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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표본-313화 (313/369)

313화

다음 날이 찾아왔다. 다행히 민국과 설화 사이에는 어떤 특별한 문제도 없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문제가 없던 이유는 간단하다. 강은별이 둘 사이가 조마조마했는지 참지 못하고 민국의 안방으로 들어와서 함께 취침을 한 것이었다.

사실상 민국을 못 믿기보단 최설화라는 캐릭터의 성격을 못 믿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민국에게 치근덕대는데 과연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겠는가.

"아잉♥ 소리 없이 하면 됐을 텐데. 민국 님도 참 소극적인 남자네요~♥"

"…시끄럽거든요? 좀 조용히 하시죠."

"아앙 민국 님 너무 무서워요. 절 꼭 안아서 두려움을 떨쳐내게 해주세요~."

노려보는 은별의 눈빛에 기다렸다는 것처럼 민국의 품으로 안기는 설화였다. 은별은 그런 설화의 여우 같은 행동에 부들부들 떨었다. 민국은 설화가 안김으로서 느껴지는 그녀의 풍만한 바스트에 순간적으로 '오오'하고 좋아하다가 은별의 눈빛을 느끼고는 정색했다.

"……."

그리고 이 현황을 아침에 잠시 민국의 방에 들린 예나가 목도했다. 사실상 예나도 어제만 해도 설화라는 인물에게 굉장히 겁을 먹고 있었다. 혹시나 여우 같은 손짓으로 민국을 유혹하진 않을까 하고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이었다. 설화는 결코 그런 짓을 할 만큼 과감한 마인드가 아니었다.

'어제 봤는 걸….'

그러하다. 예나는 어제 최설화의 본심을 보았다. 그녀는 민국이나 은별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유혹의 기질이 타고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겁이 많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본 이후라 그런지 적어도 둘 사이에 밤이 찾아오면 무슨 행위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잉 민국 니이임~."

그런 설화의 행동이 진짜라 착각하는 은별은 여전히 민국에게 치근덕대는 그녀의 모습에 이를 바득바득 가는 모양이었지만 말이었다.

*

"아니에요."

이윽고 시끄러운 아침이 정리되고, 은별이 자기 방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은별을 따라 그녀의 방으로 당도한 예나는 가볍게 설화라는 여인의 실체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뭐가 아니라는 건데?"

"그 설화라는 분… 진짜 모습은 그런 게 아니란 뜻이에요."

자꾸만 의심하는 은별에게 실체를 말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한 예나였다. 하지만 예나의 뜬금없는 소리에 은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단 얼굴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어제… 우연히 봤어요. 민국이가 잠시 화장실로 간 사이에 혼자 침대에서 고민하는 모습을요."

"하아…?"

"자세히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은별 씨 당신이 고민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은 아니란 거예요. 그러니까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예나가 왜 천적인 은별에게 이런 말을 하는가… 한다면 역시 미안함 때문이리라. 그리고 고마움도 있으니 더 은별에게 도움이 되려 하는 것이겠지. 은별은 그런 예나의 발언에 잠시 말없이 예나를 쳐다보았다. 예나는 자신을 마주하는 그녀의 뚜렷한 눈길에 어색한 듯 머뭇머뭇거리다가 눈을 피하려고 했다.

"그래… 알겠어."

"……."

"믿긴 어렵지만… 일단 고마워."

은별의 감사 인사에 고개를 돌리는 예나였다. 은별은 고개를 돌려 예나의 눈을 피하는 상태로 있었다. 하지만 뚱한 표정 가운데 볼이 상당히 붉어져 있었다. 필시 고맙다고 한 것에 대해 은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리라. 그 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예나는 곧 '풉'하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터트렸다.

"뭐, 뭐야?! 왜 웃어?!"

"아니에요… 아무튼 그렇게 알아두시면 되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과 사람이 협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가? 타협과 합의를 통해서 이루거나 화해를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둘 사이에 감당해야 하는 커다란 적이 생겼을 때 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둘에겐 최설화라는 커다란 적이 생긴 셈이었다.

*

"아잉 민국 니임~ 혼자 있게 되면 소녀 외롭사옵니다~ 같이 가요오."

"잠시 갔다 오는 거니까 그냥 편히 쉬고 있어. 괜히 나가서 힘들게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

"민국 님도 참♥ 알겠어요오 그럼 빨리 갔다 오세요 달링~."

달링이란 별명까지 칭할 정도로 오붓하게 말을 건네는 설화였고, 민국은 가까스로 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정해라 존슨. 참아라 존슨.'

그리고 민국은 이따금씩 불끈불끈 솟아오르려는 자신의 존슨을 가까스로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두 여자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신념을 꿋꿋이 관철하고 있었지만… 가슴도 크고 육체적으로 연하에 가까운 여인이 엉겨 붙어오니 민국도 미칠 수밖에. 심지어 2D 캐릭터가 실존화된 셈이었다. 외모 면에서 은별이나 예나와 견줄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왜 눈앞에 떡이 있어도 먹을 수 없는가.'

그런 주제를 가지고 혼자만의 자문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민국. 그가 현재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유이의 집이었다. 유이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자초지종 얘기도 해야 하고, 제작한 게임 1루트를 다시금 받아올 계획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제작한 1루트를 플레이하고 곧장 소감을 말할 생각이었는데, 이런 의외의 문제가 생겨서 늦추게 되었으니.

"가슴의 왕 유이 씨, 예. 지금 집 앞입니다. 문 열어주십시요."

어느 덧 유이의 집 앞에 도착한 민국이 휴대전화로 그렇게 말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다가 현관문이 철컥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문을 열자 잠을 좀 잤는지 조금 몽롱한 듯한 얼굴의 유이가 보인다. 민국이 현관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주무셨습니까?"

"……."

느리게 끄덕하고 고개를 움직이려는 사이에 민국이 '훗'하면서 자뻑한다.

"꿈속에서 분명 저와 이러쿵저러쿵하는 꿈을 꾸었겠지요? 사스가 유이 씨. 지금 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조차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군요."

"……."

참고로 유이는 민국의 얼굴에서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헛기침을 하던 민국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든 말씀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이건 관장약을 엉덩이에 주입한 뒤 한 시간을 버티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에요."

"……."

그리고 민국은 곧장 본론을 말했다.

"2D 캐릭터가 현실에 튀어나왔어요."

"……."

"농담아닙니다. 어허, 이 사람 눈빛이 벌써 거짓말을 말한다는 놈의 눈빛이네?"

"……."

뭐 이젠 감정을 들켜도 상관이 없었다. 유이는 그저 오늘은 민국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까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크흠, 아무튼 농담 아닙니다. 정확한 사정은 이제부터 말씀드릴 테니 제대로 들어보십쇼."

그리고 민국은 표현했던 대로 사정을 아주 정확하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떻게 해서 2D 캐릭터가 실존화되었는지 말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 들은 유이는 순간 호기심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제작한 캐릭터가 현실에 실존화 되었다니 말이었다.

한 번 만나 대화를 해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그런 충동과는 반대로… 유이는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걸 느끼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러한 관계로 유이 씨가 제작한 게임 1루트 파일을 다시 받으려고 왔습니다."

"……."

유이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다 들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으니 말이었다.

이윽고 2층으로 향한 유이가 새로운 usb에 1루트 게임을 담아 가지고 왔다. 그것을 손수 건네는 유이의 모습에 '오오, 유이 씨가 이렇게 말 잘 듣는 애완견처럼 착했다니.'라고 감탄사를 표하면서 받는다.

이리저리 따질 구석이 많은 것 같긴 했으나, 유이는 그보다 더 중요한 걸 생각하고 있었기에 민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유이 씨, 당신이 만든 캐릭터가 현실에 나온 셈인데 한 번 보고 싶지는 않습니까?"

"……."

보러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유이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일이…."

"쩝. 고생하고 있는 걸 알고 있으니 차마 재촉할 수는 없겠군요. 아무튼 9일 동안은 원하시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연락만 드리면 제 집으로 초청하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쇼."

오늘 용건은 여기서 끝인 셈이었다. 자초지종 얘기를 마친 민국은 곧장 집으로 갈 채비를 하였다. 유이는 그런 민국을 그냥 줄곧 쳐다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유이의 시선을 느낀 민국이 '훗'하고 웃음 지으면서 말한다.

"잘 생겼다고 너무 쳐다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유이 씨도 반해버리니까 말이지요."

"……."

혼자 크나큰 착각을 하면서 민국은 '그럼'하고 가벼운 인사와 함께 현관을 나갈 따름이었다. 혼자 남은 유이는 지금에라도 민국을 붙잡고 얘기를 해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게임을 하고 나면 민국도 자연스레 알게 될 따름이었다.

*

"남의 남자 친구에게 잘하는 짓이지? 응?"

"후훗♥ 하지만 다른 세계에서의 민국 님은 여자가 없었는걸요?"

"그건 그 세계에서나 통하는 말이지! 여긴 엄연히 여자 친구가 있잖아?"

'어머?'하면서 손을 입가에 갖다대며 눈을 크게 뜨는 설화였다.

"화내면 무서워요오~ 무서워지면 민국 님에게 일러버릴 거예요 아잉♥"

"으으…!"

은별은 열불이 났지만 차마 화를 쏟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나처럼 맞닥대응을 하는 타입도 아니었던 것이다. 오로지 민국만을 바라보며, 민국만을 위하는 타입! 민국 바라기인 예나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면에선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흥! 어차피 실제로는 덮칠 자신도 없는 주제에."

민국이 집을 나간 상태에서 투닥투닥 대화를 하던 도중이었다. 질세라 은별은 결국 예나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대응하기로 하였다. 여우처럼 유혹하는 눈매로 '후훗'하고 입가에 손을 또다시 갖다대는 최설화.

"그건 또 무슨 소리세요~ 설마 제가 민국 님이랑 하나가 되는 걸 두려워한단 소리세요~?"

"……."

이쯤되면 제대로 기세를 부릴 타이밍이었다. 은별은 본래 자기 이미지가 망가지는 선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제압하자고 생각했다.

"너, 처녀잖아?"

"……."

은별의 발언에 순간적으로 웃음 지은 얼굴로 침묵하는 설화였다. 하지만 잠시 후….

"??????????????????????"

"예나 그 여자 말이 맞네."

순간 놀라면서 표정 관리를 못하는 설화의 모습에 은별은 확신한 미소를 씨익 지었다. 이윽고 설화가 뒤늦게 진정을 하면서 눈웃음 지었다.

"처녀라니요~ 후훗~ 설사 처녀라 해도 저는 민국 님에게 언제든지 이 몸을…."

"거짓말."

은별이 말을 가로채면서 이어갔다.

"실상 행동은 그렇게 하면서도 실은 처녀로서 한 번도 그런 행위를 한 적이 없잖아? 그래서 그런 행위에 대한 로망은 가지고 있되 실전은 두려운 거고."

"……."

"완전 과거의 나네!"

졸지에 과거의 자신에게까지 욕설을 하는 은별이었다. 물론… 처녀라는 타이틀이 결코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남자들은 좋아 죽는 타이틀이었고, 그것도 예쁜 여자가 처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든지 침을 질질 흘리는 게 늑대였다. 하지만 처녀라면 한 가지 두려워 할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성관계에 대해 실은 굉장한 두려움을 느낀다는 점.

'성관계를 하면 여자는 처음에 그렇게 아프다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면 기분 좋대!'

'개소리. 그래도 아프대. 막 살이 찢기는 느낌이래!'

이런저런 여자들 간의 소문과 소문이 잇다라, 여자는 처음이면 무조건 아프다는 게 기정사실화가 된 실정이었고, 그것은 경험을 하지 않은 처녀라면 당연히 두려워 할 부분이었다.

"후후!"

은별은 왠지 팔짱을 끼면서 대범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본래 처녀라는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더 우위를 점해야 하는 부분인데 이상하게 자신감이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은 것이니 사실상 은별이 기죽을 이유는 없었지만 말이었다.

"한 가지 알려줄까? 민국이는 십! 팔! 센치라고! 십! 팔! 센치!"

유독 십팔 부분을 강조하는 은별이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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