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하루 남짓이었다. 이제 설화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다. 물론 본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서 뭔가 채비를 하거나 정돈을 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이 갑작스레 현실 세계로 현화된 설화였기 때문에. 이제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아앙~.”
“아아.”
우물우물.
“민국 니임~ 어쩜 먹는 것도 고우시와요? 역시 민국 님이에요~.”
“후후, 내가 원래 먹는 것조차도 귀티가 나는 편이지.”
“어머나~ 육식성과 겸손하지 않은 자신감까지 갖추시고, 정말 민국 님과 헤어지는 게 아쉬울 따름이라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날로 설화의 뜻대로 다 이루어주는 날이었다. 은별도 예나도 어차피 그녀가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냥 마음 참고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도 오늘은 그녀가 원하는 데로 해주었는데… 그 결과, 은별과 예나는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이따금씩 구멍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원치 않게 들을 따름이었다.
“민국 님 한 번 더 아~.”
“그래. 아.”
우물우물.
“어쩜 멋지셔라~.”
한 쪽 볼에 손을 대고 너무 멋지다는 듯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는 설화였다. 거의 맹목적인 순결파…. 그 어떠한 것도 단점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다 장점이다.
‘으으으으!’
“아~.”
“아아.”
‘으으으으! 서민구우우욱!’
그리고 은별은 책상에서 교제를 풀이하면서 가끔씩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놈의 연결된 구멍 때문이었다.
신경을 안 쓰자니 둘이 뭔 일이 있을까봐 차마 구멍을 틀어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구멍을 가로막자니 미세하게 들려오는 음란한 소리(?)에 부글부글 화가 끓을 지경이었다. 물론 예나는… 그런 은별보다는 좀 더 신중한 모습으로 책상에서 공부를 할 따름이었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이틀 후면 대학교를 다시 다니게 될 두 사람이었다. 각자 원하는 게 있었고,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공부는 그녀들에게 기본 중 기본이었다.
“민국 님 입술에 밥풀 묻었어요~.”
“훗, 그래? 너의 앙증맞은 손으로 때어 주거라.”
“부끄럽게 하셔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민국의 입가 근처에 묻어 있는 밥풀을 한 손으로 때서 대신 먹는 설화였다. 민국이 그 모습에 ‘오오!’하면서 열광했고 설화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어차피 마지막이야 마지막….’
간혹 들려오는 소리에 그리 최면을 걸면서 인내하는 은별이었다. 그렇다. 어차피 지금 민국의 방에서 식사를 하는 설화는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니까 마지막은 둘이서 작별을 할 수 있도록 참아주자고 생각했다. 그게 설화의 바램이었으니까.
“민국 님~ 저 산책하러 가고 싶어와요~.”
“앵? 산책?”
“네~ 안 되실까요?”
설화의 물음에 민국은 ‘흠’하고 팔짱을 끼는가 싶더니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한 번 가자꾸나!”
“역시 민국 님이시와요~ 멋져와요~.”
그리 말하면서 민국에게 팔짱을 끼던 설화는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치장할 것도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이윽고 산책을 한다는 소리를 엿들은 은별이 구멍으로 얼굴을 보이면서 물었다.
“어디 가?”
“아 은별 낭자. 잠시 설화랑 산책 갔다 오게.”
현관문 앞에서 막 신발을 신던 민국이 돌아보았다. 그런 민국의 옆에서는 설화가 팔짱을 끼고는 입가에 손을 갖다 대며 웃음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은별은 곧 한숨처럼 말했다.
“잘 갔다 와…. 잘 돌려보내고.”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은별아.”
“…….”
이해랄 것까지야. 어차피 이보다 심한 일도 이해했는데 말이다.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간 은별을 뒤로하고, 민국은 설화를 돌아보며 ‘그럼 갈까?’하면서 미소 짓고 물었다. 설화는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면서 입가에 손을 대고 말했다.
“좋아요~.”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둘의 마지막 산책이 시작되었다. 사실 설화와 함께 밖으로 나온 적은 거의 없었다.
백화점에서 데이트를 하면서 문화를 가르쳐준 적을 제외하곤 거의 집안에서만 있었으니 말이었다. 그리고 설화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내성적인 편에 가까운 사람인 듯싶었다. 오로지 민국을 제외하고는 누구와도 말을 섞는 일이 전무했다.
‘참으로 괜찮은 녀석인 건 분명하지.’
민국은 설화와 산책로를 거닐면서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한 편으론 마음이 아련한 것도 있었다. 설화는 게임 캐릭터였다. 그리고 그 게임의 시나리오에서 그녀는 죽게 되어 있었다. 루트 1 엔딩의 감동적인 느낌을 주기 위한 명목 하에 말이었다.
“후우.”
실은 몇 번이고 설화에게 혹시 자신의 게임 스토리 결말에 대해 알고 있냐고 물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차마 물을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저돌적인 민국이라 할지라도, 그 게임의 스토리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망설여지는 것이었다.
“왜 그리 한숨을 쉬셔와요 민국 님?”
설화가 물어왔다. 민국은 그런 설화를 미소 짓고 쳐다보다 답했다.
“네가 예뻐서?”
“헛….”
그 말에 설화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는 헉한 사람처럼 얼굴을 붉혔다. 사실상 열흘이나 같이 지냈는데 민국이 설화에 대해 이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의외로 순수한 편이었다. 행동은 항상 민국에게 대시를 하는 육감적인 여자 같았지만, 실은 속은 의외로 처녀성에 가까운 여자였던 것이다.
이내 얼굴을 붉히던 설화가 민국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머지 손으로 자기 볼을 어루만지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응 민국 님~ 이곳은 밖인데 이러시면 부끄럽사옵니다~.”
“훗. 어찌 됐든.”
민국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갔다.“열흘 동안 재미있었어?”그 말에 설화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현실 세계에 대한 것도 많이 알게 되고 민국님에 대해 더 알게 되어 기뻤사옵니다~. 무엇보다 현실계의 민국님에겐 가상계의 민국님이 가지지 못한 적극적인 개성이 반영되어 반전 매력까지 느껴졌사옵니다~.”
“그런 말하니까 갑자기 묻고 싶어지네. 나랑 가상계의 민국 중에 누가 더 좋나?”
“난처한 질문이시와요~. 민국 님은 그 누구든 좋습니다~.”
게임 세계에서 설화가 게임 세계의 민국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별 것 없었다. 설화의 위기에서 목숨을 구해주고, 설화가 밖에서 떠돌지 않도록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게끔 해준 것이었다.
게임 세계에서 설화는 평범한 여자였다. 게임 세계의 민국은 능력자 채용을 갈구하는 정부의 눈을 피한 불법 능력자였고 말이다.
민국은 그런 설화를 먹고 재워주면서, 서서히 친한 사이로 발전해나가기 시작했고, 설화는 얼마지 않아 그런 희생정신이 가득한 민국의 모습에 반해 좋아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현실 세계의 민국에게도 곧이곧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루트 1엔딩의 게임 스토리상 설화는 능력자의 힘을 손에 넣게 된다. 고로 그녀도 능력자가 되고, 정부에 발각 당해 정식 능력자로 등록되어 몬스터와의 사투를 하게 된다. 그녀의 능력은 투명한 손이 무수히 생겨나는 것. 그녀가 있는 자리에서 50미터까지 200개에 가까운 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도주를 하려다 붙잡힌 명목으로 정부에서 감시당하는 능력자가 되었고, 사랑하는 민국도 정부에 붙잡힐 것을 감안해 그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일부러 멀리하며 사이를 벌려나가던 끝에 몬스터 붐이 발생한 것이다.
몬스터 붐은 유이가 제작한 게임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재앙으로, 푸른 달이 붉게 물드는 순간 일어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야산부터 동굴까지 숨어 있던 몬스터들이 광기에 물들어 지능을 잃어버리고, 인간들의 구역을 침범하는 일. 그리고 발생한 그 몬스터의 붐은 약 9단계에 달하는, 최고조의 재앙이었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와 능력자를 모으기 시작한다.
파견된 군대와 능력자들은 몬스터 붐의 침범 지역에서 피나는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9단계 최고조의 몬스터 붐으로 세계 각지에서 능력자들이 지원을 할 만큼 위험천만한 재앙이었고, 그 전쟁에서 설화는 숨을 거두게 된다.
‘민국 님.’
‘당신이 보고 싶어요.’
마지막 그 말 한 마디를 끝으로 설화는 목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설화가 그 전쟁에 참여한단 소식을 듣게 된 민국이 뒤늦게 몬스터 붐 지역으로 향하게 되지만, 그녀의 차디찬 시신을 보고 격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 있는 게임 캐릭터, 설화의 운명이었다.
그녀가 게임 세계에서 과연 이 날의 기억을 갖고 가게 될 런지는 알 수 없다. 그 건에 대해선 흑설 공주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만일 갖게 된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 게임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건 진짜 죽는 게 되는 것일까?
“그럼 다르게 물어보도록 하지. 이곳이 좋아, 아니면 그곳이 좋아?”
민국은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사실상 그 질문이야 말로 민국이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일 것이었다.
“당연히~.”
그 말에 설화는 대답하는데 필요한 침묵을 두었다.
“이곳에도 그곳에도 민국님이 있기 때문에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답니다~.”
“그렇군.”
설화는 민국을 진짜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게임 캐릭터의 설정이라는 이유가 있다 한들,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
“그곳의 세계가 좀 더 평화로웠으면 하는 바람도 있답니다~.”
덧붙이는 설화였다. 그리고 그 말을 토대로 민국은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아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기억은 있다.’
애초에 처음 게임 스토리의 시작 부분에서 설화가 민국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전무했다. 또한, 몬스터들이 속출한들 인명 피해는 적은 세계관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 게임 세계에서는 당연한 세계관이기 때문에 ‘평화’를 운운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즉 그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셈이었다.
“설화야.”
“네 민국 님~.”
민국의 부름에 설화가 빙그레 몸을 돌리면서 답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민국은, 늘 했던 익숙한 동작을 선보였다. 자신이 친하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만 해주었던 머리 쓰다듬기였다.
“그곳에서도 즐겁게 살 수 있을 거야. 네가 원하는 평화처럼.”
“…….”
설화는 그 순간만큼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추고 말았다. 왜냐하면 민국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살아생전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게임 세계의 고자 민국은 절대로 행할 수도 없는 행동이었고 말이다.
“미, 민국 님….”
“응?”
“부끄럽사와요~!”
그리 말하면서 민국을 순간 팍 밀쳐내는 설화였다. 의외로 강력한 힘에 민국이 ‘크억’하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하지만 그건 나 몰라라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이래저래 고개를 왔다갔다 거리는 설화였다.
“정말… 민국 님 그러시는 거 아니여와요~ 숙녀를 그렇게 떨리게 하면 몸살나여요~.”
“끄어어… 유이 씨에게 맞은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강력한 데미지다.”
어찌 됐든, 부끄러워하는 설화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일어나는 민국이었다. 한참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던 설화가 곧 마음을 다잡고 민국을 쳐다본다.
“그래도 이 세계의 민국님을 알 수 있어 정말 감사했어요 민국 님~.”
“에고고고… 그래.”
“마지막으로 민국 님에게 한 번만 안기고 싶사옵니다~.”
그리 말하며 민국에게 와락 달려드는 설화였다. 민국의 동의도 없이 곧장 그에게 안겨 든 설화는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민국 님~.”
“그래. 잘 지내고.”
“네~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설화는 마지막까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민국은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숨기려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곧 올바른 것이겠지.
현실 세계를 살아본 그녀가 과연 게임 캐릭터라 칭해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걸까?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어쩜 게임 세계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임 캐릭터로서, 오로지 스토리가 이끄는대로의 행위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제 마음이란 것이 생겨났다면,
“…….”
그녀가 사는 세계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되게 된다.
민국은 자신에게 안겨 있던 설화가 사라진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