라하던 예나가 천천히 민국을 바라보았다.
민국은 다소 진지한 눈빛으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그의 행동을 느끼며 예나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간만에 신체적 접촉을 하였다. 아무리 함께 있어도 흑화 소주 건 이후 단 한 번도 손을 만지거나 잡은 적이 없는 둘이었는데 말이다.
"흐음, 참으로 보드라운 손이로군."
"……."
"이 손으로 그때 나를 그렇게 강압적으로…."
"미… 미안…."
흑화 소주건을 언급하는 민국의 행동에 예나가 울상을 지으면서 죄책감이 드는 표정을 짓는다. 민국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치고는 자기 쪽으로 빼려는 예나의 손을 완고하게 잡으며 말했다.
"아니야 농담이야. 나야말로 미안. 그냥 장난쳐보려고 한 건데 무의식적으로 그만 헛소리가 나왔네."
"……."
도리어 사과하는 민국. 그리고 예나가 다시금 민국을 올려다본다. 두 사람의 높낮이가 적당한 눈길이 서로를 마주하고, 오묘한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한 그 찰나였다.
"오빠, 빨리 와 빨리."
"알겠어. 들어갈 테니까 좀 기다려봐."
어디선가 시큰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익숙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낯설다고도 하기 애매한 목소리였다. 이윽고 자신의 옆자리로 옴에 예나와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민국이었다.
"어."
그리고 저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과 함께 자신의 옆자리로 다가온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도 어제 민국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지, 마주하자 몹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었다.
"……."
어제 유이가 보자마자 도망을 가게 했던 원인의 남자였다. 정확히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었다.
"오빠? 왜 그래?"
이윽고 그 남자의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여자 친구로 보이는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민국 쪽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여자 쪽은 민국에 대해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잘 생겼다 저 오빠."
내심 호감이 생긴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이었다.
"너…."
"아, 아니야 오빠. 절대 난 그런 짓 안 해."
그런 짓이 무슨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뒤돌아서 따끔하게 핀잔하는 남자의 한 마디에 손사래를 치며 웃는 여자였다. 이윽고 '큼!'하고 기침 한 차례와 함께 민국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였다. 민국도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예나를 다시 바라볼 따름이었다.
"민국아… 아는 사람이야…?"
"응? 아, 그건 아니고. 뭐라고 할까. 그냥 알긴 하는데 모르는 게 분명한 사람이야."
"……?"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예나였다. 알긴 하는데 모르는 사람. 소크라테스나 니체가 들었으면 철학적인 문장으로 판단하여 이리저리 해석을 해볼 듯 싶었다.
'그건 그렇고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구만.'
그러하다. 하필이면 만나도 어제 본 그 남자를 만나다니. 심지어 바로 자기 옆자리에 착석해서 앞으로 두 시간 가량 영화를 관람할 것이었다. 민국은 뭔가 몹시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그냥 여유롭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작한다 예나야."
"으응…."
이윽고 건네는 말에 예나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민국의 손을 꼬옥 잡았다. 두 사람이 쥐고 있는 손의 체온은 슬슬 따뜻해지고 있었다.
"……."
그리고 그런 광경을 민국의 옆자리에서 심상치 않게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바로 민국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유이와 연이 있는 그 남자…. 남자는 다소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민국을 지켜보다가 영화 스크린 도어로 눈길을 옮길 따름이었다.
한 편 설화는….
"어디 있으신 건가요 민국 니임~."
이미 영화가 시작한 어둑어둑한 영화관 안을 맴돌면서 민국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어딜 뒤져도 민국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어찌 된 영문일까 턱에 손을 얹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니….
"저기다!"
"아이 참."
또다시 영화관 직원들이 달려들어 설화에게 방해 공작을 놓기 시작했다. 설화는 영화에 집중하는 관객들의 관람석으로 뛰어들며 직원들의 포획 전략에서 빠져나갈 따름이었다. 어찌나 샅샅이 빠져나가던지… 꽁꽁 싸매듯 무리 지어 잡으려는 직원들의 손아귀조차 다 피할 수준이었다.
"엄마! 저 언니봐! 영화보다 더 재밌어!"
오죽하면 일부의 관객들이 영화보다 설화의 테크니컬한 피하기 실력을 즐길 정도였다. …그렇게 민국의 반대편 영화관은 한 바탕 소란스러움으로 그지 없었다.
장차 두 시간의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커플들의 오붓하고 은밀한 분위기가 주변 곳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그건 민국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연하인 여자 쪽에서 남자에게 엉겨 붙는 느낌이었다.
'크흠, 좋은 모습이구만.'
반면 돌아본 예나는 여전히 잡고 있는 손에 집중이 가는지, 조금은 집중을 못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예나야."
"으, 으응…?!"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귓속에 속삭이듯 얘기했던 민국이었다. 도리어 그의 기습적인 속삭임에 깜짝 놀라면서 큰 소리를 친 예나였다. 순간적으로 관객들의 고개가 일제히 둘에게로 돌아갔다. 당황하던 예나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푹 내리 숙였다. 민국이 머쓱해하다가 다시금 속삭였다.
"영화 재미있어?"
"으, 응… 민국이 너는…?"
사실 영화는 제대로 보지도 않은 예나였지만 말이었다. 민국은 '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거 같아. 커플들이 보기에 적당한 정도?"
"그렇구나… 다행이야…."
진심으로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예나였다. 민국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영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로부터 영화가 끝나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자 관객들이 웅성웅성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었고, 다들 출입구를 찾아 로비로 나가는 모습이었다.
"우리도 나가자."
민국도 그리 운을 띄우면서 사람들의 발자취를 뒤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 자리에서 일어나 예나와 함께 출입구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리는 즈음이었다.
"잠깐만요."
누군가의 음성이 제지를 해왔다. 자연스레 음성이 들려온 곳을 돌아보자 방금 전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오빠?"
연하의 여자도 남자가 대뜸 그런 언동을 보일 것은 예상 못했는지 조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민국에게 다소 진지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
"단 둘이 대화 좀 하고 싶군요."
남자를 쳐다보던 민국은 예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예나는 영화관에서 둘이 마주쳤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조금 불안한 기류가 흐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민국이 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소근거리듯 말했다.
"걱정마 예나야. 별 일 아니니까."
"……."
그리고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린 민국도 다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한 번 대화 좀 하죠."
그 후 영화관 로비 멀찍히 떨어진 곳에서 단 둘이 대화를 나누게 된 민국과 남자였고, 예나와 남자의 여자 친구에 속하는 여자는 대화가 들리지 않는 맞은편 쪽에 있을 따름이었다.
"저기요. 혹시 저 오빠 남자 친구예요?"
"네…?"
"아니, 되게 잘 생겨서요. 근데 언니도 되게 예쁘게 생겼네요."
달콤하게 말을 걸어오는 여자였고, 예나는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인사했다.
"고마워요… 그쪽도…."
"아, 저는 미나라고 해요. 남미나."
"미나 씨도 충분히 예쁘세요."
꽃이 피우듯 아름다운 분위기로 가득한 두 여자의 대화를 잠시만 뒤로 미뤄두고, 민국과 남자는 서로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었다.
"유이랑 어떤 사이시죠?"
상대방 남자의 이름은 강민호. 민국과 같이 이름의 두 번째 글자가 민이었고, 키도 얼추 비슷했지만 얼굴은 그래도 역시 민국이 좀 더 잘 생긴 편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민호의 물음에 민국이 답했다.
"제가 알려드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렇겠죠. 하지만 유이는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친구라서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이는 민국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다. 그렇다면 민호의 나이도 한 살 많다는 셈이 되고, 그것은 곧 민국이 동생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민국은 확실하게 전달할 부분은 전달했다.
"궁금하시다면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애초에 저는 그쪽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고, 이런 식으로 추궁을 받아야 하는 까닭에 대해서도 몰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유이 씨에게 당신이 친구다, 라는 확답을 전해들은 것도 없는데 아는대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거 같군요."
조금 불쾌하게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이성적으로 따지면 맞는 소리였다. 김민호라는 사람이 유이와 어떤 사정이 얽혀 있는지는 몰라도, 마냥 좋은 친구자 좋은 인연이었다고만 평가할 수 없었다.
도리어 안 좋은 생각으로 접근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감안한 민국의 말에 민호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유이 씨 번호 좀 알려주세요."
"헐, 제가 그걸 왜 알려줍니까? 아니 그전에 친구라면서요. 친구인데 어떻게 번호를 모릅니까?"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연락처를 모르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부탁드립니다."
"끙."
민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죄송하지만 안 되겠습니다. 나중에 유이 씨에게 의사를 받고 나서 결정을 하는거면 몰라도."
"…유이에게 사과할 게 있어서 그렇습니다!"
몸을 돌리며 예나가 있는 쪽으로 향하려던 민국이었다. 민국의 등에 대뜸 소리치는 김민호. 민국도 자연스레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사과?'
"……."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지우지 않던 민호가 주머니 속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내 자신의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는 민국에게 건네며 말한다.
"제 연락처입니다."
"……."
"나중에 유이에게서 확답을 받은 뒤에, 꼭 연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 자명했다. 잠시 침묵하던 민국이 뜸을 들이다 그 종이를 받으며 답했다.
"그러죠."
종이를 주머니 속에 넣는 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