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만남의 과거>
"축하합니다 유이 씨. 드디어 유이 씨의 새로운 시대를 열 19금 창작 작품이 세상에 발매되겠군요."
"……."
유이는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유이가 읽던 C언어 서적들을 둘러보는 민국. 그의 말 중에 한 가지 옳은 것은 있었다. 바로 게임 발매.
"루트 1은 일반 엔딩, 2는 트루엔딩. 엔딩이 두 가지인 점을 감안하면 다소 이야기가 많은 게임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대중성은 있어 보이니까 말입니다."
본래 창작에 제일 중요한 건 대중성과 상업성이다. 많은 창작 초짜들이 작품성을 우선 순위로 두는데, 대중성과 상업성이 낮은 작품은 아무리 작품성이 좋아도 결국 무너지기 마련이다.
"아! 근데 마케팅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유이 씨."
이윽고 굉장히 중요한 점을 끄집어내는 민국이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두들기던 키보드를 잠시 멈추는 유이였다. 이윽고 스으윽 반쯤 고개를 돌려 민국을 바라보는 유이였다.
"그건…."
그리고 이내 말을 꺼내지만, 마땅히 생각은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애초에 유이는 무언가를 배우고 실전에 사용하는 능력은 뛰어났다. 그러나 인간 심리나 인간 관계에 관한 것이 남들보다 유독 약한 편이었고, 그것은 마케팅에서도 약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점이었다.
사람을 끌어 들이는 마케팅이란 곧 어떻게 사람들이 그 작품에 끌리도록 만드는가가 중요한 점이었다.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어필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곧 망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
하지만 유이에겐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파뿌리 TV를 이용해서 홍보를 하는 것이었다.
"설마 파뿌리 TV 방송을 통해서 홍보하시려는 생각입니까?"
그리고 그 유이의 심리를 곧장 꿰뚫고 질문하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 말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흐음, 확실히 유이 씨도 단골 팬들이 있으니 게임만 제대로 홍보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긴 한데."
"……."
"후후, 그래도 파뿌리 랭킹 1위에 빛나는 막장 비제이 현대왕의 홍보 마케팅에 비하면 조금 딸리겠지요."
민국의 교만이었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유이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돌이켜보면 민국은 파뿌리 TV에서 가장 잘 나가는 비제이였고, 그런 그가 유이의 작품을 홍보해주면 당연히 효과는 만점일 것이 자명했다.
"……."
"어떻게 할까? 후후후후! 도와줄까요? 도와줘요 유이 씨?"
"……."
"음하하하하하하!"
금세 자만해지는 서민국. 유이는 그냥 외면하고 열심히 다시금 키보드를 두들길 따름이었다.
"크흠, 이 사람보소. 상큼하게 무시하시네."
"……."
"후후후후. 하지만 그것이 실은 유이 씨의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란 건 잘 알고 있지요. 에라이 부끄럼쟁이 같으니!"
"……."
오싹. 정말이지 유이의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느끼한 멘트였다. 오죽하면 표정 변화가 없는 유이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징그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변모하였으니 말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흠흠'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을 다시금 바라보는 유이에게 말을 이었다.
"뭐, 저도 같이 게임에 동참한 사람이고 애정도 있으니까 당연히 제 방송에서도 홍보는 해줄 겁니다."
"……."
"다만! 인생에는 공짜란 없는 법! 고로 유이 씨는 저에게 뭔가 한 가지를 해주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조건을 걸어 대가를 주고 보답을 받는 법! 흑설 공주가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좀 나갑시다."
"……."
"이 여자야, 무슨 날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조일 지경입니다. 좀 나갑시다."
그것이 민국의 제안이었다. 오죽하면 그런 황당한 제안을 할까 싶을 정도로, 유이는 집밖에서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나간 날을 돌이켜보면 전에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 한 번 정도?
"마트에서 장…."
"마트에서 장 봤을 때 한 번 나간 거 말입니까? 슈밤, 냉장고 보니까 많이 사오지도 않았구만! 이틀 먹으면 끝날 반찬 몇 가지고 뭘 사왔다고 해요? 심지어 이미 그거 다 먹었잖아!"
"……."
"으아, 답답해. 보고 있으니 숨통이 조여 죽을 맛이다. 이것이 바로 발암병인가?"
발암병이란, 드라마나 만화 속 주인공이 꼭 또라이 짓을 해서 쟁취할 수 있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그걸 지켜보는 독자들이 느끼는 답답함을 뜻한다. 민국은 마치 유이가 영화 속에서 어영부영 집에만 틀어박혀 사는 히키코모리란 인상이 들 정도였다.
"유이 씨, 이러다가 진짜 히키코모리가 됩니다."
"……."
"대인 기피증이 있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부딪혀 봐야 하고, 그러면서 대화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교우 관계가 활달해지고 좋아질 거 아닙니까?"
굳이 만날 생각이 없는데…. 유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키보드를 다시 두들기기 시작했다. 게임 제작도 끝났지만, 그래도 C언어를 가지고 요리조리 건드려보면서 만지작거리는 게 바깥에 나가는 것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이윽고 그걸 본 민국이 '후우! 안 되겠구만!'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나갑시다 유이 씨!"
"……."
"나가서 우리 쨍쨍한 하늘이라도 보자 이 말입니다! 어차피 게임 제작도 어제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오늘 민국이 여기에 온 용무도 사실상 완성된 게임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작도 다 끝났는데 이제 좀 휴식을 취할 겸 바깥에 나가서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그런 제안을 하는 민국이었지만, 유이는 여전히 영 꺼림칙한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무시하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에 민국이 손을 턱에 가까이 가져가더니 말했다.
"안 되겠군요 유이 씨. 후후, 정 그렇게 나오신다면 이 집에 제 친구들을 부를 수밖에."
"……."
그 말에 키보드를 멈추는 유이. 이윽고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민국에게로 고개가 돌아간다. 꽤나 먹히는 수법에 민국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이 씨의 집을 아는 건 아직 저밖에 없지요. 하지만 강서라가 이곳에 출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
"설사 유이 씨가 서라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 서라 녀석이랑 제가 같이 이곳에 오게 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유이는 문득 상상해보았다. 죽이 꽤 잘 맞는 서라와 민국이 유이의 조용한 집에 찾아와 서로 장단을 맞추면서 개그질을 한다면… 아마 꽤나 시끄러울 것이다. 평소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곳에서도 말문을 닫고 있는 그녀로선… 그건 꽤나….
"……."
결국 유이는 포기하고 의자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끼이익,하고 의자에서 일어나는 유이의 모습에 민국은 계획대로 되었다는 듯 음흉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자, 나갑시다."
"……."
"크크큭, 역시 인간은 재밌어!"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유이였다.
"유이 씨, 오랜만에 나오는 관계로 제가 한 번 이 세상에 대해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유이 씨는 처음부터 다시 세상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어요."
바깥으로 나온 상황. 유이는 밀집 모자를 쓰고 햇볕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고개를 내리 숙인 모습이었다. 그런 유이의 밀집 모자를 조금 올리면서 민국은 맞은편의 무언가를 가리켰다.
"자, 저걸 보십시오 유이 씨."
"……."
"저게 나무라는 겁니다. 나무. 저건 나무에 달린 잎파리. 나무는 공기를 맑게 해주지요. 우리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서 공기로 배출해주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저거 보십시오. 저건 사람입니다."
안다.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하는 민국의 패기에, 맞은편의 사람이 순간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씨익 웃는 민국의 얼굴에 순간 큐피트가 팍 꽂힌 듯 얼굴을 붉히면서 잽싸게 비껴 지나간다. 그런 지나가는 여자의 모습에 침묵하던 유이가 다시 고개를 푹 내렸다.
"이대로가 편…."
"이대로가 편하다니. 유이 씨, 세상은 아름다워요! 아직 유이 씨가 보지 못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이 말입니다!"
"……."
그 말에만큼은 유이는 저도 모르게 부정을 하였다.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 믿던 사람들조차 모두 배신을 했고, 모든 것이 전부 헛된 세상이었다. 그곳에서 누군가와 믿음을 주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혼자만의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가는 게….
"아무리 못된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아도, 희망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
그 말에 문득 유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민국을 돌아보았다. 민국은 이번엔 유이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당면을 쳐다보면서 막연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소 진지해보이는 그의 옆얼굴은, 유이가 딱 한 번쯤은 우연치 않게 본 적 있는 얼굴 같기도 하였다.
"……."
유이는 순간 덜컹거렸던 마음을 참으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민국에게 반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다른 여자들보다 이성의 얼굴을 보는 면이 적었다. 다만… 마치 자신의 진심이 들킨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 놀란 것이었다.
"이번엔 한 번 저쪽으로 가봅시다."
"……"
"제가 유이 씨에게 지하철이라는 것을 소개시켜드리지요. 자, 한 번 따라해보십시오. 지.하.철. 그렇습니다. 오늘 유이 씨에게 소개해드릴 주제는 바로 지하철입니다."
"……."
결국 민국을 따라 지하철을 소개 받으러 역까지 향한 유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이 아닌 마트에 도착한 일행이었다. 사실상 어디 갈 곳도 마땅히 없었고, 일단 텅빈 냉장고를 채울 만한 반찬거리들을 사기 위함이었다. 유이를 대신해서 민국이 봉투에 반찬거리들을 쓸어담으면서 중얼거렸다.
"자, 유이 씨. 이게 가슴 성장에 좋은 우유입니다. 앞으로 이걸 드십시오."
"……."
"유이 씨의 가슴은 앞으로 더 커져야 합니다. 좀 더 커져서 많은 색기를 발산하기 바랍니다."
세상에 여자 친구도 아닌 상대를 두고 이런 발언을 하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유이는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봉투 안을 꽉 채울 정도로 반찬 거리들을 담은 민국이 카운터에 올려두고는 지갑을 열었다.
"자, 이건 오늘 제가 사드릴 테니 이걸로 게임 제작 값은 퉁치는 겁니다?"
"……."
어찌 됐건 게임 제작에 협조한 인물로 서민국 역시 게임 상에 이름이 띄어질 예정이었으니까 말이었다. 비록 의견만 내놓고 실용적인 실전은 유이와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가 전부 책임졌지만. 그래도 그 부분을 감안하고 있기에 민국이 이렇게 반찬을 대신 사주는 것이었다.
"돈은…."
하지만 유이는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왜냐하면 돈의 부족함은 없었기 때문에 반찬이라면….
"어허, 집어넣으십시오. 그냥 제가 사드릴 때 가만히 받는 겁니다. 그게 여자로서의 도리입니다."
"……."
"엣헴."
그리고 자신 있게 계산을 하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을 그냥 말없이 지켜보는 유이. 이윽고 '수고하세요.'하고 해맑게 카운터 아줌마에게 인사한 민국이 먼저 바깥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의 아줌마가 유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좋은 남자 친구네! 얼굴도 좋고 키도 훤칠하고! 저런 자상한 남자 꼭 잡아!"
"……."
졸지에 여자 친구가 되어버렸지만, 애초에 낯선 이가 말을 건다는 것에 불안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유이는 무시하고 그냥 바깥으로 나왔다.
"자, 그럼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봉투 갔다 놓고 다시 나옵시다."
"……."
또 나와야 하는가,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거니는 두 사람. 그런데 그때였다.
"오빠. 여기서 뭐 사게? 또 인스턴트 먹게?"
"뭐 어때. 초콜릿 하나 먹는건데."
"그래도 너무 먹으면 이빨 상해. 좀 조심해."
문득, 어디선가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음성은 자연스레 유이의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고, 이내 쳐다보게 된 그 상대의 얼굴에 유이의 가슴이 쿵하고 떨리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