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그렇게 모든 것이 결말을 맞이했다.
설화는 생물이라는 권리를 갖게 되었고, 또한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새로운 세상에서, 이젠 보다 평화로운 안식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가상 세계의 서민국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애초에 그 세계는 엄연한 가짜였으며, 그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역시 꼭두각시 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이성으론 자기 뜻과 의도대로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모든 것이 다 가장된 거짓. 가짜 서민국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 설화를 가짜 세계에 남겨둘 자신이 없었다. 정말로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한 행위였다.
그것이 비록 비극의 결말을 낳는다 해도, 그는 그것만으로 족했던 것이다.
"열.불.난.다."
"열불 식히게 손수건 물 적셔서 갔다 줄까?"
"아니, 더 열불나서 너까지 불나게 하고 싶어."
이곳은 은별이의 방. 흑설 공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설화의 세계에 갔다 온 민국은, 졸지에 은별이가 예상 못했던 일까지 해내고 돌아오고 말았다. 설마 설마 했는데… 여자를 끌어 들이는 그 마성의 마력이 2D 캐릭터에게도 영향을 끼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헤헤, 왜 그러십니까 은별느님. 우리 알콩달콩하게 지낸 추억이 몇 년인데 열불내서 뭐하겠습니까. 다 무의미하지요."
"몇 년이란 말에 태클을 걸 생각도 안 드네. 그래, 너도 잘못한 거 알고 있으니까 나도 한 가지 제안할게."
침대에 앉아 은별은 씨익 미소 지었다. 민국은 은별에게 무릎을 꿇은 상태로 비굴하게 두 손을 박박 빌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의 다음 말을 듣고는 그 손짓을 멈추게 된다.
"몇 대 맞을래?"
"크흠…! 너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내 마음에 늘 몇 백대씩 때리고 있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0대!"
"양심도 없지! 존나 쳐맞어!"
곧장 베개를 들고 민국에게 뛰어가서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은별이었다. 퍽! 퍽! 분명히 솜으로 된 베개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윙에서 이는 분노와 격함이 장난이 아니다. 민국은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얼굴에 휘두르는 그 강한 공격에 혀를 내두르면서 소리쳤다.
"으, 은별아! 잘 생긴 네 남자 친구 얼굴이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
"좀 못 생기게 만들어서 여자들 못 꼬이게 만들어야겠네! 아주 좋은 아이디어인 걸?!"
그리고는 수상한 미소를 씨익 지으면서 은별이 베개로 마구잡이로 민국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한다. 어찌 때리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위력도 배로 강해짐에 민국이 '으아악'하면서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나 죽어! 정기 빨려서 나 죽는다!"
"빨리다 못해 없어지게 만들어줄게!"
"으아악!"
그렇게 민국은 고된 고문을 받게 되었으며, 은별은 반대로 참고 있던 화병을 토해내며 민국을 마구 구타했다.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를 이렇게 구타하면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보통 욕을 먹어야 당연할 지언데, 필시 객관적으로 사정을 다 아는 사람들이 이 상황을 지켜본다고 할 때 손가락질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맞을 짓은 하긴 했으니.
"자, 이제 가봐."
"크흑흑. 은별이에게 이토록 정복 당하다니. 실로 오래간만의 쾌락이야."
"…정신 못 차렸네. 10분 더 때려주겠어."
퍽퍽!
"으아아악!"
그리하여 은별의 방에서 예나의 방으로 넘어가게 된 민국이었다. 어째서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나의 방에 왔냐 하면, 예나의 기분도 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웃차'하고 예나의 방으로 들어가는 구멍 안을 기어 들어온 민국이 말했다.
"예나야."
"아……."
예나는 마침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큰 소식을 들었다 한들, 그래도 대학교 새 학기를 앞둔 상태에서 공부를 멈출 수는 없던 것이다. 하지만 민국이 자신을 호명하는 목소리를 들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그만 움찔하며 쥐고 있던 샤프의 샤프심이 빠득하고 부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본 민국이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굳어버리고는 지켜보았다.
"으, 으응… 민국아…."
"……."
"왔어…?"
"어, 그, 그래 예나야. 고, 고운 손이 참 예쁘구나."
애써 미소 지으며 이쪽을 돌아보는 예나의 행동에 민국이 어설프게 웃음 지으며 예나의 방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의자에 앉아 이쪽을 돌아보고 웃는 예나를 뒤로하고, 민국은 '휴우'하고 엉망이 된 옷깃을 정리했다. 그걸 지켜보던 예나가 물었다.
"은별… 씨는…?"
"으음… 많이 맞았지."
"그래…?"
"응. 살다 살다 이렇게 맞은 적은 처음일 정도로."
그래도 베개로 때려줘서 다행이지, 맨 손으로 때렸으면 아무리 여자라 하더라도 은별이가 담아둔 홧병이 있어서 작살나게 죽어나갔을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나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그래…."
"……."
"……."
왠지 말이 없다. 온통 침묵 뿐이다. 결국 그 침묵 속에서 무언의 자괴감을 참지 못하고 민국이 후다닥 달려왔다. 그리고는 절을 하듯 엎드려 빌면서 소리친다.
"으아악 예나야 잘못 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그런 표정 짓지 말아줘!"
"…민국아. 그러지 않아도 돼."
"마치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지 말아줘! 나도 이번엔 정말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정말 내가 원해서 한 게 아니라고!"
아니, 가만 생각해보면 자신이 원해서 한 게 맞긴 하다. 가짜 서민국도 '나'에 속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짜 '나'에 속하는 서민국은 그냥 설화를 죽지 않게끔 스토리를 조정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라는 게 예쁜 여자만 보면 왠지 자신의 곁에 두고 싶고 막 그러잖아. 여자 친구가 김태희라고 해도 주변에 예쁜 여자가 있으면 욕심이 드는 것처럼! 아니, 내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단 뜻은 아니지만 그냥 남자의 본능이란 게 원래 그것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응. 괜찮아 민국아."
어쩔 줄 몰라하면서 이리저리 제정신이 아닌 소리나 지껄이던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을 토닥이듯 어깨에 손을 갖다대면서 예나가 웃음 지었다. 여전히 의자에 앉은 채로 일어날 생각을 않는 예나를 절하는 자세로 올려다보던 민국이 물었다.
"저, 정말…?"
"응… 정말 괜찮아."
부우우웅! 마침 예나의 방에 있는 창문 너머에서는 경쾌한 승용차 소리가 들려온다. 오가는 승용차들의 시끄러운 소음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린 예나. 잠시나마 그녀의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표정이 민국에게도 보였다.
"포기했거든… 이미…."
"……."
"……."
"…으아아! 정말 미안해 예나야!"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괜찮아."
'내가 괜찮지가 않아!'
때때로 더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는가? 사람과 사람이 싸울 때 서로 분노를 해서 터트리면 그래도 감정의 웅어리가 풀리기라도 한다. 하지만 그에 반대로 사람과 사람이 싸울 때 한 사람이 맞닥뜨리지 않고 실망을 하면서 지쳐하기 시작하면… 그 감정의 웅어리는 먼 훗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만다. 어쩌면 예나는 차후 또다시 흑화 소주의 힘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폭발시킬 지도 모르는…!
"정말 미안해 예나야아아아아!"
이래저래 고생하는 민국이었다.
하기사 가짜 서민국의 바램을 들어준거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선택지를 선택할 수 있는 건 진짜 서민국의 권한이었다. 단순히 가짜 서민국이 원해서 이루어준 것이라 해도, 그 바램을 이루어준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 이것도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지.'
자고로 남자란 책임을 질 여자가 더 많아지면 강단이 생긴다고 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민국은 드디어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거실에서 안방 쪽을 돌아보자, 굳게 닫혀 있는 안방문이 보였다.
"……."
그쪽으로 걸어간 민국은 잠시 마음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천천히 안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어당겼다. 그러자….
"설화야."
그녀를 부르는 민국. 그녀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 지 너무나도 잘 이해가 되고 있었기에, 민국은 괜히 그녀의 중요한 사실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안방 문을 열어젖혔을 때 드러난 설화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었다.
"민국 니임~."
"응."
"오셨사와요? 괜찮으신 가요오?"
민국이 당도하자마자 곧장 그에게로 달려드는 설화. 하지만 껴안기기 보단, 민국의 볼을 부드러운 손으로 만지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묻는다. 민국은 그런 설화의 눈을 바라보았다.
말은 안하지만, 설화의 눈밑은 퉁퉁 부어 있었다. 필시 민국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민국은 그 부분에 대해선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괜찮았어. 좀 욕 먹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그러시와요~?"
설화는 호호 미소 지으면서 다시 여유로운 척을 한다. 하지만 실제 그녀의 얼굴은 그게 아니다. 그저 숨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슬픔을, 행복한 척함으로서.
"그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땡기는 거 있으면 아무거나 하나 사줄게."
"배려 있는 민국 님이셔라~. 그럼 민국 님이 추천하는 음식 그 어떤 것이든 먹기로 할게요~."
"그래."
웃음 짓는 설화를 따라 똑같이 미소 짓는 민국이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설화는 슬픔 속에 잠겨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슬픔은 현실의 민국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현실의 민국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그 세계의 민국은 나와 다르니까.'
겉모습이 아무리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고, 결정 짓는 대처도 똑같다 한들, 결과적으로 그와 자신은 다르다. 그래서 설화의 진심을 현실의 민국이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그것은 현재 설화의 알게 모르게 쳐져 있는 투명한 벽을 통해서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설화가 계속 슬퍼하지는 않도록 만들 수 있겠지.'
현실의 민국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이리라. 그래서 그는 설화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루트 1 게임이 들어 있는 usb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흑설 공주가 있을 방문으로 서서히 발을 내딛을 따름이었다.
*
'가짜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족했어요.'
'당신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화장실에서 세수를 하며 설화는 몇 번이고 그 생각을 되풀이했다.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게 가짜이든 진실이든 상관없었는데,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
이윽고 세수를 마친 설화가 방문을 나왔다. 그리고는 싱긋, 언제나 거짓말처럼 짓던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는 거짓말이다. 그저 행복한 척, 아무런 일이 없던 척하기 위함이겠지.
"민국 니임~."
"아, 설화야."
그리고는 진짜 그가 아닌 그를 향해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짓는다. 서로 공유한 추억이 고작 열흘밖에 안 되는 그를 향해. 사랑스럽다는 듯.
"뭐하세요 민국 님~?"
"응. 다름이 아니라."
안방에서 컴퓨터를 두들기는 민국을 보고는 스리슬쩍 다가와 묻는 설화였다. 민국은 컴퓨터로 시선을 옮기더니 말했다.
"한 번 볼래 설화야?"
"네에~."
그리고 민국이 가리킨 컴퓨터 화면을 본 순간이었다. 설화는 언제 웃음을 지었냐는 듯 그대로 굳은 표정으로 당면을 보게 되었다. 그곳에는, 그 게임 속에는, 설화가 그토록 맹신적으로 사랑하던 남자가 2D 캐릭터로 변모한 모습이었다.
"네가 사랑하던 서민국."
"……."
"그 녀석이야."
안다. 하지만 이 진실을 왜 알려주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엔."
그리고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인지, 서민국은 천천히 가리키던 손가락을 내렸다.
"그 녀석의 여자 친구."
"……."
"본래라면 가짜 서민국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역시 그런 건 너도 원하지 않고, 나도 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또다시 흑설 공주에게 부탁했다.
"적어도 녀석이 행복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다시 짜봤어."
유이에게 부탁하여 만들어진 스토리는 아니다. 흑설 공주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어디까지나 감정과 생존 가치가 없는 2D 캐릭터에게 부여된 해피 엔딩이었다. 그러나 그 2D 캐릭터 서민국은 새롭게 짜집어진 그 스토리의 결말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비록 그녀와 이어지진 못했지만]
[난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
그것이 가짜 서민국의 진심인지 아닌 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설화는 그것을 보는 순간 뭉클한 감정이 드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녀석도 행복할 거야."
"……."
"그러니까 너도 마음 편히 가져."
이것이 진짜 서민국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더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배려는 없었다. 하지만, 설화는 왠지 그것만으로도 텁텁했던 감정이 점차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렇다. 돌이켜보면, 진짜고 가짜고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설화를 배려하는 이 행동에, 반했던 것이니까. 과거의 그에게.
"민국 님~."
"응?"
"역시 민국 님은."
흘러 나오는 눈물 한 방울을 검지 손가락으로 스윽 치우면서 설화는 말했다.
"어딜 가든 민국 님이네요~."
슬프지만 기쁘단 미소를 짓는 설화를 향해, 민국도 그제야 가짜가 아닌 진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