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년 전 성폭행 및 폭행의 전과로 구속된 최모 씨는…."
오독, 오독. 은별은 조용한 거실에서 홀로 과자를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린 은별이 곧 발걸음의 주인을 발견하고는 정색한다.
"은별 마님, 내가 왔수다."
"…누가 허락도 없이 1층으로 내려오래?"
"아무도 없다길래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은별은 무시하듯 민국에게서 고개를 돌린 다음 다시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과자를 오독오독 씹었다. 민국이 작은 테이블에 있는 그녀의 과자를 보면서 다가왔다.
"무슨 과자야?"
"다이어트 과자."
"허허, 살이 얼마나 있다고 다이어트 과자를 드시는가?"
"원래 여자에게 다이어트란 평생 안고 가야 할 의무와도 마찬가지거든. 남자는 몰라."
"너의 발가벗은 몸을 전부 보았던 나로서는 공감하지 못할 말이로군. 너는 가슴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천상 여자…."
퍽!
"끄악!"
"이번엔 과자 봉지로 맞아볼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가볍게 사과를 해서 화를 풀어준 후, 다시 과자를 오독거리며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은별을 보고 민국이 묻는다.
"아직 화나 있어?"
"…뭐가."
"설화 데려온 거 말이야."
봉지에 넣은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과자를 쥐고 입안에 담기 시작한다.
"…화나긴 뭐가 나. 어차피 거기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했잖아."
은별에게도 얘기를 했었다. 게임 세계에서 설화는 죽을 수밖에 없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라고. 그리고 그 말에 은별은 말했었다.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서 바꿔보고 오라고.
"그래도, 여기로 데려오는 것까진 말한 적 없으니까."
"……."
확실히 그건 좀 실망이긴 했다. 마치 과자 한 봉지만 사오라고 했는데 쓸데없이 음료수까지 사온 느낌이랄까(?) 오히려 과자 사고 남은 거스름 돈을 차후에 중요한 일에 써야하는데 말이었다.
"어차피 그 세계의 서민국이 부탁한 거라며…."
"……."
"똑같은 너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한 거야."
그리고 은별은 민국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민국은 그런 은별의 옆얼굴을 계속해서 지켜보았다. 문득 뭉클하는 감정이 샘솟을 지경이었다! …그렇다.
애초에 은별은 민국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비록 쓰레기 같은 단점이 한 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실상 은별이 그에게 반했던 이유 중에 외모는 2순위였고 1순위는….
'푸헤헤헤헤! 죽어라 죽엉!'
스토커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때, 한 치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붙었던 민국의 모습 때문이었다.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칼을 든 괴인과 눈을 마주치고 맞붙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존심은 저리가고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
그래서 은별은 그 세계의 민국이 행한 선택에 불만을 표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현실의 민국 역시 만일 그런 기로에 놓여져 있었고, 설화가 은별 자신이었다 한들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하지만 슈퍼 개새끼인 건 변함이 없단 말이지….'
오독오독 과자를 씹고 있자니 돌연 울컥하는 감정이 든 은별이었다. 아드득! 과자를 씹어먹는 그녀의 이빨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헤헤, 은별 마님."
"…저리가지 못해?"
"어차피 이곳에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부모님도 다 일 나가셨다면서요. 으흐흐흐, 어때? 여기서 우리들만의 추억을…."
퍽!
"끄악!"
"추억은 무슨 추억이야! 가서 네 2D 캐릭터랑 으쌰으쌰하고 잘 놀아!"
"으아! 거봐! 아직도 화나 있는 거 맞잖아!"
과자 봉지로 후려치는 은별에 경악한 민국이 후다닥 2층으로 도망갈 따름이었다. 혼자 남은 은별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다시금 과자 봉지를 내려놓고 과자를 오독오독 씹으며 텔레비전을 볼 따름이었다.
그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한 때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무참히 성폭행했던 전과자 한 명이 출소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
"민국아… 많이 바빠?"
"아, 예나야."
은별이에게 한창 혼쭐이 나고 자기 방으로 돌아온 민국이었다. 막 안방에서 열려 있는 창문 너머의 바깥 경치를 구경하는 설화에게로 다가가려는데, 구멍으로 넘어온 예나가 물어왔다. 민국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을 만큼 심심해서 뭐 해야 하나 찾고 있었지. 왜?"
"그…래? 그럼 혹시…."
이윽고 예나가 천천히 무언가를 내밀었다. 수중에 거머쥐고 있는 그것은 어떤 표였다.
"응? 영화 공짜표?"
"으응… 어쩌다 보니 친구에게 표를 얻게 됐거든…."
친구라고 말하자면 이전에 흑설 공주를 소개시켜준 삼촌의 친구였다. 워낙 당돌하고 돌발적인 그 여성. 민국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기간이 언제까지인데?"
"아마… 오늘 한정일 거야."
"흐음."
뭔가 너무 급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마땅히 할 게 없는 하루였다. 대학교에서도 일찍 돌아왔고 아직 대학 시험이 출제되기까지도 조금 시간이 걸릴 터였고.
"근데 보니까 정해진 영화관에서 봐야 하나 보네?"
"으응… 그게 좀 걸리긴 하지만… 어때…?"
예나가 걱정스러운 듯한 눈초리로 물어왔다. 하지만 민국은 영화관의 표에 적혀 있는 위치가 늘 가던 곳임을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늘 같이 가자."
"정말…?"
"암. 준비하고 다시 보면 되겠네."
"민국 님 예나 님~ 무슨 얘기들 하고 있으시와요?"
그때 바깥 경치를 구경하던 설화가 설렁설렁 둘에게로 다가왔다. 예나는 마치 중요한 사실을 제3자에게 들킨 것마냥 어깨를 움찔거리며 놀란 듯 쳐다보았다. 설화는 돌아보는 민국을 보며 웃음 짓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민국은 잠시 예나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예나의 반응으로 감안할 때 표는 단 두장인가 보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일 대 일 데이트를 예나는 원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예나와 민국은 애매한 사이기도 했고… 데이트를 한들 항상 일 대 일이 아니라 일 대 이 위주로 진행이 되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래서 간만에 은별이 없는 틈을 타서 한 번 제안한 것인데 이번엔 설화가….
"영화 표네요~ 둘이서 재미있게 놀고 오시와요~."
"어? 그래도 돼?"
설화의 의외의 대답에 민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예나도 매한가지였다. 애초에 설화도 민국을 좋아한단 사실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의외의 대답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설화는 웃음 지으면서 변함없는 모습을 보였다.
"네~ 예나 님도 민국 님과의 오붓한 데이트를 원하시는 거 같구요~ 굳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드리고 싶지 않사와요~."
"……."
그리 말하는 설화를 얌전히 쳐다보는 예나. 하지만 결코 설화가 농담조로 말하는 게 아님을 예나도 알 수 있었다.
"허… 이 녀석."
민국은 그런 설화를 내심 황당하면서도 감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어제 설화는 말했었다. 민국이 바람을 피워도 상관없다고, 항상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고 말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설화의 마인드를 이용해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이거 왠지 진심으로 다가와서 묘한 느낌을….
"잘 갔다 오시와요~."
그리고 설화는 두 사람에게 즐거운 데이트가 있길 바라듯 인사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민국과 예나가 각자 채비를 갖추고 나갈 준비를 한 실정이었다. 민국의 방으로 넘어온 예나는 현관문 앞으로 다가온 민국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예나를 바라보던 민국이 말했다.
"그럼 갈까 예나야?"
"으응…."
예나는 몹시 부끄러운 듯 소심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일 대 일 데이트는 정말이지 오랜만의 것이었다.
아니… 지금까지 데이트라는 명분 하에 커플 생활을 즐겨본 적이나 있던가? 그런 것이 난생처음이었던 예나는 굉장히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윽고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회피하며 고개를 내리 숙인 예나를 뒤로하고, 민국이 설화를 돌아보았다.
"다녀오시라요~."
"그래, 오늘 정말 고마워 설화야."
"무슨 말씀을~ 그런 말씀 하실 필요 없으세요 민국 님~."
그리고 설화는 입가를 가리고는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민국이 '가자, 예나야.'하고 예나에게 손을 건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예나.
"응… 민국아…."
민국의 손을 붙잡으면서, 열린 현관문으로 슬슬 나가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현관문 너머로 스리슬쩍 사라지는 모습에 입가에 손을 대고 웃음을 짓던 설화였다.
"후훗."
웃음이 어쩐지 기묘하게 달라졌다.
'예나 님과 노는 건에 대해선 별로 큰 감정은 없으시와요~ 하지만 민국 님~.'
설화의 눈이 즐거움으로 번쩍였다. 짓는 미소도 어쩐지 음흉해졌다.
'데이트 안 엿본다고 말한 적도 없으시와요~.'
곧장 두 사람의 데이트를 엿보기 위해 준비를 하는 설화였다.
*
민국과 예나가 데이트를 하기 위해 향한 장소는 바로 유이가 살고 있는 동네의 영화관이었다. 유이가 살고 있는 동네는 번화가와 더불어 조용한 마을이 겹쳐져 있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많고 업고의 비중 차이가 좀 심한 편이었다. 아무래도 상업 건물들이 한 곳에 쏠려 있어 그런 걸지 몰랐다.
'설마 유이 씨의 동네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구만.'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예나의 친구에게 받은 표를 이용할 수 있는 영화관 중에 이곳이 제일 거리가 짧은 곳이었으니.
'그나저나 그 양반은 지금 어떠려나.'
돌연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떠오르는 민국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갑자기 충격적인 표정을 지으며 도주했던 게 신경에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끄응.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 양반을 떠올리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군.'
그렇다. 아무래도 현재는 예나와 데이트를 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현재의 데이트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올바른 선택일 거라 생각했다. 이윽고 설레는 얼굴로 영화관 로비에서 표를 쥐고 있는 예나를 보는 민국이었다.
"이 영화 재밌으려나? 평 들어본 적 있어?"
"으응…? 그건 잘…."
그 물음에는 대답을 우물거리는 예나였다. 사실상 영화의 재미는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 민국과의 데이트가 주 목적이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래? …으흐흐, 설마 성인 영화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건 잘…."
예나가 부끄러운 듯 손을 비비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미 성관계까지 가진 사이인데 뭐가 부끄럽냐고 하겠지만…. 예나는 그때 흑화 소주로 인해 저도 모르게 행한 무의식의 행동이었고… 그 이후로는 조금도 민국과의 접촉을 하고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환기 시켜보기 위해 농담조로 조크를 던졌던 민국이 말을 이었다.
"이제 시간 된 거 같네. 들어가자."
"어…? 아… 으응…!"
표의 시간을 확인하고 일어나는 민국을 따라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예나였다. 이윽고 영화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직원에게 표를 조회받는 모습. 그리고 근처에서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이쪽을 쳐다보며 '후훗'하고 웃는 한 처녀가 있었으니….
'예나 님이랑 데이트 할 땐 저런 모습이군요 민국 님~.'
왠지 저런 모습조차도 사랑스럽게 여겨지는 설화였다. 이것이 설사 캐릭터 설정으로 인한 감정이라 할 지라도!
'저도 들어갈 테니 기다리시와요~.'
이윽고 직원에게 표를 검토 받고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따라 성큼성큼 뒤를 쫓던 설화였다. 직원 한 명이 설화를 가로막았다.
"예약하셨나요?"
"아뇨?"
"그럼 표 받으시고 들어가야 합니다."
"돈은 전철비밖에 안 가지고 왔는데… 앗!"
시무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설화가 돌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쪽으로 자연스레 고개를 돌린 직원.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입가에 손을 대고 '후훗!'웃으며 빠르게 영화관으로 들어가려는 설화였다.
"이, 이봐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직원이 그런 설화를 말리기 위해 뒤쫓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