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하루 이용권>
참고로 인기 투표에서 꼴찌를 한 사람에겐 벌칙이 있었다. 민국은 그 벌칙이 마치 기존에 없던 것마냥 변명을 하면서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건 무리였다. 결국 남자로서 고추를 달고 태어난 이상 병역의 의무와도 같이 벌칙의 의무를 지키자고 결심한 민국이었다.
'다음 생에는 후타나리로 태어나겠다.'
그런 결심을 하는 민국. 그런 그에게 과연 오늘 어떤 벌칙이 있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미 인기 투표를 할 때 선언했던 벌칙이 있던 것이다. 그건 바로….
'하루 노예권.'
그러하다. 하루 동안 꼴찌는 인기 투표에서 1등을 한 사람에게 어떠한 요구든지 듣고 응해야만 했다.
만일 조금이라도 1등의 행동에 딴지를 걸거나 무시를 한다면 하루 노예권은 그 배가 되어 이틀 노예권으로 변모하는 것이었다. 비매너 현대왕으로서 약속을 어겨도 될 지도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 그것도 여자 다섯 명 앞에서 맹세한 것인데 이제 와서 무시하는 건 불가능한 행위였다.
"인생 씨벌."
고로 오늘 민국은 옷을 갈아입고 서라를 만나러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늘은 주말이고 대학교에 가지 않는다. 고로 민국은 오늘 자유의 몸인 셈이었고, 그 자유의 몸은 오늘 서라에게 도맡아질 예정이었다.
"설화야, 넌 가는 거 아니다."
"에에? 너무해요오 민국 님~."
"애초에 벌칙이 1등의 노예가 되는 거였잖아. 2등은 페스해야지."
"칫…."
순간 보이지 않게 혀를 찬 설화였다. 하지만 다 보인다 보여. 이윽고 설화가 '흑!'하고 눈물을 흘리는 듯한 제스쳐를 취하면서 바닥에 청순하게 주저앉았다.
"흑… 그럼 민국 님은 저를 오늘 하루 종일 이 집안에만 있게 하고 가실 생각이신가요오? 소녀, 너무 슬프답니다~."
"훗, 설화야. 오늘은 나도 어쩔 수 없이 가는 것뿐이야. 하지만 내일부턴 계속 너와 함께 할 수 있잖니."
"함께 할 수 있다니… 미, 민국 님도 갑자기 참~ 야하셔라~."
'아니,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하지만 평소 민국의 야한(?)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지사. 어쨌든 설화는 민국이 그 무엇을 하든 받아들이는 성격으로 설정이 되어 있었고, 그것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반영될 따름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채비를 갖춘 민국을 향해 현관문 앞에서 인사하는 그녀였다.
"다녀오시라요~."
"엇흠, 그래. 다녀와서 찐한 밤을 보내자꾸나."
"아응~."
부끄럽다는 듯 어깨를 도리도리 움직이는 그녀. 하지만.
'진짜로 찐한 밤을 보냈다간 은별이에게 사망을 하겠지.'
안 그래도 은별은 설화를 이 세계로 데리고 온 뒤, 여러모로 이를 갈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상태라면 은별이 다른 남자와 하룻밤 모텔에서 묶고 와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네토라레는 극구 반대하는 민국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은별의 비위와 눈치에 맞추는 게 그의 현재로서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도 참 양심이 없구만.'
그러하다. 오늘 민국이 밖에 나가는 이유, 서라 때문이다. 명분으로는 1등인 서라가 꼴찌인 민국을 하루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자유이용권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결과적으로 민국은 서라를 만날 수 있음에 상당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인생 씨벌!'
실로 난감할 따름이다. 300년의 기억! 이젠 서서히 잊혀지고 있는 추억 아닌 추억이었지만, 그때 그 느꼈던 그 감정은 고스란히 민국의 가슴 속에 담겨 있었다. 필시 그 300년은 실재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감정까지 없애버린다면 그것은 '무'가 될 테니… 흑설 공주가 그 부분에선 헌심을 쓴 모양이었다.
'본래라면 나랑 서라는 더 이상 만나지 말았어야 할 테지.'
아마 민국을 얽고 있는 죽음의 사슬이 없었더라면, 민국은 이미 서라와 헤어지고 은별과 예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300년이란 시간이 가져오는 감정의 어마무지함은 차원을 초월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민국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마치 한 번 딸을 친 뒤, 평생 동안 금딸을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예 안 한 놈은 있어도 한 번 하고 끝나는 놈은 없다. 그런 셈이다. 인생은 무엇이든 간에.
"고로 지금, 서라를 만나러 갑니다."
어쨌든 명분은 성립되어 있었으니, 이제 서라를 만나러 가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왔다."
"앗, 킁킁! 어디선가 꼴등의 냄새가…!"
"크흠…."
"행님! 어디선가 꼴등 냄새가 나지 않아여? 막 인기 투표 꼴등이 발표되는 순간 부들부들 떨면서 등에 암흑의 기운을 지고 있던 한 남자의 기운이 느껴지와여!"
"이놈이."
"으앙!"
해드락을 거는 민국. 서라는 스톱하라며 민국의 옆구리를 톡톡 건드릴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민국의 해드락에서 벗어난 서라가 '우으…'하고 관자놀이를 부여 잡다가 말했다.
"노예가 주인에게 폭력을 쓰다닝… 그건 동인지에서만 가능한 일입네다 행님!"
"사실 여긴 동인지 세계다."
"으아닛?"
"그리고 난 너를 범하기 위해 찾아온 노예. 너는 귀족의 따님!"
"귀족의 따님으로서 노예에게 가버렷!"
어쨌든 둘은 만났다. 하루동안 서라의 노예가 되어주기로 한 명분으로.
"은별 언니찡은 괜찮다고 하셨심여?"
"뭐… 벌칙이야 미리 말해뒀으니까 그거 가고 뭐라는 안 하지. 은별이는 그래도 줏대는 확실한 편이니까."
"하긴여. 은별 언니찡이 결혼하면 남편 잘 챙겨줄 사람이긴 해여!"
"크흠, 그리고 그 남편이 내가 되겠지."
"우왓! 감당할 수 없는 오로라 같은 자부심!"
"후후. 말은 그렇게 해도 너 내가 '남편'이란 단어를 사용하니까 순간 은별이에게 질투나지 않았냐?"
움찔!
"아, 아니거든영!"
"부들부들하는 거 보소."
"부들부들!"
어찌 됐든 서라도 300년의 영향을 받은 건 자명했다. 이 300년의 기억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민국을 흠모하고 있되 민국과 사귀고 있는 강은별에게 질투를 느낄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300년의 기억이 너무나도 컸다. 그 차오르는 감정이 결국엔 강은별을 질투하는 수준까지 올라갈 정도라니….
"그래도 은별 언니언니찡은 지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임여! 결코 은별 언니찡 상처 주지 않을 거임여!"
"훗. 이미 300년의 기억과 더불어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나고 있는 이상 은별이는 상처 받을 수밖에 없을 걸."
"흐… 흐규흐규…."
그 말에 좀 침울한 표정을 짓는 서라였다. 확실히 서라는 마음이 착한 타입이었다.
작정을 하고 남의 애인을 빼앗는 것만큼은 행할 사람이 못 되었다. 도덕적인 것을 중요시 하는 예나도 흑화 소주 건 이후로는 항상 은별이에게 남 모를 미안함을 안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 은별이와 말다툼을 하면 져주는 일도 요즘따라 많은 것 같았고 말이다.
"괜찮아 인석아."
이윽고 절망하는 서라의 머리에 손을 갖다대고 쓰다듬는 민국이었다. 웃음 짓는 민국을 향해 눈을 올려 바라보는 서라였다.
"정 안 되면 3인 하렘으로 가면 된다."
"읭."
"오, 그럼 나는 4P를 하는 셈이로군. 날마다 장어로 끼니를 채워야 하나?"
"행님의 소중한 부위가 좀비가 되는 날이 먼저 찾아오지 않을까염?"
그러하다. 사실 여자 한 명 만족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힘든 데, 3명의 여자라니. 필시 감당하려고 노력하다가 민국이 먼저 미이라가 되어 사망하는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어쩜 하렘 복상사가 실제로 일어날 지도 모를 일!
'그래도 하렘 복상사로 죽는 건 나쁘지 않은 걸?'
문득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이었다. 민국이 말을 이었다.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난 오늘 네 노예인 셈인데, 엇흠흠! 뭐, 원하는 게 뭐냐? 바지라도 벗어줄까?"
"우왓! 로리를 어떻게든 범하려는 그 강인한 태도! 지리겠슴니다영… 하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다른 거임여!"
그러하다. 오늘 서라가 민국을 부른 까닭은 민국의 18cm 흉흉한 무기를 보기 위함이 아니다.
"그럼 뭐냐."
"우후후후훙! 온니찡도 매우 놀랄 제안일 겅미! 기대하셔도 됨!"
잔뜩 기대를 부풀어 오르게 하는 서라.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친다.
"과자 사주세염."
"……."
"초코 들어있는 과자 1500원짜리로염."
1500원 정도야 있었으니 상관은 없으나… 일단 현관문으로 다시 되돌아가면서 민국은 물었다.
"용건은 그게 끝이냐?"
"실은 더 있음여. 우유도 사주세염."
"이 녀석…."
"헤헤."
어쨌든 오늘 하루동안은 서라의 노예인 셈이니 거절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민국은 그냥 순순히 뜻을 들어주기로 했다. 일단 과자랑 우유부터 사러 가자!
"옛다, 과자랑 우유 사왔다."
"으흠흠흠! 우선 테이블에 놓아주세여."
"이런."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고 있던 서라였다. 팔짱을 끼고 대담한 모습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하는 서라의 행위에 민국은 거실 테이블에 과자와 우유를 내려놓았다.
"으흠흠흠! 이제 우유 마시게 컵 좀 가져와주세여."
"내가 네 봉이냐?"
"오늘 봉이잖아염."
"아하! 그러네!"
떠받드는 마님으로 대우해야 할 판이다. 민국은 곧장 부엌으로 향해서 컵을 하나 가지고 왔다. 서라는 어느새 당당한 사람처럼 가슴까지 쭉 피고는 말했다.
"이제 컵에 따라주시져!"
"너 그렇게 가슴 피고 있으면 육감적이라서 덮치고 싶어진다."
"어, 어멋! 덮쳐지면 임신해버렷!"
"훗. 진짜 임신시키려다 참는다."
민국 역시 소파에 앉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모님은?"
"맞벌이시잖아염. 진즉에 나가셨지염."
"그렇군. 그럼 오늘은 여기서 너와 나 단 둘만이 하루종일 함께 하는 건가?"
"우왕… 과자 봉지도 뜯어주셔야졈."
"쩝, 그래."
이윽고 과자 봉지도 뜯어주는 민국이었다. 그러자 서라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벌린다.
"아~."
"허허, 먹여달라고? 어쩔 수 없지."
지이익.
"히이익!"
기다렸다는 것처럼 바지 지퍼를 벗는 민국의 행위에 서라가 경악하듯 소리친다. 그런 장난을 한 뒤에 민국은 과자를 짚어서 서라의 입에 먹여주기 시작했다. 우물우물하고 과자를 씹으면서 서라가 과자에 대한 소감을 내뱉기 시작했다.
"요즘 국산 과자에 대해서 어떤 소견을 가지고 있으신가여?"
"우리나라 과자처럼 완벽한 질소를 가지고 있는 과자는 존재하지 않지."
"질소와 더불어 수중기도 과자 봉지 속에 가득이던데염?"
"실은 과자 먹으라는 게 아니라 공기 먹으라고 만든 거다 이거."
"부, 부왘."
요즘 국산 과자에 대한 소견을 늘어놓는 두 사람. 소파에 앉아서 우물우물 과자를 주고받으면서 먹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말이지 조금도 핏줄이 안 이어진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온니찡."
"왜."
"지가 이제 고3이잖아유."
"그렇지유. 근데 그게 왜."
"근데 저번 학년에 있던 여학생들 몇 명이랑 같은 반이 되었거든염."
민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서라가 고개를 돌려 민국을 바라본다.
"온니찡 자꾸 소개시켜달라고 함여. 어떡할 까염?"
"흠."
뭐, 당연한 일이다. 대학교 미팅에서도 몇 번이고 제안이 온 적이 있으니까. 애초에 대학교 미팅이란 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권하는 자리가 많았는데, 주로 잘 생긴 남자가 한 명은 있어야 그 제안이 승낙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자리에 항상 민국은 언급이 되었고 제안도 여러모로 들어 왔었다.
"본래라면 거절하겠지만 여자 고딩이지?"
"그렇지염."
"흠! 로리콘이 되고 싶은 맘이 샘솟아서 갑자기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지는군!"
"뿌…."
입을 쫙 내밀고 민국을 바라보던 서라였다. 노골적인 질투! 동시에 서라가 우유를 내밀면서 말했다.
"컵 한 개 더 가져오셈여!"
"어째서? 너만 마시면 되는 거 아니냐?"
"원래 우유는 두 컵으로 마시는 겅미! 두 개 가져오셈여!"
"녀석."
질투하는 서라를 보면서 귀여움을 느낀 민국이 피식 미소 짓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근데 사실 지도 소개팅 받은 적 있음."
"언제? 언 놈이냐?"
"유치원 때 유치원 남자에게염."
"이놈이?"
"헤헤."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