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325화 (325/369)

325화

<누구에게나 고민은 있다>

"으으…."

"많이 아파?"

"몰라… 말 걸지마."

"아닛? 네가 걱정이 되어 찾아온 것인데 말을 걸지 못하면 무슨 말을 할꼬. 위로와 격려를 위해…."

"나가."

퍽!

"죄송합니다. 가만히 입 다물고 있겠습니다."

새학년이 시작되는 날, 새벽. 민국은 어제 돌연 끙끙 앓던 은별의 모습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불덩이 같은 이마에 물 적신 손수건을 대고 있는 은별을 보게 되었다.

"너무 공부 많이 해서 아픈 거 아니야?"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공부도 있고."

은별은 대충 웅얼거렸다. 새학년을 앞에 두고 욕심을 내서 공부를 했다 보니까 몸이 크게 상한 것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떤 이기적인 남자 때문에 홧병이 나서 생긴 영향도 상당하리라. 민국은 찔리는 감각에 어설프게 미소 짓다가 허겁지겁 움직였다.

"손수건 물 다 빠졌네. 내가 다시 빨아서 가져올게."

"됐어…."

"아니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작은 구멍을 이용해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가는 서민국. 혼자 남은 은별은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그의 뒤태를 바라보다가 다시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친 숨소리…. 어지간히도 몸을 무리하면서까지 노동을 했던 그녀인지라, 솔직히 지금까지 용케도 잘 버텨온 게 대단할 따름이었다.

'아침에 학교 가야 하는데….'

오늘은 새학년이 시작되는 날. 봄방학을 끝내고 대학교에 간만에 향하여 동기들을 만나는 날이었다. 은별도 2학년으로서 첫 날부터 결석을 하는 일은 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을 감지하니… 이거 여러모로 기분이 싱숭생숭해진다.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할까.

"읏차."

이윽고 민국이 다시 구멍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온 뒤에, 이마에 대고 있던 은별의 수건을 빼고 자신이 적신 수건을 갖다대주었다. 은별은 다시 이마의 뜨거운 열이 확 식는 기분이 들자, 정신이 조금은 번쩍 들면서 흐리멍텅한 눈빛으로 민국을 바라보았다.

"빨리 자러 가…."

"네가 이런데 어떻게 자겠냐. 잠시 동안 있다가 갈게."

"무슨… 빨리 자러…."

"쉿. 조용하시오 은별 낭자. 주무시는 가족들 깨겠소."

어차피 가족들은 1층 방에서 자고 있을 텐데, 소리를 지르지 않는 이상 깨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검지를 갖다대고 어떻게든 곁에 있으려고 피력을 하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그냥 포기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정말….'

어쩌다 이런 놈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다시 의문이 들 따름이다. 어쨌든 은별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줘서인지는 몰라도 다시금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면서 잠을 청했다. 새근새근 잠에 든 은별의 곁에서 민국은 두 시간 동안 수건을 교체해주면서 돌보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정확히는 아침이 된 뒤였다. 은별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구멍을 통해 은별의 상태를 확인하러 왔던 민국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오, 많이 괜찮아졌나 보네?"

"…그래."

덕분에 말이다. 요 몇 시간 동안 정말 잠을 제대로 잤는지, 기적처럼 감기 기운이 싹 날아갔다. 하지만 아직 여러모로 주의를 해야 할 테니 최대한 조심하자고 생각하는 은별이었다.

"아버지 차 있는데 내가 데려다줄까?"

"됐어. 그냥 전철 타고 갈게."

"엇흠, 그냥 내가 말하는대로 하시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그럴 거면 왜 물은 거람. 하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얼굴이었기에 은별은 하는 수 없이 민국의 바램대로 하기로 했다. 우선 가족들에게 바깥으로 나가는 척 연기를 한 다음에,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와 민국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민국의 집 앞에 세워져 있는 아버지 차에 탑승한다.

"설화… 그 여자는?"

"아직 자고 있어. 그 애는 아직 이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게임 속의 존재였던 그녀. 그런 그녀가 현실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실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허나 은별이 걱정하는 것은 민국과 동거하듯 같은 방에 있을 그녀. 심지어 설화가 갖는 호감부터 행동 반경은 이미 친구고 뭐고 애인으로 대하는 듯한 것이었다.

"…설마 계속 같이 지낼 거 아니지?"

"크흠, 같이 지낸다 해도 생활할 집을 따로 구해야겠지."

막상 데리고 오니 이래저래 고민할 거리가 많은 건 어쩔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민국이 설화를 책임지는 일을 맡은 셈이었다. 은별은 차에 탑승하여 운전대를 잡는 민국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것저것 책임지는 성격도 문제야."

"훗, 대신 나는 책임은 확실히 지잖아? 내 곁에 있는 여자 모두!"

"자랑이세요?"

민국을 노려보던 은별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한창 차를 타고 이동하여 대학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먼저 은별이의 대학교 앞에 당도한 민국이 그녀를 내리게 하며 말했다.

"그럼 잘 갔다 오고. 이따 끝나면 연락하시오. 내가 다시 오겠소."

"됐어. 그냥 먼저 들어가. 전철 타고 갈 테니까."

"크흠! 츤츤대면서 나의 피로를 걱정하는 츤고딩의 마음씨야 백번 이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연락해. 곧장 와줄 테니까."

"안 되겠어, 이 녀석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볍게 말을 내뱉던 은별. 하지만 열 때문에 더 걱정하는 듯한 눈빛에 은별은 어쩔 수 없이 끝나는대로 연락하겠다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나도 출발해볼까."

이윽고 은별이 무사히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민국은 자기 학교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도착한 자기 학교 앞에서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섹시하고 잘 생긴 서민국. 그것이 나다.'

본래 성격을 숨기고 대학 생활을 하는 서민국으로선, 대학교 안에 발을 디딛는 순간 철저한 가면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이었다.

"좋아, 이번 학기도 잘 해보는 거다 서민국. 크흠!"

마음을 가다듬은 민국은 이내 차안에서 나왔다. 그러자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던 여학생 무리가 웅성웅성거리면서 민국을 쳐다본다. 필시 민국의 젠틀한 분위기와 잘 생긴 얼굴 때문이겠지. 민국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다시금 가짜 가면을 착용하고 학교 생활에 임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이 그가 이 학교를 즐기는 사회 방식이었으니까.

*

"으으! 세종세종 세종대왕!"

한 편, 같은 시각. 강서라도 막 집에서 준비를 하고 고등학교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역시 방학 동안 즐거운 휴식을 했기 때문인지, 고등학교에 다시 가서 여덟시간 가까이를 보내야 한다는 게 지겹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수능 봐야 할 나이네여. 벌써 나님의 나이가 열 아홉살이라니. …앗! 19세?! 어맛 개 야함!"

민국과 마찬가지로 서라도 혼자서 노는 것을 곧잘 잘하는 아이였다. 아니, 어쩌면 혼자 노는 ENA의 천부적인 재능에서 서라를 따라올 사람은 없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우수한(?) 서라는 화장실에서 칫솔질을 하면서 호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화장실에서 나온 서라가 주변을 둘러본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오늘도 일 때문에 일찍 나가신 모양이었고, 오늘 역시도 혼자서 아침을 맞이하는 서라였다.

[아침 먹고 가렴 - 엄마]

테이블에는 어머니가 서라가 일어날 것을 감안해서 요리해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동시에 포스트잇으로 그렇게 적힌 글자를 발견한 서라는 의자에 곧장 앉았다. 밥을 먹을 때는 그래도 조용해지는 그녀였기에, 우물우물 밥알갱이나 씹어먹으면서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오늘부턴 그럼 가서 열공을 해야 하는 건가여? 근데 생각해보면 지는 별로 취업하고 싶은 맘은 없는데여.'

애초에 서라 같은 타입이 공무원이나 회사를 다닐 일은 없다. 물론, 외모적인 부분만 감안하면 어디를 취업하든 면접도 거의 합격일 테고 남자들에게 인기도 만점일 터였다. 하지만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는 곧 여자들의 공공의 적. 그래서 서라는 이미 학교에서도 현실 사회를 반영하듯 여자들에게는 적으로서 뒷담이 까이는 실정이었다.

비록 이전에 서민국의 도움 한 번으로 조금은 상황이 바뀐 듯했지만.

'의잉… 지는 뭘 해야 할까여.'

이젠 서라도 꿈을 생각할 나이다. 다 이 나이 또래가 된다고 꿈을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라는 왠지 또래 애들보다 일찍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에게도 고민이 생긴 것이었다.

"음… 밥풀을 보니까 갑자기 밥이 생각나네여. 근데 밥은 지 앞에 있지여? 어맛! 음탕한 밥풀님! 가만두지 않고 범해버리겠서여!"

*

"예쁜 처자네. 이거라도 한 번 보고 가."

"……."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유이였다. 거의 일 이년을 배달 음식으로 때웠던 유이는, 냉장고를 보며 지긋지긋하게 잔소리를 했던 민국의 말이 떠올라 정말 오랜만에 마트에 오게 되었다. 동시에 무수히 왔다리 갔다리 하는 사람들의 행각을 보면서 조금씩은 움찔움찔거렸다.

"……."

그래도 확실히 이전보단 괜찮아졌다는 생각이 드는 게 뭐냐면, 예전에는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리거나 혹은 회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부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을 피해 좁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안 되면 곧장 집으로 향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정도로 대인기피증을 비롯해 사람들을 미워하고 싫어했던 그녀. 그런 그녀가 그나마 이렇게 양호해진 상태를 갖게 될 수 있었던 건, 역시 부정하고 싶어도 서민국의 도움 때문일 것이다.

"……."

만일 그가 돕지 않았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강철남으로 인해 더 패닉에 빠졌을테고 더 사람을 못 믿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믿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실은 알고 있다. 본능적으로, 유이 그녀는….

'사람을, 믿고 싶어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을 가는 길이었다. 오래간만에 조금은 집과 먼 길을 택하여 걸음을 옮기던 유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그녀의 눈이 처음으로 커다랗게 변하였다. 동시에 홱하고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유이였다.

"……."

방금 전 자신의 근처를 비껴 지나간 인영의 모습을 확인하는 유이. 그 인영은 남자로서 옆에 있는 다른 여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반쯤 그 여자에게로 향해 있는 얼굴의 옆모습을 보니… 아니, 아니구나…. 다행히 자신의 오해였음을 자각하고 유이는 다시 앞으로 몸을 돌렸다. 터벅 터벅… 천천히 집으로 돌아갈 따름이었다.

*

"민국 니임~ 학교 가신 건가요오?"

민국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던 설화는, 조금 늦게 일어나서 거실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눈을 비비면서 주변을 훑어보며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호명해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치잉~ 가셨나 보네요."

아무런 말도 없이 갔다는 것에 조금은 섭섭했지만, 그래도 그것조차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설화는 벽면의 시계를 보면서 민국이 언제쯤 돌아올까 생각을 하였다.

"돌아오는대로 안마해드려야겠어요~."

전에는 자신이 받았으니, 이번엔 보답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윽고 설화는 다시 민국의 안방으로 돌아갔다. 창문을 열고, 따사로운 봄 햇살과 함께 드리운 평화로운 세계의 모습에 설화는 한창동안 바깥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답네요~. 이런 게 진짜 세계군요~."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설화. 문득, 이상한 느낌에 발치를 내려다 본 그녀였다.

"개미네요?"

그러자 개미 한 마리가 민국의 방안에서 꿈틀꿈틀거리면서 기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향하는가 보니, 민국의 침대 쪽이었다.

"이 개미도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네요~."

마치 가짜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민국을 살리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 같아, 동질감이 들었다. 그래서 웃음을 짓는 설화였지만.

"그래도."

순간, 투명한 무엇인가가 그 개미의 몸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작디 작은 개미는 힘도 쓰지 못하고 순식간에 짓눌려서 터지고 말았다.

"민국 님의 방에 손을 갖다대는 건 옳지 못해요~."

웃음 짓고 말하는 설화. 그리고는 창문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는 설화의 눈가가 평화롭게 그려지고 있었다.

"……."

============================ 작품 후기 ============================

준비된 에피소드가 많다는 걸 알리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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