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게임 결말이라. 훗, 그런 건 제가 잘 정하지요.'
문득 게임의 결말에 대해 고민을 하던 유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민국은 추천 받고 싶어 하는 남자와 함께 결말을 생각하던 유이에게 깊은 충고를 하고 있었다.
'자고로 게임 루트 1엔딩. 어차피 트루엔딩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해피엔딩 같은 요소를 넣을 필요가 없지요.'
'…….'
'조금 비극적으로 끝나도 된다 이 말입니다. 다만 여기서 비극적인 게 단순히 플레이어들의 인상을 찌푸리면서 토나오게 하는 결말이 아니라, 굉장히 감동스럽게 죽음을 맞는 것이지요. 요컨대 배드엔딩!'
누군가가 죽는 엔딩.'
'그럼 여기서 당연히 누가 죽는 게 낫겠습니까? 당연히 주인공이나 여자 히로인이 죽어야지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여자 히로인을 구하기 위해 온갖 발악을 다하면서 악당을 무찌르고, 여자 히로인을 지켰다는 것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는 것이죠. 그럼 그 옆에 여자 히로인이 '민국 님… 민국 님!'하면서 절규를 하는 겁니다! 그때 짱짱한 햇볕이 구름 속을 헤치고 나오면서… 두 사람을 비추는 것이죠. 오오오! 이름하여 개감동!'
'…….'
'아니면 여자 히로인이 죽는 결말도 있습니다.'
그렇다.
'여자 히로인이 우리의 남주인공인 민국을 위해 마지막에 힘을 보태주는 겁니다. 혹은 민국이 위험한 순간을 대신 방패가 되어 막아주는 것이죠! 그리고 처참하게 죽는 여자 히로인! 그리고 주인공 서민국의 각성!'
'…….'
'아니, 뭐 딱히 간지나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어느 정도 비극적인 이야기를 감안할 때 나름대로 간지나 보일 수 있는 결말을 언급하는 민국이었다. 왜, 누구나 한 번씩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실제의 현실의 내가 비극적인 건 원치 않지만, 한 번쯤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비극적인 이야기 및 그곳에서 우러 나오는 감동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맘…. 민국은 어차피 트루엔딩도 아니고 여러 루트의 엔딩 중 하나로서 게임 루트 1의 엔딩을 비극 엔딩으로 골랐다. 그리고 그런 민국의 설득이 결코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
'후후, 어쨌든 개인적으로 저는 비극 엔딩을 추천한다 이 말입니다. 나쁘지 않지요.'
많은 사람들은 항상 얘기한다. 죽는 것으로 감동을 주는 에피소드는 이제 끝나지 않았냐고, 하지만 죽음을 통한 감동은 어느 시대든 먹혀 들어갈 레파토리로서… 비록 진부하다 여겨질 지라도 그로 인해 얻는 감동은 상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민국은 순수 게임 개발자의 조수로서 이야기에 공헌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게임 1루트의 결말은 비극적이었다.
"……."
민국은 그냥 마우스를 계속해서 클릭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클릭을 하면서 보이는 이야기는 서서히 절망적으로 빠져들 뿐, 결코 행복하지는 않았다. 남주인공 서민국이 처절하게 발악을 하면서 몬스터들과 싸워 나갔지만, 결국 '몬스터 붐'이란 것이 시작되어 인류가 위험에 빠졌을 때 여자 주인공… 최설화는 죽게 된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다. 아주 끔찍하게 죽는다. 최대한 비극적인 엔딩을 살리기 위함인지 고어스러움도 약간 묻어나 있었다.
모든 몸이 몬스터들의 손길에 농락 당하다가 결국엔 팔부터 다리까지, 목부터 배까지, 모조리 싹둑싹둑 가위로 자르듯 잘려 나가면서 배드엔딩을 맞게 된다. 그리고 이를 본 남주인공 서민국은 결국 각성하여 몬스터 붐을 막는데 성공하지만, 그것으로 끝.
한 여자로 인해 최후의 능력자로서 각성을 하여 인류를 지키는데 성공한 주인공이었지만, 결국엔 이미 심장이 뛰지 않는 그녀를 추억하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허허…."
에피소드를 다 보게 된 민국은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허탈한 웃음도 잠시 의자에서 드르륵 일어나 자기 방으로 향하는 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다가 멈칫한다.
"……."
흑설 공주가 준 2D 실존화 액체는 2D 캐릭터를 현실에서 실제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의문이 한 가지 있다. 과연 그녀는 그녀의 게임 스토리에 대한 것을 모조리 알고 있을까? 그리고, 게임 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 날의 기억들은 모조리 잊게 되는 것일까?
'…….'
어차피 게임 캐릭터였으나, 자꾸만 신경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필시 이것이 인간에게만 있는 특유의 감정일 지도 몰랐다.
"크흠!"
이윽고 자기 방안으로 돌아와서 크게 의도적으로 기침을 내뱉는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의도적인 리액션에 안방의 문이 끼이익 열리면서 설화가 총총 다가오기 시작했다.
"민국 님~."
"어, 음, 설화야."
"이제 오셨군요 민국 님~. 일은 다 끝나신 건가요? 이제 저랑 함께 하는 시간만 있는 거 같네요~."
설화는 웃음 지으면서 민국의 팔에 팔짱을 끼고 있었다. 커다란 가슴이 밀착되어 팔꿈치에 닿긴 했으나, 그런 일시적인 감각에 쾌락을 느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민국은 잠시 진지하게 설화를 내려다보았다. 설화는 그의 빤히 향하는 시선에 눈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슈밤, 귀엽네.'
한 순간이지만 귀엽다고 생각해버린 민국이었다. 물론 그녀가 약간 여우의 탈을 쓴 여자인 건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게임 캐릭터 설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성격인 것도 알고 있었고 말이었다. 그러나, 왠지 꺼림칙한 기분은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설화야."
"네 민국 님~ 뭐든 말씀만 해주세요~ 다 들어드릴게요."
"가슴 만… 커흠!"
순간 뭐든 다 해주겠단 소리에 가슴 만지고 싶다고 말할 뻔한 민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슴 생명력을 또 한 번 충족시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이번엔 2D 캐릭터의 가슴을 만져 생명력을 충족시켜보고 싶은 걸? 이라고 생각했지만 민국은 자제했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 배고프지?"
"네 민국 님~."
엉겨 붙으면서 좋아하는 설화였다. 뭔가 확실히 자기 뜻을 어필하는 것에 힘이 있는 설화였다. 은별이나 예나가 같지 못한 부분이라고 할까! 이건 적극적인 편에 속하는 강서라조차 이러지 못했다.
"민국 님의 요리는 사랑이 가득 담겨서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네요? 역시 민국 님."
식사를 대접했을 때조차 민국을 향한 사랑을 끊이지 않는 설화였다. 민국은 가볍게 미소를 짓다가 문득 찔러보듯 질문했다.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혹시 게임 세계의 나도 요리를 잘하는 편인가?"
민국은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었다. 게임 루트 1을 전부 클리어해본 상태였으니까 말이었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신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하실 거 같아요~."
"크흠, 그렇구만."
이 부분은 예상 외의 대답이었다. 애초에 게임 루트 1에서 주인공 서민국이 설화에게 요리를 대접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게임 세계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후우, 거참. 직접적으로 물어보기 애매한 부분일세.'
아무리 성적인 드립에서 저돌적인 민국이라 할 지라도, 인간적으로 이런 분야의 질문은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전무했다. 만약 게임 세계의 기억을 설화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결과적으로는 그 게임 세계에서 설화가 맞이할 결말 또한 그녀는 알고 있단 사실이 된다.
"으응~ 밥을 먹었더니 갑자기 몸이 막 뜨거워지네요."
"그래? 그럼 밖에 나가서 바람이나 새고 오자."
"아잉, 민국 님. 저돌적이시와요."
가능한 한 체온을 맞닥뜨리고 '헉헉! 이 년아! 어때! 좋지?!'하고 싶은 남자의 욕구라는 게 있었으나 인내하는 민국. 이윽고 현관을 나가 옥상 계단으로 향하는 민국이었다.
"현실 세계 민국 님의 집은 이렇게 생겼군요~."
"그러고 보니 그 게임 세계에서 내 집은 오피스텔이었나?"
"네~ 복층 오피스텔이었어요~."
월세를 내면서 생활하고 있던 오피스텔이었다. 생각해보면 웃긴 것이었다. 그 게임 세계관에서는 몬스터의 출몰이 잦게 일어나고, 심지어 능력자라는 것도 존재했다. 그런데 주인공 서민국은 인생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몬스터 처리는 안 하고, 마냥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이었다.
'뭐 개연적으로 따지면 몬스터랑 맞부딪히는 게 두려우니까 그럴 수도 있다지만. 그래도 역시 나답지가 않군.'
본래 서민국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더라면 '어머나 씨발 ㅎㅎ'하면서 다 쓸어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윽고 올라온 옥상에서 차디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의 향기가 찾아오는 그때 저녁 노을과 함께 설화가 민국의 옆에 당도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에요 민국 님~. 역시 민국 님. 이런 아름다운 풍경으로 이따금씩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이 집에서 사시는 거군요?"
"역시 다른 여자들은 못 보는 걸 너는 잘 보는구나. 그래, 나 서민국은 사실 이 순간을 아름답게 살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지."
팔짱을 끼고 멋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민국의 모습에 입가에 손을 갖다대고 '후훗' 웃던 그녀였다.
"현실 세계의 민국님도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마음이 편해지네요~."
"흠흠."
현실 세계라는 단어가 유독 거슬렸던 민국이었다. 아무래도 답답하게 숨기고 있는 타입이 아닌 지라, 결국 민국은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설화야."
"네 민국 님~."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질문 좀 해도 될까?"
"말씀하세요~ 민국 님의 대답이라면 무엇이든 들어드릴 수 있어요~."
"그거 고맙네. 좋아, 그럼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할게."
홱하고 설화에게로 당차게 고개를 돌린 민국이었다. 그래, 지금이다!
"가슴 사이즈 몇이야?"
"……."
급작스런 민국의 물음에 순간 눈웃음 짓던 상태로 굳어버리는 설화였다. 하지만 잠시 후 눈을 크게 뜨면서 어색한 웃음으로 굳어버리는 그녀의 표정.
"…네?"
"콜록 콜록! 아니, 지금 건 잘못 말했다. 다시 말할게."
큰일이다. 자꾸만 커다란 설화의 가슴 때문에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렸다. 그나저나 순간 설화가 몹시 당황한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민국은 일단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니 착각으로 넘어가자고 생각했다.
"게임 세계. 그 세계에서 네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어?"
"……."
"실은 내가 그 게임을 한 번 클리어해야 해서 다시 파일을 가져왔거든."
순수하게 오늘 일에 대해서 설명하는 민국이었다. 설화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크흠… 결말을 보게 되어서 말이야."
액체가 투여 되었던 usb의 게임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설화는 게임 세계의 캐릭터이기 때문에 게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있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한 번 물어본 것이었다. 그리고 민국에게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어떤 이야기인지 알고 있나 해서 말이야."
"으음~."
잠시 후 설화가 활짝 피는 꽃처럼 미소 지었다.
"네~ 알고 있어요~."
"그려?"
"네~ 하지만 괜찮아요 민국 님~ 저는 게임 캐릭터인 걸요?"
자기 가슴팍에 손을 갖다대면서 말하는 그녀였다.
"실존하지 않고, 이것도 실존하는 것처럼 마법에만 걸린 셈이니까요~."
어차피 실제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고로 그녀에겐 생명이란 것이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여길 필요도 없었고,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저는 그 게임 속 스토리에 필요한 게임 캐릭터일 뿐이고~ 그러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흠흠…."
"하지만 민국 님이 걱정해주시는 건 뭔가 기쁘네요~."
활짝 미소 짓는 설화였다. 민국은 그런 설화를 말없이 쳐다보다가 '그래, 그렇군.'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추워지는구만. 들어가자."
"네~. 민국 님~."
계단을 내려가는 민국의 모습에 슬그머니 미소 짓고 따라가는 설화였다. 그녀에게 생명이란 없다. 고로 그녀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설화가 내놓은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