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화
세상은 몬스터들이 도래하는 시대. 정부와 달의 선택을 받아 각성된 능력자들은 그런 몬스터들과의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시대였다. 그리고 그 시대에 설화는 다시금 눈을 뜨게 되었다.
"……."
그녀가 있는 곳은 민국의 집. 하지만 열흘 동안 지내왔던 그 집은 아니었다.
"기억하게 되는군요~."
설마 현실 세계의 기억이 가상 세계에서까지 숙지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졸지에 이곳이 서민국이란 현실 세계의 남자가 만들어낸 가짜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된 설화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설화에겐 이쪽의 세계야 말로 자신의 고향이며 진짜 세계인 건 분명했다.
게임의 설정으로 제작된 이 세상의 기억들이 비롯 어디까지나 설정집에서 우러나온 기억들이라 한들, 그녀에겐 전부 추억에 가까운 소중한 것들이었다.
"준비해야겠어요."
설화는 집을 나갈 준비를 하였다. 가상 세계의 민국은 지금 대학교에 있는 참이었고, 이때 그 남자 몰래 이별을 고하고 집을 빠져나가는 게 서로에게 좋은 득이었다. 비록 게임의 기본 루트와는 다르게 진행된다 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결말은 똑같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가 죽음으로서 민국 님이 살 수 있는 루트라는 건 변함 없으니까요~.'
설화의 죽음을 본 민국이 각성을 하고 몬스터 붐을 막는데 큰 역할을 한다. 즉, 이 게임의 가장 중요한 스위치는 설화의 죽음이란 뜻이다. 때문에 설화는 크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한 사람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그 누구보다도 큰 그녀였으니까.
그리고 2개월이 흘렀다.
어디까지나 게임 세계의 시간이었지만 그녀에겐 진짜와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금 같은 시간 동안 설화는 정부에 능력자로서의 등록을 완료하고 파트너들과 힘찬 사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50m까지 투명한 손을 무수히 꺼낼 수 있는 그녀는 몬스터들을 주로 붙잡거나 못 움직이게 하는 역할에 많이 사용되었다.
물론 커다랗고 힘이 드센 몬스터들의 경우에는 저지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나, 그래도 결코 비중이 적은 편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민국 님.'
가상 세계의 민국은 2개월간 설화를 만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설화는 끝까지 그와의 재회를 거부했다. 그렇게 해야만 차후 몬스터 붐에서 민국의 스위치가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후후, 하지만 조금은 이상하네요.'
설화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말은 자기 뜻대로, 루트를 조금씩 변경해가면서 진행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뜻이, 모두 게임의 기본 루트에 맞춰서 진행된단 생각이 들었다.
그냥 민국과 함께 해외로 도망을 가거나 다른 능력자들의 지원을 부탁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강한 강박관념이 그녀를 압박했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에 그녀는 운명의 고리에 완전히 얽혀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게 설정이라도 제가 민국 님을 좋아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요. 그러니까요.'
자신이 언제 죽는지를 알면 더 무섭게 되는 법이다. 그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이 아무리 멀고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충분하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민국 님을 지켜드릴게요~.'
그리고 몬스터 붐이 일어났다. 난이도 제9단계에 속하는 가장 큰 재앙. 하필이면 그 재앙이 일어난 곳은 한국의 해운대 지역으로, 해운대 앞바다에서 파도처럼 물 밀듯이 침략해오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정부는 처음에는 안일하게 생각했으나,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준이 아님에 지원을 해주기 시작했다. 한국을 침략한 몬스터 붐은 아시아 전 지역에 위협을 가할 만큼 위력적이었던 지라, 초반에 확실히 방어를 하는 게 중요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건! 앞으로 살아남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숭고한 희생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다!"
리더에 속하는 사람들이 파트너들에게 기세를 복돋아주기 위해 그렇게 외쳐대기 시작했고, 설화는 웃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에겐 가족이랄 것이 없었다. 애초부터 가족이 없는 고아로서 캐릭터 설정이 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지킬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는 기뻤다.
만일 그런 게 없었더라면 현실 세계의 민국을 조금은 원망하지 않았을까?
- 크아아아아아아아악!
- 크오오오오오오오오!
"옵니다!"
"모두 대기해! 군대 쪽도 무전기로 연락 바라고!"
군대도 파견되어 지원을 해주었고, 탱크부터 온갖 전투기까지 준비되었다. 그와 더불어 능력자들도 몸을 숨기고 언제든지 싸울 준비를 하며 지평선 너머에서 달려오는 무리를 보았다.
쿵! 쿵! 지금껏 상대했던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굉장히 크고 흉포하고, 매서운 녀석들이었다. 이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그들의 발 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땅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민국 님.'
설화는 눈을 감고 잠시 지난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게임 세계의 민국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열흘 간의 현실 세계 민국의 기억을 돌이켰다. 죽음을 앞둔 그녀였지만 그래도 그 순간을 기억하는 찰나에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었다.
'역시 저는 민국 님이 좋네요~.'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화였다. 설화가 일어나는 타이밍이 맞았는지, 리더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발사!"
"싸워!"
"능력자들! 나를 따라 움직인다!"
쿠웅! 콰앙! 형언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굉음들이 일파만파 도시를 감싸 안았고, 몬스터들의 강렬한 포효 소리와 함께 능력자들의 능력이 발동되었다. 죽기 위해 싸우는 능력자들과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몬스터들. 푸른 달은 이미 붉은 달로 물들어 어둠을 강렬하게 비추고 있었다.
"잘 해나가고 있다!"
"좀만 더 버텨! 곧 지원 올 테니까!"
장시간의 싸움이었다. 의외로 한 치의 문제도 없이 침략해오는 몬스터들을 무수히 쓰러뜨리던 때였다.
"아아아악!"
"팔이…! 내 팔이!"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몸을 던져 자폭으로 데미지를 입히는 변종 몬스터가 기습을 해왔고, 군대부터 능력자들 대다수가 그에 생채기를 입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기절부터 실신까지, 힐러에 속하는 능력자들이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재빨리 마나를 발동했으나… 그럴 때마다 일부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방해 공작을 펼쳤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윽고 힐러 한 명이 거대한 몬스터의 방망이에 죽음을 앞둔 찰나였다.
"합!"
설화가 투명한 손을 발동시켜 그 몬스터를 묶는데 성공했고, 설화와 눈이 마주친 힐러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허겁지겁 도망가기 시작했다. 설화는 그런 힐러에게 고개를 까닥여 대답한 후 정면의 몬스터를 보았다.
설화가 묶고 있는 몬스터 너머로 또 다른 흉칙한 몬스터들이 쿵쿵거리면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간신히 몬스터 한 마리를 붙잡고 있던 설화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볍게 자소했다.
'여기까진가 봐요.'
- 크아아아아!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버텼다고 생각했다. 설화는 슬슬 끝맺음을 내려고 했다.
"설화야!"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온 소리와 함께, 설화의 얼굴을 향해 휘두른 방망이가 무언가에 가로막힌다. 카앙! 설화는 자연스레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민국 님…!"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슬픔이 확 솟아올라 눈물을 흘릴 뻔했다. 가까스로 참으며 그를 돌아본 설화.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가 겹쳐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가 현실 세계의 민국인지… 가상 세계의 민국인지 순간 가늠을 못한 것이었다.
'어, 어라….'
- 크르르르….
"괜찮아 설화야?!"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설화가 방망이를 휘두른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에 커다란 방패막이가 허공에서 소환되어 있었다. 이걸 보니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찾아온 사람은 가상 세계의 민국이다.
"…민국 니임~."
하지만 설화는 가상 세계든 현실 세계든 상관없이 오로지 민국과 만났음에 본능적으로 그를 껴안게 되었다. 고자 서민국은 그런 설화의 껴안음에 '서, 설화야?'하고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기쁜 조우는 지속될 일이 없을 듯싶었다.
- 크아아아아!
"…일단 저 녀석들부터 처리하고 얘기하자! 너랑 할 얘기가 많으니까."
"그래요 민국 님~ 민국 님의 소중한 방망이로 따끔하게 혼내주세요~."
"설화 넌 지금 이 상황에도 그런 소리가…."
- 크아아아아!
카앙!
"크으윽!"
하지만 몬스터 붐의 발생으로 쏟아 나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는 지금까지와는 남달랐다.
과연 살아돌아갈 수 있을까? 민국을 보자 돌연 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 설화였다. 헛된 기대인 걸 알면서도 기대하게 되었다.
"지원군이 왔어!"
"이제 살 수 있어! 좀만 더 버텨!"
그때 또 다른 지원군들이 지원을 하러 와 몬스터 붐을 막는데 일조하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될 만큼, 순조롭게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이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설화는 기쁜 마음이 서서히 생겨 나는 걸 바꿀 수 없었다.
"살아 돌아가자! 설화야!"
"……."
"어떻게 해서든… 내가 널 살려줄게!"
민국의 그런 일편단심 같은 마음에 설화는 가벼이 미소 지었다. 그래, 어쩌면…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정해진 운명이라 해도 분명 이 세상에도 기적이란 게 존재할 지 모른다. 그들이 보기에 이곳은 정해진 세계라 할 지라도, 설화에겐 하나뿐인 귀중한 고향이자 진짜 세계….
쿠웅!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지금까지의 위압감과는 차원이 다른 굉음이 울려 퍼졌다. 굉장한 진동에 땅이 너무 심하게 울려 무수한 능력자들이 주저앉을 정도였다. 설화는 민국의 부축으로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정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
하지만 그 순간, 직감했다. 아…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결과적으로 설화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그래야만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이 살고자 하는 욕심을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이 세계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맘을 갖는다 한들, 자신은 도망갈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져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화야…."
옆에 있던 민국이 설화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붉은 비늘의 커다란 드래곤이 하늘을 날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가상 세계의 민국은 설화에게 등을 보이며 말했다.
"내가 지켜줄게."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는 내가 지켜줄 테니까…."
그의 등이 든든해 보인다. 하지만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아무리 서민국이라 해도 이번 만큼은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가상 세계의 민국도 그간 설화를 많이 지켜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에요 민국 님~."
"설화야?"
"저는 이미 민국 님에게 많은 것을 얻었는걸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크아아아아아!
붉은 비늘의 드래곤이 입을 열었고, 거대한 불꽃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도시를 일순간에 화염으로 불태워버릴 만큼 어마무지한 위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이 향한 지점은… 민국과 설화가 있는 곳이었다.
"큿!"
민국이 허공에 방패를 소환하여 막아볼 채비를 갖춘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설화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단 사실을. 이 세상의 사람 중에 가장 확실히. …툭!
"…어?"
"……."
"설화…야…?"
그 순간이었다. 방패를 소환했던 민국이 갑자기 옆으로 기울여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가 돌아본 곳에는… 민국을 옆으로 밀쳐낸 설화가 있었다.
"설화야!!!!!"
"……."
거대한 불꽃이 설화의 몸을 녹이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고, 설화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치는 민국의 얼굴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다. 자신의 인생은.
'살아주세요 민국 님.'
이 세계는 가짜다.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진짜다.
그렇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설화야!!!!!!!!!!!!!"
그렇기 때문에 설화는 민국을 살렸다.
그리고, 뜨거운 불꽃이 자신의 몸을 녹이려는 이 순간을 막연히 방관하였다.
'끝이네요.'
이제 다 끝이다.
'그래도 좋은 시간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아~ 그래도 한 가지 후회되는 점이 있네요~ 민국 님이 아기는 낳아보고 싶었는데~.'
후회하는 점도 있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돌이킬 수 없기에 설화는 포기한다.
이것이 그녀의 인생의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
설화는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보이는 이 어둠이 진짜 죽음인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시끄럽던 몬스터들의 포효와 능력자들의 절규는 들려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조용해진 이 순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몸은 아프지 않았다. 뜨거운 화염의 불길이 설화의 몸을 녹였어야 할 텐데, 일체의 고통조차 느끼지 않았다.
"이것들이 아주 가지가지하는구만."
그리고 그때, 불현듯이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일반 사람이 말을 할 때 나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세상 천지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와도 같았다. 설화는 천천히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도트로 만들어진 새끼들아. 어디서 깽판질이여. 아니, 내가 이런 스토리로 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슈벙 이건 너무하네."
게임을 할 때랑은 차원이 다를 정도의 광경이었다. 거대한 건물의 옥상 끝자락에 서서 코트를 휘날리는 남자가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모두의 시선은 어느 틈엔가 그에게로 향해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쳐다보냐. 헐… 설마 니들 나한테 반했냐? 안 되는데, 나 은별에게 뒤지게 맞을 텐데."
"……."
"애초에 난 수간은 좋아하지 않는다. 고로 몬스터는 저리 가라 휙휙."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믿기지가 않았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일까? 차마 납득할 수가 없었기에 설화도 표정 관리를 차마 하지 못했다.
옆에 밀쳐진 상태로 주저 앉아있던 가상 세계의 민국도 그 빌딩 꼭대기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믿지 못하겠단 얼굴이었다. 이윽고 설화도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려 빌딩 꼭대기를 보았다.
"어쨌든 이 일은 내가 정리하러 왔다! 책임을 갖고 해결하는 건 전반적으로 제작자의 몫이지!"
"……."
"심지어 이건 아직 체험판이니까 내가 꼴리는대로 변경도 가능하다는 뜻! 쓔발, 여긴 이제 내 세계다!"
가상 세계의 고자 민국과는 너무나도 다르게, 대범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면서 소리치는 그 남자는, 설화가 익히 알고 있던 열흘 간의 추억 속 남자였다.
"세계 왕이 등장했도다! 막을 열라!"
서민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