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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30화 (330/369)

330화

아직 하루 이용권의 이용권 시간은 만땅이었다.

"으으음! 이 다음에 지가 원하는 건 말이지여."

서라는 팔짱을 끼고 심도 있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서민국 노예로 부리기 하루 이용권이 생겼다 한들 정확히 어느 곳에 사용해야 할 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듯 민국이 소리쳤다.

"범해줄까?"

"이이잉! 사스가 패도남."

"아니 그럼 그거 말고 할 게 뭐가 있냐? 남녀가 원래 방에 단 둘이 있고, 심지어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 당연히 음양합일을 해야지."

"그 패기를 은별 언니찡에게 부리는 걸 한 번 보고 싶네여! 이걸 요구할 테니 들어주세여!"

"아니, 미안하다. 아무래도 그건 역시 무리야. 나 죽는 꼴 보고 싶냐?"

역시 모두가 두려워하는 존재, 강은별! 애초에 강은별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는 인물이었다. 남자 친구인 서민국조차도 항상 남 모르게 은별이의 눈치를 보는 마당에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은별 언니언니찡에겐 뭔가 특별한 사람에게만 버금가는 그런 기운이 있는 거 같음여."

"확실히 그렇지. 나한테나 딴죽을 거는거지, 다른 애들은 그저 우러러 보는 수준이니까."

확실히 은별이가 민국에게나 딴죽을 걸고 그렇게 사랑스럽게(?) 구는 것이지, 그녀가 학교 생활을 하거나 혹은 겉 친구인 사람들을 상대로 대화를 나눌 때는 엄연히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 왜, 아무리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라 해도 뭔가 남 다른 분위기가 풍기면 자연스레 그 사람을 추켜 세우게 되지 않는가.

그쪽에 속하는 게 바로 강은별이었다.

'근데 돌이켜보니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이구만.'

돌이켜보니 그러하다. 강은별뿐이 아니라 예나도, 서라도, 유이도, 설화도 다 마찬가지로 뭔가 특별하고 고급스런 분위기를 풍기거나 혹은 뛰어난 비쥬얼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점이 있었다.

'심지어 나도 말이지 크흠.'

역시 인생은 끼리끼리 모이는 판이다.

"그럼 뭐할까여?"

"뭐 요구할 거 없냐? 없으면 나 그냥 소파에 드러누워서 야동이나 본다?"

"으아, 우리 집에서 오른손과 친구가 되지 마시염여."

"안타깝게도 왼손이다. 난 오른손보다 왼손이 드는 힘이 더 쌔지."

원래 전국 남자들 불문 다 왼손이 뭔가 쥐고 왔다갔다 하는 동작은 더 능수능란한 법이다. 이윽고 하염없이 민국에게 어떤 요구를 해야 할까 고민하던 서라였다.

"온니찡! 좋은 아이디어 생각남!"

"뭔데?"

"재미있게 놀아주셈!"

"앵?"

뭔가 특별한 요구도 아니고, 뜬구름 잡는 듯한 요구에 민국은 잠시 얼떨떨해졌다.

"재미있게 해달라니. 뭐 어떻게 재미있게 해달라는 뜻이냐."

"그냥 재미있게 해주시면 됨! 막 게임을 제안하거나 그래서 이 조용함을 시원하게 날려버려주셈여."

"흐음…."

재미있는 놀이를 해서 서라를 즐겁게 해달라는 요청 같았다. 어차피 하루 노예인 민국으로선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재미있게 논다면 역시 음양합일 슈퍼합체가 남녀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재미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1+1=3 놀이는 생산 가능성을 염두해야 해서 위험함여."

그렇긴 하다. 아니, 애초에 말뿐이지 민국도 별로 할 맘은 없었다. 지금 두 사람이 그럴 처지…는 아니었으니까.

"좋다. 그럼 진짜 재미있는 게임을 이 몸이 가르쳐주도록 하지."

"오옹."

"팔씨름하자."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면서 팔씨름 자세를 취하는 민국이었다. 서라는 순간 심각하게 정색해버리고 말았다.

"행님 노답이시네여…."

"오우씨. 네가 그런 정색하니까 뭔가 반전 매력 같아서 나쁘지는 않네."

"헤헤! 그렇지여? 근데 정말 노답이시네여."

서라가 말을 이었다.

"어떻게 사랑스럽고 큐티큐티한 여동생느님에게 팔씨름 같은 행위를 제안할 수가 있지여? 그렇게 나님의 보들보들한 손을 잡고 음란함의 감정을 느끼고 싶으신 건가여!"

"서라야, 그건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다. 난 이미 네 얼굴을 보고 있을 때부터 욕구 불만이었어."

"나왔당! 온니찡만이 할 수 있는 노골적인 멘트!"

역시 온니찡이라며 그 멘트를 인정하는 서라. 이윽고 민국이 팔씨름 자세로 말했다.

"어쨌든 팔씨름부터 하자고. 원래 힘 쓰는 놀이부터 해야 빨리 지치고, 그래야 쉬는 것만으로도 삶의 재미를 느끼게 되는 법이야."

"읭… 뭔가 진 빠지게 만들어서 요구를 못하게 하려는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해보겠음여."

그리고 민국의 오른손과 서라의 오른손이 꽉 맞잡는다. 서라도 어느새 맞은편에서 팔꿈치를 대고 팔씨름 자세를 잡은 상태였다. 역시 민국의 손에 비하면 서라의 손은 한낱 아기처럼 작고 뽀얗다.

"서라 너 손 진짜 작긴 작구나."

"온니찡의 그것은 너무나도 크시네여… 나님의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이 자식? 왠지 노리고 멘트친 느낌이 강렬히 든다."

어쨌든 팔씨름은 시작될 예정이었다.

"시작한다?"

"이응이응. 지가 한 번 남자를 이긴 최초의 여자 대표가 되어보겠음."

"훗, 어디 한 번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거라."

그리고 '시작'이라고 민국이 외치는 순간이었다.

"흐얍!"

온 힘을 다해 팔에 힘을 주는 서라였다. 하지만 서라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근력이라고 할까? 뭐, 평균 여자에 속하는 근력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시 민국에겐 상대가 안 됐다. 민국은 끙끙 힘을 내는 서라를 보면서 '훗'하고 가볍게 웃음 지었다.

"약하군. 나를 대적하기 위해 키운 힘이 고작 이 정도인가?"

"우으으… 나를 위해 희생한 동료들을 생각해서라동! 결코 물러나지 않겠어여!"

마치 동료의 희생으로 간신히 마왕과 싸우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 같았다. 그런 상황극을 펼치는 와중에도 서라는 끄응 거리면서 민국의 팔을 기울이게 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윽고 애를 쓰는 서라를 귀엽게 쳐다보던 민국이 다시금 웃음 지으며 말했다.

"훗, 포기해라.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너의 고향으로 돌아가!"

"고, 고향에 돌아가면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에여!"

민국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군. 그럼 내가 여기서 끝을 내주마."

휘익!

"앗! 으앙…!"

이윽고 민국의 강인한 힘에 휘둘려 팔씨름에서 질 위기에 처한 서라였다. 자신의 손등이 테이블에 닿을 위기에 처했음에 서라가 후덜덜거리자 민국이 말했다.

"여기까지다. 강서라."

"앗…! 온니찡! 잠시만여!"

"뭐냐?"

이윽고 민국이 봐주지 않고 서라의 손등을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서라가 나머지 손을 들어 보이더니 타임을 외쳤다. 그리고는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상태에서 서라가 테이블에서 뛰어오르듯 민국에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을 품고 있는 민국의 볼에 뽀뽀를 했다. 쪽~!

"……."

"서라는 상대방을 혼란시키는 기술을 사용했다! 이 틈을 타 서라가 이겼다!"

그리고는 민국이 진심으로 방심한 틈을 타서, 그가 손에 힘이 빠졌을 때 그의 손등을 테이블 바닥에 대도록 만드는 서라였다.

"와아!"

"허얼."

노예 이용권을 이용해서 져달라고 할 줄 알았으나, 예상 외의 서라의 돌발적 행동에 민국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서라는 자신이 방금 전에 했던 행동보단 이긴 것에 대한 수상(?) 소감을 표명했다.

"후후후훙, 온니찡. 이게 바로 나님의 위력입니다여. 온니찡이 아무리 그것이 달려서 남성 호르몬의 수치가 지보다 높다고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여!"

본래 세상은 남자가 만들고 남자는 여자가 만든다고 한다. 그런 법칙을 이용하여 서라는 마왕 서민국에게서 이긴 셈이었다.

"크흠…."

민국은 잠시 얼떨떨해져 있다가 곧 서라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서라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본다.

"녀석."

"데헷 데헷."

용서해달라는 듯 서라가 꼭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웃음 짓는다. 표현은 안해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느낌은 상당했다.

"……."

"……."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당연했다. 안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는 오묘한 감정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임을 알고 있었고, 서로가 서로의 감정을 짐작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남녀가 단 둘이 있는 환경이라면… 당연히 야릇한 분위기가 안 생길 래야 안 생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온 지금에야 말로 그 감정이 생기는 타이밍이었다.

"크흠…흠!"

"…엣흠흠!"

애써 그 감정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서로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눈을 마주치던 시선을 회피하면서 각자 다른 데를 돌아본다. 민국이 먼저 운을 띄었다.

"그나저나 과자랑 우유 다 먹었으면 치워도 되냐?"

"헤헤… 노예가 있다는 건 실로 좋은 거네여. 치워주세염."

노예라는 입장이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건 그저 귀여운 여동생을 돌봐주는 착한 오빠의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남녀로서의 이성적 감정도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말이었다.

"그래. 아, 근데 우유는 좀 남았는데 그냥 냉장고에…."

"아! 그건 지가 하겠…."

이윽고 우유를 향해 손을 내뻗는 서라였다. 그와 더불어 우유를 잡고 있던 민국의 손과 우연치 않게 포개지고 말았다. 순간 움찔하는 두 사람. 자연스레 민국과 서라의 눈이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

이번엔 아까처럼 테이블이 간격을 벌려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숨을 내뱉으면 그 숨결이 고스란히 면면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서라는 민국의 눈빛을 마주하게 되자 강렬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눈빛을 느꼈다.

"……."

"……."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절제가 쉽사리 되지를 않았다. 이성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바로 이런 것일까.

"오, 온니찡…."

"……."

서라의 중얼거림에 민국도 가슴이 쿵하는 걸 느꼈다. 사실상 민국도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으니까. 300년의 감정은 컸다. 그 감정을 용케도 지금까지 참아낸 게 대단할 따름이었다.

"……."

"……."

이윽고 민국이 서라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서라는 그것을 발견하고는 '앗…'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지 않아 다시 민국을 쳐다보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된 순수한 여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두 사람의 얼굴…. 글썽글썽 떨리는 강서라의 눈동자와 입을 맞추기 위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는 서민국. 이내 숨결이 닿다 못해 혀가 닿을 정도로 입술의 위치가 가까워지는 그 순간이었다.

"엄마 왔다~."

"!"

"헐!"

느닷없이 현관문이 열리면서 그런 소리가 들려왔고, 민국도 깜짝 놀랐으며, 서라 역시 '헐'하고 굉장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쳐다보게 되었다. 이윽고 현관문 앞에서 중얼거리는 서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각해보니 오늘 쉬는 날이었지 뭐니. 하도 근무가 많다 보니 쉬는 날도 근무날로 착각하고 가버렸단다. 서라 너는 어디서 뭐하니?"

"행님! 뛰십시여!"

혹시나 이 상황을 들킬세라! 서라가 곧장 자기 방을 가리키는 모습이었다. 민국은 '오냐!'하고 잽싸게 서라의 방으로 냉큼 뛰어갔다.

본래라면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려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시겠지만… 두 사람 다 순간적으로 느꼈던 사랑의 충동 때문인지, 마치 도둑이 제발 저린 것마냥 몸을 숨기려는 모습이었다. 후다닥! 이윽고 서라의 방안 침대 뒷편으로 잽싸게 몸을 숨긴 민국이었고, 서라는 어정쩡하게 거실 소파 앞에 서서 웃음 지었다.

이윽고 거실 안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서라를 보면서 말한다.

"혹시 누구 왔었니? 테이블에 꽤 어질러져 있네."

"헤, 헤헤…. 저 혼자 먹은 거예요…. 입이 심심해서요."

"그러니?"

흐뭇하게 웃는 어머니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너 고3 준비하면서 많이 힘들까봐 요기할 만한 음식도 내가 몇 개 사왔는데 한 번…."

그런 어머니의 소리가 오가는 중, 민국은 조금은 안전해진 듯한 느낌이 들어 서라의 문틈 새로 거실을 확인했다. 그러자 서라가 부엌에 어머니가 있다는 제스쳐를 눈빛으로 보내면서 후다닥 현관문 쪽으로 신호를 보냈다. 민국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다닥 현관문으로 소리 없이 달려갈 따름이었다.

끼이익… 쿵….

"응? 뭐지? 방금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는데?"

"가, 갑자기 바람의 향기를 맡고 싶었어요! 제가 열었다 닫은 거예요."

웃음 지으며 어머니에게 예의 바르게 말하는 서라였고, 어머니는 '그러니?'하면서 다시 웃음 짓는다. '휴우~.'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 서라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하루는 무사히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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