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더 이상,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 지옥 같은… 지옥 같고도 무의미했던 과거를 돌이켜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다.
그것을 위해 유이는 지금까지 홀로 숨죽여 살아온 것이다.
이전의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벗어나려고 기를 써보아도, 세상은 그녀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연이 있다면,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인 법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이는 또다시 세상에 배신을 당한 듯한 감정을 느끼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문득 유이의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는 남자였다. 남자에게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는 '오빠 왜 그래?'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
이윽고 유이와 눈이 마주친 남자였다. 그 역시 유이의 얼굴을 또렷히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비록 어린 과거의 시절에 비하면 하염없이 성장하고, 조금은 달라진 분위기와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조금은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해 오빠?"
이윽고 남자를 재촉하는 여자의 고개가 유이에게로 돌아갔다. 그녀는 처음 보는 유이의 얼굴에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남자는 유이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조차도.
"유이야…."
"……."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더불어 이곳에서 당장에라도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윽고 선두로 봉투를 들고 길을 거닐던 민국이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불렀다.
"뭐합니까 유이 씨? 혹시 뭐 사주길 바라는 물건이라도 있습니까? 에이 쯔쯔, 너무 먹으면 살찝니다?"
그리 농담조로 말하면서 다시 유이에게로 다가온 민국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굳어 있는 얼굴에 '엉?'하고 의문을 담는 표정을 지었다. 얼마지 않아 그의 시선 역시 유이를 따라 남자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
남자 역시 유이와 대화를 나눈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초면인 두 사람이 마주함과 더불어 이상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유이는 잽싸게 몸을 돌려 인도를 뛰기 시작했다.
"엇?! 유이 씨? 야 이 가슴대마왕아!"
돌연 뛰기 시작하는 유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도발하듯 외치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돌아서지 않았다. 반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옥 같은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줄행랑을 치는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에 민국이 허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조, 존트 빠르네."
애초에 근력 면에선 타고난 유이였으니까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다시 민국과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
한동안 알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고, 민국은 몸을 돌려 유이가 사라진 길을 허겁지겁 뒤쫓기 시작했다.
"어이 이봐요! 이 인간아! 좀 멈춰봐!"
안 그래도 무거운 반찬더미까지 봉투에 얼싸안고 있었는데, 유이의 뒤를 쫓자니 죽을 맛이었다. 어찌 됐든 민국은 일단 유이를 붙잡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며 이 자리를 마찬가지로 빠져 나갔다.
"오빠? 방금 그 여자 아는 사람이야?"
"……."
그리고 덩그러니 제자리에 남게 된 남자는, 옆의 여자에게 추궁과 더불어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를 안심시켜주기에는 남자도 워낙 충격이 컸는지… 벙찐 표정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유이야…."
그녀의 과거를 되새기듯, 이름을 곱씹으며.
"헉… 헉…."
한참을 거침없이 뛰던 그녀였다. 얼마만에 이렇게 뛰는 것일까? 마치 이전에 고아원에서 도망쳐 나왔을 때를 연상시켰다.
'네가 가봤자 어딜 간다고!'
그때 그녀를 붙잡고 성폭행하려 했던 아저씨…. 그리고 자기 대신 희생 당했던 그 아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유이는 몇 번이고 그 대사를 반복해서 중얼거렸었다. 어린 과거의 시절 저질렀던 죄가 너무나도 커서, 하지만 도망치고 싶어서 결국엔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결국엔 그녀도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였다. 애정을 꿈꿨고, 친해지길 꿈꿨다. 하지만, 하지만….
"헉… 헉…."
정신이 들었을 땐 집 근처의 공터까지 뛰어와 있었다. 공터에는 아이들이 소꿉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고… 유이는 오목의자의 나무 기둥에 손을 대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
그러면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이 눈에 띄는 그녀였다. 모래성을 짓고, 소꿉장난을 치면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 아이들은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신이 저 아이들처럼 환하게 웃음 지을 수 있던 시절이 언제였는지….
"으허허허헉! 으허허허 슈밤!"
"……."
"아니 유이 씨, 으허, 이 양, 반아 으어허허억, 아이고 죽겠네 나 죽어."
"……."
한참을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상념의 시간을 보내던 유이였다. 문득 들려온 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봉투를 내려놓고 허리를 숙인 서민국이 보였다. 허리를 숙여 헉헉거리는 와중에도 민국의 말은 이어졌다.
"뭔 일인진, 모르지만, 으헠, 사람을, 내팽개쳐두고! 으어! 나 죽어! …놓고가면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오!"
"……."
"제가 감히… 그녀르르으으을! 사랑합니다아아아아아!"
"……."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는 민국이었다. 열뻗치는 걸 나름의 방식대로 해소한다고 생각하는 게 올바랐다. 이윽고 호흡을 조금은 가다듬은 민국이 말을 이었다.
"왜 느닷없이 튀시고 그럽니까 유이 씨, 무슨 일 있었어요?"
"……."
"아니면 아까 그 남자, 뭐 만나보기라도 한 사람입니까? 왠지 서로 아는 사이 같던데."
역시 촉이 좋은 민국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한숨을 내뱉으며 민국이 말을 이었다.
"뭐 말하기 꺼리는 일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으아… 일단 이 짐 좀 들어주십쇼. 무거워 죽겠네."
"……."
자리에 주저앉는 민국을 보며 유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기다렸다는 듯 민국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자 유이는 가뿐하게 드는 모습이었다. 그 광경에 민국이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사스가 최유이."
"……."
"훗날, 잠자리에서 당신은 무서운 사람이 되겠군요."
뭔가 성희롱 같은 드립이었지만 그래도 본래 그가 이런 사람이었으니 넘어갈 따름이었다. 그리고… 유이는 지금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쓸 정도로 멘탈이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어지러웠던 정신을 가다듬으며 유이가 휘청거리는 몸으로 돌아섰다.
"집에… 얼른…."
"집으로 가시려고요? 허허, 이 사람 대낮부터 모텔이라도 가자고 제안할 사람일세."
"얼른…."
민국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곧장 집으로 빠른 걸음을 재촉하는 유이였다. 그런 유이의 뒷모습을 주저앉아 지켜보던 민국은 말없이 뒷머리를 긁적일 따름이었다.
"웃차."
그러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는 민국이었다.
"일단 오늘은 일찍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래는 좀 더 세상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했는데 유이 씨가 아직 적응이 덜 된 거 같으니까 말입니다."
"……."
유이는 다시금 컴퓨터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길 따름이었다. 말하는 민국을 조금도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모니터만을 쳐다보며.
"그럼 가보겠습니다. 바이찌엔."
민국은 유이의 그런 모습을 항상 봐왔기 때문에 그저 손을 들며 인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곧장 방문을 나와 계단을 내려갈 따름이었다. 타다다닥…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는 유이. 이윽고 끼이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그제야 타자를 두들기던 유이의 손이 움찔하고 멈추게 되었다.
"……."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바들바들 떨리는 그녀의 양손. 그 손을 볼 때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죄의 죄악감이 가슴 깊숙히 몰아닥치는 기분이 들었다.
"……."
얼마지 않아 유이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장 침대로 향하여 이불을 돌돌 말아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고개를 숙이고,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헤칠까 두려움을 느끼며….
"……."
그녀는 아직 과거의 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
"어서오시와요 민국 님~."
"그래. 내가 왔다."
"민국 님, 땀이 많이 나셨네요? 오늘 날씨가 많이 더우셨나봐요~."
민국의 땀에 젖은 옷을 가리키면서 묻는 설화였다. 설화의 그 말에 민국은 좀 별 난 일이 있었다고 대충 얘기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웃음 짓던 설화가 신발을 벗고 거실 안으로 들어가는 민국의 팔에 팔짱을 끼고 찰싹 달라붙으면서 말한다.
"하지만 민국 님의 땀도 저에겐 사랑스러우니 걱정마시와요~ 사랑해요 민국 님~."
"허허, 이 저돌적인 여자보소. 마치 오늘 밤 꽉 깨물어주고 싶군."
"어머나… 역시 육식계 민국님."
그리고 '우후후~.'하고 매혹적으로 웃는 설화였지만, 그래도 역시 실전에는 약한 그녀였으니. 만일 민국이 진짜로 덮치면 자신의 기술을 써서라도 제압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근데 설화야."
"네 민국 님~."
막 안방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던 민국이었다. 근처까지 와서 지켜보는 설화를 향해 민국이 문득 궁금한 것처럼 물었다.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길거리에서 마주치니까 쏜살같이 도망간다고 하면,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를 길거리에서 마주치니까 도망간다구요~?"
"그래. 우연히 길에서 그런 사람을 봤거든."
"으음~."
설화는 턱에 검지를 갖다대는가 싶더니 골똘히 생각하고 말했다.
"바람 아닐까요~?"
"바람?"
"바람이와요 민국 님~."
'바람이라.'
민국은 유이를 떠올리면서 바람과 매치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영 쉽사리 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랑 만나는 걸 꺼리는 그 양반이 바람을 필 거라곤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데.'
물론 사람의 겉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건 미숙한 행위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애초에….
'바람을 필 정도의 여자였으면 잘 생긴 내가 있는데 대시를 안 할 리 전무하잖아!'
마치 모든 여자들이 한 번쯤은 꼭 대시를 할 거라 확신하는 서민국의 교만함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설화가 중얼거린다.
"하지만 전 민국 님만 있으면 상관없으와요~"
"어? 그럼 설화 너는 내가 바람 피워도 용서해줄 거야?"
"저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아요~ 민국 님만 곁에 있으면 되니까요오~."
"헐. 설화야."
왠지 묘하게 모순된 느낌도 드는데 묘하게 감동적인 느낌도 있다. 이게 바로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는 사랑의 마인드일까? 이윽고 민국 님~하면서 안기려 하는 설화를 민국도 저도 모르게 꽈악 포옹하며 안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민국을 안은 설화의 눈으로 침대에서 꼬불꼬불 걸어가는 개미 한 마리가 보였다.
'죽으세요~.'
파직! 순식간에 투명한 손이 개미의 사지를 찢어버렸다. 민국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응?'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뭐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았니 설화야?"
"네? 무슨 소리와요?"
설화가 특유의 말투와 함께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천사 같은 미소에 민국은 '음… 아무 일도 없었나?'하면서 중얼거릴 따름이었다. 이윽고 설화가 다시 애교를 부렸다.
"민국 님~ 다시 민국 님의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어와요~ 얼른 안아주세요~."
"…훗. 어쩔 수 없군. 이리와 안기게."
"역시 민국 님이에요~ 포근해요오~."
그리고 민국에게 곧장 안기면서 웃음 짓는 설화였다. 그러자 또 한 마리의 개미가 침대에서 꼬불거리는 게 보였다.
'죽으셔요~.'
팍! 이번에도 또 한 마리의 개미가 무참하게 찢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