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세계 왕의 표본(2)>
현실 세계의 민국이 살아가는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들리게 된 백화점은 꽤나 재미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백화점은 게임 세계 속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건물이었으니, 그렇게 흥미롭거나 희귀하게 보는 건 아닌 듯싶었다. 애초에 설화가 문화를 가르쳐 달라고 운운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원했던 건 민국과의 즐거운 데이트였으니까 말이다.
데이트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민국은 녹초가 되어 침대에 눕게 되었다.
"끄어어 방송이고 나발이고 일단 자야겠구만…."
요즘은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민국의 입장이다 보니까 금방 금방 녹초가 될 수밖에 없다.
"……."
"은별 낭자. 오늘도 여기서 잘 거요?"
그때 자기 방의 방문을 잠그고 구멍 속으로 이불을 쑤셔 넣어 민국의 방으로 가져온 은별이 있었다. 민국의 물음에 은별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지. 어떤 꼴이 날 줄 알고 방심하고 있어?"
"훗."
가볍게 웃음 짓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웃음에 은별이 왠 웃음을 짓나 인상을 찌푸리자니 민국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한다. 민국의 방에 이불을 피고 있던 은별이 뭐냐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무슨…."
"으랴압!"
"꺄악! 뭐, 뭐하는 거얏!"
손으로 잡을 만한 거리를 확보한 순간, 그대로 은별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침대 쪽으로 끌어당기는 민국이었다. 민국의 갑작스런 언동에 순간 당황한 은별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몸은 민국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이윽고 침대에 따라서 눕게 된 은별을 뒤에서 꽉 안고는 못 움직이게 하는 민국이었다.
"바닥에서 자면 추우니까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놔 이 바보야!"
"왜? 같이 잠을 자자니 막 설레고 그러나?"
민국의 물음에 '설레기는 무슨….'하면서 토라진 얼굴로 정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두근두근 거리는 심장의 박동수는 굉장히 빨라지고 있었다. 뒤에서 은별을 안고 있던 민국조차 그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정도다. 이윽고 민국이 씨익 웃는데 문득 근처에서 또 다른 인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무하세요 민국 니임~."
바로 설화였다. 잠시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나온 설화는 침대에 엉겨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몹시 실망했단 얼굴을 짓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씨익 미소 짓고는 두 사람 곁으로 뛰어든다. 은별이 가지고 온 이불과 함께 말이다. 졸지에 설화에게 깔린 은별이 '꺄악!'하고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친다.
"뭐,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가!"
"아잉, 그러시면 너무 섭하시와요. 오늘 밤 찐하게 민국 님의 내조를 해보기로 해보아요~."
"오, 내조?"
"네~ 내조~."
"훗, 무슨 내조인데?"
"후후~ 벌써부터 알려고 하면 섭하시와요 민국 님~."
민국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음흉하게 물어보자, 그에 맞장구를 치듯 설화도 은밀한 눈길로 쳐다보면서 민국의 가슴팍을 한 대 툭 건드린다. 은별은 그런 두 사람의 죽이 잘 맞는 반응에 지켜보다가 중얼거렸다.
"아주 잘 논다…."
"은별 님도 같이 놀아요~."
"됐거든? 빨리 잠이나 자!"
민국에게 확 이불을 덮어주는 은별이었고, 설화는 손목을 잡고 바닥으로 내려오게 해서 같이 자게 하려고 들었다. 설화는 '아앙 바닥은 추운데요오~.'하면서 앙탈을 부렸지만, 안타깝게도 은별은 여자라서 효과가 미력했다!
"빨리 자."
"아응~ 민국 님~."
"크흠. 마녀의 기운은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누가 마녀야?"
"죄송합니다. 자겠습니다. 수고하세요."
곧장 눈 마주치는 걸 피하며 이불을 덮어쓰고 눈을 감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이제야 좀 정리정돈이 된 거 같다고 생각하며 벽면의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럼 불 끌게."
그 말과 함께 불을 끄는 은별이었고, 잠시 후 잘자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그 잘자라는 소리에 뒤를 이어 다시 대화가 시작되려고 하니, 은별은 결국 다시 중제를 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좀 자겠네….'
조용해진 방안을 둘러보던 은별이 스르륵 바닥에 몸을 뉘였다.
'정말 이게 무슨 고생이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은별은 그리 생각했다.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탄식을 내뱉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
깊은 새벽이었다. 세 사람 모두 숙면에 곧잘 취해 있을 무렵, 문득 바닥에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에 은별은 몽롱한 눈을 뜨게 되었다.
"뭐…야…?"
잠시 뒤척이며 상체를 일으킨 은별이었다. 눈가를 비비면서 자신이 누워 있는 바닥을 내려다본 은별은 얼마지 않아 침묵했다.
"……."
은별이 누워 있어야 할 곳은 분명 딱딱한 바닥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그녀는 침대의 푹신푹신한 감촉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은별이 잠에 들었을 때 누군가가 위로 올린 모양이었다.
"저 바보…."
그리고 그 증거로 민국은 땅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바닥에서 본래 잠을 자고 있던 은별과 설화는 어느새 민국이 누워 있던 침대에서 대신 자고 있던 것이다. 은별은 그런 민국의 말 없는 배려에 잠시 잠들어 있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 지었다.
"후훗."
"……."
물론 방금 전의 '후훗'은 은별이 의도해서 낸 소리가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의 웃음 소리와는 상당히 거리감이 있었다. 이윽고 옆자리를 돌아보자 언제 깨 있었는지 모를 설화가 상체를 일으킨 모습이었다.
"이 세계의 민국 님도 배려가 넘쳐나는 모습이네요~."
"……."
"정말이지… 왜 이 세계나 그쪽 세계나 민국 님은 항상 배려 있고 멋진 모습일까요?"
그리고 잠에 들어 있는 민국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설화였다. 마치 단순 게임 캐릭터로서 설정상 민국을 좋아하는 게 아닌, 정말 진심으로 흠모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설화의 옆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은별이었다. 문득 운을 띄웠다.
"…배려하는 모습도 있지만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변태스러운 모습도 많을 걸?"
"앗… 그건 민국 님에게도 육식계 남자로서의 개성도 확실히 있다는 거 아닌가요? 이름하여 반.전.매.력?"
"에휴…."
한숨을 쉬던 은별이었다. 민국에 관한 건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그리고 자기 자신도 돌이켜보면 여자친구인데 굳이 민국의 뒷담화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심지어 게임 캐릭터로 정을 주기도 애매한 여자…. 그랬기 때문에 은별은 민국이 더 열심히 설화를 챙겨주는 걸 알고 있었다. 굳이 이유 없이 상처를 주기 위해 도발을 할 필요도 없겠지….
"자…."
"후훗, 네~."
더는 할 말도 없으니 그냥 잠이나 자라면서 자리에 눕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의 뒷모습을 보면서 가볍게 미소 짓던 설화는 곧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국의 안방에 있는 창문 한 개는 쌀쌀한 오늘 날의 새벽을 알리고 있었다. 은별은 곧잘 쏟아지는 수면에 곧장 눈을 감았다.
"역시…."
그리고 문득, 들려오는 그 소리를,
"죽고 싶진 않네요~."
웃음과 함께 중얼거리는 그 음성을, 놓치고 말았다.
* *
이틀이 남았다.
"행님! 너무하시네여! 어떻게 그 신비의 약을 지에게도 선물할 생각을 안하신 거임여!"
"날 원망하지 말고 내 안방을 원망해라 인마."
"으으! 안 되겠음여! 행님 안방에 불 지르고 올 테니 신고하지 마셈여!"
"이놈이?"
캐릭터를 실존화 시키는 약에 관련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민국과 서라였다. 설화가 실존화 된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다. 300년의 감각이 서라의 얼굴을 볼 때마다 짜릿짜릿 느껴질 지경이었다.
"근데 확실히 널 보니까 왜 고영웈 씨가 그런 짓을 했는지 알겠다."
"읭?"
"확실히 덮치고 싶어지는 감정이 생겨."
"히이익."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옥에 있는 그 연예인에게 진심으로 공감을 하는 민국이었다. 물론 공감만 할 뿐 실질적인 행동은 따라하지 않았다. 범죄형 로리콘과 도덕형 로리콘의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다.
"근데 설화찡인가 하는 분은 그럼 2D 캐릭터인 거임? 행님 막 좋아하는 메가데레?"
"훗. 그런 셈이지. 이 몸이 얼마나 잘 생겼으면 2D 캐릭터조차도 나를 좋아한다면서 졸졸 따라다니겠냐? 그러니까 너 나한테 잘해라. 다른 여자에게 뺏길라."
"우왕… 뭔가 이치에 맞지 않아서 공감하기가 어렵지만 행님이니까 이해해줄 게여."
"이놈이."
"헤헤. 암튼 그럼 이틀 후면 사라지는 거예여?"
민국은 '흠'하고 두 손을 뒷머리에 대면서 말했다.
"그런 셈이네. 게임 세계의 서민국에게 다시 돌아가는 셈이군."
"왠지 참신하게 들리네여…. 온니찡 자기 자신에게 네토라레 당하는 거셈?"
"괜찮다. 난 대신 너를 먹을 테니까!"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소리치는 민국이었고 서라는 '은별 언니찡의 번호가 어디 있더람….'하면서 휴대폰을 들 따름이었다. 그런 서라의 행동을 가로막으면서 민국이 중얼거렸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으니 연락하지마 인마."
"데헷 장난임, 사실 지도 무서워서 연락할 자신이 읍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어쩌다 로리스러운 서라와 이런 감정을 갖게 된 것일까. 막 피하고 싶고 거절하고 싶어도 이젠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사람에게 이성이란 게 존재한다지만, 진정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이성조차 이빨로 으득으득 씹어먹을 수 있는 게 바로 사랑의 감정이었다.
"휘유."
"에구구구궁."
각자 다른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이었다. 은별에게 들키면 진짜 사태가 장난 아니게 커질 것이다. 예나의 경우에는 애초에 민국을 가지고 대립을 했으니 좀 괜찮다 여기겠지만… 서라는 은별조차도 좋은 인상을 가졌던 여자 아이다. 그런 서라가 민국과 이런저런 관계가 된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은별은 필시….
'헤어지는 게 역시 옳다고 봐여….'
서라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몇 백년의 감각을 도무지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그 오랜 기간의 감정 끝에 살아남은 게 사랑이란 감정 하나뿐이라면 더욱더.
"먹고 싶은 거나 골라라. 안 그래도 스폰 한 개 더 생겼는데 그 돈으로 너 맛나는 거나 사주련다."
"오옹, 온니찡을 향한 감동이 큐티큐티하게 불어나네여. 하지만 온니찡의 음모를 나님이 모를 리가 없져! 키잡을 목표로 하는 온니찡의 아마겟돈 같은 마음을여!"
"그러고 보니 키잡까지 이제 일 년 남았군. 일 년 뒤에 널 반드시 손에 넣겠다."
"우와… 그 대범함에 몸이 막 부들부들! 가버릴 거 같음여!"
'진짜 가게 해주리?'하면서 음담패설 같지 않은 음담패설을 내뱉던 둘이었다. 이내 직업원이 찾아왔고, 둘은 먹기에 괜찮은 음식을 주문하고 대기할 따름이었다.
**
"……."
그리고 그때, 막 트루 엔딩 루트 제작을 완료한 유이가 있었다. 유이는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와의 팀워크로 말미암아 무려 2주간의 노고 끝에… 드디어 게임을 제작하는 것에 성공했다. 다만 게임의 이름은 아직 무엇으로 할 지 정확히 정하지 않았다.
유이 : 잠시….
채팅으로 대화를 나누던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에게 그렇게 말을 건넨 뒤, 유이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1층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 부엌으로 향해 물컵을 들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는다. 그리고 한 모금 물을 마시려던 유이가 돌연 멈추었다.
"……."
그 컵 안의 내용물을 내려다보던 유이는 돌연 게임 루트 1 엔딩을 가져갔던 민국을 떠올렸다. 동시에 다음 날 민국에게서 게임 루트 1 엔딩에 대한 소감을 들을 수 있었다.
잘 만들었다는 소감이었다. 하지만, 그 소감을 말하던 민국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인간 관계에 소홀한 유이라 할 지라도, 그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