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나는 인기다>
또각또각.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넘친다. 반짝반짝 햇살이 비추는 현재 시각은 오후 세 시.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찾아왔음을 알리듯 날은 아직도 화창하다. 그리고 그 계단을 천천히 거닐어 올라가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
이윽고 현관문 앞에 당도한 그 여인이 원치 않는 듯, 천천히 손등을 들어 문을 노크한다. 똑똑. 그러자 잠시 후, 연거푸 들어온 그 익숙한 음성이 유이의 귓전에 닿는다.
"두유워너베이비걸?"
"……."
남자 친구도 아닌 사람이 아기 만들자고 조크를 날리는 순간부터 이미 누구인지 답이 나와 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집안의 주인 서민국이 등장한다.
"어이구, 오셨습니까 유이 사마."
"……."
"누추한 곳은 아니지만 들어오시지요."
양손으로 예의 바르게 방안을 안내하는 모습에 유이는 무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거실 안을 보자… 익숙해 보이는 얼굴들이 보였다.
은별, 예나, 서라.
"앗! 슴가슴가찡 하이염!"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서라가 먼저 조크를 부리면서 손을 들고 인사를 해왔다. 그 다음으로 유이와 별로 친하지 않은 은별이 팔짱을 끼며 말을 걸어왔고, 다음으로 예의 바른 예나가 허리 숙여 인사를 해왔다. 유이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민국은 현관문을 닫으면서 그런 유이의 뒤를 쫓아왔다.
"자, 그럼 이제 설화만 오면 다 준비가 되는 셈이로구만."
"……."
설화. 유이가 제작한 게임 캐릭터의 여자 주인공이었다. 어쩌다 보니 서민국의 집에 얹혀 살며 평생 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은 듣긴 하였다. 그러나 그 실물을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일 것이었다. 유이는 조금은 흥미가 동하는 표정으로 설화가 있는 안방을 보았다.
"민국 님~ 다 모이셨나요오?"
이윽고 설화가 굳이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머리에 꽃처럼 생긴 머리핀까지 달고 안방에서 나왔다. 그런 설화의 모습을 본 유이의 시선이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뚜렷하게 변하였다.
자신이 상상해왔던 그 캐릭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2D 캐릭터가 현존 인물이 된 셈이니 어떤 면에선 믿기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민국이 머리핀을 착용한 설화를 보고는 옆구리에 두 손을 얹으며 대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구만."
"참~ 자꾸 그러시면 부끄럽사와요 민국 님~."
칭찬하는 민국의 행동에 부끄럽다는 듯 한 쪽 볼에 손을 갖다대는 설화였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울컥한 은별이 말했다.
"늦게 왔으면 빨리 앉기나 하지?"
"납작 가슴~."
"왜 느닷없이 욕질이야?!"
"그냥 불러본 거예요~ 무서우셔라~."
입가를 가리고 '호호' 웃음 짓던 설화가 비어 있는 나머지 의자에 앉으려고 하였다. 현재 거실에는 약 여섯 개의 의자가 자리해 있었다. 음악으로 경연을 벌여 순위를 결정하는 유명 TV 프로쇼를 따라한 컨셉이라 보면 되었다. 이윽고 걸음을 내딛던 설화가 유이를 발견하고는 '응?'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그 모습을 목도한 민국이 설화와 유이의 근처로 다가간다. 두 사람이 마주하는 가운데, 민국이 말했다.
"설화야. 이 사람이 가슴의 왕 최유이 씨다. 내가 말했던 게임 제작자."
"……."
"……."
서로 말없이 마주하는 모습이었다. 유이는 여전히 실제 인물이 된 그녀를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설화는 그런 유이를 빤히 마주하다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우와아…."
그리고는 그녀의 가리려고 해도 가려지지 않는 상복부를 보고는 자연스레 손을 뻗는다. 말캉!
"헉!"
"……."
"굉장히 크시네요~. 저보다 가슴이 크시다니, 역시 제 어머님~."
"……."
설화의 부드러운 손이 유이의 가슴을 말캉말캉 쥐어짜는 가운데, 유이는 본능적으로 발을 휘두를 뻔했지만 절제했다. …애초에 게임 캐릭터 설정을 할 때 설화가 이런 성격이 될 것임은 사전에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여자기도 했고 자신이 애지중지 만들어낸 캐릭터라 그런지 크게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보는 눈도 있고 낯선 감도 있던 지라, 유이는 재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설화가 입가에 손을 갖다대며 웃어 보였다.
"잘 부탁해요~."
그리 인사를 마치고 의자에 앉는 설화. 하지만 초면인 사람이 유이뿐만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소개할 사람은 강서라. 설화와 동갑인 수능 준비 중인 여고생이었다.
"이번에 소개할 사람은 강서라. 내가 전에 얘기했던 적 있지? 나 다음으로 선천적인 막장력을 가진 놈이야."
"헐! 온니찡 너무너무하다가 너무하게 될 말씀이시네여! 어떻게 그리 끔찍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지여? 나님이 온니찡보다 막장력이 낮다니요!"
"사스가 강서라. 그런 식으로 태클을 걸 줄은 누가 알겠냐."
"후훗~."
설화가 옆에서 다시금 미소를 짓고는 서라에게 손을 내민다. 설화와 서라는 옆자리였다.
"잘 부탁드려요 서라 님~. 저랑 동갑이죠?"
"하, 하잇!"
"그럼… 저랑 친구가 되는 셈이네요?"
"!!!!"
그 말에 악수를 내미는 서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심지어 악수를 건네는 설화의 손을 내려다보는 서라의 눈빛이 긴장감과 부자연스러움으로 가득이었다. 이윽고 혼잣말처럼 불안 증세를 보이며 중얼거리는 서라였다.
"365일 동안 은따 아닌 은따 신세를 지내던 나님에게 드디어 친구가 생기는 건가여… 예뻐서 무시 받던 인생은 더 이상 저리가라가 되는 건가여… 그동안 어린아이 시청 관람 불가 애니만 보면서 친구들을 키워나갔는데… 크흐! 내 생에 이런 축복스런 날이 오다닝…!"
"재밌는 분이시네요~."
울먹임을 토해내면서 눈을 소매로 가리는 서라의 모습에 설화가 다시 입가에 손을 대고 웃어 보인다. 하지만 서라는 진심이었다! 그녀에겐 이래봬도 친구가 없었으니까! 남자에겐 인기가 많지만 동성에겐 공공의 적으로 손꼽히는 강서라! 그런 그녀에게 친구가 생기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적인 일이었다.
"하하…."
구석진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예나가 어색하게 웃음을 띄우는 가운데, 팔짱을 끼고 계속 뚱한 표정으로 있던 은별이 운을 띄었다.
"이제 발표 좀 하지 그래?"
"크흠! 자, 그럼 은별 마님 말대로 발표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은별이의 말을 시작점으로, 민국은 휴대폰을 꺼내들어 파뿌리 TV에 접속했다. 그리고 자신의 방송 홈페이지에 들어간 다음에 인기 투표 게시글이 적힌 글을 클릭하고 눈을 돌렸다. 휴대폰의 액정을 잠시 끈 뒤 천장 높이 들어보이며 소리치는 서민국.
"이 휴대폰 안에! 여러분의 인기 투표 순위가 적혀 있습니다!"
"와아…."
"오오옷!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가버릴 거 같음여!"
"후후~ 재미있네요~."
"……."
"잠깐. 인기 투표 순위는 누가 발표할 건데?"
제각기 반응이 다르다. 예나는 어색하게 '와아'하고 웃을 뿐이고, 서라는 흥분한 표정으로 '오오옷!'하고 열기에 장단을 맞춘다.
설화는 입을 가리고 재미난 듯 웃어 보이며, 유이는 그저 가만히 분위기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이다. 인기 투표의 순위 발표를 어떻게 할 것인지 그 구조를 추궁하는 사람은 강은별 한 명이었다.
민국이 천장 높이 들었던 휴대전화를 내려 보이며 말했다.
"훗. 방법은 간단하지. 일단 나는 파뿌리 계에서 워낙 출중한 인기를 얻고 있는 사람이니 솔직히 꼴찌를 하긴 어려울 거야 후후후후."
"…처음으로 들어맞는 논리를 들은 거 같은데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어지네."
"그러게여 은별 언니찡. 은별 언니찡 가슴 만지고 싶어지게 하네여."
"……."
가슴 오르가즘 사건이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발언이었다. 은별이 은근슬쩍 서라를 노려보자, 서라는 '헤헤'하면서 웃음을 보일 따름이다. 이윽고 민국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마 꼴찌 가능성이 가장 높은 건 미안하지만 설화겠지. 하지만 설화는 어디까지나 참가하는 것에 이의를 둔 것이고, 방송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꼴찌를 해도 벌칙 같은 건 삼가할 테니 안심해 설화야."
"그래요~ 저는 민국 님만 곁에 있어주시면 되어요~."
"잠깐…. 애인은 나거든? 애인처럼 굴지 말아줄래?"
"애인보다 특별한 사이가 될 거니까 그렇게 굴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자자! 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잠시 멈추시고."
당당하게 가슴을 피면서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서민국. 노려보는 은별이었지만 별 수 있으랴. 민국은 설화에게 발표가 담긴 휴대폰을 건넸다.
"설화 네가 발표해줄래? 어차피 그게 나을 거 같으니까."
"민국 님의 휴대전화를 만질 수 있다니~ 몹시 흥분되어요~."
그리고 민국의 휴대전화를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화였다. 반대로 민국은 설화가 앉았던 의자에 대신해서 앉았다. 졸지에 다섯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설화가 '후훗'하고 미소 짓더니 휴대폰의 액정을 켰다.
"그럼~ 발표하면 되나요?"
"그래. 2위부터 발표하고 그 뒤에 3위, 그리고 4위, 마지막에 1등 발표해주면 돼 설화야. 그럼 꼴등은 자동으로 선정되니까."
"알겠사와요~."
그리고 휴대폰을 내려다보는 설화. 그 순간 이 거실에 알 수 없는 무거운 긴장감이 몰아닥쳤다. …그렇다. 아무리 재미삼은 컨텐츠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얼마나의 사랑을 받고 있느냐가 결정되는 투표였다. 은근히 1등을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후우, 하지만 큰일이군. 내가 1등을 하는 건 기정사실이고, 꼴찌하는 사람은 어마무지한 상처를 받을 텐데.'
확신을 하고 꼴찌를 걱정하는 서민국이었다. 꼴찌로서 가장 유력한 상대는 예나와 유이였다. 특히 예나 같은 경우는 거의 비제이로서의 활약을 보인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괜히 마음에 걸리는 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꼴찌한 사람에겐 따뜻한 포옹 한 번이라도 해줘야겠어. 후후후.'
다리를 꼬고 폼나게 대기하는 서민국. 이윽고 모두가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휴대폰을 내려다본 설화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떴다.
"어머나?"
"……."
"민국 님~ 2등부터 발표하는 거죠?"
"그래 설화야."
고개를 끄덕이자 설화가 다시 한 번 놀란 듯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저네요~."
"……."
"고마워요~ 여러분~."
어디 있는지 모를 시청자들을 향해 말하듯 인사하는 설화였다. 민국이 '정말? 잠깐만. 2등한 부분만 보여줘.'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윽고 설화가 '여기요~.'하면서 휴대전화를 보여준다.
"헐, 진짜네."
"그렇죠~?"
개반전이었다. 파뿌리 TV에서 방송을 한 적도 없고, 고작 인기 투표 컨텐츠에서 짧은 시간 나왔을 뿐인데 이토록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버리다니…!
"…빨리 3등이나 불러."
이미 설화가 2등을 한 시점부터 뭔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다음 3등을 요구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이 다시 의자에 가서 앉은 실정에서, 설화가 웃음 짓고 말했다.
"은별 님이에요~."
"…뭐?"
잠시 놀란 듯, 하지만 은근 기쁜 듯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설화에게로 향하는 은별이었다.
"어디 봐봐…."
"여기예요 여기~. 3등~."
"……."
이윽고 설화의 휴대폰으로 자신이 3등임을 확인한 은별. 의자로 돌아간 은별은 일제히 나머지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는 가운데, 은근슬쩍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했다.
"아자…!"
"……."
자, 이제 벌써 4등이다. 과연 누가 4등이 될까?
"4등은~ 예나 님이요~."
이윽고 발표된 4등! 놀라운 일이었다! 방송 출현 빈도가 적은 예나가 4등이라니! 하지만 설화가 2등을 한 순간부터 이미 그 정도 일은 예견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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