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으흐흐, '십팔' 센치인 서민국에게 네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돌적으로 변모한 은별이었다. 설화는 자신이 처녀란 사실을 들켰음과 더불어, 자신의 숨겨진 겁쟁이의 모습이 조금은 드러난 것에 대해 당황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후훗'하고 입가에 손을 갖다대면서 눈웃음 짓는 설화였다.
"사랑하는 민국 님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답니다~."
"뭐, 뭐야?"
"그리고 자꾸 그런 식으로 저에게 민국 님의 장점을 어필하신다는 건, 실은 제가 민국 님과 사이 좋은 관계가 되길 바란다는 거 아닐까요? 너무 튕기셔라~."
보통 여자라면 눈 뜨고 욕을 하며 반격을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화는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오히려 넘어간 것은 은별이었다. '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하면서 큰 소리를 치지만 설화는 마냥 웃기만 한다. 하지만 설화의 웃는 머릿속에는 은별이 강조했던 단어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십팔 센치 십팔 센치 십팔 센치 십팔 센치….'
사이즈가 어느 정도 될까 싶어 은별이가 흥분해서 이쪽을 돌아보지 않는 새에 손가락으로 길이를 대충 측정해본다. …엄청나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될 듯한 사이즈에 놀라는 것도 잠시 설화는 '호홋'하고 다시 웃음 지었다.
"납작 가슴이라 나쁜 마음씨일 줄 알았는데 좋은 마음이셔라~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오."
"…야! 이게 무슨 응…."
"이 몸 왔수다."
이윽고 은별이 바락 소리를 치려는 찰나였다. 현관문이 열리면서 민국이 당도했다. 유이의 집은 전철을 타고 은근히 먼 탓에 왔다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녹초가 되게 만들었다. 아버지 차 말고 자기 차를 하나 사긴 사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집에 당도한 민국. 동시에 고개를 돌리는 두 여인이었다.
"아앗♥"
그리고 노렸다는 것처럼 일어서 있는 자세에서 느닷없이 넘어지는 설화였다. 아주 아리땁게 넘어진 설화는 치마 아래로 보이는 부드러운 다리를 보여주면서 입가에 손을 가져갔다.
"오셨나요 민국 님? 하지만 죄송해요 민국 님을 보고 너무 심장이 놀라서 그만 주저앉아버렸어요… 도와주세요 민국 니임~."
"……."
"……."
은별이 기가 막히단 표정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민국은 고개를 돌려 은별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단 일으켜야하니… 설화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뻗는 민국이었다.
"고마워요 민국 님♥"
"하아…!"
뻗은 손을 붙잡으면서 천천히 일어나는 설화였고, 은별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쿵쿵 자기 방으로 돌아갈 따름이었다. 민국은 도중에 '으, 은별 마님!'하면서 그녀를 부르짖었으나 은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윽고 설화가 민국의 품에 다리가 삐끗한 사람처럼 안기면서 말했다.
"어딜 갔다 이제 오시와요~ 민국 님을 떠올리면서 한참을 기다렸답니다~."
"……."
뭔가 당돌하게 나가기에는 은별과 예나의 눈치가 있어 못하겠고,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접근해오는 여자들은 많이 봤으나 일단 열흘 후에 사라질 것을 감안하면… 내버려둬도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자신의 본 모습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선량하게 말하는 민국이었다.
"그래 그래. 그런데 나 잠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은별이 좀 보고 와도 될까?"
"아응~ 소녀 섭합니다~ 저의 사랑을 외면하시는 건가요? 저는 민국 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훗… 인기 많은 남자는 어디서든 탈이야. 그런 건 아니고, 잠시 은별이랑 대화할 게 있어서 그래. 한 시간만 있다가 올게."
그 말에 설화가 민국을 와락 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기대다가 말한다.
"그럼 빨리 오시와요~."
"그려 그려."
대충 건성으로 말하고 은별을 보러 가는 민국이었다. 구멍 안으로 들어가 은별의 방에 도착한 민국.
"웃차."
"…왜 왔어 여긴."
"우리 착하디 착한 1순위 낭자 보러 왔지요."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은별에게로 다가가 볼을 꼬집는 민국이었다. 은별은 그런 민국의 손을 내치면서 신경질나게 '하지마'라고 소리쳤다. 침대에 걸터앉은 민국이 말했다.
"화났어?"
"…화 안 났어."
한 두 번 이래야지 말이다. 화가 나도 이젠 화가 난 게 아닌 거 같은 은별이었다. 하지만 언젠간 화병으로 한 번 졸도할 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하고 있었다. 민국이 그런 은별의 손등에 손을 포개면서 말했다.
"조금만 참아줘. 어차피 9일만 지나면 사라질 텐데."
"…그래. 그걸 아니까 그냥 참으려고 하는 거야."
하지만 가끔씩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그런 식으로 스킨쉽을 해오면 열불이 나는 건. 오히려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야 말로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민국도 그런 은별의 행위에서 따뜻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아, 그런데 있잖아."
"……?"
침대에 앉아있던 민국이 은근슬쩍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오늘 유이에게서 받아온 게임 루트 1의 usb였다. 민국이 미소를 짓고 은별에게 말한다.
"이거 좀 이 방에서 할 수 있을까?"
"이 방에서는 왜?"
"저기에는 설화가 있잖수. 갔다가 또 무슨 곤경을 치르랴."
"…은근 좋아하는 것 같던데."
"훗. 여자가 달라붙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나?"
"……."
"죄송합니다. 어쨌든 여러 의미에서 불안하니 이곳에서 좀 해봅시다."
애초에 설화는 이 usb에 담겨 있는 게임 루트 1의 여자 히로인이었고, 그녀의 게임 스토리 안에 대해서는 민국도 자세히 아는 게 없었다. 어디까지나 설정집에 관련된 것들 몇 가지만 유이와 의논을 했으니. 그리고 민국의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가는 분명 설화가 치근덕대면서 방해를 해올 것이었다.
민국도 집중을 할 때는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타입이었다. 이윽고 은별이 한숨을 내쉰 다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럼 노트북 빌려줄게."
"오오. 역시 큐티하고 예쁘고 아름답고 수려한 뭐 하나 부족한 거 없지만 딱 하나 부족한 은별 느님."
"하나 부족한 게 대충 무엇인지 예상이 가는데 확 수박 쪼개듯 쪼개줄까?"
"훗. 내가 부족하다고 한 것은 너의 존재 가치야. 너의 존재는 현재보다 더 가치 있고 귀중하다는 걸 난 알고 있거든!"
"말은 잘한다…."
어쨌든 민국도 설화에게 큰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니 어느 정도 안심을 하기로 했다. 이윽고 방문을 여는 은별이었다.
"어디 가려 하오 낭자?"
"잠깐 가족이랑 대화 나누고 오게. 너 있는 거 모르니까 닫으면 문은 잠가 놔."
고개를 끄덕인 민국이었고, 이내 은별이 방을 나갔을 때 곧장 방문을 잠갔다. 이후 손을 가볍게 턴 다음에 은별의 노트북으로 접속하는 민국이었다.
"자, 그럼 어디 이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은별이가 숨겨놓은 인커밍 파일을 뒤져볼까."
똑똑.
"응? 은별 낭자?"
"…문 열어봐."
"왜 그러시오 낭자. 난 그냥 그대의 노트북으로 게임만 하려는 것인데."
"닥치고 일단 열어. 안 그럼 두부로 때릴 거야."
두부로 때리면 무슨 느낌일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열어줘야 하는 건 자명했다. 이내 방문을 열자마자 은별은 보지 말라며 민국의 눈을 가리고는 노트북을 잠시 만지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녀의 숨겨진 취향을 알 수 있었는데 진심으로 안타깝다고 생각하며, 훗날을 기약하자고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다.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은별이가 방에서 나간 뒤, 파일이 정리된 노트북에 usb를 장착하는 민국이었다. 드디어 진행하게 된 게임. 유이가 제작한 게임 루트1의 에피소드를 확인할 때였다.
'어디 한 번 첫 플레이어로서 완벽한 비판을 해드리지요.'
요즘은 비판이 대세다. 대세를 따라가는 사람들을 무조건 비판하거나 혹은 객관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품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무언가를 비판함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있어 보이게끔 치장할 수 있는 것이다. 민국은 자신도 그것에 포함되는 아주 명색하고 똘똘한 비판자가 되어보일 생각이었다.
"흠, 그림체가 라이트노벨처럼 야시시하지가 않군. 게임의 7은 일러스트인데 말이지."
디자인 같은 경우는 유이가 진행하였다. 그림에도 어지간히 소질이 있는 여자였다. 다만 야시시한 그림체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간 인간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그림체로 그린 모습이었다.
"설화네."
이윽고 게임에 접속하기 전 메인 화면에 설화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남자 주인공, 서민국의 모습이 등장했다. 설화는 현실에서 보든 가상에서 보든 정말이지 예쁘장한 여자로 등장한 모습이었다.
이것은 민국의 조언대로 따른 것이었다. 여자 캐릭터가 예뻐야 남자들이 많이 보기 때문이었다.
물론 게임 속 주인공인 남주도 잘 생겨야만 했다. 안 그러면 이상하게 반발심이 생긴다.
"하지만 캐릭터 최설화의 노출도가 현실보다 낮다는 점을 감안해서 5점 만점에서 1점 드리겠습니다."
오히려 실존화가 되어버린 현실의 최설화가 더 노출도가 있고 유혹스러웠다. 게임 메인 화면 속의 최설화는 너무 옷으로 몸을 가린 실정이었다. 민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다음 게임에 접속하기로 했다.
"그럼 게임 시작."
시작된 게임의 세계관은 간단했다. 세상에 몬스터가 출현하고, 몬스터와 더불어 능력자들도 출현한다.
능력자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횡포를 부리는 그 몬스터들을 쓰러뜨려 결정체라는 것을 구하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서민국은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없었고 능력자가 되어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능력자의 수는 극소수라서 정부가 귀하게 대접하긴 했지만, 반대로 무조건 몬스터와의 싸움에 강압적으로 참여시키려는 기질이 있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주인공 서민국은 절대로 싸움에 휘말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여인, 공터의 의자에 앉아 있는 최설화를 발견하고 서민국은 어쩔 수 없이 돕게 된다. 어릴 때부터 나쁜 사람들에게 당하고 있는 착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도와 달라는, 요즘 시대에는 이상한 교육가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인공 서민국은 최설화를 구하기 위해 공터에 등장한 몬스터를 자신의 능력으로 처리. 그리고 최설화를 입막음하기 위해 그녀를 어쩔 수 없이 자기 집에서 재우며 생활하게 된다. 어찌 보면 굉장히 단순하고 로맨틱스러운 이야기로 보일 지도 모른다. 민국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H씬은 안 나오나?"
안타깝게도 H씬은 없는 듯했다. 현실에서는 이제 두 여자가 있으니 이루지 못하는 행복을, 이 게임 세계에서만이라도 이뤄보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게임 세계 서민국은 현실의 서민국보다 훨씬 고자인 모양이었다.
"내가 이겼군. 난 조루니까."
조루도 자랑은 아니었지만 말이었다. 이윽고 게임의 에피소드를 차례대로 진행하는 민국이었다.
별 다른 문제 없는 에피소드들이었다. 그저 작가가 추천 받고 싶어 하는 작가라서 그런지 약간 변태 기질이 다분한 에피소드나 모에모에스러운 에피소드가 이따금씩 출현하였다. 그러나 오덕후들을 노리기에는 충분한 에피소드였기에 어느 정도 인기를 얻을 것 같았다.
"흐흠. 나쁘지 않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진행하여 루트 1의 에피소드가 거의 끝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루트 1의 에피소드는 그리 긴 에피소드는 아니었다. 애초에 고르는 선택지도 없었고 그냥 쭈욱 진행되는 이야기였으니까.
"……."
하지만 민국은 서서히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마우스를 붙잡은 그의 안색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그의 속도가 더 빨라졌고, 이내 민국은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게임 루트 1의 이야기는 막 절정에 달하고 있는 상태였다.
============================ 작품 후기 ============================
자신 있게 내놓은 신캐인데 의외로 독자들에게 호응이 없는 듯?
설화 안 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