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실존화 된 캐릭터는 열흘 동안 현실에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면 제한 시간 완료로 다시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이 게임이라면 게임으로, 그것이 만화라면 만화로.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열흘의 시간을 본래 세계로 돌아간 캐릭터가 기억할 수 있는가 였다. 그리고 또한, 기억함으로서 그 캐릭터가 본래 살던 세계의 루트가 변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억은 할 것이란다.”
찾아와서 질문을 한 민국에게 평안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흑설 공주였다. 그녀는 오늘 역시 어김없이 와인잔을 손에 들고 홀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세게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거란 생각하지 않는구나.”
“뭐시여… 시방 흑설느님도 모르는 겁니까?”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으니 말이란다.”
흑설 공주는 그리 말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뭔가 여러모로 무책임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도움을 받아도 항상 그런 기분이 드니까 정이 안 드는 수밖에. 오붓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외면하며 민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휴, 그럼 그 녀석도 스스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셈이군요.”
“그렇단다. 그 캐릭터가 맘에 들었느냐?”
흑설 공주의 물음에 민국은 침묵하면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의자에 걸터앉아있는 흑설 공주의 눈빛은 정말이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혹적인 느낌을 소유하고 있다.
“흑설느님이라면 분명 그 캐릭터를 365일 이 세계에 있도록 만들 수도 있겠지요.”
“그렇단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또 대가라는 게 필요할 테고, 흑설 공주는 또다시 민국에게 무리한 조건을 걸 것이었다. 애초에 게임 캐릭터는 게임 세계의 캐릭터. 제작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일부분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엔 생명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하여 무가치…. 그런 무가치를 생명으로 창조한다면? 그것도 그야말로 현대 과학으론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이었다. 그 이론을 실현시켜주는 대신 흑설 공주가 무엇을 요구할 지도 모를뿐더러, 민국은… 냉정하게 말하면 설화에게 그만큼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열흘 후면 사라질 테니까.’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한정된 기간이라는 게 참으로 사람의 감정을 뭐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흑설 공주와의 대화를 마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민국 님~ 납작 가슴 아가씨가 오늘도 화를 내시와요 무서와요~.”
그리고 민국이 등장하자마자 곧장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 최설화였다. 은별이 이를 보고 분개하면서 ‘야! 그 손 안 때!’하며 버럭버럭거린다.
요즘 은별이의 눈이 도끼가 안 될 날이 없다. 워낙에 대시와 스킨쉽이 잦은 최설화였으니까. 이윽고 민국의 팔짱에 물컹한 가슴을 닿도록 하면서 최설화가 애교를 부린다.
“흉포한 사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있는 건가요~. 흑, 저는 그저 민국 님과 한 몸이 되고 싶을 뿐인데.”
“…흑화 소주 마시게 해서 타락시켜 버리고 싶네 진짜!”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부들부들 떨면서 외친 은별의 소리에 반응한 것은 가만히 있던 예나였다. 졸지에 가만히 있던 예나가 한 방 먹은 셈이었다. 민국은 차마 자신도 타이를 수 없는 상황에 그저 어색하게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벌써 5일이 지났나.’
민국은 문득 상념을 해보았다. 벌써 최설화가 소환된 지 5일이 흘렀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기간은 총 5일이었다. 5일 이후에는 최설화는 본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고 현실에선 없던 게 된다. 그리고 민국은 그에 대해 심히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먹지도 못하고 보내줘야 한다니!’
같은 남자다운 기분도 느끼고 있었으나, 그것 제외하고도 여러 가지 말이었다. 일단… 게임 루트 1 엔딩은 결과적으로 민국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유이에게 그토록 때를 부리면서, 본래 사람을 감동시키려면 히로인이나 주인공이 죽어야 한다고 징징댔으니까 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usb에서 소환된 최설화는 언젠간 죽게 된다. 그 게임 루트에서 말이다.
단순히 돌아가는 게 아니라, 죽는 것이란 뜻이다.
그게 진짜로 죽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죽은 것처럼만 치장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게임 세계로 돌아가면 이전의 기억은 전부 망각하게 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최설화는 게임 세계로 돌아가면 자신의 역할답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자꾸만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진 민국이었다.
“민국 님~ 저 소원 한 가지 있는데 들어주실 수 없나요?”
“야! 너 또 무슨…!”
“저 민국 님이 사는 세계의 문화를 보고 싶사와요~.”
은별이 또 이상한 요구를 할까 싶어 왈칵 겁을 집어먹고 소리치던 때였다. 하지만 설화는 음란한 은별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발언을 하였다. 민국 역시 그건 좀 예상 외였기 때문에 반문했다.
“문화? 문화는 왜?”
“현실 세계에서 사는 민국님이 어떤 세계에서 사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고 할까요? 아잉 부끄러워요~.”
“크흠….”
돌이켜보니 설화는 지금까지 민국의 집안에만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지만, 그래도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었기 때문에 민국의 세계가 궁금한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설화가 머무르는 게임 세계관은 이 현대와 일치하지만 몬스터가 등장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역사들은 조금씩 달랐으니까.
“어떻게 생각하오 낭자.”
“…….”
음란한 요구를 할 줄 알았으나, 너무나도 정상적인 요구에 잠시 멍을 때리던 은별이었다. 툭하고 옆에서 예나가 어깨를 건드리자 정신을 차린 은별이 팔짱을 꼈다.
“…뭐, 그 정도는 상관없어. 어차피 살던 세계가 다르니까 이쪽 세계에 대해서 궁금한 것도 있을 테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은별도 설화가 무슨 맘으로 그런 요구를 하는 건지 이해는 하는 모양이었다. 평생 함께 한다면 정말 지독히 싫어할 테지만, 일단 설화는 한정 기간이었으니까….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이윽고 민국이 설화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 낭자도 승낙해줬으니 그럼 잠깐 나갔다 와볼까?”
“아잉 좋아요 민국 니임~.”
“…야! 그렇다고 해서 엉겨 붙지마!”
달라붙는 설화의 모습에 또다시 윽박을 지르는 은별이었다. 요즘엔 하루도 안 시끄러운 날이 없었다.
“어째서 여러분도 따라오시는 거예요?”
화창한 날씨! 이제 겨울은 떠나고 봄이 찾아오는 시간! 민국의 좌우에는 나란히 걷고 있는 세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 설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은별이 팔짱을 끼면서 대답했다.
“당연한 거 아니야? 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을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가게 놔둬?”
“음….”
은별의 시샘에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설화였다. 이윽고 손가락을 가볍게 뻗어 은별을 지목하며 소리친다.
“파워 납작 가슴.”
“…너 진짜 나 화나게 할래!”
“진정해요 은별 씨….”
튀어 나가려는 은별을 도중에 중제해주는 예나였다. 요즘엔 은별의 화를 예나가 식혀주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서로 다투던 양대 산맥이 협의 하에 동맹을 맺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민국 님이 제 소망을 이뤄주니 기분이 좋사와요~”
팔짱을 또다시 끼는 최설화. 일단 이렇게라도 맞춰주는 게 현재로선 옳은 것 같았다.
‘근데 이거 생각해보니 4인 데이트가 되는 셈인가? …훗, 드디어 나도 목표로 하던 하렘왕이 되는 거로군.’
민국이 소개시켜주기로 한 곳은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이네요~.”
“잠시 들렸다 갈까?”
“네~ 민국 님이 사는 세계의 백화점은 또 다르겠지요~ 예쁜 속옷들의 무늬도 많이 다를 거 같아요~.”
“왜 하필 언급을 해도 속옷을 언급하는 건데?”
“납작 속옷.”
“…너 진짜 맞고 싶은 거지! 어!”
“진정하세요 은별 씨….”
어차피 예나는 설화의 본 모습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에, 설화의 적극적인 행동들이 실은 다 거짓말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설화의 스킨쉽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은별은 그래도 못 참는 모양이었지만…. 설화는 화를 내는 은별을 향해 입을 가리고 은밀한 눈빛을 짓다가 민국에게 기댔다.
“뭐하면 민국 님이 속옷을 골라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응 생각만 해도 기분이 오묘해져요 책임져주세요 민국 님~.”
“크흠! 그래, 이참에 너희들 속옷이나 골라줄까?”
은근슬쩍 기회를 틈타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민국이었다. 물론 은별의 찌릿찌릿한 눈빛을 맞이함으로서 의견을 철회하게 되었다. 어찌 됐든 네 사람은 곧장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웅성웅성.
“저기 네 사람 봐. 진짜 장난 아니네.”
“와, 무슨 모델이야? 아니 모델보다 더 하는데?”
“미남미녀네… 근데 여자 세 명을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아무리 잘 생겼어도 저렇게 예쁜 애들을 세 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민국 일행은 백화점에 방문하는 순간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무슨 재벌집 아들도 아니었고, 그럴 듯한 치장도 없었는데 단순히 이목구비와 분위기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네 사람은 그런 시선을 차마 즐길 여유조차 없었다.
“민국 님~ 훌쩍 훌쩍, 납작 가슴의 못된 말들이 가슴을 후벼파서 마음이 아파요오~ 가슴 쓰다듬어주세요~.”
“가, 가슴을? …그래 이 날을 기다렸다 내 반드시 너의 가슴을….”
“둘 다 경찰에 신고해줄까? 체포해줘?!”
“다들 진정해요….”
본래라면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에 흡족해하며 좋아라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기에는 워낙 신경전이 불타고 있는 실정이라…. 어쨌든 백화점 안에서도 직원들의 한 눈을 받으면서 큰 어필까지 받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이건 무슨 화장품인가요~.”
“특수 에센스로 피부를 맑게 해주는 효과를 하며 이외에도….”
그리고 다들 치장을 안 해도 귀티가 나다 보니, 부잣집 아들 딸로 착각하는 직원들도 잦았다. 물론 은별이나 민국은 굉장히 높은 인기를 구사하고 있어 돈을 많이 벌긴 하지만 말이었다.
“이번엔 저거 보러 가요 민국 님~.”
“그래 그래.”
옷깃을 붙잡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설화를 따라 순순히 행동해주는 민국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은별은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늙어죽을 지도 모르겠어.”
“조금만 마음 풀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지 않나요? 어차피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마에 손을 갖다대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은별에게 그리 말하는 예나였다. 은별은 그 말에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내키지 않는 건 별 수 없었다. 저벅 저벅, 턱. 툭.
“엇.”
“억.”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그만.”
“아니, 괜찮습니다.”
이윽고 백화점 안을 거닐던 민국과 설화였다. 민국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두 남자가 순간 민국의 신발의 발등을 찍어버렸다. 하지만 실수라 생각했기에 민국은 사과만 받을 뿐, 크게 화는 내지 않았다.
이윽고 그 두 남자가 고개를 숙여 사과한 다음에 몸을 돌려 갈 길을 가는 모습에 민국도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설화도 마찬가지로 민국에게로 몸을 돌리고 있었는데….
“킥킥.”
“아이구 고소해라.”
“…….”
보아하니 의도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느껴졌다. 설화는 슬그머니 멀어지는 그 두 남자의 등을 지켜보다가 민국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민국 님~ 저 잠시 급한 일이 있어 그러는데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응? 무슨 급한 일인데?”
“아잉 참~ 숙녀 입으로 어떻게 그런 걸 말하겠어요~”
그리고는 마치 화장실이라는 것처럼 제스쳐를 보내는 그녀였고, 민국도 알아듣고는 갔다 오라고 말하였다. 이윽고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은별과 예나를 스쳐 지나가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